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능자를 찾아내는 법
목 뒤가 시선으로 따끔따끔한 기분.
심장이 쿵쾅거리는 가운데 천천히 뒤를 돌아보자.
“···도련님?”
홍차를 들고 온 제이콥이 서 있었다.
“제이콥.”
안심한 나머지 숨을 후우 내쉬자, 제이콥은 자신이 나를 놀라게 했음을 눈치챈 모양이었다.
“놀라게 해드릴 생각은 아니었습니다, 그저 문이 열려 있기에.”
“그래. 알겠네.”
“무슨 안 좋은 소식이라도 있습니까?”
나는 쉽사리 대답하지 못했다. 편지 끄트머리의 문구가 내 눈길을 사로잡았다.
『그 누구도 믿지 마시고, 그 누구에게도 이 편지의 내용을 발설하지 마십시오.
‘쌍둥이 이능자’를 찾아내시기 전까지는.』
“아니, 아무것도 아냐.”
그 말과 함께 서신을 접어 가슴 안주머니에 넣었다.
제이콥은 안심한 듯 고개를 끄덕이고는 가져온 차를 준비해줬다.
언제나처럼 향긋한 홍차 향이 긴장감을 약간이나마 해소해주는 가운데.
“그럼 이만 나가보겠습니다.”
“그래, 고마워.”
방을 나가려는 제이콥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려줬다.
제이콥은 그대로 나갔고, 이윽고 문 닫히는 소리가 났다.
‘쌍둥이 이능자라니.’
그가 나가자마자 나는 발닉의 편지를 다시 꺼내 찬찬히 읽어보았다.
발닉은 아에갈과 친해져 많은 이야기를 듣게 되었는데, 그녀는 원래 오프러스 공국의 이민족 노예였다고 한다.
‘교양과 지식이 풍부한 것을 인정받아 공국의 귀족가에서 일하게 되었다고 하는군요. 그런데···.’
대공이 정치적 목적으로 들여보낸 쌍둥이 이능자 때문에 귀족가는 발칵 뒤집혔고.
혼란을 틈타 도망친 아에갈은 커글랜드의 국경을 넘어 운 좋게 지금의 왕비(당시에는 왕의 정부)를 섬기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자는 가족이 봐도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목표물과 똑같은 모습으로 변신한다고 합니다. 체형, 머리카락, 심지어는 목소리까지도요.’
그래, 변장이 아니라 이능을 쓰는 거니 완전히 똑같을 수밖에 없겠지.
전에 인두겁을 쓰고 들어온 암살자조차 색출하지 못했는데, 그런 이능자를 어떻게 찾아내느냐가 문제였다.
“상대방과 똑같은 모습으로 변신하는 이능이라···.”
나는 제이콥이 가져온 홍차를 슥 돌아보았다. 기분 탓인지 딱히 마시고 싶지가 않았다.
‘이능, 이능자라.’
그 단어를 입안으로 한참 읊조리는데,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무효화 목걸이로 그의 이능을 방어할 수 있다는 것은···.
“이 무효화 목걸이로 변신 이능을 해제시킬 수 있다는 것 아닌가?”
나는 -무효화 목걸이를 장착한 채로- 아까 제이콥의 어깨를 두드렸던 것을 기억해냈다. 그럼에도 제이콥은 아무 이상이 없었으니 쌍둥이 이능자일 가능성은 전무하다.
허나 이 가설이 맞는지 알아보려면, 일단 한 가지 짚고 넘어갈 게 있었다.
“2층에 있다고 했나?”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리아나가 머무는 방으로 향했다.
“무슨 일이지?”
리아나는 전보다 훨씬 나아진 모습이었다.
주치의가 애쓴 덕분인지 상처는 대부분 아물었고 혈색도 나쁘지 않았지만.
‘망가진 얼굴은 돌아올 기미가 없어 보이지만.’
더는 누군가를 의도적으로 매혹할 필요가 없다는 데서 해방감을 느낀 덕분일까.
흉측한 얼굴의 리아나는 전보다 훨씬 솔직해 보였다.
“시간이 많지 않으니 단도직입적으로 물어보지.”
그녀의 맞은편에 앉아 본론을 꺼냈다.
“칼 오프러스 대공이 그 사실을 알고 있나?”
