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작가의 서자로 살아가는 법-141화 (141/176)

거래의 기본

변신의 이능이 해제된다는 메시지와 함께.

내가 붙잡은 그의 손목을 중심으로 모든 것이 스르륵 변해갔다.

푸른색 소매 끝의 공단 레이스는 거칠고 투박한 질감의 소맷단으로.

가느다란 팔은 굵고 튼튼한 팔로 변했으며,

자그마하던 몸집은 풍선처럼 부풀어올라 거대해졌다.

“···하.”

마침내 원래 모습으로 돌아온 상대를, 나는 헛웃음을 지으며 마주 보았다.

나보다 머리 하나는 클 법한 키에 거대한 체구가 흡사 거인 같다.

에스닐인들에 비해 유난히 어두운 피부 톤, 유난히 길고 가느다란 눈에 돋보이는 험상궂은 얼굴.

‘이민족인가.’

어쩐지 익숙한 인상이라는 기분이 든 순간.

‘쌍둥이 이능자’가 내게 붙잡히지 않은 팔을 들어올렸다.

육중한 주먹을 내 머리 위로 내리꽂으려는 순간!

“후!”

나는 재빨리 뒤로 피하며 마비침을 불었다.

대롱 끝에서 튀어나간 침은 그대로 거인의 목에 박혔으나.

“크윽!”

거인은 신음만 했을 뿐 곧바로 쓰러지지 않았다.

'여태껏 마비침의 일격에 쓰러지지 않는 경우가 없었는데.'

그가 허공으로 손을 내뻗으며 제 목의 침을 빼내려 했다.

만일의 경우를 대비해 내가 준비해온 총을 꺼내든 순간!

“으으···.”

거인의 몸이 휘청거리더니 이내 쿠웅! 하고 바닥에 쓰러졌다.

문이 벌컥 열리며 카렌이 뛰어들어왔다.

“어떻게 된 거야!”

나는 대답 대신 바닥에 쓰러진 거인을 가리켜 보였다.

카렌은 그쪽으로 다가가 몸을 굽혔고, 거인이 완전히 의식을 잃은 것을 확인했다.

곧이어 3형제가 들어와 셋이 함께 거인을 들쳐업고 나갔다. 지하 감옥을 준비시켜놨다는 우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째 바람 잘 날이 없네.”

대략 상황이 정리된 뒤 집무실에 남은 것은 나와 카렌뿐.

한숨을 내쉬자 그녀가 미간을 좁히며 나를 돌아보았다.

“근데 말이야, 형식상의 약혼 관계라는 건 대체 뭐야?”

“···어?”

나는 순간 당황했다.

설마 그 말까지 들었을 줄은 몰랐으니까.

“왜 거기서 내 이름이···.”

카렌의 목소리가 이어졌지만 뭐라고 말하는지 들어오지 않았다.

‘뭐라고 해야 하지.’

진심은 그게 아니다, 이능자를 속여넘기려고 둘러댄 말이라고 해야 하나.

아니 그랬다가 네 진심이 뭐냐고 묻기라도 하면···.

나는 입안이 바짝 마르는 것을 느끼며 되는 대로 말을 내뱉었다.

“그게, 말하자면 저 이능자를 속이기 위한 연극-”

“아니 그건 아는데.”

카렌은 팔짱을 끼며 나를 빤히 보았다.

“내가 언제 네 공공연한 약혼녀가 되어버린 거냐, 이거지.”

“응?”

“고작 춤 한 번 춘게 다잖아, 근데 그거 가지고 다들 우리 둘 사이에 뭐가 있다고 생각하는 분위기인 것 같더라?”

···뭐야, 그쪽이 문제인 거였어?

괜히 허탈해지는데, 카렌이 화제를 돌렸다.

“그거야 그렇다 치고, 도나 양의 신변부터 파악해야 하지 않겠어?”

“···그렇지.”

입안이 썼다.

주변 사람이 나 때문에 본격적인 위험에 휘말린 건 이번이 처음이었으니까.

“그래서 바바 놈을 불러놨지.”

내 의중을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구나.

내 눈빛을 보며 카렌이 활짝 웃었다.

“그 밥만 축내는 자식을 이럴 때 아니면 언제 써먹겠어?”

