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의 길 이면에서
* * *
오프러스 공국의 대공성.
쾅!
대공이 주먹으로 책상을 내려치는 소리에 비서관 그롤이 몸을 움찔했다.
“이게 말이 되나!”
칼 오프러스 대공은 제 앞에 놓인 서신의 내용을 믿을 수 없었다.
미려한 수사법으로 가득한 문장이었으나 요지는 단순했다.
-2주 뒤, 꽉 찬 달이 뜰 시기에 파문 재판을 열 것이니 참석 여부를 밝히시오.
몇 차례나 눈을 깜박여보아도 내용은 변함이 없었다.
교황이, 그 빌어먹을 제수알도 3세가 설마 정말로 파문 재판을 열 줄이야!
“이 노인네가 이렇게 뒤통수를 쳐?”
제수알도 3세가 어떤 인물인가.
본디 천한 신분으로 태어나 신전에서 허드렛일을 하던 자다.
운 좋게 신관의 눈에 들어 정식으로 신학 공부를 해 신관이 된 것으로 모자라 무려 주교의 자리에 올랐으며.
‘정치적 뒷배 하나 없는 이를 교황으로 만들어준 게 누구인데!’
물론 제수알도 3세 본인은 좀 다르게 생각하겠지만, 칼 대공은 자신이 그를 교황으로 만들어주었다고 생각했다.
그런 만큼 그의 배신이 더욱 뼈 아프게 다가왔으니.
“가뜩이나 짜증이 나 죽겠는데 이젠 별 게 다···.”
대공이 신경질적으로 책상 위 서류를 집어던졌다. 날아온 종이 뭉치에 머리를 맞았지만, 비서관 그롤은 말 없이 대공의 얼굴을 흘긋거렸다.
···카사밀레 꽃가루 알레르기 때문에 흉측하게 부어오른 얼굴을.
‘이번에는 유난히 오래 갈 것 같네.’
며칠 전 대공 앞으로 산더미처럼 왔던 서신들.
그중 하나에 꽃잎가루가 들어 있었는지, 서신을 펼친 순간 대공은 재채기를 미친 듯이 하기 시작했다.
‘엣취, 에엣취!’
재채기는 금세 끝나지 않았다. 눈물 콧물 다 흘린 후에야 간신히 멎었지만, 그러는 동안 눈두덩을 비롯해 온 얼굴이 퉁퉁 부어오른 터였다.
‘이런 몰골을 하고 어딜 나가겠나!’
그 탓에 비서관의 업무는 가중되었고, 대공의 성미가 한층 날카로워진 것은 물론이었다.
‘대체 이걸 누가 보낸 거냐! 아직 못 찾아냈나?’
문제의 꽃잎가루가 들어 있던 서신을 이리저리 살펴봤지만, 적혀 있던 주소와 발신인의 이름은 모두 가짜였으니.
결국 그들은 누군가 대공을 음해하려고 일부러 이런 짓을 한 거라는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어쨌거나 지금 이 순간.
‘이럴 때는 말 없이 가만히 있는 게 상책이다.’
비서관 그롤이 그저 눈을 내리깐 채 달달 떠는데 대공의 억누른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밀정은? 별다른 보고 없었나?”
“아, 안 그래도 지금 보고 드리려 했는데.”
그롤은 그의 눈치를 살피며 밀정의 보고를 전달해나갔다.
이미 교황청은 언제 공국을 지지했냐는 듯 완전히 에스닐 쪽으로 돌아섰으며.
그 배경에는 단순한 명분 이상의 무언가가 있는 것 같다는 보고다.
“명분 이상의 무언가?”
“네, 세자르 레핀이 뭔가 교황청의 약점을 잡아 협박한 게 아닐까 추론하더군요.”
“흠···.”
“그리고 한 가지 더 덧붙이자면.”
흠흠 하고 헛기침한 그롤이 말을 이었다.
“루치오 추기경의 소재를 찾고 있다는군요. 20년 전에 파문당한.”
“루치오라면 ‘그자’ 말인가.”
“네, 밀정의 말로는 루치오가 우리 공국에서 종종 목격된다는 보고가 올라갔다고···.”
“하아.”
대공은 멀쩡하던 머리가 지끈거리는 기분이었다.
한 가지만으로도 짜증날 일들이 연달아 터져 그의 심기를 건드렸다.
“어떻게··· 할까요? 답장을 최대한 빨리 보내야 할 텐데.”
