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황의 착각
쌍둥이의 이능자, 라는 소개에 이사벨의 눈이 동그래졌다.
“뭐라고요?”
“전하께서는 이자를 본 적 없으십니까?”
이사벨은 두 눈을 깜박이며 ‘쌍둥이의 이능자’를 올려다보았다.
“설마, 아버지 휘하의 이능자 부대원인가요?”
헌데 그자를 왜 이 자리에 데려왔던 말인가.
아직도 해결되지 않은 의문이 그녀의 머릿속에서 껄끄럽게 맴도는데.
세자르가 머리를 긁적이며 말을 받았다.
“정확히 말하면 ‘전’ 부대원이지요.”
“전···?”
“지금은 저를 위해 일하고 있습니다.”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이능자를 돌아보자, ‘쌍둥이 이능자’ 그랑은 그 말이 맞다는 듯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게 대체···.’
그제야 상황이 이해가 되었다.
비록 단 한 번도 제 눈으로 본 적은 없지만, 그녀 또한 아버지가 비밀리에 이능자 부대를 육성하고 있음은 알았으니까.
‘저자의 능력은 다름 아닌 타인으로 변신하는 것!’
이능자들 가운데서도 가장 파괴적인 능력을 지닌 자를 어떻게 회유하여 제 편으로 포섭했을까?
그러한 의문을 이사벨의 눈에서 읽어냈는지, 세자르가 얼른 대답했다.
“회유 과정을 말씀드리기는 어렵지만, 어쨌거나 지금은 우리를 위해 일하는 사람이라는 것만큼은 분명합니다.”
“···공의 말을 믿겠어요.”
“감사합니다. 가까이서 살펴보시겠습니까?”
이사벨은 그 말에 ‘쌍둥이 이능자’에게 좀 더 가까이 다가갔다.
제 아버지처럼 커다란 키. 건장한 체격. 얼굴까지 모두 똑같으나···.
‘어딘가 좀 다른걸.’
칼 오프러스 대공은 훤칠한 외모로도 유명했다.
눈앞의 세자르처럼 곱상한 외모는 아니지만, 남자다운 생김새의 정석이라고 할까.
하지만 이 ‘쌍둥이 이능자’가 변신한 칼 오프러스 대공은 뭐랄까···.
“콕 집어 말하기는 어렵지만, 뭔가 좀 다른 느낌이에요.”
“그래요? 어떻게 다릅니까?”
“글쎄, 미묘하기는 하지만···.”
이사벨은 쌍둥이 이능자의 얼굴을 다시 한 번 올려보며 말했다.
“저희 아버지보다 좀 더 비열하게 생겼다고나 할까요.”
그 말에 이능자가 뜨끔한 얼굴을 했지만.
세자르는 태연하게 대답했다.
“아, 그건 아마 그랑의 머릿속에서 대공 전하가 그런 이미지일 거라서 그럴 겁니다.”
“네?”
“저 녀석의 이능은 대상을 있는 그대로 재현하는 게 아니라, 본인이 생각하는 모습으로 재현하는 식이거든요.”
그 말에 이사벨은 풋, 하고 실소하고 말았다.
천하의 칼 오프러스 대공더러 비열하다는 표현은 꺼내기조차 어려운 것이지만.
‘솔직히 말해 저 표현이 딱인걸.’
세자르는 그녀의 표정이 한결 풀린 것을 보고 미소지었다.
“능력을 보여드리는 건 이 정도면 충분할 테니, 다시 본 모습으로 돌아가볼까 그랑?”
고개를 끄덕인 ‘그랑’은 눈을 감고 어딘가에 정신을 집중했고.
잠시 후 그의 발 끝, 손 끝부터 변이가 시작되었다.
‘칼 오프러스 대공’의 모습이 천장에 닿을 정도로 거대하게 부풀었다.
저를 덮을 듯 내려오는 기다란 그림자에 이사벨의 눈이 커졌다.
“···!”
가히 거인이라 불림직한 사내를 보며 이사벨이 작게 경악의 신음을 내뱉은 가운데.
세자르가 씩 웃으며 말했다.
