소설리스트

공작가의 서자로 살아가는 법-158화 (158/176)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른다

* * *

에스닐의 대군이 성문을 무너뜨린 직후.

칼 오프러스는 대공성의 비밀통로로 향했다.

‘루치오! 루치오를 만나야 한다.’

환기구를 통해 들어오는 빛이 전부인 어슴푸레한 통로.

퀴퀴한 곰팡내가 진동하는 가운데, 대공은 눈앞을 가리는 거미줄을 두 손으로 치워가며 이동했다.

그렇게 몇 시간을 내리 걸었을까.

그는 희미한 기억을 되살려가며 무사히 성을 빠져나왔다.

“여기는···.”

새들의 지저귐과 울창한 수풀.

자신이 대공성 주변의 작은 숲에 도착했음을 깨달았다.

거기서부턴 모든 게 쉽지 않았다.

사냥꾼이나 길잡이 없이 혼자서 야생에서 길을 찾는 것부터가 문제였고.

갖고 나온 것이라고는 기밀 서류와 단검 하나가 전부였다.

물 한 방울 마시지 못한 채 몇 시간째 숲 안을 빙빙 돌며 헤맨 탓에 극심한 갈증이 찾아왔다.

“흐윽, 헉···.”

숨을 거칠게 몰아쉬던 대공은 결국 숲길 한복판에서 정신을 잃고 말았다.

.

.

.

“정신이 드십니까?”

여전히 가물가물한 의식 속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대공이 소스라치게 놀라며 몸을 벌떡 일으킨 순간, 눈앞의 사내가 안심하라는 듯 두 손을 들어 보였다.

“각하, 접니다. 루치오입니다.”

“하아···.”

지금으로서는 유일한 아군이나 다름없는 루치오의 모습에 대공은 안심하며 다시 침상에 누웠다.

그제야 주변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돌 기둥이 높이 세워진 동굴 안이었는데, 사람이 지낼 수 있도록 최소한의 가재도구를 가져다놓은 것이 보였다.

“여긴 대체 어디지?”

“저희 가문에 대대로 전해져 내려오는 은신처입니다.”

“은신처···?”

루치오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받았다.

“혹시 고대 던전이라고 들어보셨습니까?”

“···!”

대공이 그 말에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언뜻 보기에는 평범한 종유석 동굴처럼 생겼지만···.

‘정말로 이 주변에서 알 수 없는 힘이 느껴지는군.’

루치오가 설명을 이었다.

“고대 드워프들이 만든 곳이라고 하더군요.”

“헌데 어째서 은신처로 쓰인다는 건가? 높은 방벽으로 둘러싸이기라도 했나 보지?”

“그런 건 없습니다만, 일단 이곳의 문은 ‘자격 없는 자’의 눈에는 아예 모습을 드러내지 않으니까요.”

그러고 보니 어느 고대역사서에서 읽은 적이 있다.

고대의 던전은 주문의 법칙으로 작동하는 것이라, 특정 조건을 만족해야만 입장이 가능하다고.

“그렇다면···.”

“제가 알기로 이 던전은 저희 가문원 이외의 사람들에게는 여간해서 문을 열어주지 않습니다. 게다가.”

루치오가 건넨 물 한 잔을 대공은 벌컥벌컥 들이켰다.

그저 미지근한 물일 뿐인데 어쩜 이렇게 달게 느껴지는지.

“한 잔만, 한 잔만 더 주게···.”

물 한 잔을 더 건네며 루치오는 하던 말을 이어나갔다.

“이 던전은 단 두 명밖에는 입장하지 못하는 곳입니다.”

“뭐라고?”

“최대 입장 인원 두 명. 그러니 저와 대공 각하가 이렇게 있는 이상, 그 누구도 이 안에 들어올 수 없다는 뜻이지요. 그리고 혹여 제가 없는 사이 누가 들어온다 해도···.”

그 말에 대공은 안도감이 솟아올랐다.

“이곳의 이름은 ‘복수의 검’. ···상대의 손에 혈육을 잃은 자가 복수하기 위해 결투를 펼치는 곳입니다만.”

“그 말인즉.”

