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작가의 서자로 살아가는 법-155화 (155/176)

불안함의 이유

“우만··· 드 빈터라니.”

우만의 본명은 레온 드 빈터.

이 두 가지를 조합한 이름이 표지 아래에 금박으로 새겨져 있었다.

나는 표지를 넘겨 본문을 읽기 시작했다.

귀신에 씌이기라도 한 사람처럼 내용에서 눈을 떼지 못한 채 한참을 붙들고 있었다.

중간에 제이콥이 와 식사 시간임을 알렸지만.

“좀 이따 먹을게.”

식사도 건너뛴 채 몇 시간을 내리 읽은 덕분에 이런 결론을 내릴 수 있었다.

‘이면세계가 내가 생각한 그 평행세계 개념이 맞나 보군.’

이 책에서 말하는 이면세계란 <왕도의 대가> 속 세계였다.

팰러스가 왕이 되는데 성공하지만 이내 리암에게 살해당하며. 칼 오프러스 대공의 꼭두각시인 에드윈 레핀이 왕위에 오른 후의 세계 말이다.

‘그야말로 대혼란의 시대였군.’

집권 초만 해도 에드윈 3세는 공국의 요구와 에스닐에 대한 의무 사이에서 나름 줄타기를 하며 국내외의 혼란을 어떻게든 가라앉히려 했지만.

‘오프러스 공국이 에스닐의 귀족 세력을 포섭했다고?’

에스닐 귀족들의 지지를 등에 업은 공국은 갑작스레 에스닐을 침공하고, 안 그래도 병력이 부족하던 왕실은 금세 몰락하고 만다.

순식간에 승기를 잡은 공국은 자국을 지지한 에스닐 귀족들에게 대가를 내주는 한편, 알토란 같은 땅 대부분을 공국 소유로 돌릴 뿐 아니라···.

에스닐을 자국의 속국으로 만든다는 결말을, 저자 우만 드 빈터는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서술하고 있었다.

“하, 빌어먹을.”

그야말로 암울하기 그지없는 미래가 아닌가.

충격적인 내용 때문일까.

어느새 차가워진 손 끝으로 책의 마지막 장을 덮었다.

‘어쨌거나 현실은 그렇지 않으니 다행이네.’

그렇게 안도한 순간, 이런 의문이 들었다.

만일 내가 세자르의 몸에 빙의하지 않았다면?

그렇담 이 소설은, 아니 이제는 소설인지 실제 세계인지 구분도 안 가는 이 세상은···.

“···여기 나온 내용 그대로 변해갔을 거란 건가?”

그런 의미에서 내가 정말로 많은 것을 바꿨구나 싶어 새삼 감개무량한 기분이 들었지만.

그보다는 호기심이 더 강력했다.

먼저 다른 사람도 아닌 ‘우만’이 역사서를 쓸 이유가 무엇일까.

저쪽 타임라인에서 우만은 팰러스의 가신이었고, 팰러스의 본성을 알게 된 후에는 그를 암살하려다가 발각당했다.

‘헌데 저걸 썼을 정도로 오래 살아남았다는 걸 보면···.’

발각당한 후에도 잡히지 않았나 보다. 뭐 그거야 그렇다 치고.

이쯤 되니 <왕도의 대가>라는 소설과, 그 작가인 ‘역4서’라는 인물도 궁금해진다.

<왕도의 대가>는 혹시 소설이 아니라 실제 역사였던 건가?

설마 작가 ‘역4서’가 사실은 우만이라는, 뭐 그런 황당무계한 이야기는···.

‘아니, 말도 안 되는 얘기야.’

그렇담 애초에 내가 작가와 쪽지를 주고받았던 건 어떻게 설명할 건가.

요즘 웹소설 트렌드를 1도 모르는 작가에게 상태창이니 책빙의니 하는 기본 개념을 떠들어댄 게 바로 나 아닌가.

나는 말도 안 되는 가정을 머릿속에서 몰아냈다.

‘이건 나중에 좀 더 고민해보자.’

낡아빠진 역사서를 조심스레 금고 속에 집어넣고는 한숨 돌렸다.

···아, 쉬려고 했는데 쉬질 못했네.

