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는 내 아비가 아니다
* * *
테레사 1세는 커글랜드 측의 극진한 환대를 받고 귀국했다.
무탈하게 돌아왔다는 서신을 받자마자 나는 여왕을 알현하러 왕궁으로 향했고.
“폐하, 얼굴이 아주 좋아 보이시는군요.”
전보다 더 혈색이 좋아진 그녀를 보며 반가움의 인사를 건넸다.
내 말에 테레사가 양쪽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그러는 그대는 살이 좀 빠진 듯한데? 무슨 일이라도 있었나?”
안부 인사를 던지면서도 두 눈은 날카롭게 빛난다.
그녀에겐 뭐 하나 숨길 수 없음을 실감하며 대꾸했다.
“제 주변에 늘 사건 사고가 끊이질 않는다는 건 잘 아시지 않습니까?”
“하긴 그래. 세자르 레핀, 세간에선 행운의 사나이라 하지만···.”
소녀의 한쪽 입꼬리가 슥 올라갔다.
“짐이 보기엔 ‘태풍의 눈’이라는 별명이 더 잘 어울리거든.”
“칭찬인지 놀리시는 건지 모르겠군요.”
“이걸 칭찬으로 받아들인다면 짐은 그대에게 깨나 실망할 것 같은데?”
테레사는 스완 성에서의 일을 간략하게 들려주었다.
커글랜드 왕이 얼마나 정성들여 결혼식을 준비했으며.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기 위해 보안을 얼마나 철저히 했는지.
“내 입으로 이런 말을 하긴 뭐하지만, 그분께서는 나를 썩 마음에 들어하시는 것 같더군.”
그렇게 말하는 테레사의 입꼬리가 씰룩였다. 나는 저도 모르는 새에 ‘새아가 바보’가 되었을 피터 3세를 떠올렸다.
“폐하가 귀애받으시는 모습을 두 눈으로 보지 못해 아쉽기 그지없군요.”
“한 나라의 주군에게 감히 ‘귀애’라는 단어를 쓰는 건가?”
입술을 비죽 내밀며 불만을 표하는 테레사.
나는 웃음이 터지려는 것을 참으며 말했다.
“그것이 사실이니 어쩔 수 없지 않습니까, 폐하.”
“허, 점점 그대의 오만방자함이 하늘을 찌르는데···.”
테레사는 나와 농담을 주고받으며 이야기를 마무리했고, 자연스럽게 화제를 돌렸다.
“그나저나 발닉 경이라고 했나?”
“이름도 알고 계셨습니까?”
놀라서 대꾸하자 그녀가 어깨를 으쓱했다.
“아니, 원래는 잘 몰랐는데 아에갈이랑 친하더라고. 레온 전하의 유모, 기억나지?”
“폐하의 귀에까지 들어간 겁니까. ···가신 관리를 제대로 하지 못한 제 불찰입니다.”
발닉 자식이 얼마나 티를 냈길래. 내가 끄응 신음하자 테레사가 킥킥거렸다.
“왜, 둘 다 서로 꽤 마음에 들어하는 것 같던데. 왕궁에도 봄이 온 것 같아서 아주 좋지 뭐야.”
“사실은 그 발닉이 유모 아에갈을 통해 알게 된 사실이라며 제게 보고한 것이 있는데.”
자세를 고쳐앉으며 말하자 테레사의 눈빛이 달라졌다.
“말해보게.”
나는 공국이 보낸 ‘쌍둥이 이능자’ 밀정의 존재, 그리고 도나 레핀 납치사건의 개요만 얘기했다.
더불어 공국이 비밀 기관을 통해 이능자 아이들을 본격 육성하고 있다는 사실까지.
테레사는 ‘쌍둥이 이능자’의 능력에 충격을 받은 모양새였다.
“마음만 먹는다면 남의 나라 왕실을 쑥대밭으로 만들 수도 있는 능력이 아닌가.”
“치명적인 능력이죠. 그러나···.”
내가 그를 포섭해 내 수하로 만들고, 마도구를 이용해 그를 속박해두었다는 말에 테레사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가만 보면 세자르 공은 인재를 참 잘도 영입한단 말이지.”