“네. 다른 말로 하자면 복수의 동기가 없는 자들은 절대 이 안에서 상대를 해칠 수 없다는 뜻이지요.”

즉 마법의 힘으로 보호되는 곳이다, 이 말 아닌가.

대공은 루치오를 마주 보며 활짝 웃었다.

“루치오, 그대 같은 자가 내 가신이어서 얼마나 든든한지 모르겠군.”

“과찬의 말씀이십니다.”

여전히 침상에 앉아 있는 대공에게 루치오는 던전 안의 시설을 간단히 설명해주었다.

조리할 방법은 마땅치 않지만 간단히 먹을 수 있는 식량과 물을 준비해두었으며.

그 외 몸을 씻거나 하는 물은 안쪽의 우물에서 구할 수 있다는 말에 대공은 만족스레 고개를 끄덕였다.

“이 정도면 충분하네. 정말로 훌륭하군.”

“도움이 되어 다행입니다. 일단은 이곳에서 지내면서 체력을 회복하시지요.”

“좋아, 추적이 좀만 뜸해진다면···.”

대공은 굳게 믿었다.

자신을 가장 열렬히 지지했던 자들과 다시 연락만 취할 수 있다면, 재기의 기회는 아직 남아 있다고.

‘게다가 내 손엔 수족이나 다를 바 없는 루치오와 그의 이능자들이 있지 않은가!’

그렇게 생각하는 대공을 향해 루치오는 조심스레 ‘세뇌’의 주문을 펼쳤고.

대공은 몸이 성치 않은 가운데서도 제게 뻗쳐오는 이능의 기운을 간단히 무력화시켰다.

“그럼 이만 나가보겠습니다, 각하.”

“그래. 곧 보세.”

서로가 서로를 조종한다고 착각하는 중인 두 사람은 여유로운 미소로 각자의 음험한 속내를 감추었다.

* * *

아무것도 없던 경사면에 생겨난 던전에 경악한 것도 잠시.

“특수던전이라는 건 특수한 용도를 지닌 던전을 말하죠. 헌데 ‘복수의 검’이라는 이름을 보니···.”

금세 학자 모드로 돌변해 눈앞의 이상 현상을 연구하던 앨빈이 질문을 던졌다.

“근데 어째서 이런 게 갑자기 생겨난 걸까요?”

“···대공이 이 안에 있으니까.”

“네?”

언뜻 보기엔 인기척이 전혀 느껴지지 않지만.

이 안에 대공이 있는 건 확실하다.

‘모든 단서가 그 사실을 가리키잖아?’

바바의 이능으로 알아낸 좌표가 바로 이곳이며.

도전과제 보상으로 받은 던전 입장권이 하필 이곳에서 발동했다.

무엇보다도 ‘자신의 혈육을 죽인 자에게만 복수할 수 있는 곳’이라는 문구를 보면···.

“난 이곳에서 대공과 결판을 내겠다. 너희는 이곳에서 대기하고 있어.”

“도련님!”

“세자르 님, 그건···.”

“한 명밖에 못 들어가는 던전이라는 걸, 굳이 더 설명할 필요는 없겠지?”

나는 지금 이 순간을 위해 가져온 아다만티움 검을 꺼내 허리에 찼다.

만일의 경우를 위해 가져온 ‘빗나가지 않는 권총’ 또한 품속에 잘 넣어둔 상태였다.

“다녀오겠다.”

앨빈은 뭐라 더 얘기하며 붙잡으려 했지만, 발닉이 만류했다.

“도련님의 실력이라면 충분히 이기고도 남을 겁니다. 앨빈 경도 아시잖아요?”

“그거야 그렇지만···.”

주군을 혼자 들여보낸다는 것이 못내 마음에 걸리는지, 자꾸만 말 끝을 흐리는 앨빈.

“설마 내가 대공에게 질 거라 생각하는 거야?”

“아니, 그건···.”

“내가 혼자라면 그쪽도 혼자일 거다, 앨빈.”

나는 앞서 카렌에게서 들었던 보고를 떠올리며 말을 이었다.

“그리고 대공은 검은 잘 다룰 줄 모르는, 전형적인 책상물림형 정치가라고 들었고 말이지.”

