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작가의 서자로 살아가는 법-151화 (151/176)

질 싸움은 하지 않는다

* * *

따스한 봄 바람이 뺨을 간질이는 계절.

그와 대조적으로 주변 공기는 팽팽하기 그지없다.

시야 끝까지 펼쳐진 평원을 가득 메운 병사들 또한 잔뜩 긴장해 있었다.

주위의 만류를 물리치고 직접 참전한 이사벨은 고삐를 쥔 손에 땀이 차는 것을 느꼈다.

지금 이곳은 공국 서부에 자리한 세비오 평원.

그녀의 지지자 루크티오 백작이 지닌 땅이자, 역사적 사건으로 기록될 ‘오프러스의 정당한 계승자에게 권좌를 돌려주는 전쟁’의 첫 출정 장소이기도 했다.

‘모든 것이 계획대로다.’

교황청이 칼 오프러스 대공을 파문했다는 소식은 마른 들판에 불길이 번지듯 퍼져나갔다.

사생아를 공식 후계자로 책봉한 이후로 인기가 급락했던 대공을 향해 비난이 쇄도했고.

칼 대공과 이사벨 공녀 사이에서 고민하던 중립파 귀족들은 저울이 한쪽으로 기울었음을 깨달았다.

‘저희 또한 공녀 전하에게 충성을 바치겠습니다.’

그것이 박쥐들의 충성 흉내에 불과함을 이사벨 역시 모르지 않았으나.

‘그대들의 충심을 기쁜 마음으로 받아들이겠소.’

어린 아이 손이라도 빌려야 할 시점엔 의도의 진실성 따위는 중요치 않은 법이다.

중요한 것은 이 오합지졸들 사이에서 기밀을 끝까지 유지하는 것!

이사벨은 그에 성공했고, 결과적으로 2만에 육박하는 병력을 모을 수 있었다.

인근 왕국들의 상비군 병력에 비할 바가 아니었으나, 대공의 지지 세력을 척결하기에는 충분한 수였다.

‘이사벨 군’에서 총사령관을 맡은 루크티오 백작이 소리 높여 외쳤다.

“알레스 신에게 버림받은 불신자를 언제까지 우리의 머리 위에 둘 것인가!”

“우아아아!”

누군가 그에 화답하듯 ‘불신자를 척결하라!’ 하고 외치자 병사들의 함성이 한층 높아졌다.

루크티오 백작이 검을 높이 쳐들었다.

“이 땅의 정당한 계승자, 이사벨 전하를 권좌로!”

“우와아아아아!”

백작의 카리스마 넘치는 목소리에 사기가 한껏 고조되었다.

평원을 가득 메운 병사들에게서 강렬한 열기가 느껴진다.

‘이사벨’의 이름을 새긴 깃발들이 기수병들의 손에서 바람에 나부꼈다.

그 깃발의 주인, 이사벨 공녀는 눈앞의 광경을 감개무량한 기분으로 지켜보았다.

‘이것이야말로 내가 꿈꿔왔던 풍경이 아닌가.’

그러나 이는 시작일 뿐이다.

꿈이 진정 현실이 되려면, 이 전쟁을 반드시 이겨야만 한다.

루크티오 백작이 외쳤다.

“전군, 진군하라!”

장창병, 총병, 기병, 검병 들이 대열을 이루며 나아가자 지면이 진동했다.

그 웅장한 광경 한가운데서 이사벨의 가슴 또한 알 수 없는 감정으로 약동했다.

그녀는 본디 자신의 것이 되어야 했을 권좌를 향해 첫 발을 내디뎠다.

* * *

오프러스 공국에 내전이 발발한 지 얼마 후.

우리 에스닐 동맹군은 내전이 한창 무르익을 시 후방에서 기습하는 역할을 맡기로 했다.

그러니 출병 일자 자체에는 여유가 있었지만···.

‘문제는 사령관의 부재다, 이거지.’

나는 테레사와 오늘 아침 나눴던 대화를 떠올렸다.

