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작가의 서자로 살아가는 법-140화 (140/176)

밀정의 정체

제이콥이 주저하며 되물었다.

“도나 양을··· 지금 당장 말씀이십니까?”

그가 저러는 이유는 이해가 간다.

아무리 사촌이라고는 해도, 이 야심한 시각에 남녀가 단둘이 자리하는 일은 드무니까.

“그래, 왜 문제 있나?”

아무렇지 않게 대꾸하자 그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 아닙니다.”

제이콥은 그 말을 끝으로 방을 나갔다.

정원으로 서둘러 향하는 그의 발걸음 소리가 들려오는 가운데.

돌연 메시지가 눈앞에 떴다.

[도전과제 목록이 갱신되었습니다.]

그러고 보니 한동안 목록을 확인해보지 않았다.

제이콥이 도나, 아니 ‘쌍둥이 이능자’를 데리고 오려면 시간이 걸릴 테니 막간을 이용해볼까.

-이사벨 대공녀가 반란을 일으키도록 했나요?

-‘쌍둥이 이능자’의 정체를 밝혔나요?

-진짜 도나 레핀을 구출해냈나요?

-알레스 정교단의 우두머리와 접촉했나요?

-칼 오프러스 대공을 파문시켰나요?

나는 미간을 좁힌 채 목록을 살펴보았다.

맨 위의 세 가지는 알겠는데, 맨 아래 두 가지는 감이 잘 안 온다.

‘지금 이 상황에 알레스 정교단이나 파문 같은 게 대체 왜 나오는데?’

어쨌든 그건 나중에 생각하면 될 일이다.

세 번째의 ‘진짜 도나 레핀을 구출했나요?’라는 도전과제를 보니 더더욱 확신이 굳어졌다.

‘놈이 도나로 변신한 게 분명하군.’

모후궁에서 시녀로 일한 이후로 도나는 이곳 공작저의 출입이 뜸해진 터였지만, 중요한 행사에는 빠짐없이 참석해왔다.

얼마 전 테레사의 결혼식에도 분명히 자리했던 걸 봤는데 대체 언제부터 바뀐 건지 모르겠다.

‘그렇다면 진짜 도나는 어떻게 된 걸까.’

나는 불안한 마음에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나의 의도는 아니었지만 결국엔 그녀를 위험에 빠뜨린 꼴이 되어버렸으니.

“···역시 방법은 쌍둥이 이능자에게서 정보를 얻어내는 것뿐인가.”

하지만 쌍둥이 이능자 역시 이전의 그 암살자처럼 시한부 독이 투여된 상태라면?

제때에 돌아가지 못하는 경우 죽어버린다면···.

‘절망적인 생각은 그만하자.’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데,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제이콥입니다, 도나 양을 모시고 왔습니다.”

“들어와.”

끼익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그 뒤로 익숙한 얼굴의 젊은 여성이 두 눈을 반짝이며 들어왔다.

“저··· 공자님께서 절 부르셨다고 들었는데.”

내가 눈짓하자 제이콥이 문을 닫고 나갔다.

뻘줌하게 서 있는 도나 쪽을 보며 말했다.

“앉아요, 도나 양.”

나는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내 앞의 의자를 가리켰다.

“단둘이서 긴히 할 얘기가 있으니까.”

도나의 얼굴에 잔뜩 긴장한 기색이 떠올랐다.

* * *

오프러스 공국의 대공성.

성의 주인 칼 오프러스는 제 앞에 초조한 얼굴로 선 비서관을 마주 보았다.

“‘그림자에 거하는 자’를 보내겠다는 건 어떻게 되었지?”

“그것이···.”

비서관 그롤은 상사의 눈치를 봐가며 재빠르게 설명했다.

···목표물인 세자르 레핀 근처까지 가는 데 성공했지만, 그의 그림자에 숨어드는 데 실패했다는 것을.

“흐음.”

그 말에 대공은 예전에 리아나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그자에겐 저의 매혹 이능이 통하지 않습니다.’