“그 사실이라니?”
“내게···.”
나는 영문을 몰라하는 리아나와 빤히 눈을 마주쳤다.
“상대의 이능을 무효화시키는 힘이 있다는 걸 말이야.”
“···!”
리아나의 눈이 튀어나올 듯 커졌다.
저 반응을 보아하니 심증은 있었지만 확신하지는 못했던 듯하다.
“왜, 몰랐나?”
“아니, 혹시나 하긴 했지만···.”
“그뿐 아니라 당신이 매혹의 이능자라는 것도 알고 있지.”
“그걸 어떻게!”
이번엔 진심으로 놀란 듯, 리아나의 입에서 새된 신음이 터져 나왔다.
나는 어깨만 으쓱했다.
“상대의 이능을 알아보고, 그런 이능자들을 제 편으로 만들려 하는 인간이 어디 대공 혼자뿐일 것 같나?”
“···하.”
그녀는 어쩐지 허탈한 한숨을 내쉬었다.
“네가 이룩한 놀라운 성공의 비밀을 이제야 알게 되었군.”
“감상은 됐고, 질문에나 대답해.”
나는 재촉하듯 물었다.
“대공이 이걸 알고 있나?”
“···확실히는 모르겠어. 다만 내 매혹의 힘이 네게는 통하지 않았다는 것을 보고한 적이 있으니···.”
“추측은 할 수도 있다는 거로군.”
“아, 그리고 말이야.”
이내 그녀의 입에서 생각 외로 아주 중요한 정보가 흘러나왔다.
“칼 오프러스 대공 또한 무효화 이능자야.”
“···!”
“더불어 이능자를 감별하는 수단도 보유한 덕분에 그걸로 새로운 이능자들을 발굴해내곤 하지.”
대공이 무효화 이능자라니 놀라운 사실이다.
‘리아나나 팰러스가 대공만큼은 제 뜻대로 움직이지 못했던 이유가 이거였군.’
그런 능력의 소유자라면 미지의 힘을 지닌 이능자들을 얼마든 수월하게 통제할 수 있을 터이니.
“이런 중요한 사실을 왜 진작 얘기하지 않았지?”
리아나는 희미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너라면 처음부터 모든 수를 보여주겠나?”
아직도 더 많은 정보가 남아 있다, 라는 것을 암시하는 말에 혀를 찼다.
나는 미간을 좁히며 쏘아붙였다.
“협상할 여유 따위는 없는 상황임을 잊지 마라. ···뭔가 더 도움이 될 만한 건 없는지 희미한 기억까지 탈탈 털어보는 게 좋을 거야.”
그 말을 끝으로 몸을 돌리자, 등 뒤로 달라붙는 시선이 따가웠다.
나는 방을 나오자마자 총관에게 들렀다.
···리아나가 그 어떠한 연락 수단도 사용하지 못하도록 지시를 내리기 위해서였다.
지금은 발닉의 말대로 그 누구도 믿지 않는 것이 좋다.
* * *
다음 날 오전, 스완 성에서 전서구 한 마리가 더 날아왔다.
이번에는 앨빈이 보낸 것이었다.
-발닉 경의 이야기를 듣고 이능자를 찾아낼 방법을 찾아보았는데요.
빼곡하게 십여 장에 걸쳐 쓴 것이 보고서를 방불케 하는 편지였다.
그중 어느 문구 하나가 내 눈길을 사로잡았다.
-마도구를 이용한 ‘이능의 무효화’는 다양한 방식으로 이루어진다고 합니다.
마도구 착용자로부터 정해진 거리 내에 들어올 때 이능이 무효화될 확률이 가장 높으며.
이에 해당하지 않는 경우에는 마도구 착용자가 특정 이능자의 신체를 접촉하는 경우에 무효화될 수 있다는 것이다.
‘신체 접촉!’
내가 생각한 가설이 틀리지 않았다.
이 무효화의 목걸이는 전에도 리아나나 팰러스 같은 상대의 이능을 무효화하지 않았던가.
앨빈의 편지를 다 읽는 나는 이런 결론을 내렸다.
‘역시 내가 직접 나서서 찾아보는 수밖에 없겠군.’
그로부터 대략 다섯 시간 후.
