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작가의 서자로 살아가는 법-157화 (157/176)

피크닉 나온 거 아닌데

* * *

리아나의 방에서 나와 집무실로 돌아오니 바바가 대기 중이었다.

“오셨습니까.”

“응. 카렌한테 얘기 들었나 보지?”

“그럼요.”

바바는 이미 이능을 쓸 준비를 마쳤다며 질문만 알려달라 했다.

“칼 오프러스 대공이 어디 있는지 알려줘.”

“예상했던 질문이로군요.”

“한 가지 걱정이라면 지난번처럼 방해를 받지 않을까 싶은 건데.”

“음, 일단 해볼까요?”

그렇게 대꾸한 바바는 그대로 이능을 시행했다.

이번에는 방해의 이능자가 손을 쓰지 않은 덕인지, 흰 종이 위에 무언가 글자가 나타나기 시작했고.

그렇게 해서 완성된 것은 열 자리에 가까운 일련의 숫자들.

바바가 고개를 갸웃했다.

“이게 뭘 의미하는 걸까요?”

나 역시 잠시 머뭇거렸지만, 책상 위에 펼쳐둔 지도가 눈에 들어왔다.

“아마도··· 지도상의 지표가 아닐까?”

“아하.”

추측은 정확했다.

문제의 지표를 찾아 오프러스 공국의 영토 위에서 이리저리 맴돌던 손가락은, 이내 어느 한 지점을 짚어냈다.

“여기네.”

그곳은 지난번 내가 유격대를 이끌고서 공국군을 물리친 바로 그 협곡이었다.

더불어 이능자 부대의 근거지가 자리했던 곳 근처이기도 한데,

아무래도 칼 오프러스 대공은 루치오 전 추기경과 접촉하는 중인 듯하다.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건가.’

무슨 꿍꿍이일까.

남은 이능자 대원들을 데리고 음모를, 아니 최후의 발악을 준비하려는 걸까.

그렇다면 한시라도 빨리 출발해야 한다.

“고맙다, 바바.”

“천만의 말씀이십니다요.”

“가는 길에 발닉과 앨빈 좀 불러주겠나?”

눈치가 빠른 바바는 내 의향을 곧바로 알아차렸다.

“지금 바로 출발하실 작정이십니까? 대공을 잡으러?”

나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칼 오프러스 대공을 추적하는 건 좀 민감한 사안이 될 수 있다.

대공은 우리 에스닐에게 왕실 구성원들을 몇이나 암살한 범죄자에 불과하지만, 오프러스 공국 입장에선 얼마 전만 해도 나라를 통치하던 지도자이니까.

‘그러니 여유가 있다면 오프러스 대공성에 들러 이사벨 대공의 공식 허가를 받고 가는 게 좋지만.’

최근 대공위에 오른 그녀는 눈 코 뜰 새 없이 바쁜 상황.

하여 나는 ‘칼 오프러스 대공’의 처분 권한을 온전히 내 앞으로 넘겨달라는 공식 문서를 요청했고···.

“이미 허가는 떨어졌으니 걱정하지 마라, 바바.”

나는 바바의 눈앞에 공국의 인장이 찍힌 출입증을 흔들어 보였다.

사안이 사안이니만큼 시일이 좀 걸리리라 생각했던 것과는 달리.

화통한 성격의 이사벨은 그 즉시 전령을 보냈고.

전령은 오프러스의 국경을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는 출입증과 이사벨 대공의 서명이 적힌 허가증, 그녀가 손수 쓴 서신 따위를 들고 왔다.

- 친애하는 세자르 공께,

- (전략) 저희 공국 측에서도 제 아비의 행방을 좇고 있긴 합니다만, 어디까지나 형식상입니다. 사실 누구도 그의 거취에는 관심이 없어요.

- 그의 처분 권한을 그대에게 넘기는 것에는 다들 암묵적으로 동의한 상태이니, 편하신 대로 하시면 됩니다.

별다른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 그야말로 사무적인 어조의 편지였지만.

맨 마지막 문장만큼은 조금 섬뜩했다.

- 추신. 아비의 시신만큼은 공국으로 돌려보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그녀에게 칼 오프러스 대공이란 그 정도의 존재였다는 것이겠지.

그렇게 잠시 상념에 젖어 있는데, 바바의 말이 이어졌다.

