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작가의 서자로 살아가는 법-150화 (150/176)

그녀의 긍지

* * *

가짜 사신으로 분한 우만이 교황청에 가짜 서신을 전달한 지 며칠 후.

카렌과 그랑은 오프러스 가문의 문장을 큼직하게 박아넣은 화려한 마차를 타고 교황청으로 향헀다.

“우만이 무사히 임무를 마치고 왔으니, 이제는 칼 오프러스 대공이 등장해야 할 시점 아니겠어?”

카렌은 ‘칼 오프러스 대공’의 역할을 맡을 그랑을 교황청으로 데려가는 임무를 맡은 터.

본인은 키가 작고 체격이 왜소한 부관 ‘그롤’로 변장한 채로 말이다.

“그, 그렇죠.”

대공이 입을 법한 고급스럽고도 화려한 의복을 차려입었지만.

체격이나 얼굴은 본인의 모습을 유지 중인 그랑이 뻘쭘거리며 대답했다.

롯이나 3형제와는 제법 대화도 나누고 익숙해졌지만, 그 외의 가신과는 아직 어색할 뿐 아니라.

언젠가 롯이 세자르 공의 애인이라고 슬쩍 귀띔해준 귀족 아가씨, 카렌 돌로레스는 그중에서도 가장 불편한 인물이었다.

‘똑바로 마주 보지 못할 정도로 예쁜 것도 이유 중 하나이지만.’

카디움 부족 가운데서 최고의 미인으로 꼽히던 롯을 여기서 다시 만난 것도 놀라웠지만.

그랑은 롯 이상으로 아름다운 여인이 실재한다는 것에 내심 충격을 받은 터였다.

그래서일까, 롯이 처음으로 카렌 앞에 그를 인사시킨 순간.

그랑은 바보 같이 진땀만 뻘뻘 흘리며 제대로 된 말도 건네지 못했다.

‘그런데 분장이 감쪽 같아서 그런가, 본래의 모습을 알아보지 못할 정도네.’

그랑은 세자르 공의 애인이라는 귀족 아가씨가 이런 임무를 맡는다는 것 자체가 기이하게 느껴졌다.

“그랑, 왜 그렇게 뻘쭘해하지?”

“아, 아닙니다.”

마차의 맞은편 좌석에 앉은 소년은 그 시선을 똑바로 마주하지 못한 채 고개를 숙였다.

카렌의 표정이 한층 차가워졌다.

“좋아, 네가 날 불편해하는 거야 이해할 수 있어. 하지만···.”

그녀가 창 밖을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곧 교황직할령으로 들어설 거야. 거기서부턴 교황청의 개들이 여기저기서 우릴 감시할 거다.”

“···.”

“네가 대공의 모습을 유지할 수 있는 게 최대 몇 시간 정도이지?”

잠시 기억을 더듬어보던 그랑이 대답했다.

“세 시간까지는 가능했던 것 같습니다.”

세자르가 얘기했던 대로네.

카렌은 내심 감탄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한 번 능력을 쓰고 나면 다음에 능력을 쓸 때까지는 얼마나 기다려야 하고?”

“하루는 꼬박 걸리죠.”

“좋아. 재판 일정을 잘 조정해달라고 요청해야겠네.”

카렌의 머릿속이 빠르게 돌아가는데, 돌연 그랑이 불쑥 질문을 던졌다.

“어째서 귀족 아가씨가 이런 위험한 일까지 하는 거죠?”

“뭐?”

“말이 좋아 임무이지, 들키는 경우 목이 잘려도 할 말이 없는 위험한 일이잖아요. 그런 일을 자기 애인에게 시킨다고요? ···나라면 절대 그러지 않을 거예요.”

카렌은 풋 웃음이 나오려는 것을 간신히 참았다.

덩치만 컸지 알맹이는 열두 살짜리 어린애라 했던가.

그냥 웃어넘기려는데, 그랑이 진심으로 이해가 안 된다는 듯 말을 이어나갔다.

“어차피 둘 다 부하들에게 지저분한 일을 시키는 거라면, 세자르 님이나 대공 각하나 다를 바가 없잖아요. 물론 롯 누나나 형들은 네가 몰라서 하는 소리라고는 하는데.”

“그 말이 맞네.”

“···네?”

그녀는 한쪽 입꼬리를 끌어올린 채 대답했다.

