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정이 누구냐
* * *
에스닐이 쓸 수 있는 비장의 수를 알려준다던 리아나.
그녀는 이런 문장으로 말문을 열었다.
‘칼 오프러스 대공에게는 자식이 셋 있다.’
공국의 오랜 대귀족 가문 출신인 대공비에게서 얻은 두 딸.
순종적이고 얌전한 2공녀 발렌틴은 대공의 명령에 따라 외국에서 정략혼을 했고, 아이까지 낳아 잘 살고 있다고 한다.
반면 1공녀 이사벨은 당찬 성격으로 아버지의 뒤를 이어 대공이 되겠다는 의지를 어릴 때부터 자주 내비쳤는데.
‘공국은 에스닐과 달리, 여성에게도 계승권이 있거든.’
이사벨은 당연히 자신이 다음 대공이 될 거라 생각했지만, 대공은 정부에게서 얻은 서자이자 올해로 갓 열 살이 된 필립에게 대공위를 물려주고 싶어했다.
귀족들은 당연히 반발했고, 그중에서도 이사벨의 외가가 제일 앞장섰다.
‘엄연히 정통의 후계자가 있는데 어찌 사생아에게 대공좌를 물려준단 말입니까!’
그러한 반발에도 서자를 후계자로 삼으려 했던 것은, 대공이 그저 필립을 아끼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왕비의 가문이 지닌 힘이 이 이상 커지는 것을 두려워했던 까닭이었다.
‘그때부터 시작되었어.’
왕비를 시작으로 그녀의 아버지, 오빠 등 실질적 권력을 지닌 가문 구성원들이 알 수 없는 죽음을 맞이했고.
어느덧 시간이 흐르고 보니 이사벨은 자신을 보호해줄 어른이 아무도 없음을 깨달았다.
대공이 그녀를 외국의 왕족과 강제로 결혼시키기 위한 차편을 준비해둔 그날 밤, 이사벨은 대공성을 빠져나와 어느 한미한 귀족가에 몸을 의탁했다.
‘그리고 그 귀족가의 자제와 백년가약을 맺었지.’
동맹 강화를 위한 정략혼에 팔려가느니, 국내에 남아서 지지 세력을 얻어 힘을 키우는 편을 택했다는 거였다.
모든 정보를 남김없이 털어놓은 리아나는 이렇게 덧붙였다.
‘내가 바라는 것은 단 하나뿐이다.’
‘칼 오프러스 대공에게 끔찍하고도 고통스러운 죽음을 준비해주는 것.’
‘그리고 가능하다면, 최후의 순간에 내가 그자의 목숨을 끊도록 해주는 것.’
나는 그것을 보장할 수는 없으나, 최대한 노력해보겠다고 대답했다.
···칼 오프러스 대공의 죽음을 바라는 것은 그녀 하나뿐이 아니니 말이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
“어디 내 말이 틀렸나요?”
나는 성정이 불 같다는 이사벨 오프러스와 대면하는 중이었다.
단둘이서는 아니었고, 남장을 한 채 ‘렌 돌로레스’라는 청년 귀족 행세를 하는 카렌이 내 옆에 있었다.
이사벨의 말에 카렌, 아니 ‘테레사 1세의 밀사’인 렌 돌로레스가 대답했다.
“물론 전하의 말씀이 맞습니다.”
이사벨이 렌을 향해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그대의 부관은 그 사실을 잘 모르는 듯한데.”
그리고 나는 그러한 렌의 부관 자격으로 이 자리에 있는 터였다.
화장술의 도움을 받는 것으로도 모자라 같잖은 수염까지 붙여 완벽한 중년 신사로 변장한 채 말이다.
“···제 부관 카이저가 원래 말 주변이 부족한 편이긴 합니다.”
카렌의 말에 나는 속으로 이를 갈았다.
세자르(Cesar)를 다른 식으로 읽어 ‘카이저’라는 가명까지 굳이 만든 것은···.
‘하지만 세자르 공, 그대는 이 민감한 일을 맡기에는 지나치게 유명해.’
내가 이사벨과 해야 하는 것은 은밀한 뒷거래에 가깝다.
그러니 이 만남이 혹여나 외부로 새어나가게 된다면, 내 명성에 큰 타격이 될 거라는 의미다.
‘그럼 신분을 위조하면 되지!’
내 고민을 들은 카렌은 그게 뭐가 대수냐는 듯 곧바로 해답을 제시했고.
그녀와 내 역할을 바꾸어 각각 밀사와 그 부관이 되기로 한 것이었다.
무엇보다도 카렌에게는 상대의 본심을 확인하는 이능이 있으니까.
“허나 공녀 전하의 표현 또한 제게는 조금 지나치게 느껴지는군요.”
“지나치다니? 나는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얘기했을 뿐인데.”
