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 앞에 만인은 평등하니
* * *
알레스 교단의 수장, 교황이 다스리는 교황 직할령 ‘알레스빌’.
소도시 크기만 한 땅은 대륙의 쟁쟁한 나라들과 국경을 접하고 있다.
북서에는 오프러스 공국, 북동에는 에스닐, 동에는 산티노 공화국이 자리했으며.
이 교황령의 한복판에 자리한 것이 순례자들의 발걸음이 끊이질 않는 교황청이었다.
“오는 길은 평탄하셨습니까?”
이 교황청에서 일하는 젊은 신관이자 교황 제수알도 3세의 보좌관 중 하나인 피에트로가 질문했다.
청년은 고개를 끄덕이며 감개무량한 눈빛으로 주변을 돌아보았다.
“그럼요. 말은 많이 들었지만 참으로 아름다운 건축물입니다.”
신관은 자랑스러워하는 낯빛으로 교황청 건물을 올려다보았다.
여러 개의 대리석 열주가 돔 지붕을 떠받치는 형태.
고대 신화에서 그대로 튀어나온 듯한 신전 건물이 한낮의 햇살 아래서 웅장함을 뽐냈다.
“수백 년 전 드워프 장인들이 직접 지은 건물이라더군요. 여기서 매일 근무하는 저도 볼 때마다 새삼 경탄하고 맙니다.”
“그런 교황청에 직접 발걸음을 하게 되다니 실로 감격스럽기 그지없군요. 안내를 맡아주셔서 감사합니다, 피에트로 신관님.”
청년의 손목에서 흔들리는 묵주 팔찌를 보며 피에트로 신관은 흐뭇하게 미소 지었다.
요즘 젊은이답지 않게, 특히나 공작가의 자제라고는 믿어지지 않는 신실함이 느껴진다.
“저 또한 세자르 공자님의 안내를 맡게 되어 영광입니다.”
“무슨 그런 말씀을.”
민망하다는 듯 웃는 세자르의 옆모습을 신관은 빤히 쳐다보았다.
‘에스닐에선 이 청년이 행운의 상징이라 불린다 했던가.’
공작의 사생아로 태어나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냈지만, 타고난 재능과 올곧은 성품으로 주변인들을 탄복시켜온 인물이라 들었다.
어린 나이에 벌써 수차례 공을 세운 것을 인정받아 적자로 인정받은 것은 물론이고, 결국은 트리니다드 수도회 사건까지 해결해낸 걸출한 영웅!
피에트로는 그 소문이 절반 이상 과장된 것이라 믿었고, 자신감이 넘치다 못해 오만한 사내가 오지 않을까 지레 걱정했던 터였으나.
‘교황청에서 나오신 신관 피에트로 님 맞으십니까?’
직접 만나본 세자르 레핀은 선입견과는 상당히 달랐다.
머리부터 발 끝까지 타고난 기품이 흘러넘치는 동시에,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상대를 존중하는 태도가 몸에 배어 있다.
보기 드물게 고결하면서도 신실한 영혼을 지녔을 뿐 아니라, 외모와 목소리마저 아름다운 청년에게 신관은 저도 모르게 빠져들었다.
“아, 그리고 제 호위는 여기 있는 이 두 사람이 전부입니다.”
세자르가 제 곁에 선 두 사람을 가리켜 보였다.
얼굴 흉터가 험상궂어 보이는 중년 사내 하나와 이국적인 미모를 지닌 여성 검사 하나.
신관은 그가 대부대를 끌고 오지 않은 것 또한 마음에 들었다.
“그렇군요. 하지만 상관없습니다, 감히 이 알레스빌에서 사악무도한 행동을 할 만큼 겁 없는 자는 없으니까요.”
“겁이 없다니요?”
“이곳 교황령은 뛰어난 능력을 지닌 이능 신관들이 제일 많은 곳이 아닙니까.”
그와의 대화에 푹 빠진 나머지, 신관 피에트로는 자신이 쓸데없는 말까지 지껄이는 중임을 자각하지 못했다.
“대륙 최강이라 일컬어지는 신성 근위대도 그렇지만, 이곳에서 근무하는 이능 신관들은 전투 계열의 이능자가 대부분이거든요.”
“호오, 그렇군요. 그럼 그분들은 어디에?”
