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작가의 서자로 살아가는 법-153화 (153/176)

반전은 나의 것

* * *

레핀 공작이 이끄는 부대는 전날 저녁에 출발했다.

1만이 훌쩍 넘는 대부대, 거기에 공병대가 포함된 데다 어둠을 틈타 행군하려니 속도가 느렸다.

최소한의 휴식만 취하며 이동을 계속하자, 해 뜨기 직전에야 대공성이 시야 끄트머리에 들어왔다.

“여기서 잠시 휴식하겠다.”

공작의 지시에 지휘관들이 일제히 명령을 전달했다.

병사들은 바닥에 주저앉은 채 지친 다리를 주물렀다. 피로도 피로거니와 전투도 하기 전부터 사기가 저하된 터였다.

‘왜 우리 에스닐인들이 공국의 내전에 동원되어야 하냐.’

이러한 생각이 병사들 사이에 팽배했다면, 간부들은 생각지도 못한 공성전을 하게 되어 불만이 많았다.

‘각하, 저희 간부들 가운데서도 제대로 된 공성전을 경험해본 인력은 손에 꼽을 정도입니다만···.’

‘대공성은 공성전을 벌이기엔 쉽지 않은 장소로 보입니다. ‘

‘이사벨 공녀의 본대를 지원하면 되는 것 아닙니까? 어째서 우리가 이런 제일 위험한 임무를···.’

부대 전체에 흐르는 불신의 분위기가 피부로 느껴질 정도였다.

무엇보다 몇몇 부관들은 공작의 등 뒤에서 이런 말을 할 정도였는데.

‘말이 좋아 전장의 맹수, 철혈 공작이지 결국은 몇십 년 전 얘기이잖아?’

‘이봐, 누가 듣기라도 하면···.’

‘왜 그래, 솔직히 틀린 말은 아니잖아? 세자르 공이 사령관이라면 모를까···.’

레핀 공작을 이빨 빠진 호랑이로 취급하는 부관들도 적지 않았다.

지휘관 하나에게 그런 보고를 전해들은 공작은 버럭 소리를 지르는 대신 입술만 지그시 깨물었다.

‘이들 세대는 너무 긴 평화의 시기를 겪었지.’

저들은 한순간에 목숨이 오가는 전장을, 피부에 팽팽하게 와닿는 긴장감을, 피 흘리는 가운데서도 고통조차 못 느끼게 되는 흥분감을 모른다.

로건 드 레핀이란 남자가 어떤 삶의 족적을 남겼는지는 더더욱 모르고 말이다.

마음의 결정을 내린 공작은 그 즉시 야전 천막 밖으로 나갔다.

지금껏 온갖 불만을 쏟아내던 병사들이 그의 등장에 바짝 얼어붙었다. 군령에 따라 처형당해도 군말할 수 없는 상황이었으니까.

그러거나 말거나.

로건 드 레핀은 앞에 마련된 연단 위로 올라갔다. 셀 수 없이 많은 이들의 눈길이 그에게로 쏟아졌다.

공작은 두 눈을 감은 채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덕분일까.

“···.”

병사들 간의 웅성거림이 어느새 가라앉아 침묵이 자리한 순간.

번뜩!

로건 드 레핀이 두 눈을 확 떴다.

“···!”

그와 동시에 알 수 없는 위압감이 병사들을 내리눌렀다.

공작의 전신이 뿜어내는 기세에 온 부대가 술렁이던 순간.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들판을 가로질렀다.

“귀공들은 지금 이 싸움이 우리의 싸움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인가!”

여느 노인이나 다를 바 없던 노쇠한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그들 앞에 선 것은 적군을 자비 없이 도륙하던 ‘철혈공’ 로건 드 레핀이었다.

“허나 생각해보라, 칼 오프러스 대공이 우리의 적이 아니라면 대체 누구의 적인지.”

방금 전만 해도 레핀 공작을 ‘노망 난 사내’ 정도로 취급하던 어린 병사들의 눈이 동그래졌다.

