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작가의 서자로 살아가는 법-154화 (154/176)

네가 왜 여기서 나와

레핀 공작이 이끄는 대부대가 단 세 방의 포탄으로 대공성의 성문을 박살낸 직후.

훤히 뚫린 성문으로 에스닐 군이 물밀듯 쏟아져 들어왔다.

“대공군을 섬멸하라!”

“칼 오프러스 대공을 산 채로 붙잡아라!”

아침해가 뜰 때까지 술에 거나하게 취해 있던 대공 직속군은 이 생각지도 못한 기습에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왜 에스닐 군이 여기에···?”

“저것 봐! 레핀 가문의 문장이다!”

교차된 두 자루의 검과 장식 없는 방패.

대륙인이라면 누구나 알아본다는 레핀 가문의 문장에 공국인들의 머리카락이 쭈뼛 섰다.

잠과 술에 취해 있던 정신이 반짝 깨어났지만, 사태는 이미 늦어버린 후였다.

“크악!”

“이, 이렇게 개죽음을 당할 줄이야···.”

푸욱! 찍!

여기저기서 피가 솟구쳤다.

무기도 채 들지 못한 공국군을 에스닐 군은 볏단을 쓰러뜨리듯 베어나갔다.

평소의 공국군이라면 이 정도로 속수무책으로 당하지 않았을 테지만.

적장을 암살했다는 승리에 도취되어 고삐가 풀려 있었던 것이 가장 큰 패인이었다.

에스닐 군을 이끌던 레핀 공작이 우렁찬 목소리로 명령했다.

“전군, 방심하지 마라! 개미 새끼 한 마리도 빠져나가지 못하게 하도록!”

그나마 정신이 멀쩡했던 일부 병사들이 황급히 움직였지만, 그들 또한 에스닐 군의 사정거리에서 벗어날 수 없었음은 마찬가지.

병사들이 나머지 공국군의 목숨을 끝장내는 가운데, 부관들은 대공의 집무실이 자리한 방향으로 우르르 몰려갔다.

그러한 기색을 눈치챈 대공의 경비병들 또한 목숨을 바칠 각오로 부관들을 막아냈다.

“칼 오프러스 대공을 찾아라!”

“대공 각하를 지켜라!”

두 세력이 서로 총구와 검을 겨눴다.

챙캉! 챙! 탕! 타탕!

칼날끼리 부딪치며 나는 금속음이, 코 끝을 아릿하게 하는 매캐한 연기가, 귓전을 얼얼하게 하는 총포음이 이어졌다.

그들을 지휘하던 레핀 공작의 손에도 땀이 쥐여졌다.

‘반드시 잡아야 한다!’

전쟁의 승리야 확실시된 상황.

그러나 공작은 승리보다도 다른 것에 더 목말라 있었다.

자신이 총사령관을 맡겠다고 부득불 나선 데에는 ‘개인적인 복수’라는 이유가 없지 않았으니까.

‘칼 오프러스 대공, 네놈을 반드시 내 손으로 잡고 말겠다!’

한때 이언 왕세자를 곁에서 보좌했던 가신으로서, 공작은 이 젊은 왕세자가 에스닐의 영광을 이어나갈 훌륭한 군주가 되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함께한 시간들의 대가, 혹은 믿음의 대가 때문에라도 로건 드 레핀은 복수를 완성해야만 했다.

* * *

그로부터 몇 분 전, 대공의 집무실.

칼 오프러스 대공은 상황을 재빨리 판단했다.

공성전의 관건은 성을 뚫느냐 마느냐다.

헌데 이미 성문이 뚫렸다면···.

‘그건 이미 진 싸움이나 다름없지 않은가.’

애초 대공 직속군은 병력이 많지 않았다.

대부분은 이사벨의 군대를 막기 위해 보냈고, 본성 쪽에는 얼마 남겨두지 않은 상황이었으니까.

설마 에스닐이 대공성에 쳐들어올 줄 누가 알았으며, 천혜의 요새라 불리던 이 성문이 그리 쉽게 뚫릴 줄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각하, 어, 어쩌지요. 놈들이 벌써 외성을 지나 내성으로-”

“시끄럽다, 그롤.”

당황해 공황 상태에 빠지려는 그롤의 뺨을 대공은 찰싹 때린 뒤 지시했다.