음, 영입이라기보단 야생동물 포획 같은 느낌이었지만.
“그대의 얼굴이 반쪽이 될 만한 이유가 있었군. 도나 양이 그대의 사촌동생이라 했나?”
“네, 모후궁에서 안느 전하를 모시고 있다 들었습니다만···.”
“일 머리가 좋은 아이라 들었네. 무사하다니 안심이로군.”
나는 이능자 육성 기관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설명한 뒤 덧붙였다.
“한 가지 더 보고할 게 있습니다.”
“어쩐지 불안한데.”
나는 테레사에게 이사벨의 서신을 내밀었다.
편지 내용은 간결했다.
그녀와 세자르 사이의 밀담 내용이 새어나가지 않은 것만큼은 확실하나.
‘최근 공국 사교계의 온도가 달라졌음을 민감하게 받아들인 것 같아요.’
자신이 이 사람 저 사람 분주하게 만나고 다니며 여론을 움직이려 했던 것을 파악했다는 것이다.
칼 오프러스 대공은 즉각 반격에 나섰다.
지지자들을 움직여 사교계의 분위기를 제게 유리하게 만들었을 뿐 아니라.
본인답지 않은 관용을 베푼다며 여기저기에 예산을 퍼부어줬다.
‘결국 귀족사회의 여론은 완전히 바뀌었어요.’
‘얼마 전만 해도 독재자라며 비난당하던 칼 오프러스 대공은 역사상 최고의 지도자로 떠받들어지는 중이고···.’
‘제게 동조하던 귀족들은 돌연 입을 다물었을 뿐 아니라, 대공의 지지자들은 제게 아버지의 등에 칼을 꽂으려 하는 배은망덕한 불효녀라는 오명을 씌우는 중이죠.’
한마디로 내전을 일으킬 만한 명분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권력의 대부분을 대공이 쥐고 있는 상황에 여론마저 좋지 않다면, 공녀의 지지자들조차도 망설일 수밖에.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지?”
진지하게 묻는 테레사의 얼굴을 마주 보며 나는 준비해온 물건을 꺼냈다.
테레사가 고개를 갸웃했다.
“그건 묵주가 아닌가?”
나는 손가락 사이로 묵주 알을 굴리며 말을 받았다.
“네. 이걸 통해 부족한 명분을 확보할 생각입니다만.”
“어떻게?”
“그러기 위해서는 폐하의 허락이 필요합니다.”
내게서 자초지종을 들은 테레사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 * *
이사벨은 황량하기 그지없는 저택 안을 둘러보았다.
오프러스 공국과 에스닐 사이의 국경지대에 자리한 것으로, 평소에는 아무도 살지 않으며 방문객들을 위해 가끔 개방하는 별장이라 들었다.
‘세자르 공의 절친 소유라 했던가.’
최근 이사벨은 여러모로 곤란한 상황에 놓여 있었다.
세자르 레핀 공자와 밀담을 나누고, 은밀히 귀족들을 규합하기로 한 것까지는 좋았지만···.
‘아버지가 그리 신속하게 반격에 나설 줄이야.’
공국의 귀족 사회는 놀라울 정도로 간단하고도 빠르게 그녀에게 등을 돌렸다.
평생에 걸쳐 쌓아왔다고 믿었던 기반과 신뢰관계는 생각보다 쉬이 허물어지는 모래성이었음을, 이사벨은 이제야 실감한 터였다.
그렇게 궁지에 몰린 그녀는 결국 세자르 레핀에게 서신을 보냈고.
-아버지가 내 계획을 눈치채신 것 같아요.
참으로 불명예스럽게도 얼굴 한 번 본 게 전부인 외국인에게 도움을 청하는 신세가 되어버렸으니.
그러나 답신은 금방 날아왔고, 그 안의 내용은 담백하기 그지없었다.
-제게 좋은 생각이 있습니다.
-직접 만나서 말씀드리는 게 나을 테니, 국경지대에 자리한 모로스 저택에서 뵙지요. 저와 가장 친한 동시에, 제 모든 것을 알고 있는 친우 카이저 니펠 경의 별장입니다.
