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작가의 서자로 살아가는 법-143화 (143/176)

의외의 복병

* * *

눈을 떠보니 낯선 천장이다.

“우음···.”

온몸이 찌뿌둥한 가운데 도나 레핀은 두 팔을 쭉 뻗어 기지개를 켰다.

잠 기운을 몰아내고 다시 두 눈을 번뜩 뜨자, 이곳이 어디인지 알 수 있었다.

‘레핀 공작저!’

공작저의 손님방에 누워 있음을 깨달은 그녀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세자르 공자가 자신을 안전하게 구출해냈다는 의미이니까.

‘정말로 다행이야.’

긴장이 풀린 덕분일까.

그간 느끼지 못했던 피로감이 한번에 몰아닥치는 기분이었다.

도나는 침대에 누운 채 ‘그날’의 기억을 떠올렸다.

‘타시지요.’

레핀 공작저에서 식솔들을 위한 연회가 열린다는 얘기에 특별히 휴가를 신청해놓은 터였다.

즐거운 마음으로 시녀궁을 빠져나와 마차를 잡아타고 공작저로 가달라고 한 것까지는 좋았는데.

‘···왜 이리 잠이 쏟아지지.’

어쩐 이유인지 마차를 탄 지 얼마 되지 않아 정신없이 잠에 빠져들었고.

깨어나고 보니 어두컴컴한 지하 감옥에 갇혀 있는 것이 아닌가.

도나는 퍼뜩 겁이 나 비명을 질렀다.

‘지금 이게 무슨 짓이에요! 얼른 날 풀어줘요!’

그녀를 가둔 것은 거인처럼 체구가 장대하지만 눈매가 축 처져 온순해 보이는 사내였다.

‘그··· 죄송합니다.’

사내는 납치범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만큼 조심스러운 태도로 일관했다.

창살 문을 커다란 자물쇠로 잠가놓았을 뿐 그녀의 몸을 묶어두지도 않았다. 며칠 분의 물과 먹을 것까지 챙겨놓고는 이렇게 말하는 것이 아닌가.

‘꼭 다시 돌아와 풀어드리겠습니다. 그러니 불편하더라도 며칠만 고생하시면···.’

그 말을 딱히 믿는 것은 아니었지만, 덕분에 두려움이 한결 가셨다.

그것 외에도 한 가지 확신하는 바가 있었으니.

‘납치를 사주한 게 정확히 누구인지는 모르겠지만, 세자르 레핀 공자의 정적이 아닐까.’

그러한 짐작이 들어맞는다면 걱정할 필요는 없었다.

‘세자르 공자님이 날 구해주실 거야.’

그와 그다지 친한 것도, 잘 아는 사이도 아니었지만 어쩐지 그런 생각이 들었고.

“···정말로 그렇게 되었네.”

눈 떠보니 공작저의 천장을 마주한 지금.

도나는 자신의 근거 없는 추측이 틀리지 않았음을 확인했다.

“후우···.”

머릿속이 정리되고 나자 안도의 한숨이 절로 흘러나왔다.

협탁에 놓인 물잔을 들어 바싹 마른 입안을 적시는 순간.

똑똑, 하고 문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들어와요.”

열린 문 너머로 나타난 것은 세자르 레핀 본인이었다.

“세자르 공자님!”

“아니, 그대로 앉아 있어요.”

도나는 깜짝 놀라 침대에서 일어나려 했지만, 세자르가 만류했다.

세자르는 침대 옆으로 의자를 끌고 와 앉았다.

도나는 어쩐지 긴장되는 마음으로 그를 슬쩍 쳐다보았다.

‘전보다 한층 근사해진 느낌이네.’

이 저택에서 처음 그를 봤을 때가 떠오른다. 그때도 여전히 눈부신 외모를 자랑하긴 했지만···.

지금은 자신이 쥔 권위와 힘을 온전히 휘두를 줄 아는 자 특유의 여유가 느껴진달까.

도나는 잘생긴 얼굴을 마주 보다가 어색하게 입을 열었다.

“그··· 저 때문에 걱정이 많으셨-”

“죄송합니다, 도나 양.”