“어떻게 하긴.”
이런 몰골로는 당연히 불가능하겠지만, 파문 재판엔 최대한 참석을 거부하는 게 최선이다.
그렇게 차일피일 미뤄가며 교황청과 비밀리에 접점을 마련하고, 그들을 어르고 달래가며 비위를 맞춰 재판을 없었던 일로 되돌리는 것.
···전에도 해봤던 것이 아닌가.
“사신을 보내라. 참석 거부 의사를 담은 서신과 함께···.”
“선물을 보내라, 이 말씀이시군요.”
그롤의 의미심장한 눈빛에 대공은 일그러진 미소를 지었다.
“이제야 겨우 눈치가 생겼구나, 그롤.”
* * *
그날 밤.
나와 발닉, 롯은 새벽 어스름이 깔려올 무렵 처소를 빠져나왔다.
발닉이 알아온 시간에 맞춰 금서 구역에 잠입하기로 했으니까.
‘새벽에 10분 정도, 경비가 없을 때가 있습니다.’
타박, 타박.
최대한 발소리를 내지 않으며 걷는 데도, 대리석 바닥 특성상 소리가 더 크게 울렸다.
미리 준비해둔 기름등을 망토에 감춘 채 어두운 복도를 슬쩍슬쩍 비추며 앞으로 나아갔고.
그렇게 몇 번 방향을 꺾어가며 이동했을 무렵 발닉이 내 주머니 속에서 찍찍거렸다.
···쥐에 빙의한 발닉이 알려준 덕분에 나는 ‘금서구역’의 문을 발견할 수 있었다.
모르는 사람이라면 그대로 스쳐지나갈 법한 작은 문.
그러나 저 너머에는 교황청의 빛나는 역사 이면에 자리한 불편한 진실들이 가득할 것이다.
‘저기구나.’
우리는 사전에 역할을 분배해놓았다.
발닉은 쥐에 빙의한 채 문가에서 대기하고, 누군가의 기척이 느껴지면 곧바로 찍찍거리며 신호를 내주는 것이 역할이며.
롯이 금서 구역 앞쪽에서 망을 보는 동안 내가 잽싸게 해당 서류를 가져온다.
‘좋아, 시작하자.’
눈으로 신호를 보내자 롯이 고개를 끄덕였다.
살금살금 걷는 동안 심장 박동이 빨라졌다.
심장이 두근대다 못해 입 밖으로 튀어나올 것 같은 기분이지만 간신히 평정을 유지했고.
안쪽 서고로 들어가 34구역을 찾아냈다.
“···.”
천장에 닿을 듯 솟아오른 책장, 그에 빼곡히 꽂혀 있는 책들이 위압적으로 느껴진다.
나는 침을 꿀꺽 삼키며 5열 4단을 찾았다.
‘5열 4단, 4단···.’
다행히도 4단에 꽂혀 있는 서류철은 단 하나뿐.
그것을 잽싸게 꺼내 품에 넣은 순간!
“찍찍찍!”
누군가 당도했음을 알리는 생쥐의 울음소리.
머리칼이 삐쭉 서는 기분으로 발걸음을 돌리자, 바람처럼 빠르게 그쪽으로 향하는 롯의 뒷모습이 보였다.
어둠을 틈 타 책장 뒤에 가녀린 몸을 숨긴 롯.
“···.”
나 또한 바닥에 바짝 엎드려 몸을 숨기는 가운데, 문 쪽에서 타박 타박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책장 뒤에 서 있던 롯이 인상을 찌푸리며 정신을 집중하는 것이 보였고.
‘이능을 쓰려는구나.’
마침내 경비병이 안쪽에 들어선 순간!
롯이 발현시킨 ‘포박의 이능’이 그의 몸을 덮쳤다.
“으윽···.”
억눌린 신음이 입술 새로 새어나왔다.
경비병은 사지를 포박당한 듯 꼼짝도 못한 채 두 눈을 튀어나올 듯 크게 떴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
“휘익!”
책상 뒤편에 몸을 숨기고 있던 롯이 그대로 마비침을 날렸다.
“···!”
목에 침을 명중당한 경비병은 신음조차 내지 못한 채 그대로 바닥에 쓰러졌다.
롯이 조심스레 나와 그의 상태를 살폈다.
경비병의 눈꺼풀이 완전히 감긴 것을 확인하더니.
‘으쌰.’
잠든 경비병을 괴력을 발휘해 옮기는 것이 아닌가.