-주변에선 저와 그의 관계를 모르니 눈치채일 염려도 없습니다.
뼛속까지 다 아는 친구와의 관계를 주변에선 모른다는 것이 말이 되나?
그러한 석연찮은 마음을 억누른 채, 이사벨은 평범한 귀부인으로 위장한 채 이곳으로 왔다.
자신에게 따라붙은 미행이 없음을 이능자 호위 기사를 시켜 확인했음에도.
‘불안한 마음은 어쩔 수가 없군.’
사안은 민감하고도 복잡했다.
무려 ‘내전’을 논하는 자리가 아닌가.
작은 실수 하나가, 자신뿐 아니라 수많은 이들의 목숨을 앗아가는 결과로 이어질 수 있는 일.
평소 담대하기로 유명한 그녀조차도 오늘만큼은 긴장되는 마음을 억누를 수가 없다.
“이사벨 님 되십니까?”
그녀가 일국의 공녀임은 모르는 듯한 사용인이 그들을 맞이했다.
안내에 따라 응접실에 앉은 이사벨은 심호흡까지 해가며 두근대는 가슴을 다스리는데.
그녀를 호위하는 어린 여기사의 관심은 다른 데에 가 있는 듯했다.
상기된 얼굴로 자꾸만 두리번거리는 것이 뭔가를 기대하는 눈치다.
“지난번의 그분이 이번에도 오실까요?”
“그분이라니?”
이사벨이 뾰족한 목소리로 되물었지만, 여기사는 눈치채지 못하고 말을 이었다.
“아니 왜 세자르 공의 부관 말입니다. 선이 엄청 가늘고 얼굴 생김이 곱상한··· 이름이 렌이라 했던가요?”
이사벨은 속으로 혀를 찼다.
충성스럽고 뛰어난 무예를 자랑하며, 타인의 기척을 감지하는 이능까지 지닌 이 완벽무결한 호위 기사는···.
‘너무 쉽게 사랑에 빠진단 말이지.’
올해 갓 스물이 된 그녀는 아무리 봐도 세자르 공의 부관에게 푹 빠진 모양이었다.
눈썰미가 좋은 이사벨로서는 통탄할 수밖에 없는 일이었으니.
“···너 대체 무슨 소릴 하는 거야.”
“네? 왜요, 그분 외모는 누가 봐도 근사한-”
“아니 그게 아니라.”
이사벨 공녀는 끙 소리를 내며 말을 이었다.
“그 사람, 여자잖아.”
“···네에?”
눈이 튀어나올 듯 커진 호위 기사를 보며 그녀가 설레설레 고개를 저었다.
‘이럴 줄 알았다니까.’
세자르 공 같은 자가 왜 애먼 여인을 굳이 남장까지 시켜가며 데리고 다니는지 모를 일이었다.
에스닐에는 여자 부관이 흔치 않아서 그런 건가. 아니면 혹시···.
‘애인을 데리고 다니기 위해서?’
그런 의문이 들기는 했지만, 그래 봤자 자신과는 상관없는 일이라는 결론을 이사벨이 내린 순간.
“오래 기다리셨지요.”
응접실 문이 열리며 구면인 얼굴이 나타났다.
자신만만해 보이는 세자르 레핀의 표정을 보자 이사벨은 어쩐지 안심이 되었다.
“아닙니다. 방금 도착한 터라.”
“오는 길은 괜찮으셨는지요.”
간단한 안부 인사를 나눈 뒤, 세자르는 곧바로 본론으로 들어가겠다며 안쪽 방으로 이어지는 문을 가리켰다.
“보여드리고 싶은 인물이 있는데, 공녀 전하만 오시지요.”
호위기사는 응접실에서 대기하는 가운데, 이사벨은 세자르와 단둘이 문을 열고 들어갔다.
문 너머에 자리한 것은 짤막한 복도.
어둑어둑한 복도를 거니는 가운데 세자르는 한 마디도 하지 않았고, 이사벨의 가슴은 불안감으로 요동쳤다.
‘저 안에 기다리고 있다는 게 대체 누구일까.’
자신이 너무 순진하게 이자를 믿은 것이 아닐까.