* * *

바바는 카렌이 시킨 대로 응접실에서 얌전히 대기하는 중이었다.

“오래 기다렸나?”

내가 들어가며 묻자 바바는 얼른 고개를 저었다.

“오래는요, 되려 그 술판에서 벗어날 수 있어서 다행이었습니다요.”

맞은편에 앉아 얼굴을 마주 보니, 바바의 낯이 해쓱하기 그지없다.

몇 시간 만에 홀쭉해진 것이 단기 다이어트라도 끝마친 느낌이랄까.

“점 봐달라는 인간들한테 많이 시달렸나 보지?”

“어디 시달리기만 한 정도겠습니까, 주인님이 아량을 베풀어주신 덕분에 복채를 안 받겠다 하니 다들 이때다 싶어···.”

직업, 금전, 애정, 건강 운을 봐달라는 것도 모자라 사돈의 팔촌 운명까지 물어대는 통에 죽는 줄 알았다고 푸념하는 바바.

“그래, 잡설은 그 정도로 하고.”

내 표정을 본 바바가 태도를 바꿨다.

“제 이능이 필요하신 것이지요? 어떤 질문이든 하시지요.”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내 질문은 이거다. ···‘도나 레핀은 지금 어디 있는가?’”

그러자 바바의 표정은 아까보다 더욱 창백해졌다.

방금 전, 자신이 정원에서 도나 레핀과 대화를 나눴던 것을 떠올리는 모양이었다.

“그렇담 아까 그 여자가 정말 ‘쌍둥이의 이능자’라는···.”

“그래. 그러니 진짜 도나를 한시바삐 찾아야 해.”

바바가 종이를 펼친 뒤 정신을 집중했다. 여느 때처럼 강력한 이능의 기운이 느껴지는가 싶더니-

“안 됩니다요.”

“···뭐?”

울상을 짓는 바바의 손 아래서, 새하얀 종이가 금세 새카맣게 물들었다.

나는 얼마 전의 기억을 떠올렸다.

‘누군가 의도적으로 제 힘을 방해하는 것 같단 말이지요.’

테레사 여왕의 결혼식 예지를 방해하던 그자가, 아마도 이 ‘도나 레핀의 행방’에 관련된 예지 또한 가로막고 있는 듯하다.

“이거 어쩌지요.”

바바가 불안한 기색으로 입술을 깨물었다. 나 또한 걱정되는 것은 마찬가지였으니.

‘만일 바꿔치기 된 지 오래되었다면, 그것으로도 모자라 이미 죽었다면···.’

도나의 시체를 붙들고 오열하는 에드윈 경과 그녀 오빠의 모습이 한순간 뇌리에 그려졌지만.

나는 얼른 고개를 저었다. 지금 절망에 빠지는 것은 무엇 하나 도움이 되지 않으니까.

“그렇다면 질문을 바꿔야지.”

“어떻게?”

황망한 눈빛의 바바를 보며 단호하게 말했다.

“지금 제일 중요한 건 도나 양의 생사 아니겠나?”

“아!”

바바는 ‘도나 레핀은 살아 있는가?’라는 질문으로 다시금 예지의 이능을 사용했다.

나는 떨리는 마음으로 종이 위를 주시했다.

강렬한 힘의 파동이 느껴지며 검은 글씨가 서서히 나타났다.

이윽고 완성된 글자는 단 한 자뿐.

‘예.’

완벽한 긍정의 표현에 나도 모르게 안도하고 말았다.

바바 역시 마찬가지였는지, 참았던 숨을 몰아내쉬었다.

“후우, 아이고 이거 진땀 흘렸구만요.”

나는 바바를 내보내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

‘도나가 살아 있음을 확인한 것만으로도 한시름 덜은 기분이군.’

이제 남은 것은 지하 감옥에 가둬놓은 거인 자식을 문초해 숨겨둔 곳을 알아내는 것뿐이다.

그러나 문제는 이자 또한 대공의 시한부 독을 투여받은 상태일 수 있다는 것.

어차피 공국으로 돌아갈 수 없다면 죽은 목숨이나 다를 바 없는데, 그런 상황에서는 무슨 짓을 한들 입을 열지 않을 수 있다.

