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작가의 서자로 살아가는 법-152화 (152/176)

곱게 미친 계획

* * *

여전히 입을 다물지 못하는 공작의 반응에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그를 데리고 포신 근처로 가자, 포병들과 이것저것 이야기하던 앨빈이 우리를 돌아보았다.

“세자르 님! 공작 각하!”

“역시 기대했던 대로 훌륭한데.”

별 것 아닌 칭찬에도 앨빈은 몹시 쑥스러워했다.

“다 그분 덕분이죠, 뭐.”

“금속의 마에스트로, 유리겔의 힘을 쓰는 건 어쨌거나 너잖아?”

나는 앨빈의 어깨를 툭 치며 말했다.

“누군가 대단하다고 해주면 그냥 겸허하게 받아들이라고.”

“하하···.”

우리의 대화를 가만히 듣고 있던 공작의 눈이 커졌다.

“이걸 자네가 만들었단 말인가?”

앨빈이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라 눈치만 살피길래, 내가 먼저 입을 열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앨빈의 ‘이능’을 통해 만든 물건입니다.”

“대장장이의 이능이라도 있는 게냐?”

“음, 조금 다르긴 한데 따지고 보면 아예 틀린 말은 아니죠.”

공작이 감탄하는 눈빛으로 돌아보자 앨빈은 머쓱해하며 고개를 숙였다.

“아버지, 앨빈 또한 부관의 자격으로 아버지 곁에 따라갈 겁니다. 공병대를 담당하게 해주시지요.”

“알겠다.”

“공작 각하의 지휘 아래 첫 출정을 하게 되어 영광입니다!”

앨빈은 어색한 경례를 붙인 뒤 다른 포병들과 함께 대장간으로 돌아갔다.

그 뒷모습을 잠시 바라보던 내가 고개를 돌리자, 공작이 돌연 질문을 꺼냈다.

“어째서 대포를 제작한 거냐?”

“대공성은 천혜의 요새라 하시지 않았습니까?”

“물론 그거야 그렇지만 우리 에스닐은 어디까지나 동맹의 자격으로 참전하는 것이니···.”

공작은 미간을 좁힌 채로 말을 이었다.

“본성을 치러 가는 게 아니라, 당연히 이사벨 공녀의 세력을 지원하러 가는 거라고 생각했는데.”

“물론 당연히 지원할 겁니다.”

지금쯤이면 추가 병력이 필요할 시기이기도 하고 말이지.

“헌데 언젠가 이사벨 공녀가 그러더군요. 제 아버지는 이런 절체절명의 상황에서 십중팔구 성 안에 틀어박혀 있을 인물이라고요.”

대공성의 집무실, 편안하디 편안한 안락의자에 앉아 손 하나 까딱하지 않고 제 수하들을 부린다고.

방공호에 틀어박힌 독재자처럼 말이다.

“칼 오프러스 대공이 제 한몸의 안위를 제일 중시한다는 건 꽤 유명한 얘기이긴 하지.”

내 말에 웬일로 맞장구치는 공작.

“게다가 그쪽도 ‘상식적으로’ 우리 에스닐이 설마 본성으로 쳐들어올 거라곤 생각 못 할 것 아닙니까.”

“그렇지.”

나는 내가 가져온 오프러스 대공성의 구조도를 펼쳐 보였다.

“그럼 본성에는 병력을 얼마 안 남겨놓겠죠? 가뜩이나 반란군에 비해 수적 열세인 상황이니. 무엇보다 여기 보이는 높은 성곽이나 해자, 제방, 포루 따위가 여간한 병력보다 훨씬 막강할 테니까요.”

공작은 내가 이런 걸 어디서 어떻게 구했는지 놀란 눈치였다.

이게 다 군사 기밀도 무리 없이 빼내는 유능한 가신을 둔 덕분이다.

“그런데 만일 레핀 공작이 대군과 함께 이 대포를 끌고 나타나 공성전에 나선다면?”