내가 돕겠다고 나서기도 전, 어느새 경비병을 서고의 의자에 대충 앉힌 롯이 내 팔을 잡아끌았다.
‘세자르 님, 얼른 나가시지요.’
‘그래.’
잽싸게 나온 나는 바닥에서 어쩔 줄 몰라하던 쥐(발닉)를 주워들고 최대한 소리 없이 걸었다.
처소로 돌아오는 길이 천리 만리처럼 느껴졌다.
마침내 방에 돌아와 문을 닫고 나서야 숨을 한 번에 몰아쉬었다.
“후우···.”
롯 또한 긴장한 기색으로 이마의 식은땀을 훔쳤다. 나는 그녀를 돌아보며 감사의 말을 했다.
“롯, 고생했어. 네가 아니었으면 큰일날 뻔했네.”
“천만의 말씀입니다.”
잠시 입을 다물고 있던 그녀가 말을 이었다.
“제가 방금 쏜 건 마비침이 아니라 수면침이니, 내일 저자가 일어나면 아마 깜빡 잠이 들었다고 여길 겁니다.”
“그래?”
“네, 카렌 님이 따로 주신 물건인데 약간의 착란 효과가 있어 잠들기 전의 기억이 흐릿해진다고 하네요.”
보면 은근 카렌이랑 롯이 친하단 말이지.
나는 다시금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품에 넣어온 서류를 꺼냈다.
‘이게 그 문제의 기밀 정보.’
대체 무엇이길래 시스템에서 따로 보상을 주어가면서까지 이렇게 찾아오라고 하는 걸까.
아까 전과는 좀 다른 종류의 두근거림을 느끼며 첫장을 펼쳤다.
“···.”
제법 두툼한 서류를 정독하기 십여 분째, 롯과 어느새 인간으로 돌아온 발닉이 나를 지켜보는 가운데.
나는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이런 미친.”
“···도련님?”
“세자르 님, 무슨 내용인가요?”
호기심 가득해 보이는 두 사람의 얼굴에게로 눈을 돌렸다.
“발닉, 롯. 혹시 너희는 이런 생각 해본 적 없어?”
“네?”
“이 동네는 왜 이리 개나 소나 다 이능자인지, 하는 생각 말이야.”
“이능자가··· 그렇게 많았나요?”
고개를 갸우뚱하는 발닉에 이어 롯 또한 말을 받는다.
“이능자란 본디 알레스신의 축복을 받아 태어나는 극소수에 한정되는 것 아닌가요? 물론 저 같은 예외도 있겠지만요.”
나는 그녀를 흘긋 보았다. 언젠가 얘기하기로 그녀가 속한 카디움 부족은 알레스 신을 믿지 않는다고 했다.
교황청 입장에서는 ‘이교도’나 다를 바 없는 인물이 이능을 갖고 태어났으니, 그것만 봐도 이미 충분하지 않은가.
즉 일부 학자들 주장대로 이능은 유전의 산물이지만···.
‘이 서류의 내용에 따르면 그것뿐만이 아니야.’
나는 서류의 어느 한 부분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본래 인구의 극소수에서만 나타나는 ‘이능자’의 비율이 폭발적으로 급증한 시기가 있는데.
그것이 바로 20여년 전으로, 여기 있는 롯뿐 아니라 카렌, 앨빈, 팰러스 등 지위 고하를 막론한 이능자들이 출생할 즈음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 서류에 따르면, 그때가 공교롭게도 루치오 전 추기경이 파문당한 시기라는 거지.’
이능자 출생율의 비정상적인 증가와 파문당한 전 추기경.
이 두 가지가 교황의 급변한 태도와 관련 있는 것이라고, 나는 확신에 가까운 결론을 내렸다.
‘어차피 시간이 지나면 드러날 문제를 감추기 위해 협박조의 제안을 받아들였다고 보기에는 너무 저자세로 나왔으니까.’
솔직히 말해서 놀란 게 사실이다. 아무리 못 해도 두세 번은 더 협상이 오갈 줄 알았거든.
헌데 그런 것 하나 없이 내 요구를 전부 다 오케이해준다?
그게 의미하는 바는 하나뿐이다.
‘뒤가 아주 켕기는 게 있다, 이 말이지.’
내가 서류에서 여전히 눈을 떼지 못하자 발닉이 조심스레 물었다.
“저 도련님, 그게 대체 무슨 내용이길래 그러십니까?”