“롯들이 한 말이 맞다고. 네가 뭘 몰라서 하는 소리야.”

“···.”

그랑은 불만의 표정을 숨기지 않았지만, 카렌은 무시하며 말했다.

“네가 모르는 게 꽤 많은데 일단 첫째, 난 세자르의 애인이 아니야.”

“네? 아니, 다들···.”

“어쨌거나 외부에는 내가 세자르의 약혼녀 격으로 알려져 있지만,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는 거지.”

카렌은 영문을 몰라하는 그랑을 보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

“난 그의 애인이 아니라 가신이야. ···그것도 제일 민감한 정보를 물어다주는 밀정대장이지.”

“···!”

그랑의 눈이 커졌다.

“그러니 나와 함께라면 들켜서 목이 잘릴 염려 같은 건 하지 않아도 돼. 아니, 그런 염려를 하는 것 자체가···.”

소년이 저도 모르게 몸을 뒤로 뺀 순간, 카렌은 도리어 다가가 그의 눈을 정면으로 주시했다.

“내 일에 긍지를 갖고 있는 이 카렌 돌로레스에게는, 모욕이나 다를 바 없는 얘기라는 거야. 알겠니?”

그랑이 침을 꼴깍 삼키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두 번째. 대공과 세자르 사이에 무슨 차이가 있느냐 말했는데···.”

카렌은 임무를 맡기기 전, 세자르가 늘 가신들에게 동의를 구하는 것을 기억해냈다.

‘카렌, 이건 어디까지나 네 선택이야.’

‘위험하다고 생각되면 하지 않아도 좋아.’

그녀만이 아니었다.

가신들 누구에게나 그의 의견을 물었고, 동의를 구한 후에야 임무를 맡겼다. 그것이 위험한 일이라면 더더욱.

‘그것 자체도 의미 깊지만.’

맡은 임무를 완수해내면 세자르는 늘 함박웃음을 지으며 가신들을 치하했다.

‘그럼 정산을 해볼까?’

‘저, 정산이라니 무슨 말씀이십니까!’

‘아, 그럼 주군으로서 상을 내린다고 생각하던가.’

활약한 만큼 뒤따르는 보상.

세자르 자신은 당연하고도 간단한 이치라고 생각하는 이것이 정말로 그렇게 당연한 일이었다면-

세상에 제 주군을 배신하는 자는 그리 많지 않을 거다.

카렌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입을 열었다.

“그랑, 넌 정말로 아무것도 모르는구나.”

“모르다니, 뭘요?”

“세자르는 임무를 맡기기 전, 가신에게 늘 동의를 구해.”

“그래 봤자 말뿐인-”

“얼마든 거부할 수 있어. 물론 다들 거부하기보단 임무를 못 맡아서 안달이긴 하지만.”

언제나 더 큰 공을 세우고 싶어하던 발닉과 디터를 떠올리며 카렌이 픽 웃었다.

“그뿐이 아냐, 그랑.”

대공과 세자르의 가장 큰 차이라 하면···.

카렌은 브렉을 죽인 뒤, ‘처음으로 사람의 목숨을 빼앗은’ 충격으로 한동안 침울해하던 세자르를 기억해냈다.

‘그러게 내 선에서 조용히 처리한다니까 그러네.’

‘아냐. 이것만큼은 내가 내 손으로 했어야 하는 일이니까. 게다가···.’

자신을 올려다보던 그의 진실한 눈빛 또한.

‘너나 다른 가신들이 어떤 무게를 짊어지고 있는지는 주군인 내가 제일 잘 알아야 하는 것 아니겠어?’

바로 얼마 전 트리니다드 수도회 사건에서도 세자르는 자원하는 가신들을 물리치고 굳이 총알받이가 되기를 자처하지 않았던가.

자신이 언젠가 왜 주군인 네가 굳이 위험에 뛰어드느냐고 불만을 토로하자,

세자르는 이렇게 답했었다.

‘원래 큰 힘에는 큰 책임이 따르는 법이라고, 카렌.’

‘내겐 특별한 힘이 하나 더 있으니 너무 걱정하지 말란 얘기야.’

그녀가 귀에 딱지가 앉을 정도로 잔소리해봤자 세자르는 변함이 없었고, 앞으로도 그럴 거다.

···애인은 개뿔.

카렌은 쓴웃음을 삼키며 입을 열었다.