“다 모였나?”
나는 공작저로 불러모은 가신들을 돌아보며 말했다.
“안 그래도 바쁜데 왜 갑자기.”
“카렌 너만 바쁜 건 아닐 텐데.”
“그러게, 오랜만에 오니 반갑기만 한데.”
툴툴거리는 카렌, 뭐라 한 마디 쏘아붙이는 우만, 밝기 그지없는 표정의 리암과.
“주군, 부르셨습니까?”
“뭐든 분부만 해주시지요!”
“불러주시길 기다렸습니다!”
“언제라도 목숨을 걸 준비가 되어 있으니···.”
방금 전까지 연무장에서 대련하는 중이었다는 디터와 3형제를 비롯해.
“아직 이능을 쓸 수 있기까지 며칠 더 남았는데, 무슨 일이십니까요?”
지시를 받고 헐레벌떡 저잣거리에서 왔다는 바바까지.
테레사에게 붙여보낸 이들을 제외한 가신 전원이 한자리에 모였다.
이렇게 모이는 일이 원체 드문 만큼, 대체 무슨 용건으로 불렀나 싶어 잔뜩 긴장한 얼굴이었다.
“이렇게 부른 건 다름이 아니고···.”
음, 뭐라고 말해야 할까.
직접적인 이유를 밝히지 않고도 상대와 접촉할 명분을 찾으려면···.
뒷말을 고르던 중 맨 왼쪽에 서 있던 카렌과 시선이 딱 마주쳤다.
“나와 레핀 가문, 그리고 이 나라를 위해 수고해주는 내 가신들을 치하해주고자.”
“치하라면 이미 충분히···.”
누군가 겸양의 말을 내뱉은 순간, 나는 제일 먼저 카렌 앞에 다가가 섰다.
“한 명씩 안아주겠다.”
“···뭐?”
카렌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런 미친!’이라고 외치는 듯한 표정이었지만 무시했다.
눈앞에 가서 껴안자 카렌의 몸이 퍼뜩 굳는 것이 느껴졌다.
가볍게 포옹하고 물러서자 카렌의 뺨이 발갛게 상기된 것이 보였다.
“이, 이게 무슨-”
“다음.”
“···.”
나는 리암도 마찬가지로 껴안아주었고.
리암은 낄낄거리며 농담조로 말했다.
“이거 뭐야? 이제 딱히 줄 게 없으니 몸으로 대신하겠다, 이건가?”
우만은 미간을 좁힌 채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으며.
“···이 무슨 쑥스럽게.”
디터는 눈물이라도 쏟을 듯 황송해했다.
“주군의 이 하혜 같은 마음 씀씀이 잊지 않겠습니다!”
3형제의 반응 또한 황송해하는 건 마찬가지였지만.
“주군!”
감격한 채 되려 나를 꽉 안아오는 통에, 세 차례나 연달아 숨이 막혀 죽을 뻔했다.
이거 원, 밀정 찾아내려다가 승천할 지경이네.
“이거 뭔가 목적이 있으신 것 아닙니까?”
마지막으로 내게 포옹당한 바바가 영 꺼림칙한 얼굴로 물었다.
은근 날카로운 구석이 있다니까.
“그래. 사실은···.”
‘쌍둥이 이능자’가 아님이 확실한 가신들을 향해, 나는 발닉이 들려준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그렇담 심각한 문제 아냐?”
본인 또한 밀정 전문가인 카렌이 미간을 좁혔다.
“최하급 사용인들 사이에 섞여들어도 어마어마한 결과를 초래할 수 있는 게 밀정의 존재야. 하물며 영향력 있는 누군가로 변신할 수 있는 이능자가 이 사이에 숨어든다면···.”
카렌이 끔찍하다는 듯 신음했다.
“여간한 정보를 다 공국 쪽으로 빼돌리는 건 물론이고, 우리 사이를 이간질하는 것도 문제가 아닐걸.”
“네 말대로 이건 아주 심각한 사안이야. 그래서 곧바로 너희 가신들부터 확인해본 거기도 하고.”
“확인이라니? 너랑 껴안는 게?”
“사실 최근에 ‘상대의 이능을 무효화하는 마도구’를 얻었거든. 그리고 앨빈의 말에 따르면, 이 마도구를 장착한 채 상대와 접촉하면···.”