“···그렇다면야 안심입니다.”

“그래.”

나는 앨빈의 어깨를 툭 치고는 던전 입구로 걸어갔다.

내 뒤에서 농농이가 손을 흔들며 응원했다.

[앙옹앙! 바부부!]

“대공을 반죽여놓고 오라는··· 농농 님! 그런 말 쓰시면 안 돼요!”

[앙, 바바앙? 부방?]

“아무리 그래도···.”

둘의 대화를 뒤로하며 망설임 없이 구멍 안으로 들어선 순간.

파아앗!

하며 눈앞의 풍경이 바뀌었다.

* * *

던전에 머문 지 어느새 2주가 넘었다.

처음만 해도 루치오가 이틀에 한 번꼴로 식량을 조달해주었지만, 점차 발걸음이 뜸해졌다.

며칠 전부터는 아예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던 탓에, 대공은 아무런 외부의 소식도 전해듣지 못한 채 불안에 떨어야 했다.

‘물론 이곳을 내 발로 나가면 해결되는 문제이지만.’

여기가 지도상으로 어디에 해당하는지 알 수 없었다.

루치오에게 몇 번이나 물어봤지만 그는 단 한 번도 명확히 대답해주지 않았으며.

아무것도 모르는 상황에서 섣불리 던전에서 나갔다간 지난번처럼 미아 신세가 될 게 뻔했다.

아주 운이 좋다면 근처의 인가를 찾아낼지도 모르지만···.

‘대공 각하의 초상화가 전국에 돌고 있습니다. 각하를 잡아다 바치는 자에게 이십만 플로르를 하사한다는···.’

십중팔구 현상금을 노리는 자들에게 붙잡힐 것이며, 최악의 경우 산짐승의 먹이로 전락할 것이다.

대공은 조금 더 때를 기다려보자는 루치오의 말을 믿기로 했다.

이 안에서 편히 쉰 덕분에 건강은 제 상태를 회복했으며, 머릿속에선 부지런히 다음 계획들을 구상해내는 중이었다.

‘단 하나, 음식만 빼면 다 괜찮은데 말이지.’

태어난 이래로 늘 고급스러운 음식만 먹어온 예민한 미각의 소유자인 그에게.

돌처럼 딱딱한 빵, 소금에 푹 절인 고기나 생선 따위로 버티는 나날들은 너무나 힘겨웠다.

루치오에게 언젠가 그런 불만을 토로했더니 다음 번에는 꼭 먹을 만한 음식을 가져오겠다고 했었다.

후우, 한숨을 내쉬며 육포를 입안에 넣으려는 순간.

타닥, 타닥.

바깥에서 낮게 울리는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대공은 반가운 마음에 벌떡 일어나며 외쳤다.

“루치오? 자네인가?”

그러자 발소리는 금세 멈췄다.

“···루치오?”

발소리의 주인공은 대답하지 않았다.

뒤늦게 루치오가 했던 말이 머릿속을 울렸다.

‘혹여나 제가 없는 사이 누군가 들어온다고 해도···.’

루치오가 아닌 다른 누군가가 들어왔다는 사실에, 대공의 등 위로 소름이 쫙 돋았다.

칼 오프러스는 책상 위의 검을 집어들었다.

겁먹은 것을 애써 감추며 목소리를 쥐어짜냈다.

“누구냐!”

그러자.

타닥타닥, 하고 다시 발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

몹시 당황한 나머지, 대공은 허공을 향해 검을 겨누었다.

제 몸을 지키려는 무의식적인 움직이었지만, 검자루를 쥔 손에 땀이 흥건함을 깨닫는 계기만 되었을 뿐.

“칼 오프러스 대공, 맞습니까?”

···막상 검을 겨눠야 할 상대가 나타나자, 대공은 심장이 철렁했다.

“너, 너는···!”

중키에 늘씬한 체격, 검은 머리에 푸른 눈을 지닌 곱상한 청년.

초상화로 봤을 뿐이었지만 대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세자르 레핀?”

“알아봐주시니 영광이군요.”

대공은 재빨리 머리를 굴렸다.

