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작가의 서자로 살아가는 법-147화 (147/176)

대공의 약점

* * *

제수알도 3세는 빠르게 체념했다.

노인은 영 마뜩잖은 얼굴로 누구의 파문을 바라느냐고 물었고.

“오프러스 공국의 수장, 칼 오프러스 대공입니다.”

내 대답에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참으로 쉽지 않은 상대를 얘기하는군. 파문을 논할 만한 명분은 있소?”

“차고 넘칠 정도이지요.”

이를 드러내며 증거 자료를 내밀었다.

그것을 살펴본 교황의 표정은 한층 어두워졌다. 그럼 그럴 수밖에.

‘대공의 사주로 에스닐의 왕가 일원들이 암살당했다는 내용이니까!’

사태의 심각성을 파악한 제수알도 3세가 마른 입술에 침을 적셨다.

“맙소사, 이게··· 정말이란 말이오?”

“정말이 아니라면 제가 이 먼 길을 달려 교황청까지 왔겠습니까?”

나는 저쪽 진열대에 올려둔 성물을 향해 눈짓했다.

“고작 저 성물 하나 반환하는 일에 일국의 공작위 후계자가 올 리 없잖습니까.”

“고, 고작 성물이라니 너무하는군.”

“사람 목숨보다 중한 것은 아니겠지요.”

“그, 어쨌거나···.”

교황은 뚜껑이 열릴 것 같은 표정이었지만, 애써 침착을 유지했다.

과연 신분 사다리 꼭대기까지 올라간 위인다운 인내심이다.

“교황 성하, 혹시 믿을 만한 증인이 필요하시다면 이사벨 공녀 또한 직접 나서서 증언할 수도 있다 하셨습니다.”

“···공녀가 어째서?”

그렇게 되물은 교황은 금세 답을 찾은 듯했다. 대공위 후계 구도를 둘러싼 부녀 사이의 뿌리 깊은 갈등을 모르지 않을 터이니.

“게다가 공녀 전하는 본인의 모친을 살해한 것 또한 대공 전하의 소행이라고 확신하고 계시거든요.”

“···!”

그 말에는 교황도 적잖이 놀랐는지 이마에 솟아오른 땀을 손수건으로 훔쳐냈다.

“이 모든 고발이 사실이라면 파문은 무리 없이 가능할 것이오. 자신의 영달을 위해 타인의 목숨을 빼앗는 것이야말로 알레스 신께서 엄금하신 칠대죄악 중 하나이니까.”

그 말에 기분이 씁쓸해졌다.

그 교리대로라면 이미 수많은 권력자들이 파문당했겠지만, 현실에선 신의 교리 또한 이해관계에 맞춰 적용되기 마련이니까.

···그럼에도 어쨌거나, 현 시점에서 대공을 파문시킬 수 있다면 그 여파는 어마어마할 거다.

‘티를 내지 않을 뿐이지 지금 대공은 상당히 궁지에 몰려 있는 상황이거든.’

건국기념제에서 옆 나라 왕을 암살하려 했지만 실패로 돌아갔으며.

‘이능자에 관한 중차대한 기밀 서류’가 보관돼 있던 트리니다드 수도원마저 함락당하고 말았다.

결혼식에 이능자까지 보냈지만 두 번째 암살 시도 또한 불발이었으며.

‘내게 붙인 밀정 역시 실패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정보를 쉽사리 얻을 수 없는 상황에서 대공은 섣불리 움직이지 못할 것이다.

무엇보다도 현재의 에스닐은 왕실 간 결혼으로 커글랜드와 꽤 그럴싸한 동맹을 맺게 되었으니까.

‘원작 외전 속의 상황과는 달라도 너무 다르군.’

팰러스가 살해당한 후 에스닐의 왕좌에 오른 에드윈 레핀.

그는 말이 좋아 에스닐의 국왕이었지 칼 오프러스 대공의 꼭두각시나 다름없었으니 말이다.

어쨌거나.

지금 같은 때에 대공은 당연히 나라 안의 기강을 다지는 데 집중할 거다.

이사벨의 심상치 않은 움직임을 초장에 제압하려 했던 것도 마찬가지 이유였고.