갑작스러운 사과의 말과 함께, 세자르가 그녀를 향해 고개를 깊이 숙였다.

“당신을 납치한 건 제 정적의 소행입니다. 불미스러운 일을 겪게 해···.”

“자, 잠깐만요! 그만 고개를 드세요!”

당황한 도나의 말에 세자르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진심으로 미안해 보이는 얼굴에 도나가 얼른 말을 이었다.

“그렇게까지 죄송해하실 필요 없어요, 세자르 공.”

“그렇지만 나 때문에 납치된 것 아닙니까.”

도나는 일부러 더 밝게 웃어 보였다.

“지금 이렇게 무사한 것도 세자르 공 덕분이잖아요? 저와 제 가족이 공을 만난 건 그야말로 인생의 행운이에요.”

세간에 유행하는 말 중에 ‘세자르 레핀과 악수를 하면 행운이 온다’라는 게 있다.

우스갯소리이겠지만, 도나 자신 그리고 제 가족들에게는 꽤 그럴싸하게 들렸다.

‘우리 가족의 운이 완전히 바뀌었으니까.’

사업 말아먹기가 취미이고 남에게 속아넘어가는 것이 특기이던 아버지는 어느덧 사교계의 명사가 되었고.

집안의 돈만 축내던 놈팽이 오라버니 퍼시는 본인의 적성을 살려 의류 사업을 배우고 있으며.

자신은 무려 왕궁 시녀가 되어 집안 경제를 떠받치고 있으니 말이다!

시녀궁의 일은 적성에 잘 맞았고, 정년이 보장되는 직업이라는 것도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다.

‘게다가 세자르 공의 사촌동생이라는 이유로 제법 특별 대우를 받고 있지.’

세자르를 만난 후로 모든 것이 다 잘 풀렸으니, 소문대로 세자르 공은 ‘행운의 상징물’인지도 모르겠다.

도나가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하지만 옛말에 ‘대가 없는 행운은 없다’는 말이 있잖아요? 제가 공의 힘을 빌어 이 안락함과 호사를 누리고 있는 만큼, 언젠가 이런 일이 있을지 모른다는 건 예상하고 있었어요.”

그 말에 세자르의 눈이 커졌다.

허나 그녀의 말은 진심에서 우러나온 것이었다.

그래서 납치당했을 때도 당황하거나 충격에 빠져 있기보단 느긋하게 구출의 손길을 기다렸다.

‘뭣보다 납치범은 날 죽일 생각까지는 전혀 없어 보였으니까.’

일이 끝나는 대로 돌아와 풀어주겠다 약조하는 그 말이 거짓처럼 들리진 않았다.

누군가 들으면 천하태평에 순진해빠졌다 할지 모르겠지만, 그게 도나 레핀의 타고난 성격이었다.

“그러니 그렇게 마음 쓰실 것 없어요.”

“···그래도 미안한 건 어쩔 수 없군요.”

세자르가 씁쓸하게 웃으며 머리를 쓸어넘기는데, 그의 손목에 찬 무언가가 찰랑거렸다.

여러 개의 구슬을 꿰어 만든 팔찌처럼 생겼지만, 가운데에 사람의 눈 모양(目)을 한 장식물이 달린 것을 보니···.

“어, 그건 알레스 신의 묵주 아닌가요?”

“묵주···요?”

어째 차고 있는 본인은 그 사실조차 모르는 눈치였지만.

도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네, 원래는 신관들이 기도할 때 쓰는 성물이지만, 일반 신도 중 신실한 이들에게도 수여되는 물건이에요.”

세자르는 그런 얘기를 처음 듣는 눈치였다.

“어머니도 이런 묵주를 몸에 늘 지니고 계셨는데, 돌아가신 어머니가 신실하셨어서 어릴 때는 신전에 빠짐없이 다녔거든요.”

“그렇군요, 몰랐습니다.”

“그게 귀한 이유는 단순한 신앙심의 증표가 아니라···.”

도나는 그의 묵주를 흘긋 보며 말을 이었다.