“이능 신관들은 대부분 이능청 소속인데···.”
관계자만 알 수 있는 정보를 읊어대는 동안, 세자르 레핀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짓는 것을 신관은 미처 보지 못했다.
그리고 잠시 뒤.
“여기입니다.”
두 사람은 어느새 교황 알현실 앞에 와 섰다.
“교황 성하, 세자르 레핀 공 들었습니다.”
“들라 하게.”
화려하게 장식된 육중한 문이 느릿하게 열렸다. 문 너머로 길게 뻗은 공간 끄트머리에 화려한 권좌가 자리했고.
눈처럼 새하얀 머리에 교황관을 쓴 초로의 사내가 그 위에 앉아 있었다.
청년은 당당한 걸음걸이로 나아가 예법에 따라 인사를 올렸다.
“에스닐의 특사로 온 세자르 레핀, 교황 성하께 인사드리옵니다.”
“편히 하게.”
교황 제수알도 3세는 소탈한 태도로 청년을 대했다.
그를 데리고 안쪽의 응접실로 자리를 옮긴 교황 또한 청년의 손목에 걸린 묵주에 주목했다.
청년을 이곳으로 들이기 전, 보좌관 피에트로 신관이 얼마나 칭찬을 해댔는지 모른다.
‘과연 듣던 대로 신실한 청년이로군.’
이내 청년의 듣기 좋은 목소리가 이어졌다.
“일전에 연락드렸던 대로 에스닐의 왕궁에 보관되어 있던 성물을···.”
오늘의 공식적인 용건은 에스닐에 5년 전 빌려준 성물을 교황청으로 돌려받는 것이었지만.
‘그것만이 아닐 것이다.’
교황의 확신은 육감에 가까웠다.
단지 그뿐이라면 세간의 관심을 한몸에 받는 이 귀공자를 굳이 특사로 파견할 이유가 없을 테니까.
“···그 건은 피에트로와 논의하면 될 것이오. 딱딱한 이야기는 그 정도면 충분할 것 같고.”
교황은 짐짓 인자한 노인 같은 미소를 지으려 노력했다.
“얼마 전 트리니다드 수도회 사건을 세자르 공 혼자서 해결해냈다는 얘기를 들었소.”
“과장된 소문일 뿐입니다. 저 혼자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제 가신들과 함께 해낸 일이고 말이지요.”
세자르의 겸손한 대답에 교황은 만족하며 대꾸했다.
“하긴, 믿음직스러운 가신의 존재는 또 하나의 목숨과 같다는 말도 있을 정도이니.”
“맞는 말씀이십니다.”
“헌데 세자르 공은 어릴 적부터 신실했나 보오.”
그의 시선이 묵주에 가 있는 것을 확인한 세자르가 고개를 저었다.
“아뇨, 묵주는 선물 받은 물건입니다.”
“아, 그렇군···.”
대답은 그리 했지만 교황은 내심 충격받은 터였다.
신도들에게 묵주란 신앙심의 증거이자 가족에게도 내어줄 수 없는 귀한 성물이 아니던가!
“어릴 적 불우한 환경에서 자란 탓에 신전을 가본 건 손을 꼽을 정도입니다. 솔직히 말하자면 무교에 가깝다고나 할까요.”
“무교···라고?”
무심코 되풀이했으나, 발음하는 것만으로도 신성 모독을 저지르는 기분이다.
교황의 경악이 한층 커졌지만, 세자르의 말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네. 제 부친은 아시다시피 레핀 공작 로건 드 레핀이지만, 제 어미는 사창가의 창부였습니다.”
“···.”
“말하자면 사생아인 셈인데, 이렇게 운 좋게 적자가 되었죠.”
교황은 뭐라고 말해야 좋을지 알 수 없었다.
공공연히 자행되는 일이라고는 하나, 사생아의 적자 인정은 어쨌거나 정교단의 교리에 어긋나는 일인데···.
“아, 맞다. 교단에서는 서자의 적자 인정을 엄격히 금지한다고 했지요. 성하, 방금 제가 말씀드린 것은 부디 잊어주시지요.”
곱상한 얼굴로 천연덕스럽게 웃어 보이는 세자르 레핀.
교황은 그가 멍청한 건지 똑똑한 건지 알 수 없었다.