“병력은 모두 준비되었네. 신규 육성한 왕실 직속 부대는 물론이고, 노바스 가의 사병대, 그 외에도 여러 가문이 병력을 내놓았어.”

“그 정도 인원이면 차고 넘치는군요.”

“그래. 헌데 문제는 전장 경험이 있는 지휘관이 부족하다는 걸세.”

전시에 지휘를 맡는 고급 장교들은 대부분 아카데미 군사학부 출신이다.

평민 혹은 하급 귀족에게 열린 최상급 엘리트 코스인 만큼 배출하는 인원 수가 애초 많지 않으며.

그중에서도 실전 경험이 있는 지휘관들은 이미 최전방에서 복무하는 중이라는 게 문제였다.

기존 복무자들을 빼내는 것도 한 가지 방안이었으나, 참 공교롭게도 이민족들의 침입이 잦아졌다.

“하필 지금 같은 시기에 말이지. 누군가의 공작이 있다고 의심이 되지 않나?”

테레사는 대공이 손을 쓴 게 아닐까 의심하는 터였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내 개인 사병대는 간부들을 잘 붙여놨다는 것이다.

발닉, 디터, 리암 이 세 사람은 실전 경험은 부족해도 통솔력만큼은 확실했고, 그들을 보좌할 부관들은 경험이 풍부한 이들로 골라놓았다.

하지만 에스닐 정규군은 사정이 좀 달랐고, 게다가···.

“제일 큰 문제는 총사령관을 맡을 인물이 없다는 거야.”

테레사의 말대로였다.

일반 지휘관이야 평민이나 하급 귀족이 맡지만, 사령관은 고급 귀족이 맡아야 하는 직책인데.

“실전 경험이 있는 사령관들은 대부분 이미 무덤 속에 있거나, 나머지는 요실금에 시달리는 나이이지.”

“···폐하.”

가끔 보면 너무 말이 거침없다니까.

내가 헛기침을 하자, 테레사는 마뜩잖다는 얼굴로 말을 이었다.

“그나마 중립파 귀족 몇 명이 후보군이긴 한데, 그들은 공국의 내전에 간섭할 명분이 없다고 주장하는 중이고.”

“말은 그럴싸하지만 결국 남의 나라 전쟁에 목숨까지 걸기 싫다, 이 말이군요.”

테레사가 내놓을 수 있는 안은 하나뿐이었다.

그녀의 삼촌, 노바스 공작이 총사령관이 되는 방안.

마음은 감사하지만 나는 주저할 수밖에 없었다.

“말씀은 감사합니다만···.”

“물론 짐도 알고 있네, 우리 숙부가 의지 하나만큼은 강인한 분이시지만 사실 총도 제대로 쏘지 못하신다는 것을.”

“···.”

“허나 총사령관이란 높은 귀족이 총대를 메어야 하는 자리가 아닌가.”

노바스 공작이야말로 전쟁터와는 누구보다도 거리가 먼 인물이라 들었다.

최근 몇십 년간 전쟁 대신 평화가 이어졌으니 청년들이 실전 경험이 없는 게 당연한 일이 아닌가 싶긴 하지만.

“그렇다면 폐하, 총사령관 지명은 며칠만 더 고민해보시지요.”

그렇게 대화를 마치고 공작저로 돌아온 터였다.

물론 며칠 고민한다고 없던 수가 생길 리는 없다.

‘결국 노바스 공작 외에는 답이 없는 건가.’

그렇게 머리를 싸매고 고민하던 중, 총관 카얀이 공작의 말을 전해왔다.

“세자르 도련님, 각하께서 잠시 보자고 하십니다.”

공작의 집무실에 들어서자 창가에 서 있는 공작의 뒷모습이 보였다.

로건 드 레핀은 연무장에서 대열을 갖춘 병사들을 지켜보는 중이었다.

“아버지, 부르셨다고 들었습니다.”

그 말에 비로소 공작은 나를 돌아보았다.

요 몇 달 새 건강이 급격히 나빠진 공작이었지만, 오늘만큼은 어쩐지 눈동자에 생기가 돌았다.

“출병 준비는 잘되어가느냐?”