그 얘기에 혹시 자신 같은 무효화 이능자인가 싶기는 했었다.

이러면 상황이 곤란해지는데, 라며 턱을 쓰다듬는데 비서관이 조심스레 덧붙였다.

“그러한 상황에 대비해 차선책을 보내놓기는 했습니다만.”

“차선책?”

“‘쌍둥이 이능자’ 말입니다.”

“아.”

대공의 표정이 확 밝아졌다.

‘쌍둥이 이능자’는 민감한 임무를 이미 수차례나 성공적으로 해낸 바 있는 베테랑일 뿐 아니라.

상대가 무효화 이능자라 하더라도, 신체 접촉을 하지만 않으면 변신이 풀릴 일은 없으니까 말이다.

“잘했다, 그롤.”

비서관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기만 해도 절반은 성공한 셈이었다.

그는 떨리는 손을 들어 안쪽의 덧문을 가리켰다.

“전하, 이쪽은 새로 들어온 이능자들입니다.”

덧문이 열리더니 기껏 해야 열서너 살 전후로 보이는 아이들 몇 명이 걸어나왔다.

“이 아이는 손 끝에서 바람을 일으키는···.”

‘바람을 일으키는 자.’

‘소리 없이 전달하는 자’.

‘빨리 달리는 자’.

신통방통한 능력을 지닌 아이들을 비서관이 소개하는 말을 들으며 대공은 혼자만의 생각에 잠겼다.

‘이능을 신이 내려준 재능이라 우기다니, 그것만큼 우스운 얘기가 없지.’

알레스 교단의 위세는 막강하기 그지없다.

지금은 커글랜드 국교회로 개종했으나, 십여 년 전에만 해도 전 대륙의 모든 나라가 알레스 교를 믿었다.

그리고 그 막강함의 기저에는 다름 아닌 ‘이능자’들이 존재했으니.

‘이능이야말로 알레스 신의 기적을 보여주는 증거가 아닌가!’

맨손으로 불꽃을 피워올리고.

지친 이들을 다시 일으켜세우며.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 먹을 것을 만들어내는 자들.

세상의 물리법칙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힘을 지닌 이들을 데려다가 알레스 신전은 ‘이능 신관’으로 육성했다.

그들은 대륙 각지에서 걸인과 부랑자들을 도우며 교단의 교리를 설파했다. 이들이 보여주는 ‘신의 기적’에 무지몽매한 자들은 쉽사리 현혹되었다.

‘오, 신이시여!’

‘이런 광경을 제가 살아보게 되다니···.’

‘위대하신 알레스시여, 부디 자비를 베풀어···.’

이능.

그것이야말로 오늘날 알레스 교단의 영향력을 완성해준 일등공신이었다.

하나부터 열까지 전부 다 뻔한 눈속임이라고 생각하는 칼 오프러스 대공에게는 우스워 보일 뿐이었지만.

‘말이 신관이지, 결국은 교단의 광대나 다를 바가 없는 이들 아닌가! 놈들은 그 어마어마한 힘을 제대로 쓰는 법을 전혀 모르는 셈이나 다름없다.’

대공은 눈앞에 선 어린 이능자들을 보며 비뚤어진 미소를 지었다.

이들 모두 그가 비밀리에 운영하는 이능자 전문 육성 기관에서 찾아낸 이들이다.

알레스 교단은 강력한 믿음을 지닌 자에게 신이 내리는 선물이 바로 이능이라고 주장하지만, 말도 안 되는 소리.

‘이능은 유전이다.’

그것도 주로 혈통이 좋은 가문 출신에게서 발현된다.

실제로 귀족 자제들 중에는 이능자가 자주 나타나는데, 이들은 제일 먼저 이능 신관감으로 발탁된다.

물론 거리의 고아 중에도 이능자들이 꽤 나오고, 공국의 육성기관이 노리는 것도 이쪽이지만···.