“지금 당장 구금실에 가서 ‘제물의 이능자’를 데려와라.”

“아···.”

“당장!”

호통을 치고 나서야 그롤은 뒤돌아서 구금실로 달려갔다.

그 멍청한 뒷모습을 보려니 절로 한숨이 나왔다.

‘형편없기는.’

대공은 저렇게 쉽게 겁에 질리는 자들을 이해할 수 없었다.

이미 목에 칼이 들어온 순간이라면 모를까, 그 전이라면 어떻게든 살 방법을 도모해야 하지 않겠는가?

칼 대공은 불필요한 부분에는 일말의 감정도 소모하지 않는 유형의 인간이었다.

“일단은···.”

기밀 서류를 비롯해 귀중품을 챙겨 담은 뒤, 호신용 총을 꺼내 장전했다.

혹여나 그롤이 시간 내에 돌아오지 못할 경우를 대비해 시간을 끌어야 했다.

“···.”

닫혀 있는 문을 향해 총구를 겨눠본다.

그 자세로 잠시 서 있노라니 총을 든 제 두 손이 부르르 떨리는 게 보였다.

‘이런 나조차 긴장을 하고 있단 말인가.’

불안, 혹은 두려움.

그 감정의 정체가 무엇이든 간에 대공은 최대한 절제한 채 눈앞의 문이 열리기만을 기다렸다.

잠시 후 벌컥 열린 문 너머로···.

“각하, 헉, 헉.”

다행히 그롤이 땀을 잔뜩 흘리며 나타났다.

“그, 제물···을 데려왔습니다.”

그 등 뒤로 나타난 어린 소년의 모습에 칼 오프러스 대공은 히죽 미소를 지었다.

“잘했군.”

당황해 어찌 할 바를 모르는 아이를 대공은 거칠게 제 쪽으로 끌어당겼다. 바로 한 달 전 ‘그자’가 보내준 아이였다.

대공은 아이를 보며 이를 드러내 보였다.

“꼬마야, 드디어 네 힘을 쓸 때가 왔구나.”

아이는 침을 꿀꺽 삼키더니 망설이는 얼굴로 그의 귓가를 뭔가를 속삭였다.

“흠, 대가가 필요하단 말이지. 그거야 걱정마라.”

고개를 주억거리며 이쪽을 흘긋거리는 대공의 모습에 그롤이 문득 불안해진 순간.

“그롤, 언제든 나를 위해 목숨을 걸 수 있다고 했지?”

“네? 그, 그거야 당연-”

“마음이 바뀌지 않아 다행이구나.”

그 말과 동시에, 대공은 품에 숨긴 단도를 꺼내 그롤의 목을 그었다.

“끄어어억···.”

갈라진 틈새에서 흐르는 선혈을, 대공은 두 손으로 고이 받아냈고.

“이 정도면 충분하지 않겠나?”

아이의 머리에 그 피를 부었다.

아이는 무표정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더니 입안으로 무언가를 중얼거렸고.

동시에 부우웅, 하고 공기가 진동했다.

‘이것이야말로 이능을 쓰는 감각!’

내심 감탄해 있는데 아이가 감정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준비는 끝났습니다. 바로 떠나시면 됩니다.”

크하하하.

대공은 광소하며 책상 아래 숨겨진 바닥문을 열었다.

그 안으로 들어간 뒤 아래에서 바닥문을 닫았다. 저 위에서 볼 때는 그냥 평범한 바닥 타일로 보일 것이다.

‘하, 빌어먹을 아비의 조언이 도움이 될 줄은 꿈에도 몰랐군.’

언젠가 그의 부친은 그를 저주하며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그 누구도, 설령 자식이라 해도 믿지 말라고.

너 같은 놈은 언젠가 네 자식에게도 같은 꼴을 당할 날이 올 거라고 말이다.

···그리고 그 말을 나름 마음 깊이 되새겼던 칼 오프러스는, 오프러스 대공가의 일원에게만 구전되는 이 성의 각종 비밀통로와 비밀방의 존재를-

자신 외에 그 누구에게도 알려주지 않았다.

‘두고 봐라.’

비록 자신이 지금은 막다른 골목에 몰려 있지만, 반드시 판을 뒤집고 말 것이니까.