“선을 넘는 임무, 가령 누군가를 죽여야 한다거나. 목숨을 걸어야 할 만큼 위험한 임무는···.”

그랑의 기대감 가득한 눈빛을 마주 보며 말을 잇는다.

“세자르 본인이 맡지.”

“···네에?”

“이 정도면 그 둘의 차이점으로 꼽기에는 충분하지 않니, 그랑?”

그랑은 놀란 눈으로 입을 다물었다.

눈빛이 복잡해지는 것이 제 나름대로 고민에 잠긴 모양이다.

“세자르는 지저분한 일 따위는 시키지 않아. 나나 우만이나, 다들 알아서 하는 거지.”

“···.”

언젠가 우만이 이런 얘기를 한 적이 있다.

···세자르가 빛의 길을 걷는다면, 이미 손을 더럽힌 자신은 그 그림자에 숨어 위협이 될 만한 요소를 알아서 제거하겠노라고.

그 말에 카렌은 심히 동감했던 바였다.

“그것이 어쩌면 진정한 충성의 증거일지도 모르고. 안 그래?”

그랑은 그녀의 얼굴을 빤히 마주 보았다.

“진정한 주군은 강압이 없이도 가신이 제 목숨을 걸도록 만드는 법이니까. ···네가 모셨다는 대공은 어땠지?”

“···.”

그랑은 생각에 잠긴 얼굴로 입을 다물었다.

열두 살 소년의 고뇌를 지켜보며 카렌은 오늘의 계획을 다시금 정비해 보았다.

마차 차창 밖으로 교황직할령의 경계가 보이기 시작했다.

* * *

결론부터 말하자면, 파문 재판은 무사히 잘 진행되었다.

주연을 맡은 그랑은 생각 외의 열연을 보여주었는데.

‘감히 나를 파문하려 하다니!’

‘교황 성하께서 어찌 내게 이리 나오실 수 있소!’

칼 오프러스 대공의 말투를 재현하는 것은 물론이고, 그가 자주 쓰는 표현과 세세한 습관까지 따라해내는 것이 아닌가.

덕분에 시나리오는 차질 없이 진행되었고.

‘알레스 정교단의 수장, 나 제수알도 3세는 교황청의 이름으로 오프러스 공국의 수장, 대공 칼 오프러스에게 파문을 선언하는 바요.’

‘말도 안 돼! 이건 음모다, 저놈들의, 에스닐의 음모라고!’

‘···이로써 본 재판정은 종결되었습니다.’

난동을 부리려는 대공이 신관들에게 붙잡혀 재판정 밖으로 끌려나가는 것까지, 그야말로 완벽하게 마무리되었다.

재판이 3시간 안에 끝난 덕분에 그랑의 이능은 그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았고.

마침내 모든 변장을 풀고 내 처소로 돌아온 그를, 이사벨 공녀가 맞이하며 감탄의 말을 건넸다.

“지난번에는 절 놀리려고 일부러 어설프게 행동하신 거로군요.”

“하하···.”

대공을 가장 오랫동안 곁에서 지켜봐온 이사벨 공녀마저 차이를 알 수 없었다는 것이다.

“공녀 전하야말로 여기까지 행차하시고 증언까지 해주신 데에 감사드립니다.”

“뭘요, 다 저를 위해 하는 일인걸요. 암거위에게 좋은 것은 수거위에게도 좋다는 말도 있지 않나요?”

어깨를 으쓱하며 말하는 이사벨의 모습에 나도 모르게 입꼬리가 올라갔다.

일국의 공녀치고는 솔직하기 짝이 없는 언사가 아닌가.

“어쨌거나 제가 공의 처소에 직접 찾아온 건, 긴히 말씀드릴 사항이 있어서예요.”

그녀의 의미심장한 눈빛을 본 순간, 나는 그 다음 내용을 짐작했다.

대공이 파문당한 이상, 아비와 딸 사이를 저울질하던 귀족들의 지지가 어느 쪽으로 향할지는 극명하니까.

“드디어 계획을 실행에 옮기실 거로군요.”

“역시 세자르 공이십니다.”

내 말에 이사벨이 활짝 웃으며 계획의 상세 사항을 알려주었다.

“그렇다면 저희 에스닐 또한 준비를 해야겠군요.”

나는 그에 못지 않은 환한 미소로 그에 화답했다.