‘그 뿌리를 따져보면 과거에 귀족 가문이었으나 멸문지화를 당해 부모를 잃은 고아들인 경우가 많지.’

그런 아이들은 대부분 마음속에 강렬한 복수심을 품고 있으며, 그 원한을 조금만 건드리면 그 누구보다도 훌륭한 살인 기계로 거듭나기 마련이었다.

이들이 어둠 속에서 공국의 영화를 위해 더러운 일도 서슴지 않은 덕분에 공국은 날로 승승장구를 거듭할 수 있었다.

‘과거 에스닐의 속국이나 다를 바 없었던 공국이 이렇게 큰 것도 다 이능자 부대 덕분이 아닌가!’

대공은 새삼 자신의 혜안에 스스로 감탄하며 입을 열었다.

“훌륭한걸.”

“아···.”

그 한 마디에 비서관의 얼굴이 환해졌다.

“이번에는 쓸모 있는 능력이 제법 있어 보이니 말이네.”

“그리 말씀하시니 다행입니다.”

비서관은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이고는 이능자 아이들을 밖으로 내보냈다.

덧문이 완전히 닫히고 인기척이 사라진 것을 확인하더니 그가 조심스럽게 대공에게 속삭였다.

“1공녀님께 붙여놓은 밀정이 소식을 전해왔습니다.”

“이사벨? 무슨 소식인가?”

“그것이··· 최근 수도의 귀족들 사이에 이상한 기미가 보인다 합니다. 이사벨 공녀님을 중심으로 무언가를 획책하는 모습이 여기저기서 포착되어···.”

“하.”

이사벨.

넌 어찌 이 아비를 단 한 번도 도와주는 법이 없는 것이냐.

칼 대공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비서관의 보고를 경청했다.

* * *

쪼르륵.

제이콥이 가져다준 차를 직접 따라주는 광경을 보며 ‘쌍둥이 이능자’는 드레스 자락을 꽉 움켜쥐었다.

긴장한 탓인지 심장이 쿵쾅거린다. 분명 이 둘 사이에는 아무 관계가 없다고 들었는데 왜 이런 시각에 부른 걸까.

‘설마, 내 정체를 눈치챈 걸까?’

그 생각에 퍼뜩 고개를 들었다. 곱상하게 생긴 세자르의 얼굴에선 별다른 감정을 읽어낼 수 없었다.

어딘가 나른하고 여유 있어 보이는 표정이라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하긴 그럴 리가 없지.’

이 멀쩡한 귀족 아가씨를 두고 ‘이능자가 변신한 모습’이라고 생각할 사람이 세상 천지에 어디 있겠는가.

애초 ‘쌍둥이 이능’이라는 능력의 존재를 아는 자부터가 손에 꼽을 정도로 적으니···.

그는 마음을 단단히 먹고 말문을 열었다.

“저, 죄송하지만 왜 부르신 건지 이유를 여쭤봐도 될까요?”

“도나.”

돌연 바뀐 호칭에 이능자의 가슴이 덜컹했다.

“우리 둘뿐이잖아. 아무도 엿듣고 있지 않으니 편하게 해도 돼.”

“···.”

설마··· 둘이 남몰래 밀회를 즐기는 사이였던 건가?

조사 자료에는 이런 말은 없었다. 세자르 레핀과 도나 레핀은 어디까지나 친척 관계일 뿐이며, 그마저도 왕래가 거의 없었던 편이라 했는데.

‘도나 레핀을 ‘변신의 숙주’로 삼은 이유가 바로 그 때문이 아니었나.’

누구도 함부로 몸에 손을 댈 수 없는 귀족 여성이며, 공작저와 왕궁을 오가며 두루 정보를 얻을 수 있는 왕궁 시녀.

설령 말 실수를 하더라도 세자르를 포함한 주변 이들이 알아차리지 못할 만큼 친한 인물이 없다는 것까지 그야말로 최상의 조건이었는데!

“도나, 정말로 섭섭하게 굴 거야?”