최악의 경우, 고문을 한다 해도 시한부 독의 여파로 정보를 얻기 전에 죽어버릴 수도 있지 않은가!

“젠장.”

치밀어오르는 불안감에 머리를 거칠게 헝클어뜨리는 순간.

응접실 문을 두드리는 소리와 함께 롯의 목소리가 들렸다.

“잠시 들어가도 괜찮을까요?”

허락의 말에 조심스레 들어온 롯은 지하감옥에 쌍둥이 이능자를 잘 가둬놓았다고 보고했다.

“그리고 이 이능자의 신원에 관해 말씀드리고 싶은 것이 있는데요.”

“뭐지?”

롯의 표정이 복잡해졌다.

“저자는 아무래도 저희 카디움 부족 출신 같습니다.”

“···정말이야?”

“기절한 얼굴만으로는 확신하기 어려우나, 그것도 제가 아는 이의 자제 같습니다만···.”

나는 몇 년 전 헬리오스 백작이 벌인 영토전(이라 쓰고 노예충당 작전이라 읽는) 때문에 카디움 족이 뿔뿔이 흝어졌음을 떠올렸다.

절반은 죽었고 나머지 절반 중 대부분이 노예로 팔려나갔으며, 지극히 소수만이 롯과 그 형제들처럼 자유를 얻었던 것을.

“기회를 주신다면 제가 저자를 설득해봐도 괜찮을까요?”

침착함을 가장한 롯의 얼굴 너머에서 복잡한 감정의 파문이 느껴졌다.

“좋아, 대신 그 목적은···.”

파르르 떨리는 그녀의 입술을 보며 나는 말을 이었다.

“어디까지나 너희가 그자의 입에서 ‘도나 레핀’의 행방을 알아내는 것이 되어야 한다, 알겠지?”

···그 이상도, 그 이하도 되어서는 안 된다는 의미를 함축한 말.

롯은 “존명”이라며 고개를 꾸벅 숙여 보였다. 그녀를 내보내자 피로감이 온몸을 엄습했다.

롯과 그 형제들이 공국의 밀정을 쉽게 설득할 수 있으리라 보이지는 않지만.

‘지금으로선 솔직히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이니까.’

나는 그 길로 일어나 내 침실로 향했다.

침대에 눕자마자 깊은 수마가 내 몸을 덮쳤다.

* * *

다음 날 아침.

눈을 뜨자마자 반가운 메시지가 나를 기다렸다.

[도전과제 ‘소설에 내가 나왔으면 정말 좋겠네’ 달성! - 쌍둥이 이능자의 정체를 밝혔습니다.]

[보상으로···.]

그 뒤에 이어지는 설명을 보고 실소하고 말았다.

“거참 시기적절한 보상이네.”

나는 그 길로 롯과 3형제를 대동하고서 지하 감옥으로 내려갔다.

“내게 뭐 할 말 없나?”

“···.”

여간한 성인 남성의 1.5배는 되어 보이는 떡 벌어진 어깨, 널따란 등판, 두꺼운 팔.

‘거인’이라는 말이 누구보다도 잘 어울리는 자가 예상 외로 순순히 묶여 있었다.

‘저자가 도나로 변신했다고 생각하니 소름이 돋는군.’

디터조차 저 옆에 서면 날씬해 보일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며 나는 재차 물었다.

“공국이 내게 붙인 밀정, 그게 네가 맞냐는 얘기다.”

거인은 입술을 지그시 깨물더니 돌연 나를 향해···.

두 팔로 하트를 그려 보였다.

“···?”

그 갑작스러운 제스처에 당황한 것도 잠시.

“어디 감히 저런 상스러운!”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새끼가 어디서 저런 되어먹지 못한 짓을···!”

“내 당장 저 놈의 목을 부러뜨려···.”

나답, 나훔, 나만 삼형제가 일제히 분개하며 일어섰다.

혹시 저게 이 세계에선 상대에게 모욕감을 주는 손짓인가.

왜, 우리도 세 번째 손가락을 들어올리는 행위에 민감하지 않은가.

어쨌거나.

삼형제의 반응에 화답이라도 하듯 거인은 알 수 없는 말을 쏟아냈다.

“■■■■■!”

···알아들을 수는 없지만 좋은 의미가 아님은 분명하다.