그래봤자 결국은 공국의 적국이나 다를 바 없는 외국인인데···.
무얼 보고서 그를 덥석 믿고 혼자서 사지에 온 걸까.
수많은 잡념이 머릿속을 뒤덮었을 즈음 문 앞에 도달하자 세자르가 문을 열어주었다.
“먼저 들어가시지요, 공녀 전하.”
열린 문 뒤로 나타난 것은 천장이 낮고 좁은 방이었다.
가구라고는 가운데 놓인 탁자와 의자 몇 개가 전부인 조촐한 방.
그리고 그 탁자에 앉은 채 자신들을 바라보는 자는···.
“···!”
다부지다는 표현이 어울리는 건장한 체격, 독수리처럼 날카롭게 빛나는 눈동자, 나이를 가늠하기 어려운 외모의 소유자.
다름 아닌 그녀의 아버지, 칼 오프러스 대공이었으니까.
소스라치게 놀란 이사벨이 간신히 비명을 삼켰다.
“이,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옆을 돌아보자 세자르는 빙그레 웃고 있다.
···설마 그가 자신을 배신한 걸까?
이사벨이 호신용으로 가져온 마도구를 꺼내려던 순간, 세자르가 쉿 하며 말문을 열었다.
“전하, 안심하셔도 됩니다.”
“이게 대체 무슨 꿍꿍이죠?”
“그저 지켜보시지요.”
그 말에 이사벨은 세차게 뛰는 심장을 억지로 진정시켰다.
‘솔직히 마음 같아선 당장에라도 도망치고 싶지만.’
확실치 않은 상황에서 일국의 공녀가 그런 추태를 보일 수는 없는 법.
결심을 굳히고 다시 탁자를 돌아보자, ‘칼 오프러스 대공’의 얼굴을 한 자가 입을 열었다.
“이제 왔느냐. 내 너에게 한 가지 묻고 싶은 것이 있는데.”
심지어 목소리마저 아버지와 똑 닮았다.
너무 똑같은 나머지 소름이 끼쳐온다.
“이사벨, 모든 이를 일어서게 하는 말이 무엇인지 아느냐?”
모든 이를 일어서게 하는 말이라니, 이런 식으로 자신을 시험하려 드는 것인가?
이사벨은 미간을 좁히며 고심했지만, 답은 쉬이 떠오르지 않았다.
“···.”
“모르겠느냐. 그렇담 이 아비가 답을 알려주지.”
‘칼 오프러스 대공’이 근엄하게 말했다.
“정답은··· ‘다섯’이다.”
“···?”
밀려드는 당혹감에 이사벨이 멈칫한 순간.
“무가 눈물을 흘리면 어찌 되는 줄 아느냐?”
대공은 거침없이 말을 이었다.
“무뚝뚝, 이지.”
“···.”
지금 설마 저건···.
‘농담을 하는 건가?’
이사벨은 당혹감을 넘어 황당무계함을 느꼈다.
저자가 정말 저의 부친이라면 저런 실없는 소리를 할 리가 없으니까!
누군가 칼 오프러스 대공이 실없는 소리를 하는 모습을 봤다고 한다면,
그녀는 그런 일은 불가능하다는 쪽에 제 목숨이라도 걸 수 있었다.
이사벨의 표정을 흘긋 본 세자르가 입을 열었다.
“공녀 전하, 가까이 다가가서 살펴보시지요.”
그 말에 이사벨은 저도 모르게 한 걸음 대공에게 다가섰다.
아버지와 똑같은 얼굴, 똑같은 이목구비이지만···.
‘이 미묘한 이질감은 무엇일까.’
그녀가 흠칫하며 뒤로 물러서자, 세자르가 한 발 앞으로 나섰다.
“장난은 이 정도로 하고, 공녀 전하께 정식으로 소개드리지요.”
그 말에 대공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두꺼운 손목에 찬 팔찌가 찰랑거리며 금속음을 냈다.
“‘쌍둥이의 이능자’, 그랑을 전하께 감히 선보입니다.”
대공의 얼굴을 한 자가 헤벌쭉 웃었다.
칼 오프러스 대공이라면 절대로 짓지 않을 표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