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동력
* * *
커글랜드와의 결혼 동맹으로 왕실의 기반이 단단해진 가운데, ‘오프러스 동맹전쟁’은 에스닐의 왕권을 한층 강화해주었다.
인접한 이웃나라 중 제일 사이가 안 좋았던 나라가 바로 오프러스 공국인데.
그 집권자가 에스닐에 우호적인 인물로 바뀌었고, 권력 이양 과정에 에스닐이 큰 영향을 미쳤을 뿐 아니라.
‘무엇보다도 이번 전쟁으로 얻은 것이 상당하지.’
지하 자원이 풍부한 땅이 생겼고.
비밀 암살대가 철폐됨으로써 고위 인사들이 암살당할 가능성도 줄어들었다.
그 대부분이 나와 레핀 공작의 공임을 부정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아까 대신들 표정 봤어?”
“무슨?”
왕궁에 불려가 모두가 보는 앞에서 ‘궁내장관’의 직위와 훈장, 봉토까지 받고 돌아오는 길.
마차 안에서 돌연 카렌이 웃음을 터뜨리며 입을 열었다.
“다들 불만은 있지만 한 마디도 못 하는 얼굴이잖아.”
“그랬나?”
딱히 그쪽엔 신경 쓰지 않아서 몰랐는데, 하고 대꾸하자 카렌이 쯧쯧 혀를 찼다.
“너도 은근 둔하다니까. 근데 뭐 지들이 어쩌겠어? 나이 스물에 궁내장관이 된 게 고깝긴 하겠지만.”
“그래 봤자 세자르가 세운 공을 부정할 순 없을 테니까.”
그때껏 입을 다물고 있던 우만이 그녀의 말을 받았다.
카렌이 그를 보며 씩 웃었다.
“웬일로 말이 통하네.”
“뭐, 사실이잖아? 이제 에스닐 사교계에 세자르를 견제할 만한 세력은 하나도 없고 말이야.”
어깨를 으쓱하며 말하는 우만을 나는 가만히 보다가 입을 열었다.
“넌 정말 원래 이름은 안 쓸 거야?”
민감한 주제를 꺼내자 마차 안이 조용해졌다.
카렌이 나와 우만의 얼굴을 돌아보는 동안, 우만은 시선을 허공에 둔 채 입을 다물었다.
“전에도 묻긴 했지만, 그때와 지금은 상황이 다르잖아.”
우만은 나를 마주보기만 할 뿐 여전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내가 이런 걸 묻는 데는 다 이유가 있었는데.
‘가신들의 논공행상.’
오늘 왕궁에서 공적을 치하받은 이는 나와 레핀 공작뿐이 아니었다.
공성전 승리의 주역이었던 ‘드워프의 대포’를 제작한 앨빈은 물론이고.
기습 게릴라전을 성공으로 이끈 발닉, 디터, 롯, 3형제 등이 모두 공에 걸맞는 보상을 받았다.
‘그뿐이 아니지.’
칼 오프러스 대공의 실각과 함께 그가 저질렀던 사건들이 수면 위로 드러남에 따라.
왕가 일원의 죽음에 연루되어 멸문지화를 당했던 가문들의 명예가 회복되었다.
해당 가문의 생존자들은 다시 귀족 신분으로 복권되었을 뿐 아니라 위로금까지 받게 된 상황.
대표적인 사례가 앨빈이었는데, ‘앨빈 세비어’라는 이름으로 귀족 명부에 올랐다.
앨빈이 행정관을 목표로 하는 만큼, 앞으로 승진에 꽤 큰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다.
“앨빈도 ‘세비어’ 가문의 성을 다시 사용하겠다고 했어. 귀족으로 복권될 때의 장점이 무엇인지는 굳이 언급하지 않아도-”
“내 결심은 확고하다, 세자르.”
우만의 목소리는 차분했다. 이미 많은 고민을 했고, 그리하여 확고한 결론을 내렸음이 느껴지는 태도였다.
“실익 같은 건 상관없어. 난 그냥 지금의 나로 남고 싶으니까. ···빈터 가문과 관련된 과거는, 절대로 즐거운 추억 같은 게 아니야.”