“···.”

“단 세 방.”

생각에 잠긴 공작의 옆얼굴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단 세 방만 쏘면 어떤 성문이라도 뚫어버리는 이 대포 앞에서···.”

나는 곧 다가올 미래를 상상하며 히죽 웃었다.

“대공이 과연 어떤 반응을 보일지, 궁금하지 않으십니까?”

잠시 고민하던 공작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럼 이사벨 공녀를 지원하는 건?”

“병력을 나눌 겁니다. 머릿수는 충분하니까요. 게다가 애초에 그쪽 부대는 치고 빠지는 식의 유격대로 운용할 생각이었어서 말이죠.”

이른바 게릴라 부대다, 이거지.

내 계획을 들은 공작은 아까와는 다른 의미로 입을 떡 벌렸다.

“네가 이렇게 미친 생각을 할 줄은 몰랐구나.”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잘 정돈된 턱수염을 만지작거리더니 이내 이렇게 덧붙인다.

“하지만 제법 곱게 미친 계획이긴 해.”

···됐다!

“역시 아버지라면 알아봐주실 줄 알았습니다.”

“뭘. 헌데 공성전 담당 부대야 내가 끌고 간다 해도, 지원 부대는 누구에게 맡길 생각이냐? 유격 부대라면 더더욱 위험하니 여간해서는 다들 맡지 않으려 할 텐데.”

내가 씩 웃자 공작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세자르, 안 된다.”

“안 되긴 뭐가 안 됩니까.”

“하지만-”

“설마 위험해서 안 된다고 말씀하시는 거라면, 아버지가 제게 내세우셨던 것과 똑같은 논리를 내세울 겁니다.”

공작이 아랫입술을 깨물며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가운데, 나는 그의 마음속 짐을 덜어줄 말을 덧붙였다.

“그리고 아시죠? 제가 지는 싸움은 절대 하지 않는다는 거.”

“그 말인즉.”

“이쪽도 다 계획이 있으니 걱정하지 마시지요.”

결의에 찬 내 눈빛을 보더니 공작은 체념한 듯 고개를 저었다.

“그래, 내가 아무리 말해봤자 귓등으로도 안 듣겠지.”

“이런 걸 보면 제가 확실히 아버지를 닮은 것 같긴 하군요.”

그 말에 공작은 허, 하며 어이없다는 듯 혀를 찼지만.

주름진 입가 양 끝이 슬쩍 올라가 있었다.

다음 날, 출정 당일.

새벽부터 공작저를 찾은 카렌이 예상 외의 정보를 들고 왔다.

* * *

새벽 햇살이 들어오는 어스름한 집무실 안.

카렌은 나와 우만을 마주보며 담담하게 보고했다.

“초반에만 해도 이사벨 군은 공국군을 놀라운 기세로 이겨나갔어.”

애초 대공에게 그다지 충성하지 않았던 귀족령들은 싸우는 척만 하다 투항하기도 했고, 군대가 다가오기 전에 알아서 백기를 드는 경우도 있었다는 것이다.

“그렇게 파죽지세로 뚫고 나오던 반란군은 로웬 지방에서 처음 제대로 된 전투를 겪었지.”

카렌의 설명에 우만이 말을 받았다.

“거기 영주가 대공의 가장 충성스러운 지지자 중 하나라고 했던가?”

물론 전력 차이가 워낙 극심했기에 반란군은 무리 없이 승리를 거뒀다.

문제는 그다음, 대공 직할령에서부터 시작되었다는 거다.

“제일 심각한 골칫거리는, 총사령관인 루크티아 백작이 암살당했다는 거야.”

“총사령관이··· 암살당했다고?”

깜짝 놀란 우만과 달리.

이미 테레사의 정보망을 통해 어젯밤에 소식을 전해들은 나는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을 뿐.

“그래. 듣자하니 창부로 변장하고 들어온 공국군 병사에게 살해당했다고.”

