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작가의 서자로 살아가는 법-148화 (148/176)

또 다른 용건

* * *

다시 몇 주 전으로 되돌아가자면.

세자르 레핀이 협박에 가까운 제안을 들고 찾아온 얼마 후, 교황 제수알도 3세는 추기경들을 소집했다.

“이렇게 갑작스럽게 추기경 회의를 소집하시다니, 대체 무슨 일이십니까 성하?”

“불러주신 덕분에 정신없이 달려오느라···.”

“그래도 간만에 여러분들 얼굴도 보고 좋지 않습니까.”

아무것도 모른 채 여유롭게 한담을 주고받는 추기경들을 보며 교황은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여기 모인 것들은 ‘12인의 사도’라 불리는 추기경 열두 명으로, 온 대륙에 흩어진 대형 교구를 각기 담당한 이들이다.

‘오늘날의 교황청을 떠받치는 자들.’

교황은 대부분 머리가 하얗게 샌 추기경들을 둘러보다가 입을 열었다.

“여러분을 오늘 이 자리에 모이게 한 것은···.”

제수알도 3세는 차분히 현재 상황을 설명했다.

에스닐 특사 세자르 레핀의 갑작스러운 방문.

성물 반환이라는 명분 뒤에 숨겨진 진짜 의도.

그리고···.

“···세자르 공은 오프러스 공국의 칼 대공을 파문 재판에 처해달라 요구하고 있소!”

파문 재판.

민감한 화제에 추기경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저마다 한 마디씩 하는 가운데 유난히 큰 목소리 하나가 송곳처럼 튀어나왔다.

“파문 재판은 20년 전 ‘그자’를 대상으로 한 것이 마지막 아니었소이까?”

“그자라 하면···.”

“왜, 그···.”

“아아.”

본명 대신 ‘그자’로만 지칭되는 인물의 언급에 회의장이 돌연 조용해졌다.

“···.”

교황의 심기가 명백히 불편해지는 것을 본 추기경들이 입을 꾹 다문 가운데.

그때껏 한 마디도 안 하던 젊은 추기경 하나가 불쑥 입을 열었다.

“왜, 그 이름을 언급해서는 안 된다는 암묵의 규약이라도 있는 것입니까?”

“이보세, 알치노 추기경!”

“왜요, 제가 모르는 사이에 그런 규칙이 생겨나기라도 했나 보지요?”

“허어, 이것 참···.”

모두가 바짝 얼어 있는 가운데, 알치노 추기경은 제수알도 3세를 정면으로 노려보았다.

“그렇담 교황 성하께서 대답해주시지요. ‘그자’, 아니 루치오 전 추기경을 언급하는 것이 금지된 것입니까?”

그 말에 교황은 대수롭지 않은 듯 대답했다.

“아니, 설마 금지되었겠소.”

입가에는 미소가 걸려 있었으나 눈빛은 차갑기 그지없었다.

이 날카로운 분위기를 해소하고자 추기경 하나가 화제를 전환했다.

“헌데 성하, 어째서 우리 교황청이 에스닐의 요구를 들어줘야 합니까? 아무리 대공이 그들 주장대로 타국의 왕족 구성원을 암살했다고 해도···.”

추기경의 입가에 비틀린 미소가 걸렸다.

“그건 어디까지나 그들 사이의 문제가 아니겠습니까? 속세의 사사로운 일에 우리 교황청이 관여하는 것이 좋지 않은 관례로 남을 수 있습니다.”

“그대의 지적은 정확하오, 오메로 추기경.”

“하면 어째서입니까? 혹여 에스닐이 무언가 우리의 약점을 쥐고 있기라도···.”

청산유수로 질문을 이어가던 오메로 추기경이 교황의 구겨진 얼굴을 보고 말 끝을 흐렸다.

“다들 트리니다드 수도회가 작성한 기밀 서류를 기억하고 계시오? 그것이 에스닐의 손에 들어갔소.”

“···!”

추기경들의 얼굴에 경악의 표정이 떠오른 가운데. 그중 제일 어린 성직자 하나가 입을 열었다.

“하지만 성하, 그것 자체로는 큰 문제가 되지 않지 않습니까? 어차피 시간이 지나면 알게 될 일이기도 하고-”

“그러다 에스닐이 ‘그자’가 저질렀던 만행을 알아내기라도 하면?’”