내 눈치를 살피던 카렌은 내게 눈짓하며 고개를 저어 보였다.
이제 그 이야기를 그만하라는 신호였다.
“후, 알겠어. 네 생각이 정 그렇다면.”
딱히 우만의 선택을 바꾸려고 했던 건 아니다. 그저 궁금했을 뿐.
‘그렇담 어째서 이면 세계의 우만은 빈터라는 성을 사용했던 걸까.’
그때의 우만은 지금과 무엇이 그렇게 다를···.
거기에 생각이 미친 순간, 우만이 나를 보며 미간을 좁혔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지?”
“별거 아냐.”
“별거 아니라는데 심각해 보이네.”
카렌의 말에 나는 슬쩍 질문을 던져보았다.
“너희는 만약 세상이 마음에 안 드는 방식으로 흘러가면 어떻게 할 거지?”
“마음에 안 드는 방식?”
“응. 너희 손으론 저지할 수도, 흐름을 바꿀 수도 없을 만큼 끔찍한 방식으로 흘러간다면.”
“흠, 생각지도 못한 질문인걸.”
카렌은 내 말에 곰곰이 생각하더니 입을 열었다.
“한 가지는 확실해. 세자르 너처럼 앞에 나서서 세상을 바꾸려고는 안 할 거야.”
“···내가 언제.”
무슨 히어로물 주인공도 아니고.
카렌도 말은 저렇게 하지만, 사실 원작에서는 그 누구보다도 세상을 바꾸려고 분투하지 않았던가.
“거대한 흐름을 바꿀 수 없다면.”
그때 우만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 모든 광경을 씁쓸하게 바라보며 기록이라도 남기지 않겠어?”
“기록?”
“그래. 비극을, 그에 얽힌 진실을 누군가는 후대에 제대로 알려야 할 테니.”
“···.”
그런 마음으로 역사서를 집필한 것일까.
“그 정도가 아마 내가 할 수 있는 전부일 것 같은데.”
우만은 어깨를 으쓱하고는 그것을 말을 마쳤다.
어쩐지 기분이 묘한 가운데, 카렌이 화제를 돌렸다.
“그런데 세자르, 앞으론 어떻게 할 생각이야? 대공을 계속 추적할 거야?”
“그래야겠지.”
“하긴 뭐, 바바를 써먹으면 사람 하나 찾는 거야 문제도 아니겠지.”
카렌은 바바 놈을 잘 데리고 있으니 언제든 데려다 써먹으라고 덧붙였다.
“그리고 세자르, 네가 준 이능자 육성 관련 서류 말인데···.”
테레사가 이사벨에게서 받아 내게 전달해준 서류.
나는 그것을 애당초 카렌에게 넘겨 조사를 부탁한 터였다.
“이게 의외의 방향으로 흘러갈 것 같아.”
“의외의 방향?”
“이능이 과연 ‘신성’이냐, 아니면 ‘유전적 능력’이냐를 두고 학계에서 말이 많다고 했잖아?”
이능이 정말로 신의 힘이 맞느냐.
신성 모독에 가까운 화두인 탓에, 학계의 뜨거운 감자란다.
“근데 일부 학자들이 새로운 의견을 제시했는데, 이게 사실은 이백여 년 전에 존재했던 ‘마법’의 힘인 마나의 개념 아니냐는 거야.”
“마나가 실제로 존재한다고?”
내가 알기로 <왕도의 대가> 세계관은 마나가 없는 세계관인데.
금시초문이라는 듯 반응하자 카렌이 어깨를 으쓱했다.
“물론 거의 소멸된 개념이라, 다른 학자들도 반신반의하긴 하지만··· 이백 년 전, 교단이 대대적인 마녀 사냥을 벌이기 전에는 상황이 달랐다고 해.”
“···마녀 사냥?”
“앨빈한테 들어본 적 없어? 앨빈이 그쪽에 관심이 많던데.”
카렌은 그 밖에 얻어낸 정보들을 빠짐없이 보고했다.
그것을 머릿속에 정리하며 언젠가 앨빈에게 자문을 구해봐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바바는 언제쯤 보내면 될까?”
“빠르면 빠를수록 좋지.”