세자르가 찬 묵주는 유리구슬이 아니라 진짜 보석으로 만든, 꽤 귀한 물건으로 보였다.

“묵주를 찬 사람만이 고위 신관을 알현할 수 있기 때문이에요.”

“고위 신관?”

“네, 주교나 추기경, 교황 같은 분들 말이죠.”

세자르가 흥미를 보이자 도나는 좀 더 자세한 설명을 들려주었다.

커글랜드를 제외한 대륙의 모든 나라가 알레스교를 국교로 삼고 있으며.

그런 만큼 교황은 수많은 나라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고.

“오죽하면 ‘한 나라의 왕도 교황에게 파문당하면 끝장이다’라고 말할 정도이니까요.”

“파문이라···.”

세자르가 제 턱을 문지르며 그 단어를 되풀이했다.

어째서 공작가 자제가 이런 기본적인 신학 상식이 없는지 이해가 되지는 않았지만.

그가 만족스러워하니 됐지, 라고만 도나는 생각했다.

“그것 참 흥미로운 사실이군요.”

그렇게 대답하는 세자르의 입가에 미묘한 미소가 걸렸다.

* * *

도나 레핀이 무사히 깨어난 그날 저녁.

나는 지하 감옥 대신 손님방에 묶여 있는 거인에게로 향했다.

롯과 3형제가 긴장한 기색으로 내 옆에 서 있는 가운데, 나는 놈에게 ‘제어의 팔찌’를 건넸다.

“네가 정말로 내 아래서 일할 생각이 있다면, 이걸 차도록.”

“이게 뭐지?”

“착용자의 충성심을 시험하는 물건이라고 할까. 나도 아무 보증 없이 널 내 아랫사람으로 둘 순 없잖아?”

나는 씩 웃으며 거인과 눈을 맞추었다.

“배신이란 처음이 어렵지 두 번째는 더 쉬우니까.”

“···.”

거인이 이를 으득 갈았지만, 처음과는 달리 그다지 위협적으로 느껴지지 않았다.

열두 살이라는 얘기를 들어서 그런가, 제법 인상이 어린애처럼 보이기도 하고 말이지.

“나는 신념을 밥 먹듯 내버리는 인간이 아냐.”

“그래, 그런 마음가짐은 좋아. 좋으니까···.”

나는 싸늘한 눈빛으로 거인이 쥐고 있는 팔찌를 가리켜 보였다.

“그거나 차고 얘기하지.”

거인은 내키지 않는 얼굴로 팔찌를 찼다.

손목이 워낙 굵은 탓에 팔찌가 안 들어가는가 싶었지만, 어느새 굵기에 맞춰 길이가 늘어난 터였다.

“이거면 됐어?”

“아직 안 끝났다, 꼬마.”

“···날 꼬마라고 하지 마라!”

꼬마라는 호칭에 발끈하는 것 보니 열두 살이 맞긴 한가 보다.

“이 팔찌가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알아야지, 안 그래?”

나는 실소를 흘리며 말을 이었다.

“나 처음 봤을 때 했던 것 있잖아. 두 손을 머리 위로 둥글게 올리는···. 그거 다시 해봐.”

하트를 그리는 거라고 하면 설명하기 편한데.

그러나 거인 꼬마뿐 아니라 롯 남매들도 모두 말을 알아들은 모양이었다.

“···!”

“그건!”

“그것만큼은!”

“안 됩니다 주군!”

“세자르 님, 제발···.”

···내가 무슨 사약이라도 마시라고 한 듯한 반응을 보였으니까 말이다.

대체 무슨 의미이길래 이렇게 난리인지 모르겠지만, 나는 거인 꼬마에게 재촉하듯 말했다.

“해보라니까.”

“···그건.”

“처음에는 잘만 하더니, 이제 목숨이 아까워졌나 보지?”

“아니다!”

거인은 발끈하며 두 팔을 들어올렸고, 3형제가 말릴 틈도 없이 하트 모양을 그려보였다.

“■■■··· ■■!”

3형제의 입에서 욕설로 추정되는 카디움 어가 쏟아져 나왔지만.

욕설은 오래 이어지지 못했다.

“크악!”