* * *

일명 ‘오프러스 동맹전쟁’을 마무리하고 돌아온 뒤, 꼭 일주일 만에 왕궁에 첫 출근을 했다.

궁에 발을 들인 순간부터 강렬한 시선들이 내게 쏟아졌다.

“어머, 세자르 공이야!”

“이번 전쟁에서 대단한 공훈을 세우셨다지?”

“전형적인 책상물림일 줄 알았더니 전쟁에서도···.”

“책상물림이라니 무슨 소리야! 전에 수도회 사건 때 직접 뛰어들어 제압한 거 몰라?”

남들의 시선에는 이미 익숙했지만 이번은 그 정도가 좀 더 심했다.

왕궁 시녀들, 궁내관료들, 귀족들 할 것 없이 날 보며 수군거리는 것은 기본이요.

약간이라도 안면이 있는 이들은 거리낌 없이 다가와 축하 인사를 건넸다.

“세자르 공! 축하하오!”

“그 젊은 나이에 벌써 이런 무훈을 세우다니, 과연 사자의 아들은 사자가 아니겠소.”

“허허, 레핀 공작이 많이 자랑스러워하시겠습니다.”

나는 어색한 얼굴로 인사를 대충 받아넘긴 뒤 국왕의 집무실로 향했다.

“왔나.”

테레사가 나를 돌아보더니 환하게 웃었다.

“폐하께서는 강녕하셨습니까.”

“얼굴 보면 모르겠나? 행복해서 죽을 것 같은 얼굴일 텐데, 지금.”

‘하긴 모든 게 계획대로 흘러갔으니 만족스러울 수밖에.’

자신의 아비와 동생을 죽인 죄를 물어 대공을 파문시키는 데 성공한 것이 일단 첫 번째.

그 후로도 이사벨 공녀가 약속대로 움직였으며, 그녀가 일으킨 내전이 우리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마무리가 되었으니 기쁘지 않을 수가 없을 거다.

“그것만으로도 기쁜 일인데, 그대가 이능자 부대원들까지 잡아서 데려왔으니!”

“운이 좋았을 뿐입니다.”

“운이라니, 무슨 소리. 그대는 가끔 보면 겸손이 지나치단 말이야.”

허물없이 말하던 테레사가 빙긋 웃더니 내 앞에 놓인 찻잔을 가리켰다.

나는 찻물을 한모금 들이켠 후 고개를 저었다.

“과찬의 말씀이십니다. 이사벨 대공과는 얘기를 좀 나누셨습니까?”

“그래, 이능자 육성기관 관련 정보를 이미 모두 넘겨왔네.”

“빠르군요.”

“성격이 화끈하더라고. 짐과 잘 맞을 것 같아.”

어깨를 으쓱한 여왕이 말을 이었다.

“전에 그대가 그랬던가? 교황청에서 20년 전에 파문당한 루치오 추기경이라는 자가 공국의 이능자 육성기관과 관련 있을 수 있다고.”

“그랬습니다만.”

기다렸던 주제의 등장에 침을 꿀꺽 삼켰다.

“이사벨 대공이 조사한 바에 따르면 그냥 관련 있는 정도가 아니던데. 직접 확인해보도록.”

테레사가 건넨 서류를 나는 빠르게 살펴보았다.

칼 오프러스 대공에게 이능자 육성기관이라는 아이디어를 제시했으며.

아이디어가 현실화되자 ‘이능자 양성 프로젝트’를 지휘한 총책임자로서 활동한 장본인이 바로···.

“루치오 전 추기경이 곧 이 사건의 흑막이다, 이 말인가요.”

“그래. 참으로 기이한 일이지 않은가? 그자가 20년 전 파문을 당하지 않았더라면, 그래서 대공의 밑으로 기어들어가지 않았더라면···.”

담담하게 이어지는 테레사의 목소리에서 회한이 느껴졌다.

“적어도 공국이 보낸 이능자들의 손에 내 아비와 동생이 죽을 일은 없었을 텐데.”

“···폐하.”

샌프란시스코에서 작은 나비가 일으킨 날갯짓 한 번이 하와이의 태풍을 불러온다 했던가.