“그럼요. 차질없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다행이구나.”

틀에 박힌 대답을 내놓자 공작은 대수롭지 않게 대꾸했지만.

그의 눈동자가 날카롭게 빛나며 내 표정을 살폈다.

“그렇담 질문을 좀 더 좁혀보지. 단순히 전열을 가다듬는 것뿐 아니라··· 군을 지휘할 간부 선정도 잘 마무리되었다, 이 말인 게냐?”

정확한 지적에 속이 뜨끔한 동시에 로건 공작의 속내가 뻔히 들여다 보였다.

나는 마른 입술에 침을 바르며 거짓말을 했다.

“그럼요. 하나부터 열까지 잘되었으니 걱정하실 필요-”

“세자르, 내 눈은 못 속인다.”

날카로운 목소리가 내 말허리를 끊고 들어왔다.

딱히 소리를 높이지도 않았는데 알 수 없는 위압감이 느껴진다.

“에스닐은 최근 몇십 년간 전쟁다운 전쟁을 하지 않았지. 자그마한 전투 또한 모두 국경에만 한정되어왔고, 그나마 경험 있는 지휘관들은 모두 그곳에 매여 있을 거야.”

“···.”

“사령관은 어떨까. 지금 같은 상황에서 제 목숨과 명예를 온전히 걸고 타국의 내전을 지원하려는 자가 과연 있을까 싶은데. 내 말이 틀렸나, 세자르?”

“아뇨, 틀리지 않으셨습니다 아버지.”

하아.

나는 결국 한숨을 내쉬며 실토하고 말았다.

“그 두 가지 다 문제이지만, 그중에서도 대군을 이끌 총사령관의 부재가 제일 큰 문제입니다.”

내심 걱정을 담아 한 말에 공작은 도리어 함박 웃음을 지었다.

“그게 대체 왜 문제가 되는지 모르겠구나.”

“네?”

“총사령관 감이라면 네 눈앞에도 있지 않느냐?”

“···하지만.”

나는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바로 이런 상황을 막고 싶었던 것인데.

···그러한 내 바람과는 달리, 로건 드 레핀의 눈은 형형하게 빛나고 있었다.

내가 아직 뒷방 사생아였던 몇 년 전, 처음 만났을 때의 모습으로 되돌아간 듯했다.

“진정한 전장의 경험이란 게 무엇인지, 머리에 피도 안 마른 네게 보여주마.”

그 자신만만한 말에 피식 웃음이 터지고 말았다.

* * *

로건 드 레핀이 살아온 오십여 년의 세월.

불우하다면 불우하고, 영광스럽다면 영광스러운 인생이었다.

한순간의 실수로 대를 이을 수 없는 몸이 되었고, 우여곡절 끝에 얻은 아내는 다른 사내의 아이를 낳았으며.

그 아이는 결국 그 자신의 목숨을 노리려 들었다.

그래, 이렇게 본다면 불행하기 짝이 없는 인생이라 말할지 모르겠지만.

‘그럼에도 원하는 건 모두 얻지 않았던가.’

평생 무예에 몸 바쳐온 이답게 높디 높은 무훈을 세웠다.

로건 드 레핀의 공적은 음유시인들에 의해 노래로 만들어졌고.

고대 왕국의 흔적이 남았다는 던전 또한 발견하는 데 성공했으며.

자신과는 인연이 없다 생각했던 결혼, 가족, 작위.

그 모든 것을 우연찮게 얻었다.

게다가.

‘서류상으로만 이어진 양아들이기는 하나.’

제 옆에 서 있는 세자르는 나날이 공적을 세워 아비와 가문의 이름을 드높이고 있지 않은가.

비록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았지만, 자신의 기질을 똑 닮은 양자를 볼 때마다 로건은 묘한 감상에 빠지고는 했다.

둘 사이에 애틋한 부자간의 정 따위는 없었지만, 이 또한 ‘가족’이 아닐까 싶어서.

평생을 전쟁터에서 굴러왔던 그가 인생 말년에 들어서 경험한 것들은 모두 놀랍고 새로웠다.

