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운의 부적?
* * *
세자르 레핀은 자리를 떠났지만 나머지 가신들은 그러지 않았다.
롯과 3형제는 가만히 거인, 아니 쌍둥이 이능자를 지켜보았다.
이능자는 그들의 시선조차 눈치채지 못한 모습이었다. 세자르의 위협이 어지간히 겁났는지 덩치가 무색할 정도로 벌벌 떨고 있는 중이었으니.
롯은 한숨을 내쉬며 긴 머리를 쓸어올렸다.
‘세자르 님이 설득을 허락해주셔서 다행이네.’
기절해 눈을 감은 모습을 봤을 때는 혹시나 싶었다. 헌데 눈을 뜬 채 세자르에게 대거리를 하는 것을 보니 더더욱 확신이 들었다.
결심을 굳힌 롯이 카디움 부족어로 말했다.
[너, 아헬라의 막내아들 맞지?]
[···!]
거인이 깜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롯과 3형제의 시선이 제게 한 번에 쏟아지자 당황한 모양새였다.
[네 이름까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너 카디움 부족이잖아. 안 그래?]
직설적인 질문에도 거인은 입을 열지 않았다.
그가 입술을 지그시 깨무는 것을 보며 롯이 말을 이었다.
[우리를 못 알아보겠나?]
그 말에 거인은 롯을, 이내 나답, 나훔, 나만 형제를 차례로 주시했고.
[나는 롯, 이쪽은 내 오빠들 나답, 나훔, 나만으로 카디움 부족장의 자녀들이다.]
이내 두 눈이 튀어나올 듯 커졌다.
그가 이를 갈며 롯의 말을 잘랐다.
[그런 너희가 지금 여기서 뭘 하는 거지? 카디움 부족을 멸망시킨 에스닐인들을 위해 봉사하다니, 제정신이냐?]
부끄러움도 없는, 하고 이어가려는 그의 말을 롯이 잘랐다.
[세자르 레핀 공자는 우리의 은인이다.]
[뭐?]
[우리의 터전을 공격하고 카디움인들을 잡아다 노예로 만든 헬리오스 백작에게서 내 오라비들과 부족민들을 구해준 은인이란 얘기다!]
방금 전만 해도 적의로 불타던 거인의 눈이 이채를 띠었다.
[우리를 자유의 몸으로 만들어준 후, 세자르 공은 선택권을 주었다. 우리의 재능을 높이 사고 있으니, 너희가 원한다면 자신의 가신이 되어달라고. ···우리는 어디까지나 우리 자신의 선택으로 그분을 섬기는 것이다.]
거인이 믿을 수 없다는 듯 두 눈을 껌벅거리는 가운데, 롯이 밀어붙였다.
[우리와 그분이 군신 관계라면, 너와 오프러스 대공은 노예와 주인의 관계가 아닌가!]
그녀의 말에 거인이 성마른 목소리로 외쳤다.
[노예라니, 나는··· 나 또한 어디까지나 내 의지로 각하를 섬기는 거다.]
[너의 의지로?]
[그래! 그분은 내게 에스닐의 멸망을 약속하셨다!]
그의 목소리는 진심 어린 분노로 가득했다.
[양친을 잃고 그 누구도 의지할 수 없었던 어린 나를 데려와, 먹이고 입히고 재워주신 것이 모두 그분의 은덕이란 말이다!]
힘겹게 외치는 상대를 롯은 가만히 쳐다보았다.
그녀나 오빠들이 아닌, 자기 자신에게 되뇌이는 것처럼 보였다.
쌍둥이 이능자가 숨을 헐떡이며 말을 토해냈다.
[이러니 저러니 해도 결국 너희의 말은 궤변이야! 그런 너희와 달리 나는 우리 부족의 복수를 위해 온 힘을 쏟아-]
[복수와는 아무 상관 없는 더러운 임무까지 맡아가면서 말인가?]
[···!]
그 말에 거인의 눈이 커졌다.
롯은 자신이 그의 정곡을 찔렀음을 확신했다.
[게다가 대공은 매번 네 목숨을 담보로 임무를 맡기는 것 같은데.]
그녀가 눈짓하자 나답이 다가와 거인의 팔을 번쩍 들어올렸다.
흘러내린 소매 아래로 팔 안쪽에 찍힌 낙인이 드러났다.