아마도 카디움 부족어로 욕설을 퍼붓는 듯한 거인의 반응에, 삼형제는 더더욱 격분하며 저희들 역시 부족 언어로 맞대응하기 시작했다.

“내 저 자식의 혈관을 모조리-!”

“■! ■■■■··· ■■!”

“■■■! ■■■···.”

격분한 이들의 외침과 욕설로 감옥 안이 아수라장이 된 가운데.

나는 옆에서 어쩔 줄 몰라하는 롯을 가만히 돌아보았고.

롯은 숨을 한 모금 들이마시더니 이내 카랑카랑하게 외쳤다.

“다들 그마아아안!”

그녀의 외침에 감옥 안이 일순 조용해졌다.

오빠들은 머쓱한 얼굴로 여동생을 돌아보더니 나를 향해 사죄의 말을 건넸고.

“···.”

거인은 여전히 분하기 그지없다는 듯 나를 노려보았다.

나는 한 걸음 더 다가가 그와 눈을 맞췄다.

“보아하니 살 날이 얼마 안 남았나 보지?”

“···!”

돌직구 같은 말에 거인의 눈빛이 흔들렸다.

“칼 오프러스 대공이 시한부 독을 쓴다는 건 꽤 유명한 얘기라서 말이야.”

침을 꿀꺽 삼키는 놈을 보며 확신했다.

놈은 시한부 독에 이미 당한 것이 분명하다고.

“그래, 어차피 복귀하는 것은 불가능하고, 복귀할 수 없다면 죽는 것은 기정사실이니···.”

그자의 앞에 놓인 의자에 앉으며 말을 이었다.

“죽음이 두렵지 않다는 듯, 이런 상황에서도 그렇게 막 나갈 수 있는 거겠지. 그런데···.”

나는 고개를 들어 거인과 눈을 마주쳤다.

일견 겁 없어 보이는 눈동자 안쪽에서 두려움과 불안감이 스멀거린다.

“죽음 앞에서 초연하기란 사실 불가능에 가깝거든. 더구나···.”

나는 품 안의 주머니에서 작은 병 하나를 꺼내 보였다.

그것을 가볍게 흔들자 병 안의 붉은 액체가 기분 좋은 소리를 내며 찰랑거렸다.

“눈앞의 죽음을 피할 수 있는 완벽한 방법이 있다는 걸 알아버렸다면 더더욱 어렵고 말이지.”

“···죽음을 피할 방법이라니?”

처음으로 에스닐어로 말하는 거인.

놈의 목소리가 생각보다 꽤 앳된 소년처럼 들렸다.

“네 몸에 투여된 독을 중화시킬 수 있는 해독제라는 거다.”

“···!”

그 말에 일순 눈이 커졌지만, 거인은 애써 침착한 척 말했다.

“그걸··· 내가 어떻게 믿지? 네 손에 들린 게 그냥 평범한 액체가 아니라는 걸 어떻게 믿냔 말이다!”

나는 대답하지 않은 채 손에 든 해독제에 시선을 가져갔다.

이건 진짜 해독제이지만, 저놈이 그걸 알 리도 없고 딱히 놈을 납득시키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

그것을 던져버릴 기세로 손을 번쩍 들어올리자, 거인이 퍼뜩 소리쳤다.

“자, 잠깐! 던지지 마!”

···생각 외로 어리숙한 밀정 같네.

나는 피식 웃으며 유리병을 다시 품으로 거두어들였다.

“믿든 안 믿든 네 자유다. 하나 이것만큼은 확실히 말해주지.”

나는 불안과 희망이 교차하는 거인의 눈을 마주 보며 말했다.

“네 목숨을 살릴 해독제를 받고 싶다면, 도나 레핀이 어디 있는지 털어놔. 단 1시간의 여유를 주겠다. ···만일 여기에 응하지 않는다면.”

내 눈이 가늘어졌다.

“나는 고문을 해서라도 네 입에서 진실을 캐낼 거다. ···너무 고통스러운 나머지 차라리 시한부 독이 더 빨리 듣기를 바랄 정도로 말이야.”

“···!”

“그 점만큼은 약속하지. 그럼 이만.”

나는 롯을 돌아보며 고개를 끄덕인 뒤, 그대로 지하감옥을 빠져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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