···어쩐지 날 딱해하는 듯한 목소리였다.

“모처럼 폐하께 포상으로 휴가도 받으셨다 들었는데···.”

“휴가를 받았으니 맘 편히 다녀올 수 있는 건데?”

“···.”

내 말에 바바가 어처구니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지독하기가 이루 말할 데 없구만, 이라고 말하는 듯하달까.

“모르긴 몰라도, 여왕 폐하께서 그러라고 휴가를 주신 건 아닌 것 같은데···.”

“바바.”

“어이쿠, 얼른 발닉 경과 앨빈 경을 불러오겠습니다요!”

얼른 몸을 사리며 집무실을 나서는 바바.

덩치 큰 뒷모습이 멀어지는 것을 보며 피식 웃었다.

* * *

오프러스 공국 동부의 이케로스 협곡으로 가겠다.

그 한마디에 발닉은 신속하게 야영 준비에 나섰고.

“가자.”

나와 발닉, 앨빈, 그리고 농농이까지.

총 네 사람은 그다음날 새벽해가 뜰 때 공작저를 출발했다.

어른 셋은 각자의 말을 타고, 농농이는 오랜만에 꺼낸 ‘4차원 주머니’ 속에 들어가 있는 터였다.

발닉의 조언에 따라 평범한 여행자처럼 차려입은 나는 괜히 신경쓰여 주머니 안을 들여다보았다.

‘농농이는 괜찮으려나.’

걱정과는 달리 농농이는 편안하게 뒹굴거리는 중이었다.

“다행히 잘 있는 것 같군.”

[옹, 앙앙, 바앙!]

“네, 걱정 안 하셔도 될 것 같아요. 옛날 생각도 나고 좋다 하시네요.”

앨빈의 말에 나는 눈을 크게 떴다.

“너 아까는 통역관 하라라에 빙의 안 한 상태 아니었어?”

아니다. 생각해보니 꽤 오래전부터 빙의 안 한 채로 노움어를 해석해왔던 것 같은데.

내 말에 앨빈이 머쓱해하며 대답했다.

“하하, 하라라 님을 불러내지 않고도 절반 정도는 알아들을 수 있거든요.”

절반은 무슨, 겸손 떠는 것 봐라.

보면 앨빈은 타고난 언어 능력이 뛰어난 편인 것 같다.

전에 피터 3세도 앨빈의 커글랜드어가 모국어처럼 들린다 했을 정도였으니.

“대단한데?”

진심으로 감탄하자, 앨빈이 쑥스럽다는 듯 대꾸한다.

“음, 언어는 대부분 비슷해요. 공부하면 할수록 새로운 언어를 금방 터득하게 된달까요. 구체적인 세부 사항이 다를 뿐이지 중심이 되는 원리는···.”

앨빈의 말이 길어지기 시작했다.

“···그러니 세자르 님도 저와 같이 공부해보시면-”

“난 됐다.”

외국어 때문에 고통받던 경험은 전생만으로도 충분하다.

우리의 대화를 지켜보던 발닉이 끌끌 웃음을 터뜨렸다.

“앨빈 경, 세상 사람들이 다 앨빈 경 같은 줄 아십니까.”

“발닉 경, 너무하십니다···.”

원망스럽다는 대꾸하는 앨빈의 모습에 나도 피식 웃음이 새어나왔다.

“사이가 좋네.”

그렇게 우리는 한참을 달렸다.

느리지는 않지만 말에게 부담이 되지 않을 정도의 속도로 몇 시간을 보내고 나자.

사람의 발자취는 느껴지지 않는, 수풀이 울창한 평원에 어느새 들어섰다.

“여기만 지나면 오프러스와의 국경이 나올 거다.”

“음, 여기서 잠시 쉬어가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만.”

발닉의 말에 반대하는 이는 없었다.

나와 앨빈이 말에서 내려 근처 나무에 짐승들을 묶는 사이,

[앙, 옹옹···.]

“왕자님이 오늘 날씨가 너무 좋다고, 기분이 끝내준다고 하시네요.”

그러고 보니 정말이다.

구름 한 점 없이 쾌청한 하늘이 저 높이까지 펼쳐져 있고.

청량한 바람에 실려오는 숲 냄새가 상쾌하기 그지없다.

농농이는 신이 나는지 한 바퀴 빙그르르 돌며 말했다.