그러기 위해서 제일 먼저 향해야 할 곳은···.

‘그자를 만나야 한다.’

어둠 속을 휘휘 나아가며 대공은 품속에 든 지도의 존재를 떠올렸다.

자신에게 이능자 부대의 가능성을 알려주고, 가능성에 불과하던 것을 실현시켜준 자.

‘···루치오를 만나야 한다!’

대공의 발걸음이 빨라졌다.

* * *

승리의 맛은 짜릿하고도 달콤했다.

가장 큰 공헌을 한 것은 무엇보다도 내 아버지 레핀 공작으로.

난공불락이라고 불리던 오프러스 대공성의 성문을 단숨에 박살냈을 뿐 아니라, 최소한의 인명 피해로 최단 시간 내에 성 하나를 함락했다.

“다 네 덕분이다, 세자르.”

레핀 공작은 드워프의 대포 덕분이라며 한사코 공을 내게 돌리려 했지만 말이다.

나 또한 상당히 괜찮은 성과를 올렸는데, 이사벨 공녀군을 지원한 뒤 곧바로 그 근처에서 이능자 부대의 근거지를 발견해냈으니 말이다.

말 그대로 온갖 신묘한 재주를 부리는 자들이 한가득이었지만, 수적 차이가 엄청난 데다 기습을 당하는 상황에서는 어쩔 수 없는 법.

이능자 부대원 중 절반이 순식간에 목숨을 잃었고, 나머지 절반은 내가 세자르 레핀임을 눈치챈 모양이었다.

“어, 어떻게 이런!”

“맙소사, 이능이 통하지 않아!”

“설마 저자가 각하께서 말씀하시던···.”

“저항해봤자 소용없어! 저자는 무력화 이능자다!”

대공의 데이터베이스에는 내가 그렇게 알려져 있었던 걸까.

그 후로 상황은 급변했다.

처음만 해도 극심하게 저항하던 이들은 결국 투항하는 편을 택했다.

“탁월한 선택이다. 헌데 마음 같아서는 너희에게 인도적인 대우를 해주고 싶지만···.”

나는 밧줄에 순순히 묶인 이능자들을 향해 말을 이었다.

“너희는 아무래도 이능자잖아? 그냥 밧줄에 묶어서 끌고 가기엔 아무래도 좀 찝찝한 구석이 있거든. ···부관들!”

눈짓으로 신호를 보내자, 부관들이 달려와 놈들을 깔끔하고도 효율적으로 기절시켰다.

마지막 한 명까지 제대로 의식을 잃은 것을 보고 병사들에게 명령했다.

“좋아, 놈들이 기절해 있는 사이에 재빨리 에스닐 궁으로 되돌아간다!”

“세자르 공 만세!”

이처럼 분위기는 아주 밝고 활기찼으니.

나는 총 서른 명가량의 이능자들을 포박해 무사히 에스닐 궁으로 데려왔다.

‘간만에 지하감옥에서 사람 사는 냄새가 좀 나겠는걸.’

그로부터 사흘 후.

상황은 깔끔하게 정리가 되었다.

레핀 공작의 활약 덕분에 이사벨 공녀는 대공성에 무혈입성할 수 있었고.

마지막까지 대공을 지지하던 세력이 물거품처럼 와해된 만큼, 그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권좌에 올랐다.

‘나, 오프러스 가문의 적장녀 이사벨은 대공위의 새로운 주인이 될 것을 천명하니···!’

이제 막 대공위를 물려받아 정신이 없을 와중에도 이사벨 공녀, 아니 대공은 에스닐과의 약속 사항을 신속하고도 충실히 이행했다.

국경지대의 알토란 같은 에우레카 광산지대를 곧바로 양도했음은 말할 것도 없고.

대공이 양성하던 비밀 암살대의 존재를 만천하에 드러냈으며, 그 책임자를 비롯해 관련자들을 모두 숙청했다.

마지막으로 칼 오프러스 대공의 유폐 및 신병에 관해서는···.

“뭐라 할 말이 없구나, 세자르. 다 내가 부족한 탓이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아버지.”

레핀 공작의 부대 앞에서 모래성처럼 함락된 오프러스 대공성.

그때만 해도 공작은 대공을 생포할 수 있다고 확신했지만.