저자가 어떻게 이곳에 들어왔는지는 모르겠지만, 저렇게 아무 생각 없이 모습을 드러낸 것을 보면 한 가지는 확실하다.

‘복수의 검이라는 던전의 조건이 무엇인지 모른다!’

일전에 루치오가 말하지 않았던가.

이곳은 혈육을 죽인 자에게만 상처를 입힐 수 있는 공간이라고.

그리고 자신은 적어도 세자르 레핀의 혈육만큼은 건드린 적이 없다.

‘그런 것은 꿈에도 모른 채, 자신의 싸움 실력만 믿고 있는 모양이군.’

밀려오는 흥분감에 대공은 침을 꿀꺽 삼켰다.

1대1로 승부한다면 자신이 불리한 것이 당연하지만.

루치오의 말이 틀리지 않았다면 저자는 자신에게 상처입힐 수 없을 터이니···.

‘승산은 내게 있다!’

그렇게 결론 내린 순간, 세자르가 허리춤에 찬 검을 빼들어 그를 겨눴다.

“대공 각하, 초면에 이런 말씀을 드리게 되어 송구하지만··· 순순히 붙잡히신다면 상처는 입히지 않겠습니다.”

대공은 웃음이 터지려는 것을 간신히 참으며 검을 고쳐쥐었다.

“세자르 공, 그대는 내 손에도 검이 들려 있는 것을 간과한 것 같소만.”

“글쎄요, 본디 대공 각하는 무보다는 문을 숭상하시는 분이라 들었습니다만.”

“보아하니 아무것도 모르는 모양인데···.”

역시 저자는 아무것도 모른다.

대공은 확신하며 세자르와의 간격을 좁혔다.

가까워진 거리에 상대가 움찔한 순간, 대공은 그를 향해 날카롭게 검을 뻗었다.

“이곳은 나의 혈육을 죽인 자만 상처입힐 수 있는 복수의 장소요!”

챙! 챙캉!

세자르가 곧바로 검을 받아쳐냈다.

“그렇다면 각하나 저나 마찬가지인 상황이 아닙니까? 굳이 힘 빼지 마시지요!”

“하,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군.”

온몸에 차오르는 자신감.

대공은 세상 제일의 검사가 된 기분으로 자신만만하게 검을 내질렀다.

“그대, 세자르 공의 손에 죽임 당한 타릭 벡카드를 기억하나?”

챙! 챙캉!

“그 아이 또한 내 핏줄이었거늘!”

손안의 권력이 최정점에 달했을 시절, 대공은 여러 귀족 여인들을 자신의 정부로 삼았다. ···그녀들을 정치적 협력자로 만들기 위해.

“그렇습니까?”

그러나.

세자르는 놀라는 기색 없이 그의 검을 쳐냈다.

뛰어난 검객이라더니 과연 빈틈 하나 보이지 않았지만, 대공은 느긋한 마음으로 때를 기다렸다.

던전의 규칙은 절대적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각하, 각하야말로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셨나 봅니다.”

“뭐라고?”

세자르의 검이 눈앞에 부웅- 하고 날아들더니.

싹둑, 하며 대공의 옆머리를 잘라냈다.

눈앞에서 흩날리는 제 머리카락을 보자 저절로 침이 꼴깍 넘어가는데.

세자르의 말투가 돌변했다.

“네놈이 죽인 에스닐의 전 왕세자, 이언을 기억하나?”

“···?”

로건 공작의 사생아가 왜 갑자기 이런 말을 꺼내는 걸까.

어머니는 사창가의 창부요, (로건 공작은 씨가 없는 사내이니) 아버지는 누군지 알 수 없는···.

자신이 떠올린 추론에 문득 기분이 싸해지는데.

“에스닐 사교계에서 가장 천한 사내이자 레핀 공작가의 수치라 불렸던 내가···.”

세자르의 검이 바람처럼 날아들었다.

날카로운 검 끝이 한순간 시야를 온가득 메웠고-

“바로 이언 왕세자의 아들이었다는 건 당신도 몰랐나 보군.”

“···!”

칼 오프러스의 두 눈에서 초점이 사라진 순간.

푸욱!

검이 대공의 옆구리를 찌르고 들어왔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