[옹, 앙앙앙, 부앙?]

“예전에 자기 데리고 디터 경까지 넷이서 다니던 거 기억 나냐고 하시는데요. 지금 생각해보면 그 시절이 참 좋았다면서.”

“···.”

말투하고는. 나는 픽 웃으며 노움족 아이를 돌아보았다.

최근에 많이 먹더니 팔다리에 살이 통통하게 오른 농농이가 허리춤에 두 손을 올린 채 날 마주 보았다.

[오그그 아그, 앙앙 부앙···.]

“가끔은 이렇게 쉬어줘야지, 사람이 일만 계속하면 정신이 이상해진다고 하시네요. 저도 동감이에요, 왕자님.”

둘이 아주 죽이 척척 맞는구나.

“점심 준비가 되었습니다!”

그 사이 발닉은 주방장 벤이 싸준 음식들을 재빠르게 차려놓은 터였다.

농농이와 앨빈이 탄성을 지르며 둘러앉았다.

[앙옹!]

“잘 먹겠습니다!”

입에 뭘 잔뜩 묻혀가며 먹는 농농이를 보고 허허 웃는 발닉.

앨빈도 밝은 얼굴로 한마디했다.

“이러니까 꼭 넷이서 소풍 나온 것 같네요, 세자르 님.”

“그러게.”

“흐흐, 정신없이 달려왔으니 쉴 시간도 필요한 법이죠.”

사실은 피크닉이 아니라 달아난 범죄자 잡으러 나온 거였지만.

대부대를 끌고 갔다간 금방 눈치채고 도망칠 게 뻔하니, 대공을 붙잡기에 최적의 인물들만 데리고 나온 것이다.

야영 전문가에 만일의 경우 동물에 빙의할 수 있는 발닉은 당연히 포함이고.

앨빈은 이능의 기원이나 신성, 마법 따위에 누구보다도 박식할 뿐 아니라 검 실력도 뛰어나다.

그리고 농농이는···.

‘인기척을 파악할 수 있으니까.’

대공이 작정하고 숨어 있다면 저 명백한 지표를 가지고도 그를 찾아내는 데 실패할 수도 있다.

그때 농농이의 능력은 큰 도움이 될 거다.

그뿐 아니라 예상치 못한 위험이 발생할 경우, 이 인원들을 데리고 공작저로 순간이동을 할 수도 있으니.

생각에 잠긴 채 입안의 음식을 한참 우물거리는데 앨빈의 목소리가 들렸다.

“농농 님, 천천히 드세요.”

눈앞에 음식이 보이는 족족 먹어치우는 농농이.

그걸 본 발닉도 한마디했다.

“흠, 본격적인 성장기라 그런가 요즘 많이 드시는 것 같군요.”

하긴 농농이와 함께한 지도 벌써 몇 년째구나.

볼이 터질 듯한 것이 꼭 겨울 양식을 저장해둔 다람쥐 같은 농농이를 보자,

처음으로 던전에 들어갔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때는 모든 게 신기하고 새롭기만 했는데.’

이제는 도전과제 보상으로 던전 입장권을 받아도 그러려니 하게 되었으니.

그 몇 년 사이에 새삼 많은 경험을 했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그건 그렇고, 앨빈에게 물어볼 게 있었지 않나.

‘지난번에 카렌이 이렇게 보고했었지.’

이능이 사실은 몇 백 년 전 사장된 ‘마나’의 개념에 가깝고, 여기에는 교단의 대대적인 마녀 사냥이 관련돼 있을 수 있다고.

그 얘기를 입 밖으로 꺼내자 앨빈은 고개를 갸웃했다.

“처음 들어보는 주장이긴 하지만, 아주 이치에 닿지 않는 얘기는 아닌 것 같네요.”

“그래?”

“네. 공교롭게도 이능 신관이 본격적으로 활약하기 시작한 게 마녀 사냥이 끝난 지 십여 년 뒤이기도 하고요.”

“그 전에는 이능 신관이란 게 없었다, 이 말인가?”

“기록된 역사상으론 그렇습니다.”

‘이능과 마법의 관계’라는 새로운 화두에 머릿속이 복잡해지는 기분이다.

그런 와중에 시스템이 특수던전 입장권을 줬다는 건, 이거와도 뭔가 관련이 있는 게 아닐까.