“그··· 알았소, 어쨌거나.”
아마 이때부터였을 거다.
에스닐의 영웅이라는 명예로운 평판의 소유자일 뿐 아니라 신관 피에트로 또한 ‘요즘 보기 드문 신실한 청년’이라 칭했던 세자르 레핀에게서-
‘미묘한 이질감이 느껴진 것은!’
이 종잡을 수 없는 청년에 대한 불안감이 마음 깊은 곳에서 솟아올랐지만, 교황은 그런 자신을 억눌렀다.
‘세자르의 진짜 성격이 어떻든 간에 중요한 건 이자를 회유하는 것!’
교황은 이마의 진땀을 닦아낸 뒤 말을 이었다.
“우리 교황청은 그대가 세운 공로를 공식적으로 치하하고 싶소.”
그리고는 상대의 반응을 살폈다.
보통은 이 정도만 해도 눈물을 글썽이며 무한한 영광이라고 대답하기 마련이건만···.
“계속 말씀하시지요.”
이게 아닌데, 싶으면서도 교황은 말을 계속했다.
“그대, 세자르 레핀 공에게 교황청이 특별히 명예 신관의 칭호를 내리려 하오.”
명예 신관.
평신도들이 누릴 수 있는 최상의 영광이자, 그야말로 감읍할 만한 명예이거늘···.
세자르의 표정에는 변화가 없었다.
“무지하기 그지없는 질문을 드리자면, 명예 신관이 되면 뭐가 좋은 겁니까?”
“어, 그것이.”
교황은 마땅한 대답을 찾을 수 없었다.
···그 누구도 이런 질문을 해온 적이 없었으니까.
당황하는 노인을 바라보던 세자르가 말을 이었다.
“성하께서 진정으로 공을 치하하고 싶으시다면 제 쪽에서 제안을 드리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도리어 제안을 해오는 세자르를 보며 교황은 입을 떡 벌리고 말았다.
‘이자는 대체 무엇인가!’
한 나라의 왕이라도 무릇 교황의 앞에선 경외심을 갖기 마련이다.
헌데 이 청년이 자신을 대하는 태도는 아무리 좋게 보아도···.
‘옆집 노인네를 대하는 것 이상, 이하도 아니지 않은가!’
저도 모르는 사이 상대의 속내를 정확히 파악한 제수알도 3세에게, 세자르가 씩 웃으며 말했다.
“사람 한 명을 파문시켜주시는 건 어떻습니까?”
···파문이라니?
예상치도 못한 요구에 교황은 경악하고 말았다.
* * *
제수알도 3세.
알레스 교단의 수장으로 만인의 영적 지도자이자 교황 직할령 ‘알레스빌’의 국가 원수.
모든 인간 가운데 가장 신성하며 신과 가장 가까운 존재.
알현실에 처음 들어설 때만 해도 자애로운 눈빛을 보내던 교황은 이제 나를 미친 놈 보듯 쳐다보는 중이다.
“그게 대체 무슨 소리요?”
눈처럼 새하얀 머리, 자글자글한 주름, 독수리의 그것처럼 날카로우면서도 진중한 눈동자.
외모만 보자면 이상적인 교황의 이미지 그대로였지만···.
‘그 속알맹이는 산전수전 다 겪은 노쇠한 정치인이나 다를 바 없다고 했던가.’
그 어느 사회보다도 관료제적인 것으로 유명한 성직자사회에서 살아남아 꼭대기에 오른 남자에게 여유롭게 웃으며 대꾸했다.
“그 말대로입니다. 명예신관 칭호는 사양할 테니, 제가 지목하는 인물을 대상으로 파문 재판을 열어주시지요.”
“파문 재판이 마지막으로 열린 게 이십 년 전이요. 교황청은 여간해서는-”
“교단의 교리에 어긋나게 살아가는 지도자들을 단죄하여 본보기를 보이는 것 또한 교황청의 역할이 아닙니까?”
“허어, 거참.”
교황이 곤란해하는 게 눈에 보였다.
‘눈치가 빤하군.’
내가 아무 영향력 없는 자를 파문해달라 하지는 않을 거고, 정치적 이해관계에 연루될까 봐 심기가 불편한 것.