카렌에게 대답하는 순간, 돌연 눈앞에 낯익은 메시지가 나타났다.
[도전과제 ‘초특급 승진’ 달성! - 궁내장관으로 승진했습니다.]
[보상 ‘던전 입장권’을 수령했습니다.]
···던전 입장권이라고?
생각 외의 보상에 잠시 멍해져 있는데, 가슴 안주머니에 묵직한 뭔가가 느껴졌다.
나는 도전과제 목록을 다시 불러내보았다.
-루치오 전 추기경의 금지된 연구를 조사했나요?
-특수던전 ‘복수의 검’에 입장했나요?
-도주한 칼 오프러스 대공을 붙잡았나요?
-루치오 전 추기경의 파문에 얽힌 비밀을 파헤쳤나요?
-교단의 비리를 온 천하에 까발렸나요?
두 번째에 자리한 ‘특수던전’ 과제가 다른 것과 어울리지 않게 생뚱맞아 보이지만···.
사실은 이 던전이야말로, 얽히고 설킨 미스터리를 해결할 열쇠가 될지도 모른다.
‘대공이 어디 있는지도 대충 알 것 같고 말이지.’
물론 그래도 확실히 하는 게 좋겠지.
결말이 비로소 다가오는 듯한 느낌에, 나는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 * *
자신이 지닌 모든 정보를 세자르에게 넘긴 후.
리아나는 줄곧 방 안에만 머문 터였다.
극심했던 고문 탓에 거동조차 쉽지 않은 상황에서, 주치의는 예전의 마님을 대하듯 조심스럽게 그녀를 진찰해주었다.
“마님, 아침 식사를 가져왔어요. 오늘은 좀 어떠세요?”
이름은 모르겠지만 낯익은 얼굴의 하녀 또한 지극 정성으로 돌봐줬고 말이다.
“···마님이라고 부르지 말랬지.”
“아차.”
깜짝 놀라며 제 입을 가리는 하녀의 모습에 리아나는 미간을 구겼고.
이 흉측한 몰골을 보고도 그런 말이 나오느냐는, 역정 비슷한 뒷말을 입안으로 삼켰다.
‘그러고 보면.’
로건 드 레핀과 함께 사는 십여 년간.
그녀 자신은 단 한 번도 이 공작저의 온전한 주인이라고 느낀 적이 없었다.
‘나는 어디까지나 대공의 명령을 수행하는 도구가 되어야 한다.’
그처럼 멍청하기 짝이 없는 사명감에 사로잡혀 공작저 내부의 소식을 공국에 소상히 알렸을 뿐 아니라.
레핀 공작을 무너뜨릴 기회만을 호시탐탐 노렸으니까.
···그때 그러지 않았더라면.
조금이라도 이 생활을 진심으로 받아들였다면.
손에 피를 묻혀가면서까지 자식을 왕으로 만들겠다는 헛된 야심을 품지 않았다면 좀 달라졌을까.
‘뒤늦게 후회해봤자 무슨 소용일까.’
리아나는 한숨을 내쉬며 수프를 한 입 떠먹었다.
고문의 후유증 때문인지 무엇을 먹어도 아무 맛도 나지 않았다.
대충 몇 숟가락 넘기고 그릇을 밀어내자, 하녀가 안타까워했다.
“그래도 마님, 한 입만 더 드시지···.”
“그렇게 부르지 말라니까.”
“···.”
“세자르는? 세자르는 들어왔나?”
그녀의 질문에 하녀는 잠시 망설였다.
전에 모시던 이라 습관적으로 ‘마님’이라고 불렀을 뿐, 공작저의 실질적인 주인은 세자르였으니까.
그 속내를 금방 알아차린 리아나는 빠르게 덧붙였다.
“···혹시라도 들어온다면 내가 보기를 청한다고 말을 전하도록.”
“네, 마님.”
하녀가 그릇을 들고 문 밖으로 총총 사라졌다.
비로소 혼자가 되었다는 안도감에 한숨이 흘러나왔다.
“후우···.”
어느샌가부터 날짜를 세는 것을 잊어버렸다.
눈을 뜰 때마다 온몸에 격통이 엄습했고.