“저희 그랑이 이래 봬도 열두 살입니다. 아직 한창 귀여울 나이이죠.”
“···주군.”
“왜, 불만 있어?”
틱틱대는 두 사람의 모습을 이사벨은 어이없어하며 지켜보았다.
* * *
이사벨은 그랑의 본 모습에 깜짝 놀란 눈치다. 더구나 열두 살이라고 나이까지 밝히니까 믿지 못하는 모양인데.
‘그럼, 이런 반응이 정상이지.’
롯이나 3형제가 ‘그랑이 덩치만 컸지 얼굴은 귀엽다’라거나, ‘우리 부족 사이에선 저런 얼굴이 미남형으로 통합니다’ 같은 얘기를 하던 걸 생각하면···.
그때, 신기한 눈으로 줄곧 그랑을 쳐다보던 이사벨이 미소 지으며 입을 열었다.
“그러게요. 자꾸 보니까 말씀하신 대로 귀여워 보이기도 하고.”
“···.”
나는 할 말을 잃었다. 어이가 없어 옆을 돌아보자 그랑의 얼굴이 빨개져 있다.
어라 이거 봐라, 라고 생각한 순간.
“고, 공녀 전하도 아름다우십니다!”
“어머.”
나는 질끈 눈을 감고 말았지만.
이사벨은 상냥하게 웃으며 고맙다고 대꾸했다.
‘···어린 놈이 밝히기는.’
속으로 혀를 차는데, 이사벨이 내 쪽을 돌아보았다.
“그런데 니펠 경께는 인사드리지 않아도 괜찮나요?”
니펠 경.
순간 그게 누구지, 했다가 이내 입꼬리를 올리며 고개를 저었다.
“그 친구는 이곳에 머무는 일이 거의 없습니다. 저더러 필요할 때 언제든 쓰라고 했으니, 제가 따로 감사의 말을 전하겠습니다.”
“그렇군요. 역시 가장 가까운 친우라···.”
가볍게 수긍하는 이사벨을 보며 조금 뜨끔했지만.
‘정체를 그리 쉽게 밝힐 수는 없지.’
내 모든 것을 속속들이 아는 최고의 친우.
그러나 주변에선 친분이 있다는 것조차 모른다는 카이저 니펠은 바로-
‘내 가명이거든.’
금광이 터진 후로 자본이 넘쳐나기 시작했다.
기사단을 비롯해 사병을 대거 늘려 내 개인 부대를 운용했음에도 남아나는 돈을 주체할 수 없었는데.
‘가상의 신분을 만들어서 투자를 해보는 건 어때?’
우만이 지나가듯 던진 말에 힌트를 얻어 ‘카이저 니펠’이라는 가짜 신분을 만들었다.
그의 이름으로 알토란 같은 땅을 대대적으로 매입했으며 향후 발전 가능성이 높은 사업에 투자했다.
‘사실 원작의 팰러스가 썼던 방법이기도 하고 말이지.’
지금 이 모로스 저택 또한 그의 이름으로 구입해둔 곳이다. 앞으로도 종종 밀담을 나눌 일이 생기지 않을까 싶어 마련했다.
그리고는 이사벨에게 천연덕스럽게 편지를 적어 보냈지. ···니펠은 나와 가장 가까운 친우이지만, 주변에선 그와 나의 관계를 모른다고 말이다.
“그나저나 어쩐지 우습네요.”
생각에 잠겨 있던 나를 이사벨의 목소리가 일깨웠다.
“우습다뇨?”
“아뇨, 누군가에겐 아버지의 모습이 그렇게 비칠 수 있다는 것이···.”
“비열한 악당처럼 보일 수 있다, 그것 말씀이십니까?”
그 말에 이사벨이 또 한 번 웃음을 터뜨렸다. 아까처럼 ‘피식’이 아니라 제법 호탕하게 말이다.
그 모습을 보며 나는 그랑의 상태창을 확인했다.
『 이능자 ‘쌍둥이의 이능자’ (숙련도 lv. 5)
- 설명 : 타인의 모습으로 변신할 수 있다. 외모뿐 아니라 목소리까지 똑같아진다.