국내 귀족 세력의 움직임이 심상찮은 가운데···.

‘교황청이 그에게 파문 재판에 출두할 것을 요청한다면?’

오프러스 공국 내의 혼란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가 될 거다.

대공의 불안감 또한 커져만 갈 거고, 결국엔 본인답지 않게 무리수를 두는 것!

···그게 바로 내가 세운 시나리오다.

“헌데 말이오.”

교황의 목소리에 상념에서 깨어났다.

“그대의 요구대로 대공을 파문시킨다면 우리 교황청은-”

“이 거래 아닌 거래로 약속받는 것이 무엇이냐, 그리 물으시려는 겁니까?”

교황의 주름진 입가에 일그러진 미소가 걸렸다.

“말이 잘 통하니 좋구려.”

“일단은 이 사본은 폐기하지요.”

“···그것만으론 충분치 않을 텐데? 이 내용을 알고 있는 사람이 세자르 공 말고도 꽤 여러 명이 될 것 아니오.”

교황의 날카로운 눈빛을 정면으로 받아냈다.

“그럼요. 설령 그런 이들의 입을 억지로 막는다 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머지 않아 저절로 드러날 사실이니까요.”

“하면 어떻게-”

“남들이 알아내기 전에 먼저 공표하시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교황의 미간이 확 구겨졌다.

“지금 그게 무슨 말이오?”

“위기를 기회로 바꾸는 방법 중 하나는···.”

나는 교황에게 내보였던 증거자료를 가리켜 보이며 말을 이었다.

“약점을 온 천하에 드러내어, 그것을 더는 약점이 아니게 만드는 것이지요.”

“···.”

입을 다문 교황에게 나는 미리 생각해둔 계책을 들려주었다.

교황의 눈동자에 떠오른 의구심은 이내 확신으로 변해갔다.

“···확실히 그렇군.”

“그렇지요? 더불어 저희 에스닐과 커글랜드가 지지하겠습니다.”

교황은 처음으로 만족스러워 보이는 미소를 지었다.

“좋소. 솔직히 말하자면 내 비록 칼 오프러스 대공과 오래도록 우호적 관계를 유지해오긴 했으나 공과 사는 엄격히 구분해야 하는 것. 심지어 그것이 교리를 위배하는 죄악이라면 단죄를 피할 수 없지 않겠소?”

개소리, 라고 생각했으나 나는 씩 웃어 보였다.

“성하의 하해 같은 관대함에 감사드리옵니다.”

각자 저만의 꿍꿍이를 품은 채, 그와 나는 웃는 낯으로 손을 잡았다.

* * *

비밀 협상을 마친 세자르 레핀이 교황청에 머문 지 1주쯤 되었을 무렵.

그 둘의 만남에 관한 소문은 멀리 퍼져나가 칼 오프러스 대공의 귀에까지 들어갔다.

“···제수알도 3세와 세자르 레핀이라.”

대공의 중얼거림에 비서관 그롤이 얼른 말을 받았다.

“말로는 성물을 반환하러 온 특사 자격이라고 하지만, 그것만이 아닌 게 분명합니다.”

“세자르 레핀이 모종의 수를 준비하고 있다 이건가?”

“아직 명확하게 조사된 바는 없지만···.”

그롤이 말을 얼버무리는 것을 보며 대공은 생각에 잠겼다.

‘제수알도 3세는 전형적인 정치꾼 기질의 성직자다.’

교황은 여태 공국과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했다.

특히나 공국이 비밀리에 이능자 부대를 육성한다는 것을 눈치챘음에도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았는데.

‘물론 뇌물과 정치적 압력 덕분이긴 했지만.’

몇 년 전의 교황 선거에서 라제수알도 3세는 지원군을 필요로 했고.

칼 오프러스 대공은 기꺼이 지지 세력을 자처했을 뿐 아니라 물적 지원까지 아끼지 않았던 터다.

“제수알도 3세라면 걱정할 것 없다.”

“하지만···.”

“그와 우리 공국이 쌓아온 역사는 그리 간단한 것이 아니야.”

물론 그 또한 교황이 의리와 신의를 지키는 자라고는 믿지 않았으나.