“한때 에스닐의 빛이 되리라 여겼던 고 이언 왕세자의 목숨을 앗아간 것이 누구인가! 여왕 전하의 부친과 남동생을 처참하게 살해한 것은 누구이고!”

듣는 이를 압도하는 목소리, 그 이면에서 느껴지는 절절한 분노.

병사들은 어느샌가부터 홀린 듯 공작의 얼굴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우리의 동부 땅을 빼앗아갔을 뿐 아니라, 그대들의 아버지와 형제의 피를 흘리게 한 것으로도 모자라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 에스닐을 호시탐탐 무너뜨리려 하는 것이 바로 칼 오프러스 대공이 아닌가!”

“···.”

공성전의 명분 운운 하던 말들이 쏙 들어갔다.

소리 없이 주먹을 움켜쥐거나 입술을 지그시 깨무는 병사들을 내려다보며 공작은 연설을 이어나갔다.

“이사벨 군을 지원한다는 것은 허울 좋은 명분일 뿐, 이건 어디까지나 우리 에스닐의 싸움이다. 너른 전장을 거침없이 달리던 선조들을, 총칼의 위협 앞에서도 몸을 사리지 않던 그들을 기억하라!”

어느샌가 그의 열정에 경도된 듯한 병사들을 내려다보며 공작이 쐐기를 박았다.

“조국을 위해, 네 가족과 형제를 위해 무엇보다 너 자신을 위해 싸워라!”

서서히 데워지던 물이 어느 순간 확 끓어넘치듯.

그 말을 기점으로 병사들의 입에서 자연스레 함성이 터져 나왔다.

우와아아아!

“적들의 피로 대지를 적셔라. 대공의 목을 잘라라!”

잘라라! 잘라라! 칼 오프러스 대공의 목을 잘라라!

병사들이 무기를 높이 들며 연호했다.

어느새 분위기는 완전히 반전된 후였다.

불안감과 의문 따위는 눈 녹듯 사라지고, 어느새 잔뜩 고양된 흥분감만이 머릿속을 지배하는 중이었다.

공작이 연설을 마치고 연단에서 내려가자, 부관 하나가 멍하니 로건을 쳐다보았다.

“왜 그러지, 리오넬 경.”

“아,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렇게 얼 빠져 있을 때가 아니네.”

로건의 시선은 저 멀리서 다가오는 공병 부대로 향했다.

“···할 일이 아주 많으니까 말이야.”

세자르 레핀의 가신, 앨빈 경이 이끄는 공병 부대. 그리고 그들이 꽁꽁 숨겨서 가져온 공성 기기의 정체가 모습을 드러내자.

병사들의 함성이 한층 커졌다.

* * *

내가 계획한 게릴라전의 첫 단추를 끼운 것은 발닉이었다.

‘잿빛 늑대의 우두머리에 빙의하라, 그 말씀이십니까?’

본디 동물 빙의는 대상 동물과 친밀도가 높아야 성공하기 쉽지만.

발닉은 이능을 부지런히 수련한 덕분에 숙련도가 매우 높은 상황이었다.

게다가 잿빛 늑대는 아니더라도 비슷한 부류인 개과 동물에 자주 빙의했던 터.

‘걱정 마시지요, 도련님.’

씩 웃으며 사라진 발닉은 약속한 시점에 정확히 나타나 공국군을 대혼란에 빠뜨렸다.

제 아무리 훈련된 병사이라 한들, 발닉이 이끄는 최강의 늑대들 앞에서는 속수무책이었다.

‘끄악!’

‘제, 제발 신이시여···.’

대부분은 맞서 싸울 엄두조차 내지 못한 채 신의 이름만 부르다 죽어나갔고.

그나마 일부 이능자들이 정신을 차리고 그들에게 맞서는 가운데, 지휘관들이 나머지 병사들을 끌고 재빨리 퇴각했지만.

‘그것 역시 내가 계산한 범위 내였지.’