그러니 그 모든 걸 종합한다면 제 삶의 족적은 그리 형편없지만은 아닐 것이다.

오래 전에 세상을 떠난 ‘흑의 기사’ 에드먼드 경이 이 얘기를 들으면 이렇게 비아냥거리겠지만.

‘하, 각하는 어찌 이렇게 긍정적이신지 모르겠군요.’

아, 비아냥보단 비난이 먼저이겠구나.

그 귀한 아이를 데려와놓고 어찌하여 그렇게 방관하였는지 말이다.

가혹한 운명도 운명이지만, 자신의 잘못된 선택에 따른 회한이 더 큰 인생이라 할 수 있겠다.

‘마지막만큼은 후회하지 않겠다.’

다 늙어빠진 몸, 의지대로 움직이지 않는 관절.

그나마 정신의 총기로 유일하게 버티는 가운데 자식을 위해 무언가 하나라도 더 해줄 수 있다면-

‘전장이야말로 내 인생의 마지막에 가장 잘 어울리는 곳이 아닌가!’

무엇보다 오프러스 대공성은 천혜의 요새.

결코 쉽지 않은 싸움이 될 터이니만큼, 더더욱 가치 있는 죽음이 될 것이다.

출병 전날, 그러한 다짐을 되새기던 로건 공작에게 세자르가 찾아왔다.

“아버지, 보여드릴 것이 있습니다.”

로건은 말 없이 그의 안내에 따랐다.

“어찌 표정이 그리 심각하십니까?”

“심각하지 않은 게 더 이상하지 않겠느냐.”

‘내일이 출병일인데’라는 다음 말을 로건은 입안으로 삼켰다.

그 말이 끝나자마자 세자르가 눈을 묘하게 빛내며 이렇게 말했으니까.

“···설마 아버지, 이번 전쟁을 내 생의 마지막 순간으로 삼겠다, 뭐 이런 생각을 하고 계신 건 아니겠죠?”

뜨끔.

날카롭기 그지없는 눈빛을 공작은 제대로 마주하지 못하고 고개를 돌려버렸다.

세자르는 이후로도 뭐라 뭐라 캐물었지만, 얼버무리며 제대로 대답하지 않았다.

이윽고 둘은 목적지에 도착했다.

공작가 사냥터로부터 좀 더 떨어져 있는 공터 한가운데에 육중한 철판이 세워져 있었다.

‘···저건 대체.’

공작이 미간을 좁히며 문제의 물건을 자세히 들여다보려는 순간.

콰콰쾅!

저 반대편에서부터 굉음이 터져나왔다.

난생 처음 보는 크기의 거대한 대포에서 폭발이 일었다.

“세자르, 저게 대체···.”

“일전에 오프러스 대공성이 최강의 요새라 하시지 않으셨습니까? 웬만한 화포로는 흠집도 낼 수 없을 만큼 방비가 탄탄하다고.”

세자르의 말이 이어지는 가운데에도 대포는 두 차례 더 탄환을 뱉어냈다.

쾅! 콰광!

탄환은 철문에 그대로 직격했고.

새카맣게 치솟은 연기가 걷힘과 동시에 철문의 모습이 서서히 드러났다.

···그토록 두꺼워 보이던 철문에 거대한 구멍이 나 있었다.

로건이 경악의 표정으로 옆을 돌아보자, 세자르가 자랑스러운 기색으로 소개했다.

“아버지, 과거 드워프들이 만들었다는 공성포를 소개합니다. ···단 세 방만 쏘면 세상 그 무엇이라도 부술 수 있다는, 전설의 화포이죠.”

두 눈으로 보고도 믿을 수 없는 광경에 주름진 두 눈을 껌벅이는데, 양아들의 말이 이어졌다.

“아버지께서 아무리 이번 전장을 마지막 장소로 마음에 두고 계신다 해도 쉽지 않을 겁니다.”

어이가 없어 고개를 돌리자, 세자르가 씩 웃으며 쐐기를 박았다.

“이번 전쟁, 무슨 일이 있어도 이길 거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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