- 지속시간 : 3시간
- 쿨타임 : 24시간
- 발동 조건 :
1. 대상과 친밀도가 낮을 경우, 그의 신체 일부를 섭취하는 식으로 변신할 수 있다. 이 경우 대상을 완벽하게 재현할 수 있다.
2. 대상과 친밀도가 높을 경우, 신체 일부가 없어도 해당 인물로 변신할 수 있다. 다만 자신의 기억 속 형태로 변신하는 만큼, 재현도는 다소 떨어진다.』
짐작했던 대로다.
그랑의 능력은 두 가지 방법으로 사용 가능한데, 낯선 인물의 경우 신체 일부를 섭취하는 식으로 이능을 쓸 수 있다.
‘도나에게선 머리카락 한 올을 얻어서 변신했다고 했던가.’
칼 오프러스 대공처럼 자주 봤던 인물의 경우, 아무것도 없이 머릿속 기억만으로도 재현 가능한 것이다.
···그야말로 어마무시한 능력이다 싶어 새삼 혀를 내두르는데, 웃음을 멈춘 이사벨이 진지하게 말했다.
“이제껏 저나 다른 공국인들에게 아버지는 늘 영웅 같은 존재였거든요..”
공국 안에서 칼 오프러스 대공의 평가가 어떨지는 상상이 간다.
주변 대국들에 눌려 지내던 소국에 불과했던 오프러스를 오늘날의 위치로 끌어올린 장본인이니까.
“그러나 아무리 영웅 같은 인물도 인간이라면 누구나 실수를 저지르는 법이죠, 아닙니까?”
특히나 인생의 말년에 들어선 지도자들은 꼭 치명적인 실수를 범하곤 한다.
그중 대표적인 것이 바로 이 칼 대공처럼 어린 사생아를 후계자로 고집하는 것.
‘그리고 그건, 우리 에스닐에는 더할 나위 없는 기회이지!’
나는 의미심장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제가 서신으로 좋은 생각이 있다고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이사벨이 두 눈을 빛냈다.
“이제야 본론을 꺼내시는군요.”
내가 감춰두었던 묵주를 꺼내서 차자, 이사벨의 시선이 내 손목으로 향했다.
“그건 묵주 아닌가요? 근데 이게 본론과 무슨 관계가···.”
“공국은 다른 나라에 비해 독실한 신자들이 유독 많다고 들었습니다.”
이사벨이 짐짓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권세를 자랑하는 대공이 지금껏 제 서자를 후계자로 만들지 못한 이유는 바로 이것이었다.
···서자를 인정하지 않는 알레스교의 교리에 완전히 어긋나는 행보이기에.
“결국 공녀님께 부족한 것은 대공에게 정당하게 반기를 들 수 있는 정당성인데···.”
나는 묵주 알을 굴리며 미소를 지었다.
“칼 오프러스 대공이 알레스 교단에 의해 파문을 당한다면 어떨까요?”
“···.”
이사벨의 눈이 커졌다.
“아시다시피 저희 테레사 여왕님은 대공의 음모로 가족을 잃으셨고, 언제든 그 사실을 공표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비록 국경 너머까지 효력을 발휘하는 법은 없을지언정···.”
더불어 리아나 덕분에 부족했던 물증까지 확보한 상황이 아닌가.
“온 대륙이 신봉하는 종교의 우두머리로부터 공식 파문을 당한다면 그 여파가 상당하지 않겠습니까?”
이사벨의 얼굴에 긴장의 빛이 떠올랐다.
그녀는 마른 입술을 혀로 슥 핥으며 입을 열었다.
“세자르 공은 생각보다 순진하시군요. 제 아비가 정말로 그런 짓을 저질렀으며 그에 대한 증거가 있다 해도, 한 나라의 대공을 그리 쉽게 파문시킬 수 있다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그 말도 일리는 있다.
무엇보다 공국과 교단의 관계는 돈독하기로 유명하니까.
“···파문이란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라 정치적 이해관계의 산물이라는 얘기를 하고 싶으신 겁니까?”
“그뿐이 아니에요. 설령 교황청에서 공의 고발을 진지하게 받아들인다 한들, 제 부친이 자신의 파문을 논하는 재판 자리에 출두할 것 같나요?”