기다렸다는 듯 양쪽 측면에서 나타난 신원 미상의 이민족, 실은 3형제가 이끄는 기마대와 맞닥뜨리고 말았다.

산악 지형에 특화된 이들 기마대는 제 뜻대로 공국군을 몰아갔고.

공국군은 가파른 협곡 아래쪽 막다른 곳에 다다르고 나서야 자신들이 함정에 빠졌음을 깨달았다.

디터와 롯이 이끄는 내 사병대가 그들을 친절히 맞아주었으니까.

롯이 기다란 머리를 휘날리며 검을 휘두를 때마다 비명이 끊이지 않았고.

무엇보다도···.

‘저, 저건 인간이 아니야! 괴물이다!’

온몸에 피칠갑을 한 채 ‘섬멸의 일격’으로 십여 명을 한번에 박살내는 디터.

사신 그 자체나 다를 바 없는 모습에 공국군은 전의를 완전히 잃어버리고 말았다.

처음과 비교해 병력이 1/4도 채 남지 않은 공국군은 에스닐에 투항하는 편을 택했다.

반면, 적군 대신 에스닐의 동맹군을 협곡에서 마주한 이사벨의 군대는 사기가 크게 올라갔다. 그야말로 사막 한가운데서 오아시스를 발견한 듯한 분위기랄까.

“···이 정도가 설명드릴 수 있는 내용의 전부입니다.”

간부 전용 야전 천막 안에서 이사벨 공녀와 독대한 나는 그것으로 설명을 마쳤다.

“와, 언제 봐도 참 세자르 공은 놀라운 분이시군요.”

자초지종을 들은 이사벨 공녀의 입가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걸렸다.

“놀랍긴요, 그저 좀 뛰어난 가신들을 둔 덕분입니다.”

“언제나 겸손하신 것도 마찬가지이고요.”

그렇게 형식적인 안부를 나눈 우리는 본격적인 작전 얘기에 돌입했다.

“사실 에스닐의 동맹군 병력은 이게 전부가 아닙니다. 여기 온 건 전체의 절반에 불과하죠.”

“그렇다면 나머지 절반은?”

“부친께서 이끌고 대공성으로 향하는 중일 겁니다.”

대공성으로 향한다는 말에 이사벨의 눈이 커졌다.

그 눈동자 뒤편에 스친 불안감을 알아차린 내가 얼른 설명을 덧붙였다.

“어디까지나 목표는 칼 오프러스 대공의 실각일 뿐이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에스닐 역시 그건 바라지 않는 일이니까.

아무리 일개 공국이라 해도 이웃나라를 점령하면 상황이 여러모로 복잡해진다.

외교적으로 높은 기회비용이 발생한다고나 할까.

“에스닐 군은 칼 오프러스 대공의 신병을 넘겨받는 즉시 회군할 것입니다.”

그 내용을 명시한 서류를 건네자 이사벨의 얼굴이 한결 밝아졌다.

“세자르 공과 에스닐의 도움에 가슴 깊이 감사드립니다.”

“뭘요. 전하께서는 지금의 병력을 이끌고 곧바로 대공성으로 향하시지요.”

“그럼 공께서는요?”

그녀의 질문에 나는 양쪽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저희 에스닐 군은 ‘이능자 부대’의 근거지를 찾아내 뿌리부터 뽑아낼 작정입니다.”

이능자 부대.

방금 전 우리의 계책에 걸려든 공국군 가운데에 이능자 부대원들이 꽤 있었고, 이 중 상당수가 목숨을 잃었지만.

‘아직 꽤 많은 수가 남아 있으니까.’

출병하기 직전, 나는 바바를 불러내 이능자 부대의 근거지를 파악해달라 지시했다.

‘정말 이 질문으로 하실 겁니까? 오프러스 대공이 어디에 있느냐가 아니고요?’

‘지금 이 시점에 대공이 있을 곳이야 뻔하지 않겠어?’