[대체 어떤 주군이 가신에게 그런 독을 주입하며, 그 신체에 이런 낙인을 찍는단 말인가? ···그러고도 네가 카디움 부족으로서의 긍지를 잊지 않았다고 할 수 있단 말이냐!]
이제 거인의 얼굴은 흙빛이 되어 있었다.
애써 부정하고 싶었지만 끝내 그럴 수 없는 진실 앞에서 그의 입매가 일그러진 순간.
롯이 쐐기를 박았다.
[네가 섬기는 그 빌어먹을 대공이 우리 부족을 멸족시킨 헬리오스 백작과 손을 잡은 건 알고 있겠지?]
[뭐라고?]
거인의 두 눈이 황망하게 빛났다.
롯은 싸늘한 눈으로 그를 마주 보았다.
[몰랐나? 처음부터 대공은 네 복수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다는 거다.]
[···.]
거인이 두 손으로 제 얼굴을 감쌌다.
솥뚜껑만 한 손바닥에 얼굴을 묻고 몸을 들썩이는 그의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한 마디 덧붙였다.
[생각할 시간이 필요할 것 같군.]
롯은 제 오빠들에게 시선을 돌렸다.
“이만 가자.”
“···그래.”
자꾸만 뒤를 돌아보는 3형제와 달리, 롯은 뒤돌아보지 않은 채 지하 감옥을 나섰다.
‘저 아이의 사정이 어떻든 간에.’
선택은 어디까지나 자기 자신의 몫이었다.
* * *
지하 감옥을 나온 지 정확히 한 시간 만에 이능자는 투항하겠다는 뜻을 밝혀왔다.
“순순히 투항할 줄은 몰랐는데, 의외인걸.”
그렇게 말하며 옆을 슥 돌아보자, 롯이 눈길을 피한다.
그녀가 설득에 성공한 모양이지.
나는 카렌과 롯을 데리고 지하 감옥으로 내려갔다.
창살 문을 열고 들어가자 그새 급격히 초췌해진 거인의 모습이 나타났다.
“전부 다 털어놓겠다니 탁월한 선택이로군.”
내 빈정거림에 거인은 미간을 구겼지만, 카렌이 나서서 질문하자 순순히 대답했다.
“그래, 도나 레핀은 멀쩡히 살아 있다.”
카렌은 나를 돌아보더니 눈으로 신호를 주었다. 쌍둥이 이능자가 진실을 말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그렇다면 지금 그녀는 어디 있지?”
잠시 입술을 깨물던 이능자가 말했다.
“벡카드 백작저의 지하감옥 제일 안쪽에 자리한 비밀방에.”
“···비밀방?”
이내 그는 포기한 듯 모든 것을 털어놓았다.
비밀방의 위치, 그곳에 이르는 방법, 열쇠를 여는 방법까지 전부 다.
그 말을 듣자마자 롯이 나섰다.
“저와 오빠들이 가겠습니다!”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카디움 남매들은 백카드 백작저를 향해 출발했다.
* * *
그로부터 정확히 여섯 시간 뒤.
롯이 전서구로 쪽지를 보냈다.
-도나 레핀 양은 무사합니다. 곧바로 저택으로 데려가겠습니다.
그것을 확인하자마자 나는 주치의를 불러 빨간 액체가 든 병을 건넸다.
“지하 감옥의 죄수에게 투여하도록.”
어쨌거나 약속은 약속이니까.
쌍둥이 이능자는 해독제를 투여받자마자 긴장이 풀렸는지 그대로 잠들어버렸다.
“도나 양을 무사히 데리고 왔습니다!”
서너 시간 후, 역시 곤히 잠든 도나 레핀을 데리고서 롯 일행이 공작저로 돌아왔다.
가볍게 긁힌 상처 외에는 다친 곳이 없어 보였으며, 잠든 얼굴은 평온해 보였다.
“도나 양을 침실로 데려다주도록.”
가신들 앞에서는 애써 감정을 숨겼지만, 집무실로 홀로 돌아가자 안도의 한숨이 터져 나왔다.
“후우···.”
얼굴을 쓸어내리는데 아까부터 내내 힘을 준 탓인지 미간에 주름이 파여 있다.
나는 잠시 한숨돌린 뒤에야 롯과 3형제를 불러들였다.