“···!”

“더 나아가 우리 교황청이 ‘그자’의 행태를 용인하고 무마해줬다고 주장하기라도 하면 어떻게 되겠소?”

젊은 추기경의 얼굴이 새파래졌다.

“제, 제 생각이 짧았습니다.”

제수알도 3세는 그 말에 대꾸하는 대신 제 말을 이어나갔다.

“아무리 증거를 깨끗이 처리했다 한들 파고들다 보면 언젠가는 꼬리 잡힐 만한 게 나올 것이오.”

“···.”

“그러기 전에 의혹을 걷어내고, 그들에게 완전히 협조하는 듯 행동한다면-”

“성하, 한창 말씀하시는 중에 송구스럽습니다만.”

송구스럽다는 표현과 달리 비뚤어진 미소를 짓는 알치노 추기경이 끼어들었다.

“이제 와 걱정이 되시나 봅니다? 전에만 해도 세간의 의혹을 싹 다 지워냈다며 여유만만이시더니-”

“어디 감히 성하 앞에서 그런 말을!”

“알치노 추기경, 입 다무시오!”

나머지 추기경들이 분연히 일어나 알치노 추기경을 공격하고 나섰다.

높아진 언성이 고함에 가까워질 즈음, 교황이 말없이 한 손을 들어올렸다.

웅성거림이 한순간에 잦아든 가운데, 제수알도 3세는 형형한 눈빛으로 알치노 추기경을 노려보았다.

“그대의 빛나는 용기와 천성적인 솔직함은 언제나 높이 평가하는 바이지만. ···이제는 추기경의 자리에 올랐으니 말 한 마디 한 마디를 조심해야 하지 않겠소, 알치노 추기경?”

알치노는 그 눈빛을 정면으로 받아내며 미소를 지었다.

“그 말씀, 명심하며 혀를 놀리겠사옵니다.”

“가, 감히 저런 건방진 말대꾸를!”

비꼬는 것이 명백한 대답에 다른 추기경들이 분노했지만, 제수알도 3세는 반응하지 않았다.

‘어차피 금세 제 풀에 거꾸러져나갈 애송이가 아닌가.’

알치노 추기경 같은 자들을 이제껏 한두 해 보아온 것이 아니다.

젊은 날의 치기에 사로잡혀 정의니 도리니 운운하다가 경거망동하고, 결국은 제 수명을 깎아먹고 마는 자들.

그런 애송이들의 도발 하나하나에 일일이 반응해줄 필요는 없다.

“자, 그럼 이제 에스닐의 ‘파문 재판’ 요청에 대해 그대들의 투표를 받겠소.”

투표는 거수로 진행되었고, 알치노 추기경과 최연소 추기경 두 명을 제외한 모두가 찬성했다.

교황은 그 둘의 얼굴은 쳐다보지도 않은 채 회의의 종료를 선언했다.

추기경들이 하나둘씩 회의실을 빠져나가는 가운데, 제수알도 3세는 오메로 추기경의 소매를 붙잡았다.

“성하.”

제수알도 3세는 자신의 집무실로 그를 데려간 후에야 본론을 꺼냈다.

“‘그자’의 행적을 추적해보라는 건 어찌 되었소?”

오메로 추기경은 준비해온 서류를 교황에게 내밀었다.

“그자로 추정되는 인물이 몇 있었습니다만, 그중 제일 인상착의가 유사한 이가···.”

서류 첫장에 실린 지도 어딘가를 짚어 보이며 말을 잇는다.

“오프러스 공국 수도에서 종종 목격되었다고 합니다.”

“···오프러스 공국이라고?”

추기경은 대답 대신 고개만 끄덕였다.

‘그자’와 오프러스 공국 사이에 대체 무슨 연관이 있는 것일까.

교황은 지도를 내려다보며 한참 동안 생각에 잠겼다.

* * *

첫날의 만남 이후, 제수알도 3세는 내게 대단히 협조적으로 나왔다.

교황청의 수많은 거처 가운데서도 최고급 숙소를 내어준 것은 물론이요, 최고위 귀빈들을 위한 의전을 아낌없이 베풀었으며.

그게 전부가 아니었다.