이른바 운명의 나비 효과는 여기서도 예외가 아니었지만.

테레사는 금세 기운을 차리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 아니야. 짐의 생각이 짧았네. ···이능자가 수하에 없더라도 대공은 어떻게든 내 핏줄들을 암살했을 테니.”

물론 암살의 성공률은 훨씬 낮아졌겠지만 말이다.

나는 그 말에 입 밖에 내지 않은 채 그녀의 말을 경청했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지. 이사벨 대공은 그 루치오라는 자를 잡아서 신병을 인도하겠다 약조했었지만, 어찌나 눈치가 빠른지 대공성이 무너지기 이전에 이미 행방이 묘연해졌다는군.”

대공성이 무너지기 전에 진작 도주했다, 는 얘기를 듣자 짚이는 바가 있었다.

‘눈치가 빠른 게 아니라 예지 이능자를 데리고 있어서인지도 모르지.’

언젠가 바바의 이능을 방해했던 공국 측 인물이 있지 않은가.

그자 역시 예지 관련 이능자일 것 같은데, 이번에 죽거나 생포한 이능자 부대원 가운데에 그런 자는 없었으니까.

“헌데 세자르 공, 그자를 붙잡아서 어찌할 생각인가?”

“글쎄요···.”

“설마 공국처럼 우리도 이능자 부대를 만들자, 이런 생각인가?”

“그런 건 아닙니다. 그저 개인적인 호기심이랄까요.”

이 부분은 좀 애매하긴 하다.

나는 굳이 그들 중 누군가를 더 데려올 생각은 딱히 없는 데다.

에스닐을 위해 봉사할 이능자 부대를 양성한다, 라는 아이디어 자체는 나쁘지 않지만 내가 직접 그 일에 관여할 생각은 없다.

그보다는 오히려···.

‘교황청에서 발견한 기밀문서의 내용에 마음이 쓰이기 때문이지.’

자연 출생한 이능자가 아니라, 파문당한 전 추기경이 만든 기이한 약물에 의해 강제로 이능자가 되어버린 아이들.

그 아이들을 폭력과 세뇌로 부대원으로 양성해온 사건의 진상을 알아내고 싶은 것뿐이니까.

“나쁘지는 않은 생각인데, 안 그런가?”

“그렇지만···.”

이 망설임과 반감은 대체 어디서 나오는 걸까.

나는 잠시 고민하며 말을 천천히 골랐다.

“설령 그런 특수부대를 만들더라도, 그 방식이 공국의 그것처럼 비인간적이 되어서는 안 될 것 같군요.”

“···.”

테레사는 생각도 못한 부분이라는 듯 눈을 동그랗게 떴지만.

이내 옅은 미소를 지었다.

“그거야 당연하지. 가신의 마음을 얻지 않고서는 제대로 된 주군 관계가 성립될 리 없잖은가.”

언제 봐도 총명하기 그지없는 대답에 나 또한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생포해온 이능자 부대원들의 거취는 천천히 결정할 것이니, 그대도 생각이 바뀌면 언제든 말하도록.”

“송구스럽습니다.”

“그거야 그렇고, 이제 본격적인 논공행상을 시작할 것인데. 부친 로건 공에게는 명예 원수의 지위를, 그리고 그대에게는···.”

명예 원수의 직위라.

생각했던 것보다 더 통 큰 보상에 내가 할 말을 잃은 사이, 테레사가 씩 웃으며 말을 이었다.

“궁내장관의 지위를 내릴 생각인데, 어떻게 생각하나?”

“···!”

궁내장관.

왕실 고문관에서 두 계단이나 더 높은 자리가 언급되자, 며칠 전에 갱신된 도전과제 항목들이 떠올랐다.

-궁내장관으로 승진했나요?

-루치오 전 추기경의 금지된 연구를 조사했나요?

-특수던전 ‘복수의 검’에 입장했나요?

-도주한 칼 오프러스 대공을 붙잡았나요?

-루치오 전 추기경의 파문에 얽힌 비밀을 파헤쳤나요?

아래의 네 가지야 그렇다 쳐도, 첫 번째 과제를 보며 좀 황당해했던 터였다.