그렇다.
그녀의 말대로 알레스교의 파문은 일종의 종교 재판을 통해 선고되는데, 이를 위해서는 장본인이 반드시 재판에 참석해야 한다는 전제가 뒤따른다.
나는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를 지어 보였다.
“전하의 질문에 답해보자면 첫째, 저는 그리 순진하지 않습니다.”
“무슨 뜻이죠?”
“···다 믿는 구석이 있다는 의미이지요.”
몇 달 전 트리니다드 수도회 사건을 해결하며 얻은 예상치 못한 수익을 떠올리며 말을 이었다.
“그리고 둘째, 대공이 재판에 참석할 리 없다고 얘기하셨는데···.”
나는 옅은 미소를 띤 채 옆의 그랑을 가리켜 보였다.
“칼 오프러스 대공이라면 여기도 있지 않습니까?”
“···!”
* * *
매년 봄이 다가오면 교황청은 그 어느 때보다도 바빠졌다.
연중 가장 날씨가 좋을 때이니만큼 각국에서 다양한 종교 행사나 의식이 열리고, 관련된 문의나 허가 요청 따위가 쇄도하는 시기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알레스 교황청의 수장이자 모든 신도들의 우두머리, 교황 제수알도 3세가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것 또한 필연이었다.
“···아직도 한참 남았나?”
눈이 침침한 교황을 대신해 서류를 읽어주던 젊은 신관이 머쓱해했다.
“반 정도 마무리되었습니다. 잠시 쉴까요?”
“아닐세. 기운이 있을 때 한 번에 끝내야지. 다음 문건은 뭐지?”
신관은 에스닐 왕실의 이름으로 온 서신을 조심스럽게 읽기 시작했다.
절제된 수사법과 품위가 느껴지는 장문의 글이었지만, 요는 간단했다.
-에스닐 특사를 보내 교황을 알현하고 싶다.
낭독을 다 들은 교황은 미간을 좁혔다.
“에스닐에서 알현 요청이라고? 벌써 특사들이 오는 시기인가?”
“아닙니다, 하지만 여기 적힌 ‘세자르 레핀’ 공자는 레핀 가문의 젊은 자제로, 지난번 에스닐에서 발생한 트리니다드 수도회 사건을 해결한 장본인이라 들었습니다.”
“호오.”
수많은 이단들 가운데, 정도를 벗어난 폭력으로 유명한 광신도 집단인 트리니다드 수도회가 벌인 사건은 교황청 내에서도 유명했다.
건국기념제에서 국왕을 암살하려 했던 것으로도 모자라, 영지민과 귀족 자제들을 데리고서 인질극을 벌이지 않았던가!
‘그리고 세자르 레핀이라면···.’
공작가의 적장자이면서도 본인이 직접 뛰어들어 인질들을 구해낸 불세출의 영웅.
그것이야말로 교황청에 널리 퍼진 세자르의 이미지였다.
‘한 번쯤 만나보고 싶었던 청년인데 마침 잘되었군.’
교황은 인자한 미소를 띤 얼굴로 대답했다.
“그런 젊은이라면 어디 한 번 얼굴을 보고 싶군.”
“네, 적당히 치하하시면 신도들에게 좋은 본보기가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순진한 신관은 그렇게만 생각하는 모양이었으나.
제수알도 3세의 속내는 따로 있었다.
‘최근 에스닐에서 교단의 위세가 많이 약해졌지.’
그런 가운데 에스닐의 영웅으로 추앙받는 청년에게 교황청이 친교의 메시지를 보낸다면 어떨까.
평신도의 대부분을 이루는 평민들이 이런 일에 쉽게 영향을 받는다는 것을 그는 모르지 않았으며.
‘그것뿐이 아니다.’
새파란 애송이를 잘 구슬려 교황청의 충실한 꼭두각시로 만들 수도 있지 않겠는가!
스스로를 모략가라 여기는 제수알도 3세는 몰랐다.
“좋아, 그럼 어디 자리를 마련해보도록.”
사소하게만 생각했던 약점을 붙잡혀 세자르에게 협박당하는 미래가 자신을 기다리고 있음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