“필요하시면 좀 더 조사해볼까요?”

“그래, 부탁할게.”

어느덧 식사가 마무리되었고, 우리는 간단히 정리한 뒤 곧바로 다시 출발했다.

* * *

그로부터 몇 시간 뒤.

중간에 국경검문소를 지나야 하긴 했지만, 이사벨 대공의 직인이 찍힌 출입증의 효과는 놀라웠다.

별다른 검문 절차도 없이 즉시 통과시켜줬을 뿐 아니라, VIP 대접을 해줬으니까.

“통과하십시오!”

“따로 도움이 필요한 게 있다면 뭐든 말씀하시지요!”

검문소를 지난 이후의 일정도 평화로웠다.

중간에 나타난 마을에서 저녁 식사를 한 뒤 제일 큰 여관에서 하룻밤을 묵었고.

평범한 여행자처럼 입은 덕분에 쓸데없는 관심을 끌 거나 불필요한 사건에 휘말려드는 일도 없었다.

거기서 한 시간 정도 더 말을 달리고 나니 마침내 목적지가 눈앞에 나타났다.

폭이 몹시 좁고 가파른 경사를 자랑하는 험지의 등장에 앨빈이 감탄하며 말했다.

“여기로군요.”

이케로스 협곡은 대부분이 평지인 오프러스 공국 내에 보기 드문 산지에 자리했다.

양옆으로 깎아지른 경사면이 하늘에 닿을 듯 솟아 있었다.

“여기는 지난번에 저희가 공국군을 물리쳤던 바로 그 근처 아닙니까?”

“맞아. 그런데···.”

나는 지도상의 지표를 다시 한 번 확인했다.

분명 여기가 확실한데 뭐 아무것도 보이지가 않네.

“세자르 님, 근데 여긴 뭐 어디 숨을 만한 곳이 보이질 않는데요.”

둘러보고 오겠다며 말을 한 바퀴 달리고 온 발닉도 이렇게 말했다.

“어딘가 가려진 동굴 같은 게 있을까 했는데 그런 것도 없군요.”

바바가 준 종이를 다시 한 번 확인해보았지만 여기가 확실했다.

하지만 겉보기에는 사람 하나 보이지 않는 휑한 골짜기일 뿐.

‘대공이 대체 어디 숨어 있단 거야.’

목을 쭉 빼서 이리저리 둘러보던 중, 갑자기 가슴 안주머니 쪽이 홧홧거렸다.

뭐지 싶어 그 안에 든 것을 꺼내자.

“던전 입장권···.”

입장권이 든 봉투 안쪽에서 빛이 일렁거렸다.

내 말에 앨빈은 영문을 몰라하는 반면, 발닉은 느긋한 반응이었다.

···그때만 해도 악마의 소행이라며 신에게 기도를 드리더니.

거침없이 봉투를 뜯자 그 안에서 푸른 빛이 왈칵 흘러나왔다.

쿠구구구궁.

지축이 진동함과 동시에 온몸이 흔들렸다.

“으아아악!”

“허허, 앨빈 경, 진정하시죠. 이건 별것 아닙니다.”

그리고 다음 순간.

눈앞의 경사면에 거대한 구멍이 생겨났다.

언제 생겨났는지 알 수 없는 팻말이 그 옆에 세워져 있었다.

[특수던전 ‘복수의 검’

최대 입장 인원 : 2명

기존 입장 인원 : 1명

경고 : 한 번에 한 명씩만 들어오시오.]

팻말의 문구를 읽은 발닉이 당황해서 외쳤다.

“어? 근데··· 한 명만 들어갈 수 있겠는데요?”

“그게 무슨, 어 정말이네요? 최대 입장 인원이 2명이면···.”

앨빈과 발닉이 그 문구를 두고 떠들어대는 사이.

나는 좀 다른 부분에 집중하는 중이었다.

일단은 내 손에 들린 입장권에 새로운 문구가 나타났으며.

[특수던전 ‘복수의 검’

-이곳은 고대인들이 애용해온 결투 장소입니다.

-자신의 혈육을 죽인 자에게만 복수할 수 있는 곳입니다.]

그 내용도 내용이었지만.

바바가 알려준 지표에서 던전 입장권이 반응했다는 건···.

대공이 이 던전 안에 있다는 의미였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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