향후 정세를 생각해서라도 무조건 에스닐의 편을 들지는 않을 거라는 강한 확신이 들었다.

“그래도 확인해볼 필요는 있겠지. ···교황청에 밀정을 투입시켜라.”

“알겠습니다. 그리고···.”

대공의 눈치를 살피던 그롤이 보고서를 내밀었다.

“쌍둥이 이능자에게서 소식이 끊겼습니다.”

그 말에 대공은 책상 위 보고서로 시선을 던졌다.

쌍둥이 이능자에게서 마지막으로 서신이 날아온 것이 일주일 전이며.

마지막 서신의 내용은···.

“도나 레핀이 세자르와 애인 사이였다고?”

“네, 그렇습니다.”

대공의 질문에 머리를 조아리는 비서관.

두 사람 다 이것이 일부러 흘린 거짓 정보임은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다.

“하, 그렇담 십중팔구 발각당했겠군.”

더불어 이미 싸늘한 시체가 되어 있을 거다.

쌍둥이 이능자가 투여받은 시한부 독이 며칠 전에 효력을 발했을 터이니 말이다.

“모처럼 쓸 만한 인재였는데 아쉽기 짝이 없구나.”

이능자의 죽음을 애도하는 말은 그것이 전부였다.

대공은 비서관이 내민 대체 인력 명단을 무감정한 눈으로 훑어보았다.

그 눈빛은 이능자들과 마주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상품을 취급하는 눈빛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으니까.

그때 문에서 노크 소리가 났다.

“대공 각하, 이사벨 전하가 알현을 요청하고 계십니다.”

시종의 알림에 칼 대공은 얼굴을 찌푸렸다.

장녀 이사벨이 이곳 대공성에 온 것은 며칠 전. 그때부터 요청해온 알현을 번번이 거절했으나, 이사벨은 물러설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내가 분명 돌려보내라고 하지 않았나?”

그의 험악해진 안색에 시종은 몸을 움츠리며 대답했다.

“아무리 얘기 드려도 막무가내로 버티고 계셔서··· 오늘 만나주시지 않으면 귀족회에서 ‘대공의 불통’을 안건으로 제기하겠다 하십니다.”

그런다고 그 고지식한 귀족들이 그 말에 귀 기울일 일은 없겠지만.

대공은 순수하게 짜증이 치미는 것을 느꼈다.

‘자꾸 기어오르는 계집에겐 매운 맛을 보여줘야 하는 법이지.’

언젠가 그의 아버지가 했던 말을 떠올리며 고개를 들었다.

“들어오라고 해.”

잠시 후 대공의 집무실.

이사벨은 서류와 서신들이 산처럼 쌓인 집무용 책상 맞은편에 앉았다.

대공이 무심한 눈빛으로 그녀를 보았다.

“무슨 일이냐?”

“제나터 장원 일대의 세금을 갑자기 올려 매기셨다 들었습니다. ···그 장원이 제 소유인 건 알고 계시죠?”

“그랬나? 그런 건 내가 아니고 그롤에게 얘기했어야지, 이 아비가 그런 것까지 일일이 신경써야겠나?”

대공의 태도에 이사벨은 이를 바득 갈았지만 이내 꾸민 듯한 미소를 되찾았다.

“아버지, 한 가지 충고해드릴까요?”

“필요없다.”

“언제까지 아버지의 천하가 이어질 거라 보세요?”

그 말에 대공은 미간을 좁히며 처음으로 딸의 얼굴을 제대로 보았다.

간만에 본 이사벨은 알 수 없는 자신감에 차 있었다.

“이 오프러스 공국의 귀족들이, 민중이 진심으로 아버지를 지지하고 신뢰한다고 생각하십니까?”

대공의 눈이 가늘어졌다.

“아버지는 본인의 권좌가 영원할 거라 보지만, 저 속과 겉이 다른 자들이 언제든 손바닥 뒤집듯 주군을 갈아치울 수 있다는 걸 모르시나 봅니다.”

속사포처럼 말을 쏟아낸 제 딸을 대공은 가만히 바라보았다.

이윽고 그의 입에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무엇이 그리 우스우십니까?”

눈꼬리에 맺힌 눈물을 닦아내고서야 웃음을 멈춘 대공은 냉기 서린 목소리로 말했다.