“그게 아무래도 말이지, 20년 전에 파문당했다는 추기경 말이야···.”
나는 바싹 마른 입술로 말을 이었다.
“그 사람이 무언가 금지된 연구와 실험을 했고, 그렇게 만든 무언가로···.”
“금지된 연구와 실험이요?”
반문하는 롯을 돌아보며 말을 맺었다.
“‘인위적으로 이능자를 태어나게 하는’ 약물을 만든 것 같다는데?”
“···!”
두 사람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인위적인 이능자의 탄생.’
그것이야말로 이 서류가 주장하는 ‘의혹’의 요지였다.
* * *
한편 그 시각.
칼 오프러스 대공의 서신을 맡은 사신은 부지런히 길을 재촉하고 있었다.
“이랴, 이랴!”
마부의 외침과 채찍질에 두 마리 말이 지친 다리를 이끌며 어둠 속을 달렸다.
마차 안, 공국의 사신이 덜컹거리는 차체에 몸을 기댄 채 잠시 눈을 붙이려던 중.
“어이쿠!”
알 수 없는 비명과 함께 마차가 잠시 덜컹거렸다.
“무슨 일인가?”
사신의 물음에도 마부는 답이 없었다.
마차가 잠시 느려지는가 싶더니, 이내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제 갈 길을 가기 시작했고.
사신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다시 눈을 붙이려는데.
“오프러스 공국의 사신 되십니까?”
···돌연, 누군가가 차체의 앞쪽 벽을 뚫고 나타났다.
“으히익!”
갑작스러운 인물의 등장에 사신은 날카로운 비명을 질렀지만.
마부는 대꾸조차 없었다.
“마부! 뭐 하나! 호위병은, 호위병은 어떻게 되었지?”
“그리 외치셔도 소용없을 겁니다. ···이미 제 손으로 다 처리했으니까요.”
벽을 통과하고 나타난 사내의 살가운 목소리에 사신은 눈을 크게 떴다.
설마, 이자 또한 말로만 듣던 이능자의 일종인가?
빠르게 머리를 굴려 상대의 정체를 알아냈으나 그것은 하등 소용없었다.
“그럼 이제 대공의 서신은 제게 맡겨주시지요.”
“어, 어디 감히! 이건 내 목숨을 걸고서라도-”
지켜내겠다, 라는 사신의 다음 말은 이어지지 못했다.
···어느새 다가온 날카로운 비수가 그의 목숨을 단번에 끝장냈으니까.
“그 기개만큼은 높이 사죠.”
벽을 통과하고 나타난 이능자, 아니 우만은 마차 문을 열어 사신의 몸을 밖으로 떨어뜨렸다.
숨을 켁켁대는 사신이 그를 저주하는 듯한 눈빛으로 노려보았지만 상관없었다.
‘중요한 건 세자르의 임무를 완수하는 것.’
교황청으로 떠나기 직전, 세자르는 그를 따로 불러내 임무를 맡겼다.
‘칼 오프러스 대공이 파문 재판에 불참한다는 서신을 사신에게 들려보낼 거다.’
‘우만, 네가 할 일은 그 사신을 따돌리고 가짜 사신으로 변장한 채 가짜 서신을 들고 교황청에 오는 거야.’
세자르는 사신을 죽이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그냥 기절시킨 뒤 숲 어딘가에 버려두라고.
‘하지만 후환은 남기지 않을수록 좋지.’
팰러스 아래서 더러운 일을 수없이 반복했던 우만은 제 손을 더럽히는 데 주저함이 없었다.
그것이 자신이 선택한 주군을 위한 일이라면 더더욱.
다그닥, 다그닥.
이미 목숨이 끊어져 숲길 어딘가에 버려진 마부 대신 우만 자신의 충실한 종복이 마차를 모는 가운데.
우만은 편안하기 그지없는 기분으로 두 눈을 감았다.
‘세자르, 넌 여전히 너무 물러.’
리드미컬하게 흔들리는 차체에 머리를 기댄 채 그는 다시 한 번 다짐했다.
···세자르가 빛의 길을 걸어가는 동안, 자신은 이면의 어둠에 숨어서 모든 지저분한 일을 처리하겠다고.
이윽고 몇 시간 뒤.
“오프러스 공국의 사신, 오펜 알테미스가 교황 성하를 뵙사옵니다.”
가짜 사신이 내민 서신을, 교황 제수알도 3세는 아무 의심 없이 받아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