거인이 뭐에 감전된 사람처럼 몸을 파드득 떨며 두 팔을 떨어뜨렸으니까.

튀어나올 듯 커진 그의 눈을 마주 보며 내가 씩 웃었다.

“꽤 따끔하지, 안 그래?”

“이게 따끔이라고?”

“봐봐, 그 손 동작을 했다고 이 정도 충격이 올 정도인데···.”

나는 얼굴에서 웃음기를 걷어내며 말했다.

“네가 날 배신하려고 작정하면 어떻게 될까? 그 점을 스스로 생각해보라는 거지. ···롯, 포박을 풀어줘라.”

거인 소년은 분한 듯 입술을 깨물었지만, 밧줄을 푸는 롯의 손길에 순순히 몸을 맡겼다.

“그나저나 네 이름이 뭐지?”

그러자 소년은 당황한 듯 입을 우물거렸다.

한참 대답이 없자 롯이 재촉했다.

“아엘라의 셋째 아들, 얼른 대답하거라.”

“그게···.”

소년은 곤란한 듯 미간을 찌푸렸다.

“내 이름이 기억나지 않아.”

방 안이 조용해진 가운데, 소년이 담담하게 말했다.

공국에 잡혔을 때가 여덟 살이었고, 그 후로는 계속 ‘쌍둥이 이능자’라고만 불린 탓에 자신의 이름을 까맣게 잊었다고.

“···.”

롯과 3형제가 뭐라 설명할 수 없는 표정을 짓는 것이 보인다.

분하기도, 안타깝기도, 씁쓸하기도 한 그런 얼굴들.

이제는 완벽한 ‘내 사람들’이나 다를 바 없는 이들의 표정을 보며 입을 열었다.

“그럼 ‘그랑’은 어때?”

“그랑?”

‘그랑’은 프랑스어로 ‘크다’는 뜻으로, 펜싱에서 종종 등장하는 용어였다.

“네 새로운 이름 말이다.”

“···.”

갈 곳 잃은 듯한 눈빛을 하고 있던 소년의 눈동자에 총기가 돌았다.

“그럼 난 이만 나가보겠다.”

나는 그들을 두고 방을 나섰다.

같은 부족민들끼리 밀린 회포를 풀 것도 있을 테고, 나도 나름 할 일이 있었으니까.

발걸음을 재촉해 집무실로 돌아가는데 손목에 찬 팔찌, 아니 묵주가 찰랑거렸다.

‘도나가 생각지도 못한 힌트를 주었군.’

그녀가 아니었다면 이게 알레스교의 묵주이며, 이걸 이용해 ‘교황을 알현’할 수 있다는 사실은 알지 못했을 거다.

이걸 어디서 얻었냐고 묻는다면, 오늘 아침 도전과제가 달성된 덕분이었다.

[도전과제 ‘진짜는 너다’ 달성! - 진짜 도나 레핀을 구출했습니다.]

[보상으로 ‘알레스 신의 장미’를 받았습니다.]

그와 동시에 보석알을 꿰어놓은 팔찌가 눈앞에 나타났다.

‘근데 장미라니, 대체 무슨 소리야?’

처음만 해도 그렇게 생각했지만, 이제는 이해가 되었다.

‘묵주를 로사리오라고도 하잖아?’

로사리오의 어원은 ‘장미’라고 어디선가 들었던 것 같다. 게다가 이걸 이용해 고위 신관을 알현할 수 있다는 것까지 알고 나자.

-알레스 정교단의 우두머리와 접촉했나요?

-칼 오프러스 대공을 파문시켰나요?

여태 감이 오지 않았던 도전과제들이 의도하는 바.

그리고 이 묵주의 진정한 용도를 알아차릴 수 있었다.

왜냐하면···.

-세자르 공, 문제가 생겼습니다.

바로 한 시간 전, 칼 오프러스 대공의 딸 이사벨 공녀가 내게 밀정을 통해 보낸 서신이 도착했으며.

그 서신의 내용을 한 줄로 요약하자면, 아래와 같았기 때문이다.

-아버지가 내 계획을 눈치채신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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