“하.”

집무실 안에 잠시 침묵이 흘렀다.

이해 관계가 상충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도 이사벨 공녀가 분투한 덕분에 반란 계획을 마지막까지 기밀로 하는 데는 성공했으나.

‘결국은 대공의 전장 경험이 당락을 바꿨다는 건가.’

공국이나 우리 에스닐이나 최근 몇십 년간 평화를 유지해왔다.

그러니 결국, 대공처럼 장년의 나이에 들어선 이들 말고 젊은 사람 가운데는 실전 경험을 지닌 이가 드물다는 소리였고.

완전한 수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반전이 생겨난 것은 바로 그 차이 때문이다.

‘과연 전장의 독사라더니, 그 명성을 고스란히 재현하고 있군.’

“그것 말고도 이사벨 군이 고전하는 이유가 하나 더 있는데, 대공 직속 ‘이능자 부대’가 아주 상대하기 까다로운 부대이기 때문이야.”

“이능자 부대···.”

놈들이 전장에서도 활약을 펼친단 말인가.

내가 미간을 좁힌 채 생각에 잠겨 있는데, 카렌의 설명이 이어졌다.

“게다가 대공 직속 부대 특유의 계책이나 특수작전에 속절없이 당하는 상황이기도 하고.”

“특수 작전?”

“대공이 한때 ‘전장의 독사’라고 불린 건 알고 있어?”

우만이 고개를 젓자 그녀가 보충 설명을 했다.

젊은 시절 칼 오프러스 대공은 전장의 지휘관으로 자주 활약했는데, 정정당당한 승부를 중시했던 다른 지휘관들과 달리 온갖 음모와 계략, 암수를 즐겨 썼단다.

“그 당시의 계책들을 지금도 고스란히 써먹는 중이고 말이지.”

적군이 자리잡은 곳 근처 우물에 독을 푸는 것은 예사이고.

첩보병을 민간인으로 변장시켜 적진에 들여보낸다든가.

길을 지나던 상단 행세를 하며 상대를 현혹한다든가.

“승리를 위해서라면 그 어떤 비열한 음모나 계략도 서슴지 않았다고 해.”

“그것 참 마음에 드는데.”

“···마음에 들다니?”

미간을 좁히며 반문하는 카렌에게 씩 웃어 보였다.

“나도 비겁한 싸움이라면 자신 있거든.”

그 말에 우만과 카렌은 내 얼굴을 어이없어하는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너희도 알다시피 이사벨 군을 지원하는 유격부대는 내가 맡기로 했어. 그리고 거기서···.”

나는 우만 쪽을 돌아보았다.

“네 도움을 필요로 해도 될까, 우만.”

벽을 넘는 이능은 비단 암살만이 아니라 전장에서도 아주 유용한 능력이니까.

우만이 시원하게 대답했다.

“물론이지.”

“그리고 카렌.”

나는 귀중한 정보를 매일처럼 들고 오는 카렌에게도 진심으로 감사 인사를 했다.

“네겐 늘 고마워하는 것 알지?”

“···뭘.”

카렌은 두 개로 나뉜 부대 사이를 오가며 전황을 보고해주겠다고 약속했다.

“무리는 하지 말고.”

“무리라니, 내 아래 있는 밀정만 해도 몇 명인데.”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하는 모습이 참 든든하게 느껴진다.

그리고 그날.

나와 레핀 공작은 맡은 부대를 이끌고 각자의 전장으로 출발했다.

* * *

총사령관을 잃은 이사벨 군이 대혼돈에 빠져 있었다면.

그들이 접근하길 기다리며 협곡에 매복 중인 공국군의 사기는 하늘을 찔렀다.

‘우두머리를 잃은 오합지졸이라니, 쉬워도 너무 쉬운 상대가 아닌가!’

게다가 그들 곁에는 신묘한 힘을 지닌 이능자 부대가 있었다.