“그자가 기이한 술수를 부린 탓이지 아버지 탓이 아닙니다.”

“···허나.”

“아버지가 아니라 그 누구라 해도 그 상황에선 어쩔 수 없었을 테니까요.”

아니, 마지막까지 저항하던 최후의 대공군 병사들을 물리친 뒤 대공의 집무실에 들어선 순간까지도 그리 믿었다.

집무실 안에는 칼 오프러스 대공이 평온한 표정으로 앉아 있었으니까.

‘문제는 그다음이었지.’

공작이 이사벨 공녀에게 대공의 신병을 넘긴 지 하루 뒤, 구금실에서 비명이 울려퍼졌다 한다.

‘대공은! 대공은 어디 갔나!’

대공 대신 웬 어린아이가 포박돼 있는 모습에 담당 간수는 기절할 뻔했다. 나중에 들은 전말로는 아이가 ‘제물의 이능자’라 했던가.

후일 카렌은 이렇게 설명했다.

‘굉장히 특이한 이능이던데? 특정인을 대신해 옥에 갇히거나 목이 잘리거나 하는, 말 그대로 ‘제물’이 되는 이능이라고.’

‘다만 이 이능을 발동시키기 위해서는 사람 하나의 목숨을 공양해야 한다고 해.’

그 과정에서 대공의 부관 그롤이 죽어나갔고.

‘제물의 이능’이 발현되자 본인과 대공을 제외한 모두가 아이를 ‘칼 오프러스 대공’으로 인식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니 앞으로의 과제는 분명했다.

1. 이사벨 측에서 주도하긴 하겠지만, 도망친 대공을 추적하는 것.

이거야 뭐 문제도 되지 않는다.

바바의 이능을 이용한다면 개인의 행방을 추적하는 건 누워서 떡 먹기이니까.

2. 이능자 육성 기관에 관한 비밀을 파헤치는 것.

얼마 전 금서 구역에서 얻은 기밀 정보에 따르면 교황청은 무언가 껄끄러운 비밀을 숨기고 있다.

무엇보다 카렌이 조사한 바에 따르면, 교황청에서 추방된 추기경과 이능자 부대의 육성을 주도한 인물이 동일인일 가능성이 있다는 거다.

이처럼 할 일은 꽤 남아 있지만···.

“하지만 지금은 일단 좀 쉬고 싶어. 이 정도면 제법 마무리가 된 것 아냐?”

불만 어린 목소리에 제이콥이 일그러진 미소를 지으며 정성스레 우려낸 홍차를 내 앞에 내려놓았다.

“아무렴요, 도련님. 그간 쭉 과로하시지 않았습니까, 이제는 한동안 쉬셔야지요. 그럼 이 제이콥은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충실한 하인이 집무실을 나간 뒤.

나는 간만에 찾아온 혼자만의 시간이 몹시 반가웠다.

느긋한 마음으로 향긋한 홍차를 한 모금 마시는데 메시지들이 눈앞에 우다다다 떴다.

[도전과제 ‘마리오네트’ 달성! - 이사벨 대공녀가 반란을 일으키도록 유도했습니다.]

[도전과제 ‘그놈 잘라’ 달성! - 칼 오프러스 대공을 파문시켰습니다.]

[도전과제 ‘문을 여시오’ 달성! - 오프러스 대공성의 성문을 박살냈습니다.]

이번 사건을 기점으로 도전과제 여러 개가 동시에 달성된 것 같다.

보상으로 무얼 받을까, 두근대는 마음으로 기다리는데.

[특수과제 ‘일타삼피’ 달성!!! - 특수보상이 해금됩니다.]

[보상 ‘이면세계의 역사서’를 받았습니다.]

···이면세계라면 일종의 평행세계를 말하는 것 아닌가?

그러한 의문이 드는 동시에 <왕도의 대가> 저자 이름이 ‘역4서’임이 기억났고.

메시지가 사라지자마자 낡은 책 한 권이 내 눈앞에 툭 떨어졌다.

“이건···.”

뭔가에 홀린 듯 표지로 손을 뻗치던 찰나, 하단에 적힌 저자의 이름이 눈에 들어왔다.

“···어?”

우만 드 빈터.

몹시 익숙한 이름의 등장에, 나는 두 눈을 크게 뜨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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