“파문 재판을 열기 위한 절차는 모두 마무리되었소. 추기경들의 동의를 얻어낸 것은 물론이고···.”

내 요구의 핵심인 ‘파문 재판’ 절차 준비를 며칠 만에 일사천리로 마친 것이 아닌가.

“빠른 처리에 감명받았습니다, 성하. 에스닐은 성하가 내려주신 은혜를 잊지 않을 것이옵니다.”

“판에 박힌 감사는 그 정도면 충분할 것 같고.”

“판에 박히다뇨, 절반의 진심을 담아 드린 감사 인사인데···.”

“그래도 절반이라도 진심이라니 다행이로군.”

불퉁하니 대꾸하는 제수알도 3세를 보자 웃음이 나올 것 같았다.

뭐랄까, 내가 본인의 캐릭터를 다 파악했다고 생각해서인가.

언젠가부터 교황은 묘하게 솔직하게 구는 터였다.

“저희 역시 모든 준비를 마쳤으니 이제는···.”

“파문 재판 안내장을 대공에게 보내라, 이 말 아니오?”

“과연 성하의 혜안은 날카롭기 그지없군요.”

“흥.”

코웃음을 치며 뒤돌아서는 교황.

나를 영 마음에 안 들어하기는 했으나, 일 처리만큼은 빈틈이 없었다.

교황청의 직인과 교황 본인의 인장이 찍힌 ‘파문 재판 안내장’이 대공에게 곧바로 날아갔고.

대공은 안내장을 받는 즉시 재판 출두 여부를 적어 답장을 해야 할 거다.

‘안내장에 적힌 재판 날짜는 지금으로부터 2주 뒤로 여유가 없으니까.’

그러니 나는 또 이곳에서 2주간 더 지루한 기다림을 감내해야 한다는 의미였다.

2주 뒤에 재판이 열린다고 얘기해주자, 롯은 그냥 고개만 끄덕였지만 발닉은 걱정스러운 얼굴이었다.

“도련님, 이렇게 오랫동안 교황청에 머물러도 될까요? 에스닐 궁의 일이나 공작저의 업무도 넘쳐나던 터인데···.”

“공작저 업무는 걱정할 것 없어. 우만과 리암에게 맡겨놨으니까.”

“아, 그 두 분이라면 믿을 만하지요.”

우만과 리암.

성실과 꼼꼼, 완벽주의라면 누가 더 뛰어난지 우열을 가리기 힘든 두 사람이다.

‘우만에게는 좀 다른 성격의 임무를 하나 더 맡기긴 했지만.’

그 둘이라면 알아서 잘 해내겠지.

“왕실고문관 임무로 말하자면, 폐하께서 두 달간의 공식 휴가를 내어주신 참이다.”

“···그 귀중한 공식 휴가를 또 다른 나랏일에 쓰고 계시는 거로군요.”

발닉의 정확한 지적에 살짝 슬퍼졌지만.

“위협 요소만 제거되고 나면 장기 휴가 받아서 쓸 거야.”

“부디 편히 쉬실 수 있길 바라겠습니다만.”

“그거야 그렇고. 발닉, 자네한테 부탁한 건?”

앞서는 극진한 대접을 받으며 쉬고 있다고 했지만, 우리 세 사람이 이곳에서 그냥 호의호식만 하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이렇게 ‘에스닐의 특사’ 자격으로 교황청을 직접 방문해 몇 주간 뭉기적거린 것은 비단 파문 재판 때문만이 아니었으니까.

내 말에 발닉이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그럼요, 여부가 있겠습니까.”

그 말과 함께 주머니에서 꺼내 보인 것은 제법 무거워 보이는 금속 열쇠.

열쇠를 받아들며 수고했다, 고 하자 발닉이 겸연쩍게 머리를 긁적였다.

“어째 이런 일을 할 때마다 좀 찔리는 기분입니다만···.”

“그럼 이렇게 기도해보는 건 어때? ···알레스시여 오늘도 정의로운 도둑이 되는 걸 허락해주세요, 라고 말이지.”

내 같잖은 드립에 발닉은 어이없다는 듯 웃음을 터뜨렸다.

나는 그가 가져온 열쇠를 빤히 내려다보았다.

‘이게 문제의 그 금서구역 열쇠다, 이거지.’