세자르가 자연스럽게 그를 향해 손을 뻗어왔다.

‘쌍둥이 이능자’는 제 손을 붙잡으려는 그 손을 본능적으로 피하며 대꾸했다.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모르겠군요.”

“카렌과는 그저 형식상의 약혼 관계라고 얘기했잖아.”

카렌.

쌍둥이 이능자는 얼른 머릿속을 헤집었고 그것이 세자르 레핀의 정혼녀 이름임을 기억해냈다.

‘그 둘이 연인 사이라고 들었는데.’

실상 저자는 제 정혼녀와 도나라는 여자 두 명을 동시에 만나고 있는 듯하다.

‘이런 젠장!’

만약 그것이 사실이라면, 그는 최악의 숙주를 고른 셈이 된다.

이 둘이 연인 관계가 맞다면 최소한의 접촉은 피할 수 없을 테고, 약간이라도 몸이 닿을 시-

‘변신의 이능이 무효화되어 본 모습으로 돌아올 테니까!’

위기를 벗어날 방법은 하나뿐이다.

지금 이 자리를 최대한 빨리 벗어나는 것.

쌍둥이 이능자는 마른 입술을 축이며 간신히 입을 열었다.

“저는··· 더는 그 얘기를 하고 싶지 않아요. 죄송하지만 들어가볼게요.”

그리고는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자 세자르 또한 자리에서 일어났다.

“잠깐만.”

그 말을 무시하고 몸을 돌렸다.

자연스럽게, 그러나 신속히 이곳을 벗어나려 발걸음을 재촉한 순간.

“그럼 제발, 딱 한 가지만 대답해줘.”

애원하는 듯한 목소리에 몸이 멈췄다.

저렇게까지 말하는데 매몰차게 나가버린다면 세자르가 이상하게 생각할 수 있다.

그렇게 결론 내린 쌍둥이 이능자가 걸음을 멈추고 그를 돌아보았다.

* * *

‘카렌과는 그저 형식상의 약혼 관계라고 얘기했잖아.’

이 말은 나름의 승부수였다.

진짜 도나라면 저런 말을 듣고 눈이 휘둥그레졌을 테니까.

‘네? 그게 대체 무슨 소리세요?’

‘두 분이 무도회에서 이미 공공연한 사이로 소문 난 게 언제인데··· 설마 그 사이에 헤어지신 거예요?’

따위의 말을 하며 호들갑을 떨었겠지.

하지만 ‘가짜 도나’는 그러지 않았다. 탐색하는 눈초리로 내 표정을 훑으며 말을 고르며 대답했다.

‘저는··· 더는 그 얘기를 하고 싶지 않아요. 죄송하지만 들어가볼게요.’

혹시나 틀린 대답을 할까 봐 일부러 애매모호하게 말하는 여자의 표정을 보아하니, 내 연극에 속아 넘어간 기색이었다.

도나 레핀이 내 정인인 것 같으니 얼른 이 자리를 벗어나 위기를 피할 심산이었겠지.

‘이 정도면 확인은 충분하다.’

그렇게 결론 내린 나는 아까부터 하던 연극에 쐐기를 박았다.

“그럼 제발, 딱 한 가지만 대답해줘.”

···매달리는 남자 특유의 구구절절한 목소리로 말하자, ‘가짜 도나’가 어쩔 수 없이 멈춰 서서 이쪽을 돌아보았고.

나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그녀에게 달려들었다.

“널 보낸 것이 칼 오프러스 대공이 맞나?”

“···!”

상대가 당황한 찰나, 그녀의 손목을 붙잡았다.

그 순간 눈앞에 문구가 떴다.

[‘무효화 목걸이’가 효력을 발휘합니다.]

[2단계 스킬 ‘쌍둥이 복사’가 무효화됩니다.]

무효화 문구가 뜸과 동시에, 내게 붙잡힌 손목을 중심으로-

‘도나’의 모습을 한 신체가 본래의 모습으로 스르르 되돌아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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