다름 아닌 오프러스 대공성이 아니겠는가.

그 말에 바바는 납득한 듯 고개를 끄덕이더니 이내 이능을 시행했고.

일종의 좌표 같은 것이 적힌 종이를 내게 건네주었다.

‘여기인 것 같군요.’

그렇게 지도에서 찾아낸 지점이 바로 이 협곡 근처였으니 말이다.

나는 깜짝 놀란 이사벨을 마주 보며 덧붙였다.

“그럼, 한바탕 하고 돌아오겠습니다.”

* * *

어스름한 새벽빛 아래서 희미하게 빛나는 대공성 안.

애초 미학적인 부분에 초점을 맞추기보다는 방어 목적에 치중하여 지어진 요새 형태의 성이다.

그 탓에 늘 어딘가 으스스하고 우중충한 분위기를 자랑했지만, 오늘만큼은 이곳 대공성도 축제 분위기였다.

“마셔라! 부어라!”

“적장의 목을 땄으니!”

“승리가 눈앞에 있으니 어찌 기쁘지 아니하리요!”

외성의 병영에서는 밤새도록 고성방가가 울려퍼졌다. 평소 기강이 잘 잡혀 있으며 병영 내 음주가무를 엄금하기로 유명한 대공 직속군이었으나.

“오늘 하루 정도는 괜찮겠지.”

“그럼요, 사기가 올라갈 뿐 아니라 병사들이 각하의 관대함을 칭송할 것입니다.”

부관 그롤의 말에 대공은 어깨를 으쓱했다.

이 같은 예외에는 이유가 있었다.

이사벨 공녀가 이끄는 반란군의 수장, 루크티오 백작이 대공의 밀정에 의해 암살당했기 때문이다.

공녀의 군대는 말이 좋아 반란군이지, 대부분이 후반 가서야 합류한 오합지졸에 불과했다.

그 안에서 구심점 역할을 했던 루크티오 백작이 죽은 이상, 칼 오프러스 대공은 확신할 수밖에 없었다.

‘이 싸움은 이미 이긴 셈이다.’

단 한 가지 변수가 있다면 에스닐에서 올 동맹군의 지원이지만 어쨌거나 남의 나라 집안 싸움이 아닌가.

이미 수세가 한쪽으로 기운 마당에서 십중팔구 슬그머니 발을 빼려 할 것이다.

“여러모로 뜻 깊은 날이군.”

대공의 혼잣말에 부관은 고개만 끄덕였다.

그들이 모르는 것이 있다면, 세자르가 이끄는 유격대가 공국군을 박살냈다는 것.

그로 인해 절멸 위기에 놓였던 이사벨 군의 숨통이 트였으며 지금 바로 이 시각···.

대공성의 코앞에 에스닐의 군대가 도착해 있음을, 두 사람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롤, 이젠 자네도 잠깐 눈을 붙이는 게 어떻겠나.”

대공이 건넨 모처럼의 친절한 말에 부관이 몹시 황송해하던 순간.

콰과광!

어마어마한 폭발음이 들려왔다.

“뭐냐!”

아까와 동일한 굉음이 쾅, 쾅! 하고 두 번 더 들려왔다.

···다름 아닌 대공성의 정문 쪽에서.

“가, 각하, 이게 대체···.”

그롤이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발만 동동 구르는 반면, 칼 오프러스 대공은 재빨리 창가로 걸어갔다.

“···!”

창 밖의 광경에 그의 입이 떡 벌어진 순간.

우다다다 하며 계단 오르는 소리가 나더니 집무실 문이 벌컥 열렸다.

칼 오프러스 대공은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

“각하, 서, 성문이!”

혼비백산한 경비병이 더듬거리며 말했다.

“성문이 뚫렸습니다!”

제 눈으로 보고도 믿을 수 없는 광경을, 친히 증언하러 와준 경비병을 보며 그는 인정해야만 했다.

그것이야말로 이 오프러스 대공성이 세워진 이래 처음 있는 일이라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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