시작은 피에트로가 꺼낸 한 마디였다.

‘세자르 공이 이능 신관들에게 관심이 많아 보이셔서 말씀드리자면, 이능청은 그 무엇보다도 비밀이 많은 부서라는 걸 아십니까?’

‘비밀이 많은 부서라니요, 신관님?’

첫날부터 날 유난히 마음에 들어하던 그 젊은 사제는 말수가 꽤 많았다.

나는 그의 비위를 맞춰가며 순진하고 호기심 많은 청년 행세를 했고.

‘알레스 정교단의 초기 역사에서 이능 신관들이 제일 큰 역할을 했다는 건 누구도 부정하지 못하는 사실 아니겠습니까? 헌데···.’

피에트로 신관은 슬쩍 찌르기만 해도 내가 궁금해하는 것을 전부 다 대답해주었다.

‘그 이능자들이 어떻게 태어나는지에 관해서는, 단순한 신앙심으로 설명할 수 없는 신비가 숨겨져 있다고 하더군요.’

‘그렇게 말씀하시니 호기심을 억누를 수가 없군요.’

‘귀빈들의 궁금증을 해소해줄 만한 온갖 귀한 고서적이 교황청 도서관에는 수없이 많지요. ···물론 중요한 기밀 정보는 금서 구역에 있지만요.’

‘금서 구역이라니요?’

무심코 되묻자 피에트로 신관은 헙, 하며 뒤늦게 말 실수를 깨달은 듯했다.

‘아, 원래 외부인에게는 이런 얘기 하면 안 되는데···.’

‘피에트로 신관님, 조금 섭섭하군요. 제가 그냥 외부인이라니-’

‘아니, 그런 뜻은 아닙니다. 그저···.’

신관을 잘 구슬린 덕분에 꽤 많은 정보를 얻어낼 수 있었다.

요컨대 교황청의 온갖 민감한 핵심 정보들은 도서관 제일 안쪽에 자리한 ‘금서 구역’에 보관되어 있으며. 교황청 근위대원들이 밤낮으로 감시한다고 말이다.

‘흥미로운 이야기군요.’

그 말을 끝으로 내가 더는 관심을 보이지 않자 신관은 안도하며 가슴을 쓸어내렸지만.

나는 돌아오자마자 발닉에게 이런 지시를 내린 터였다.

‘발닉, 쥐는 준비 돼 있지?’

‘그럼요. 분부만 내려주십시오.’

‘그렇다면···.’

발닉은 자초지종을 듣자마자 이능을 발현시켰고, 쥐에 빙의하는 데 성공했다.

···이런 유의 일에 대비해 공작저에서 미리 데려온, 훈련된 쥐였다.

찍찍거리며 사라진 쥐는 몇 시간 후 우리의 처소로 되돌아왔고.

‘생각만큼 경비는 삼엄하지 않던데요?’

발닉은 문제의 금서구역에서 몇 명이 경비를 서는지, 그들이 언제 교대하는지, 잠깐이라도 자리를 비우는 것이 언제인지 따위를 세세하게 알아왔다.

그리고 오늘은 금서 구역의 여분 열쇠를 가져오는 쾌거를 이루었으니.

“도둑이라니 너무하십니다, 도련님. 경비병이 낮잠 잘 때 슬쩍 꺼내온 거거든요.”

“세간에선 그런 걸 도둑이라 하지 않나요, 발닉 경?”

롯의 농담에 나와 발닉이 웃음을 터뜨렸다.

어쨌거나.

어째서 위험을 감수해가며 금서 구역의 열쇠를 훔쳐왔느냐고 묻는다면.

얼마 전에 갱신된 도전과제 중 하나가 달성되었고.

[도전과제 ‘최고위층 알현’ 달성! - 알레스 정교단의 우두머리와 접촉했습니다.]

[보상 ‘교황청 금서구역의 기밀 정보’를 얻었습니다.]

그 보상으로 쪽지 한 장이 팔랑거리며 떨어졌기 때문이다.

쪽지에 적힌 것은 단 한 줄뿐.

-34구역, 5열4단.

나는 열쇠를 꽉 움켜쥐었다. ···아마도 이곳에 기밀이 있다는 의미이겠지.

모든 준비가 마무리되었으니 남은 건 그것을 손에 넣는 것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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