“신뢰? 믿음이라고? 이사벨, 너야말로 순진해빠졌다는 걸 아직도 모르겠느냐?”

입을 꾹 다문 이사벨을 보며 대공이 말을 이었다.

“내가 믿는 것은 오직 권력과 금뿐이다.”

“···.”

“네가 말한 겉과 속이 다른 자들, 그들은 오히려 다루기 쉬워. ···놈들은 내가 쥔 권력과 금에 머리를 조아리는 거지, 내게 그러는 것이 아니거든.”

분한 기색으로 아무 말도 못하는 그녀를 보며 대공은 실소했다.

“이사벨, 네가 이 모양이니 내가 대공위를 줄 수 없다는 거다.”

“무슨 그런!”

“네가 단순히 여자이어서거나, 그 빌어먹을 건방진 계집의 핏줄이어서도 아니야.”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난 대공이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멍청한 주제에 제 그릇도 모르고 설쳐대기 때문이지!”

주먹으로 탁자를 쾅! 내리치는 소리에, 이사벨은 몸을 움찔하고 말았다.

‘늘 이런 식이지.’

어린 시절부터 그녀의 자존감을 망가뜨리던 비수 같은 말들.

그녀를 한없이 작게 만들던 노기 어린 눈빛.

익숙한 악의 앞에서 몸이 부들부들 떨려왔지만, 이사벨은 간신히 평정을 가장했다.

“제가 멍청하다면 그건 아버지인 당신을 닮아서이겠지요, 안 그렇습니까?”

최대한 냉정하게 말한다고 말했지만, 어쩐지 제 목소리에는 미세한 울음기가 섞여 있었다.

“···가능하다면 저 또한 당신과 혈연임을 부정하고 싶지만-”

“나가라.”

대공이 그녀의 말을 잘랐다.

온몸으로 분노를 표출하는 아버지를 보자 학습된 공포감이 스멀스멀 올라왔지만.

“안 그래도 나갈 생각이었습니다.”

이사벨은 몸의 떨림을 간신히 자제하며 일어섰다.

대공이 노기 섞인 한숨을 내쉬며 창 밖을 향해 시선을 돌린 순간.

‘···이때다.’

책상 위 수북이 쌓인 서신들 사이로 그녀는 품에 숨겨온 편지봉투를 슬쩍 밀어넣었다.

완전 범죄를 마친 뒤 아무렇지 않은 기색으로 대공의 집무실을 빠져나왔다.

* * *

교황청에서 머문 지 어느덧 3주가 되었을 무렵.

나는 이사벨이 밀정을 통해 보낸 서신을 받았다.

-세자르 공, 잘 지내시는지요.

안부인사로 시작된 서신은 길게 이어졌다.

자신은 여전히 건강히 잘 지내고, 최근에는 어느 무도회에 참석했으며, 이러저러한 옷과 장신구를 주문했으며···.

‘누군가 몰래 뜯어본다 해도 신변잡기에 불과하다 여길 내용이로군.’

잡담만 가득하다고 느낄 기디긴 편지 내용 중, 중요한 메시지가 간간이 숨어 있었으니.

-편지는 계획대로 ‘그분’께 드렸어요.

-말려서 빻은 카사밀레 꽃잎가루를 뿌려 장식한 편지지인데 부디 좋아해주시면 좋으련만···.

그 문구를 보고 나는 헛웃음을 짓고 말았다.

카사밀레 꽃은 색깔이 화려하고 향기가 좋아 인기가 많은 꽃이지만.

일부 사람들에게는 강력한 알레르기 반응을 유발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그리고 이사벨의 말에 따르면.

‘칼 오프러스 대공의 약점이요? 딱 한 가지 있긴 하죠.’

카사밀레 알레르기.

대공은 그 꽃을 만지기만 해도 얼굴이 흉측할 정도로 퉁퉁 부어오른다는 것이다.

-제 편지를 보시고 나면 한동안 두문불출하실 거예요. 최소 2주는 거뜬할걸요.

···이사벨이 최적의 타이밍을 만들어줬으니, 이제는 본격적인 작전에 돌입할 때였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