롯은 어떻게 작전을 수행했는지 담담하게 보고했다.
“벡카드 저택에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덕분에 그녀를 구출하는 것은 쉬웠다.
지키는 이 하나 없이, 오로지 자물쇠 하나만이 그녀의 탈출을 막는 전부였으며.
도나 레핀의 주변에는 며칠을 버틸 만큼의 물과 식량이 놓여 있었다고 한다.
“도나 양이 납치당한 건 이틀 전의 일이라고 하더군요.”
그녀의 증언과 쌍둥이 이능자가 털어놓은 이야기를 종합하자면.
지금으로부터 1주일 전, 이능자는 왕궁의 하급 경비병을 기절시킨 뒤 그의 모습으로 변신하고서 왕궁에 잠입했다.
경비병의 일과에 맞춰 출퇴근을 반복하며 시녀들의 동선을 파악했고.
그 가운데서도 도나 레핀을 집중적으로 탐색해 결국 그녀를 발견했다는 것이다.
‘문제의 사건이 일어난 게 그저께 오후라는 건가.’
도나가 평소처럼 퇴근해 왕궁을 나오는 길.
시녀들이 곧잘 마차를 잡아타는 길목에서 마부로 위장해 대기하고 있다가 그녀를 자신의 마차에 태웠고.
곧바로 벡카드 가문의 저택으로 데려가 감옥에 가두었단다.
“다행히 폭력을 쓰진 않았다고 합니다. 도리어 도나 양 쪽에서 이능자를 공격했다고 하더군요.”
나는 쌍둥이 이능자의 얼굴에 긁힌 상처가 여기저기 나 있던 것을 떠올렸다.
“그렇담 그나마 다행이지만···.”
롯이 그렇게 말했음에도 일말의 불안감을 떨쳐낼 수 없었다.
무엇보다도 도나는 한창 때의 아가씨인데다 상당한 미인이니만큼···.
“저기, 롯.”
망설이던 나는 결국 말을 꺼내고 말았다.
험악하기 그지없는 이능자의 얼굴이 자꾸만 눈앞에 아른거렸다.
“혹시 안 좋은 일을 당하거나··· 그런 것 같진 않던가?”
고개를 갸웃거리던 롯은 금세 내가 의미하는 바를 알아차렸다.
“아뇨, 그건 아닌 게 분명합니다.”
“그럼 다행이군.”
“무엇보다 그 아이는 아직 어리니까요. 열두 살밖에 안 되었으니-”
“뭐?”
하마터면 벌떡 일어날 뻔했다.
“모르셨습니까? 딱 봐도 앳돼 보이는데.”
“···그건 좀 아닌 것 같은데.”
“그런가요? 저희 부족 아이들은 원래 좀 얼굴이 일찍부터 나이 들어 보이는 경향이 있어서.”
롯은 과거를 회상하는 듯 아련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제가 그 아이를 마지막으로 봤을 때만 해도 코흘리개 꼬맹이였는데···.”
그 외모로 열두 살이라니, 정말 충격이다.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데 롯의 말이 이어졌다.
“자세히 보면 은근히 귀여운 얼굴인걸요.”
···야, 그건 좀 아니지.
어쨌거나 지금 한 가지 할 일이 생겼다.
“어디 가십니까, 세자르 님?”
롯의 물음에 나는 씁쓸하게 대답했다.
“에드윈 경을 만나려고.”
* * *
에드윈 레핀 경과 그 아들 퍼시는 하루 만에 얼굴이 해쓱해진 참이었다.
그들이 도나의 실종을 알게 된 것은 어젯밤의 일로, 전서구로 소식을 받자마자 곧바로 이곳으로 달려온 것이다.
에드윈 경이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도나를··· 찾으셨단 말입니까?”
쌍둥이 이능자가 그녀로 변신했다든가, 그 이능자가 사실은 공국이 보낸 밀정이라든가.
그런 자세한 사정까지는 얘기하지 않았다.
“네, 다행히 제 가신들이 방금 도나 양을 데려왔습니다. 지금은 잠들어 있고요.”
다만 그들이 아는 것은 도나가 퇴근 후에 돌연 누군가에게 납치되었고, 그녀를 납치한 자가 나 세자르 레핀의 정적이라는 것뿐.