이럴 땐 쐐기를 박아줄 필요가 있다.
“라고네 시의 우발도, 지아노니 지방의 보니토, 로토노 마을의 모르가나, 미첼로 시의 페데리카···.”
“···!”
교황의 표정이 금세 험악해졌다..
“모두 다 총명하고 어여쁜 아이들이죠, 안 그렇습니까?”
“지금 감히 나를 협박하는 것인가?”
이를 갈며 말하는 제수알도 3세에게 고개를 저어 보였다.
방금 내가 읊은 것은 카렌을 통해 알아낸 교황의 혼외자식 명단으로, 넘치는 권력욕만큼이나 가족을 번성시키려는 욕구 또한 강했던 모양이다.
‘한마디로 타락한 종교인의 표본이지만.’
르네상스 시대의 교황들은 혼외자식을 제 뒤를 이을 추기경으로 임명하기도 했으니, 이 정도는 애교로 봐줘도 될 거다.
“협박이라니, 설마요. 이건 어디까지나 거래의 기본을 갖추기 위한 절차에 불과합니다.”
“거래의 기본이라니?”
“거래란 무릇 대등한 관계에서나 가능한 것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나를 씹어먹을 듯한 교황의 눈빛을 정면으로 받아내며 말했다.
“일개 평신도인 제가 신의 대리자인 교황 성하와 대등한 지점에서 거래를 하려니, 성하의 인간적인 면모를 찾아내야 했을 뿐이지요.”
“허, 궤변도 그런 궤변은 처음 보는군. 자네는 상대를 잘못 골랐어.”
교황의 눈빛이 한층 더 싸늘해졌다.
“···내가 같잖은 애송이들의 협박에 휘둘리며 이 자리까지 올라왔다고 생각하나? 고작 사생아의 존재를 알아낸 걸로 날 어떻게 할 수 있다 생각한다면-”
“말씀드렸듯, 아까 그건 협박이 아니었습니다.”
나는 품에 손을 넣어 가져온 것을 꺼내 보였다.
꽤 두툼한 서류 뭉치였다.
“이쪽이 진짜 협박이지요.”
불안한 기색으로 서류를 훝어본 교황은 금세 깨달은 듯했다.
“이걸 어떻게···!”
여태 알레스 교단이 트리니다드 수도회의 만행을 눈 감아준 진짜 이유.
내가 그것을 들고 협박 무기로 휘두르고 있다는 것을!
“트리니다드 수도회 사건을 해결한 게 저란 걸 벌써 잊으신 건 아니겠죠? 수도원 지하에 카타콤이 있을 줄, 그리고 관 안에 시신 대신 기밀서류를 보관해놨을 줄은 상상도 못 했습니다.”
‘트리니다드 수도회 사건’을 해결한 공로로 테레사가 내게 비밀리에 건넨 기밀 서류.
그 내용은 단순했다.
-이능은 신이 내려준 기적이 아니라, 유전적으로 발현되는 능력이다.
-알레스교에 몸 담지 않은 이교도들 사이에서도 이능자는 태어나며, 주로 지배계층의 자손에게서 많이 나타난다.
-이 같은 사실을 최근 일부 학자 집단이 연구하고 있는데, 교황청은 이들의 연구를 금지하기 위해 각종 압력을 행사하고 있다.
-만일 이 사실이 세간에 공표된다면, 그 여파는 어마어마할 것.
서류를 든 교황의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핏기가 싹 가신 노인의 얼굴을 보며 말을 이었다.
“물론 이건 사본입니다. 진본은 교황청에서 파견나온 신관들이 가져가셨을 텐데, 아닌가요?”
“감히 이런 짓을···.”
분노를 참지 못한 교황이 벌떡 일어섰다.
이마에 핏줄이 솟아오른 채로 외쳤다.
“알레스 신의 자식으로서 어찌 교황인 나를 협박하려 드는 것인가!”
“알레스 신은 만인이 평등하다 하시지 않았습니까?”
교황은 ‘이 미친 놈이 또 무슨 말을 하려고’ 같은 눈빛으로 나를 보았고.
“저 또한 일개 촌부나 교황 성하나 가리지 않고 협박하는 것뿐이니, 너무 마음 상하지 마시지요.”
나는 천사처럼 환히 웃으며 말을 맺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