망가진 사지와 엉망이 된 얼굴만이 악몽처럼 자신을 마주했다.
‘통증은 참을 만하지만.’
그와 별개로, 머릿속을 지배하는 죄책감은 견디기 힘들었다.
아무 감정 없이 남을 이용하고, 남의 목숨을 수없이 끊어왔던 자신이 이제 와 죄책감에 사무친다는 것이 우습기는 했지만.
‘나와 평생 인연이 없는 감정이라 여겼는데.’
그 낯선 감정은 팰러스의 죽음 이후로 눈덩이처럼 불어나 그녀의 내면을 가득 채웠다.
아주 가끔, 긍정적인 감정이 피어나거나 안도감이 들라 치면.
그녀의 사고 회로는 늘 ‘나는 희망을 느낄 자격조차 없어’라는 결론으로 마무리되었으니.
“···그러니 내게 남은 것은 단 하나뿐.”
언젠가 방을 나서려는 세자르의 발치에 매달려 애원한 적이 있었다.
‘제발, 내가 그자의 목숨을 끊게 해주거라.’
세자르는 확답을 줄 수는 없지만 노력해보겠다고 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감사한 대답이었다.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은 상태의 그녀가 여지껏 숨이 붙어 있는 것은, 오로지 대공을 제 손으로 죽이고 말겠다는 결심 덕분이었으니까.
그때, 문 밖에서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세자르였다.
그녀의 침대 맞은편에 의자를 끌어와 앉은 세자르에게, 리아나는 대뜸 이렇게 물었다.
“대공은? 대공은 어찌 되었나?”
“제물의 이능자라고 알고 있나?”
“처음 듣는데.”
“흠, 그럼 최근에 데려온 이능자인가. 어쨌든.”
세자르는 칼 오프러스 대공이 절체절명의 순간, 제물 이능자를 이용해 어떻게 도망쳤는지 들려주었다.
설명을 다 들은 리아나의 얼굴이 한층 더 새하얗게 질렸다.
“그, 그러면 대공은-”
“하지만 걱정할 것 없어. 잡는 건 시간 문제이니까.”
“뭘 믿고 그렇게 호언장담하지? 대공은 네 생각만큼 호락호락한 인물이 아니야.”
리아나의 대꾸에 세자르는 희미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러는 당신이야말로 아직도 모르나 보군. 나 또한 유능한 이능자들을 여럿 보유하고 있다.”
···이능자의 힘을 이용해 대공을 추적하겠다는 건가.
그 사실을 깨닫자 세자르의 여유만만한 얼굴이 한순간 칼 오프러스 대공과 겹쳐 보였지만.
이내 이어진 말에 그러한 인상은 순식간에 사라지고 말았다.
“그리고 약속은 지킬 거니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가능하면 직접 당신의 손으로 죽일 수 있도록 노력해보지.”
“···어째서?”
“어째서라니, 그게 거래 조건이었잖아? 실제로 당신이 준 증거들이 꽤 효과적이었고.”
당연한 걸 묻느냐는 듯한 세자르의 모습.
그 순간 리아나는 또 다른 누군가를 떠올렸다.
‘그럴 리가 없다는 걸 그 누구보다도 잘 알지만···.’
꽤 우습게도 지금 이 순간의 세자르는 로건을 꽤 닮지 않았나.
로건 드 레핀은 약속을 어기는 법이 없는 남자였으니까.
“대공은 반드시 내 손으로 생포할 거다.”
이어진 세자르의 말에 리아나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만약 공국측에서 먼저 잡으면?”
“그땐 내게 신병을 인도하기로 약조받았으니까 상관없어. 그들에게 대공은 버린 패나 마찬가지다.”
안도의 한숨을 쉬는 리아나에게 세자르는 한 번 더 확신을 주었다.
“뭐가 됐든 당신이 그자의 목숨을 직접 끝장내게 해주지.”
그 말에 달콤한 희망이 밀려왔다.
움직일 때마다 살을 저미는 듯한 고통이 밀려들고, 한쪽 눈은 제대로 뜰 수조차 없으며, 숨 쉴 때마다 쌕쌕 소리가 나긴 하지만.
그 덕분에 이 힘겨운 현실이 좀 더 견딜만해질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