그중 하나는 손짓 하나만으로 적진에 불을 붙이기도 했고.

누군가는 바람의 방향을 바꾸었으며.

또 누구는 돌처럼 단단해진 몸으로 화살받이를 자처했다.

이런 자들 수십 명이 모여 있으니, 앞서 반란군이 수차례 퇴패한 것은 어쩔 수 없는 수순이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이능자 부대만 있다면 우리 공국군은 무적이다!’

그렇게 여유로운 분위기로 시종일관하던 중, 구름이 잔뜩 낀 하늘을 관찰하던 병사 하나가 지휘관에게 다가갔다.

“저, 지휘관님.”

“무슨 일이지?”

병사는 정규군 소속이 아니라 사냥꾼 출신으로 충원된 자였다.

이 근처 지리에 익숙하다는 이유로 매복 부대에 포함된 터였는데.

“뭔가 분위기가 심상치 않습니다요.”

“심상치 않다니?”

“그것이 뭐라고 해야 할지··· 예감이 좋지 않다고 해야 하나.”

의견을 명확하게 표현하지 못하는 병사의 말에 지휘관은 확 짜증이 났다.

“지금 장난하는 건가?”

“아니, 아닙니다요, 제가 요 골짜기에서 사냥질을 한 것만 십 년인데···.”

그 순간.

돌연 상공에서 새 떼가 후두드득 나타났다.

기이할 정도로 낮게 나는 새들의 활공에 지휘관 또한 섬뜩한 기분이 드는데.

두두두-

두 발 아래 지면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뭐, 뭐야!”

“저, 저기!”

사냥꾼 출신 병사가 다급하게 어딘가를 가리켰다.

그의 손가락 끝이 향하는 곳을 바라본 지휘관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어?”

저 위쪽에서 들소 떼가 돌진해오는 것이 아닌가.

지휘관이 패닉에 빠져 아무 반응도 못 하는 사이, 사냥꾼 출신 병사가 부관들에게 급히 알렸다.

“얼른! 피해야 합니다!”

두두두두.

들소 떼가 내려오는 동안 병사들은 황급히 안쪽으로 움직였고.

신속한 대처 덕분에 다행히 큰 피해 없이 지나갔다.

“이 근방에 들소가 있나?”

어느 부관의 물음에 사냥꾼 출신 병사가 대답했다.

“예, 야생 들소 떼가 줄곧 출몰합니다. 하지만 저놈들이 저렇게 흥분해서 한 곳으로 달려가는 건 드문 법인데···.”

병사가 고개를 갸우뚱하던 그때.

우우우-

듣기만 해도 소름끼치는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한 가지였다.

“···맙소사.”

사냥꾼 출신 병사는 방금 전 동물들이 보인 이상 행동의 원인을 곧바로 알아차렸다.

“얼른! 여, 여기서 철수해야-”

그러나 이미 늦어버렸다.

들소 떼를 피하느라 한쪽으로 몰린 매복 부대의 눈앞에 거대한 잿빛 늑대 무리가 나타났다.

그들의 선두에 선 것은 덩치가 보통 늑대의 1.5배는 될 법한 우두머리 늑대.

우우우-!

우두머리가 울부짖자 나머지 늑대들이 그에 화답하듯 함께 울었다.

“으아악!”

“알레스시여! 저희를 부디 귀히 여기시어···”

공황 상태에 빠진 병사들을 향해 지휘관은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겁에 질려 두뇌 회전이 멈춘 것은 그 역시 마찬가지였으며.

그를 정면으로 노려보는 우두머리 늑대 앞에서 두 다리가 후들거려 주저앉기 직전이었으니까.

‘마치 내가 지휘관임을 알고 있는 듯한 눈빛이 아닌가!’

그 순간.

크와아아앙!

우두머리 늑대가 지휘관을 향해 뛰어들었다.

인간과 늑대 사이의 살육전이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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