* * *

예기치 않은 카사밀레 알레르기의 후유증 때문에 대공성 안에서 두문불출하던 2주간.

칼 오프러스 대공이 가만히 앉아서 상황을 관망하고 있던 것은 아니다.

‘비록 사신 놈에게 뇌물을 들려 보내기는 했지만.’

밀정의 보고대로 에스닐이 무언가 약점을 잡아 협박하는 거라면. 단순한 뇌물만으론 교황의 마음을 돌릴 수 없음은 그 누구보다도 잘 알았으니까.

‘밀정에게 교황과 긴히 대화를 나눌 기회를 마련해보라고 해라.’

‘그··· 이미 시도는 해보고 있다는데 쉽지 않다는데요.’

비서관 그롤의 어눌한 대답에 대공은 분통이 터졌다.

비서관도 그렇고, 밀정이라는 놈도 그렇고.

어째서 제 수하라는 자들은 이다지도 무능한 것인지.

‘밀정 놈은 돌아오는 대로 갈아치워야겠군.’

생각하면 할수록 이런 무지렁이 같은 자들을 데리고 이 정도까지 올라온 자신이 대단하다 싶었다.

어쨌거나 대공은 다양한 해결책을 모색해보았다.

교황을 떠받치는 12개의 기둥이라 불리는 추기경들 각각과 접촉을 시도해보았고.

정교단 산하에 있는 여러 수도회나 수녀회의 수장들에게 압력을 행사하기도 했으며.

‘···무엇보다도 에스닐이 잡았다는 약점이 무엇인지를 알아내야 해.’

핵심 정보를 알아내고자 밀정을 잔뜩 풀었으나, 그다지 수확은 얻어내지 못했다.

그렇게 지리멸렬한 날들이 이어지던 가운데.

대공은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듣게 되었다.

‘뭐라고? 파, 파문이라니 어째서-!’

교황청에서 보낸 한 통의 통지문을 받아든 순간.

누군가가 망치로 자신의 뒤통수를 내리친 듯한 기분이었다.

‘분명 사신을 통해 참석 불가의 뜻을 전하지 않았더냐! 그런데 이게 어째서···.’

파문 당사자의 사정으로 참석이 어려운 경우 재판은 필연적으로 2주 이상 미뤄지게 된다.

그런데 지금 통지문이 날아온 것을 보니 아무리 봐도···.

그 순간, 비서관 그롤이 서신을 들고 들어왔다. 교황청의 밀사가 보고한 내용을 달달 떨며 전달했다.

‘우리 공국 측의 사신이 재판에 참석하겠다는 서신을 들고 왔다고 합니다. 그뿐 아니라.’

‘뭐라고?’

‘그··· 대공 각하께서 재판에 참석하셨다고···.’

내가 재판에 참석했다니, 이게 대체 무슨···!

뒷목을 붙잡고 쓰러지기 직전, 대공의 뇌리에 돌연 이름 하나가 스쳐지나갔다.

···다름 아닌, 자신의 모습을 그대로 흉내낼 수 있는 ‘쌍둥이 이능자’의 존재가.

‘쌍둥이 이능자!’

‘네? 그, 그게 무슨 말씀이신···.’

철썩!

뺨을 후려친 것을 시작으로, 비서관에게 거침없이 주먹 다짐을 했다.

그렇게 속이 시원해진 후에야 대공은 거친 숨을 몰아쉬며 지시를 내렸다.

‘···쌍둥이 이능자가 어디 있는지 찾아내라.’

필시, 세자르 레핀 놈 곁에 붙어 있을 터이니.

이마에서 흐르는 피를 닦아내던 그롤은 대공의 말에 눈을 크게 떴다.

‘아직 늦지 않았다. 이능자가 자신을 대신해 참석한 거라는 사실만 입증할 수 있다면···.’

그렇게 희망의 끈을 놓지 않고 있던 대공이었지만.

“대공 각하! 지금 당장 군사를 일으키셔야 합니다!”

수도 기사단장이 허락도 받지 않은 채 집무실에 들이닥쳤을 때는 천하의 강심장인 그도 놀랄 수밖에 없었다.

“군사라니, 그게 무슨 소리인가?”

“서부와 남부의 호족들이 이사벨 공녀를 중심으로 내전을 일으켰습니다!”

“···!”

오프러스 공국에서 사상 초유의 내전이 발발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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