“죄송합니다, 에드윈 경. 심려를 끼쳐드려 무어라 드릴 말씀이 없군요.”
하나뿐인 귀한 딸을 나 때문에 잃을 뻔한 것이니 원망의 말을 들어도 어쩔 수 없는 상황이다.
나는 최대한의 진심을 담아 말하고는 고개를 푹 숙여 보였다.
무슨 말을 들어도 감내하겠다는 마음가짐으로 대답을 기다리는데, 에드윈의 목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드십시오, 세자르 공.”
그는 웃는 것도 우는 것도 아닌 미묘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솔직히 지금도 마음의 동요가 가라앉지 않습니다만··· 세자르 공 덕분에 도나가 무사한 것 아니겠습니까.”
그때 퍼시 레핀이 끼어들었다.
“게다가 도나 그 계집애가 호락호락하게 당하고 울고 있을 성격은 아니잖아요?”
“퍼시.”
에드윈이 짜증 섞인 목소리로 제 이름을 부르는데도, 퍼시는 넉살 좋게 말을 이었다.
“저도 물론 걱정은 했지만, 무사히 돌아왔으니 다행이라는 얘깁니다 아버지.”
“그거야 그렇지만 도나가 혹시나 충격을 받았을까 봐···.”
“왜 어렸을 때 일 기억 안 나세요? 아버지 사업 실패 때문에 한창 빚쟁이들한테 쫓겨다닐 때 있었잖아요.”
에드윈 레핀이 크흠, 하고 헛기침을 했지만 퍼시는 말을 멈추지 않았다.
“그때 나랑 도나 붙들고서 온갖 협박을 해대는 놈들이 얼마나 많았는데요. 몇 번은 정말로 노예사업장에 팔려갈 뻔도 했었는데···.”
나는 내심 깜짝 놀랐지만, 퍼시는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한 기색이었다.
“그때마다 나는 눈물 콧물 쏟아가며 펑펑 울었는데, 도나 그 기집애는 고개를 들고서 어른들한테 거래를 제안하더군요. 우릴 몇 푼 받고 노예로 팔아버리느니 우리 아버지를 압박해서 밀린 돈을 받아내는 게 낫지 않겠냐며.”
퍼시는 그 후로도 온갖 파란만장한 모험담을 한참 떠들어댔다. ···모르긴 몰라도 이들 남매는 깨나 험난한 유년기를 보낸 모양이다.
이야기를 마친 그가 어깨를 으쓱했다.
“요는 너무 죄송해하실 것 없다는 겁니다, 세자르 공.”
“···.”
“공께 많은 것을 받은 만큼, 저희도 정치적 이해 관계에 연루될 수 있다는 건 늘 인지하고 있으니까요.”
퍼시의 말에 나는 눈을 크게 떴다.
그의 말에 깊은 인상을 받은 건 나뿐이 아닌 듯했다.
“···너 정말 내 아들 퍼시가 맞느냐?”
“대체 무슨 말이에요, 아버지. 자기 아들도 못 알아봐요?”
“···.”
휘둥그레진 눈으로 퍼시를 돌아보는 에드윈 레핀에게 나는 한 걸음 다가가 그의 손목을 가리켜 보였다.
“아 그리고 에드윈 경. 이제 그 팔찌를 돌려주실 수 있으실까요?”
제어의 팔찌.
그가 어디 가서 내게 불리한 짓을 하지 못하게 하는 족쇄를 에드윈 경은 언제 어디서든 차고 다녔다.
그가 내게 허튼 짓을 하지 않을 거라는 것은 충분히 입증되었으니, 이제는 새로운 인물에게 족쇄를 채울 차례.
“아, 이것 말씀이십니까.”
팔찌를 푸는 에드윈은 어쩐지 아쉬워하는 듯 보였다.
그리고 그건 내 착각이 아니었다.
“좀 아쉽군요.”
“아쉽다뇨?”
에드윈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제 손 안의 팔찌를 만지작거렸다.
“이게 제겐 행운의 부적 같은 물건이었거든요.”
“···?”
“세자르 공을 만난 뒤부터 모든 일이 술술 잘 풀렸으니 말입니다.”
그러면서 환히 웃어 보이는 것 아닌가.
‘아, 양심이···.’
나는 속으로 뜨끔해하며 팔찌를 받아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