따지고 보면 최근은 절대 아니지만.
우만이 이해했다는 듯 말을 받았다.
“쌍둥이 이능자의 이능이 무효화되어 본 모습으로 돌아오게 된다는 거로군.”
“정확해.”
가신들은 내 설명을 납득한 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하지만 우리 가신들이야 그렇다 치고, 이 공작저에 거하는 식솔들 전원을 다 이런 식으로 확인해볼 순 없잖아? 무엇보다 병사들도 있고 말이지.”
우만의 지적은 정확했다.
공작저의 사용인만 해도 수십 명인 데다 레핀 가문의 사병대까지 포함한다면···.
“맞아. 그러니까 문제라는 거야.”
“더군다나 하녀들 태반이 나이가 어린데, 함부로 신체 접촉을 할 수도 없고.”
리암의 말에 카렌이 끼어들었다.
“그럼 나는? 나는 왜 막 껴안은 건데?”
“너는 뭐···.”
“난 뭐, 함부로 신체 접촉해도 상관 없다 이거야?”
나와 카렌이 잠시 투닥거리는 사이, 생각에 잠겨 있던 리암이 돌연 외쳤다.
“맞다!”
“응?”
“너 그 주사위!”
주사위···?
“예전에 아카데미에서 애들 줄서서 던지게 했었잖아, 기억 안 나?”
유레카! 라고 외칠 기세의 리암을 보며 나는 오랫동안 잊고 있던 아이템을 기억해냈다.
···이능자 주사위를 이런 식으로 쓰게 될 줄이야.
* * *
그날 저녁.
석양에 붉게 물든 하늘 아래 레핀 공작가의 식솔들은 간만의 흥취를 즐겼다.
’세자르 레핀 공자’가 특별히 사재를 털어가며 주연을 열어준 덕분이다.
“참으로 관대하시기도 하지!”
평소 마시기 어려운 술과 음식, 거기에 소박하지만 듣기 좋은 연주를 하는 악사들까지.
모든 것이 완벽한 가운데, 한 무리의 사용인들이 한쪽에 길게 줄을 서 있었다.
“저건 무슨 줄이야?”
“왜 있잖아, 공자님의 개인 점술가가 특별히 점을 봐준다고···.”
“주사위 점이라고?”
모두가 즐거운 가운데, 바바만이 울상을 지은 채 가짜 점괘를 줄줄이 늘어놓았다.
“주사위를 던져보시지요.”
피로에 전 눈동자는 상대가 주사위를 던질 때만 빛났다.
···그렇게 긴 줄이 다 끝나갈 무렵, 누군가가 던진 주사위의 결과를 본 바바가 퍼뜩 고개를 들었다.
“···4가 나왔군요.”
“어머, 그러네?”
그 말에 상대 아가씨가 까르륵 웃었다.
바바는 그녀에게 점괘를 늘어놓는 한편 옆에 선 제이콥에게 눈짓을 보냈고.
제이콥은 그 즉시 내게 달려와 보고했다.
“4가 나왔다고 합니다!”
“그래? 그게 누구지?”
집무실에 앉아 있던 내가 고개를 들었다.
제이콥의 입에서 내가 예상했던 이름이 흘러나왔다.
“···그렇단 말이지.”
‘모두가 주사위를 던질 기회’를 마련하기 위한 주연이 이어지는 동안, 나름의 추리를 마친 터였으니까.
-대공이 내게 무효화 이능이 있다고 생각한다면, 분명 접촉하기 어려운 대상으로 변신했을 것이고.
-그렇다면 높은 확률로 여성, 그것도 젊은 여성일 터이며.
-대상의 말투나 머릿속 지식까지는 얻어낼 수 없을 테니, 들킬 가능성을 최소화하기 위해 다른 이들과 관계가 깊지 않은 인물을 고르려 할 거다.
거기에 어느 정도 지위가 높아 왕궁과 공작저도 오가며 정보를 모을 수 있고, 내가 함부로 대할 수 없는 상대라면 금상첨화이겠지.
그리고 저 모든 조건에 부합하는 것은 단 한 명뿐이었다.
“도나 레핀!”
나는 내 사촌을 이곳으로 불러올 것을 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