궁내장관의 자리에 오르려면 아직도 한참은 남았을 텐데 왜 이게 맨 위에 있지 싶어서.

‘근데 그게 이렇게 진행될 줄이야.’

얼떨떨한 심정으로 입을 열었다.

“고문관으로 승진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상황에서 너무 과한 보상이라 말이 나오지 않을까요.”

“그렇게 따지면 여태껏 그대가 세워온 공은 과하지 않고?”

그 말에 대답하지 못하자 테레사는 기분 좋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공은 짐의 마음을 모를 거야.”

“···네?”

“짐이 그래도 한 나라의 왕인데, 그대의 마음을 붙잡기 위해 제시할 수 있는 게 고작해야 두 단계 특진뿐이라니.”

“하하.”

그녀의 너스레에 웃음을 터뜨리자 테레사가 입술을 비죽 내밀었다.

“진짜라니까? 짐은 가끔 그대가 어디로 훌쩍 가버리는 게 아닐까 불안하거든.”

농담처럼 들렸지만 어딘가 뼈가 있는 말이었다.

너무 뛰어난 가신이 다른 마음을 먹진 않을지 불안해하던 주군은 역사상 수없이 많지 않았던가.

나는 웃음기를 싹 거두고 진지하게 말했다.

“불안해하실 필요 없습니다, 폐하. 저 세자르 레핀이 폐하 외에, 에스닐 외에 충성을 바칠 일은 없을 테니까요.”

저 말은 어느 정도 진심이었다.

내 안에는 아직도 완전히 ‘세자르 레핀’이 되지 못한, 현대인 ‘김현우’의 잔재가 남은 만큼 이 시대에 적합한 충성심 같은 건 알지 못했으나.

적어도 이것만큼은 분명했다.

내가 이리저리 부딪히며 노력한 덕분에, 이 풍요로운 나라가 <이면세계의 역사서>에 나온 것처럼 파탄을 맞지 않아서 너무도 다행스럽다는 것.

그리고 앞으로도 이 현상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할 의지가 있다는 것 말이다.

어쨌거나 그 말이 효과가 있었던 것인지.

긴장한 듯 보이던 테레사의 얼굴이 천천히 미소를 되찾았다.

* * *

테레사는 두 손으로 턱을 괸 채 세자르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언제부터였을까.

그를 믿고 의지하는 것으로 모자라, 그가 어디론가 가버릴까 봐 불안해진 것은.

‘충성심이나 소속의 문제가 아니야.’

세자르는 가끔 기이한 느낌을 줄 때가 있었다.

당면 과제를 해결하기 위해 그 누구보다도 노력하면서도, 마치 이 현실과 아무 상관없는 방관자처럼 말하고 행동할 때가.

그래서일까.

그녀는 언젠가 세자르가 아예 없던 사람처럼 사라져버리지 않을까 싶어 문득 불안해지곤 했다.

‘말도 안 되는 생각이란 걸 잘 알면서도.’

대신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특진을 추진한 건 그 때문이었다.

그런 게 세자르 본인의 발목을 붙잡을 수 없으리라는 걸 알면서도.

그 순간, 테레사는 불쑥 진심을 말해버리고 말았다.

“공은 짐의 마음을 모를 거야.”

“네?”

당황한 세자르를 보면서도 말을 멈출 수가 없었다.

“···가끔 그대가 어디로 훌쩍 가버리는 게 아닐까 불안하거든.”

그 말에 세자르의 표정이 바뀌었다.

그는 헛기침을 하더니, 진지한 기색으로 말했다.

“불안해하실 필요 없습니다, 폐하. 저 세자르 레핀이 폐하 외에, 에스닐 외에 충성을 바칠 일은 없을 테니까요. 물론···.”

세자르의 얇은 입술이 호를 그렸다.

“물론 폐하께서 적절한 논공행상을 잊지 않으신다는 전제하에 말입니다.”

···좀 둔하긴 하지만, 계산속 하나만큼은 철저한 사내라니까.

그런 제 생각에 결국 테레사는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방금 전의 불안감이 눈 녹 듯 사라지는 신기한 기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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