도도하다 못해 앙칼지기까지 한 그녀의 반응에도 카렌은 미소를 유지하며 말했다.
“전하께서 하게 되실 것은 ‘반란’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
“반란이란 모름지기 자격이 없는 자가 왕관을 쓰기 위해 일으키는 난을 말하는 것 아닙니까?”
부드러운 목소리로 조곤조곤 논거를 펼쳐나가는 ‘렌’. 그 모습을 이사벨은 홀린 듯 바라보았다.
카렌이 말을 잘하는 건 알긴 했지만, 이런 협상에도 능할 줄은 생각 못 했는걸.
“···즉, 공녀 전하는 본인의 당연한 권리를 주장하시는 것뿐이라는 얘기입니다. 적통의 장녀가 권좌를 요구하는 것이 무어 문제가 된단 말입니까?”
“적통의 장녀라.”
씁쓸하게 중얼거리는 이사벨.
현재 대공은 교단과 귀족 세력의 반대에도 서자인 필립을 후계자로 책봉하고자 기를 쓰고 있다.
‘보통의 왕국에서라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지만.’
오프러스 공국은 대공의 일인 체제나 다름없는 나라다. 아마 이 상황에서 무언가 큰 변화가 생겨나지 않는다면, 공국의 후계자는 높은 확률로 필립이 될 터.
이사벨이 미간을 좁히고 고민하는 가운데, 카렌의 설득이 이어졌다.
“게다가 전하가 직접 나서신다면 단순한 가문 내의 다툼이 될 수 있는 일이지만, 그러지 않으신다면···.”
지금껏 웃으면서 말하던 카렌의 표정에서 일순 미소가 걷혔다.
“에스닐과의 전면전으로 비화할 수 있으니까요.”
“···전면전이라니, 그게 무슨 말이죠?”
이사벨의 눈이 커졌다.
카렌의 눈짓을 눈치챈 내가 얼른 말을 이어받았다.
“테레사 폐하는 공국에 선전 포고를 할 결심을 굳히셨기 때문입니다.”
“선전 포고라뇨?”
“최근 에스닐에서 암살 미수 사건이 있었던 건 알고 계십니까?”
내 질문에 이사벨이 입을 꾹 다물었다.
표정을 보아하니 사건의 자세한 전말뿐 아니라 그 배후가 대공일 가능성까지 아는 모양새다.
“알고··· 있어요.”
이사벨은 그 상태로 한참을 고민에 잠겨 있었다.
‘고민이 될 만하지.’
귀족 세력을 규합해 내전을 일으키지 않는다면 전면전에 돌입하겠다는 건, 말이 좋아 제안이지 협박이나 다를 바 없으니까 말이다.
그러나 어쨌든 현 시점에서 키를 쥔 것은 이사벨 본인이며.
자신의 결정으로 양국의 운명이 크게 뒤바뀔 수 있는 상황이었으니까.
그녀는 우리가 건넨 서류를 다시 한 번 훑어보았는데, 그 골자는 단순하기 그지없었다.
-귀족 세력을 규합해 내전을 일으킨다면, 에스닐의 군대가 이사벨 공녀 세력을 지지할 것이다.
-이사벨 공녀는 대공위를 이어받아 오프러스 공국의 정당한 통치자가 된다.
위의 두 가지가 핵심 내용이라면, 에스닐이 군사 협력의 대가로 요구하는 것은 아래와 같았다.
1. 공국에서 양성하는 비밀 암살부대를 없앨 것.
2. 칼 오프러스 대공을 유폐할 것.
3. 에스닐과의 국경 근처에 자리한 에우레카 광산지대를 내어줄 것.
내가 보기에 1번과 2번은 큰 문제가 안 될 듯하고. 3번에 적힌 에우레카 지대는 워낙 알토란 같은 땅이라 좀 마음에 걸릴 수 있겠지만.
‘땅 하나를 내어주고 나라를 얻는 셈인데, 이사벨 입장에서는 절대 손해보는 거래는 아니지.’
그녀 또한 비슷한 결론을 내린 듯했다.
거래 조건 자체에는 문제가 없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든 이사벨이 입을 열었다.
“한 가지만 더 물어봐도 될까요?”
“뭐든 물어보시지요.”
어디 대답해보려면 해보라는 듯, 이사벨은 불쾌감을 숨기지 않으며 말을 이었다.
“에스닐은 어째서 이렇게까지 하는 거죠? 그냥 전쟁도 아니고 굳이 내전을 일으키려는 건 너무 비열한 접근이 아닌가요?”
깨나 직설적인 어조였다.
그러나 그녀는 몰랐을 것이다.
‘도리어 이쪽은 그런 질문을 기다리고 있었거든.’
“저희의 방식이 비열하다 하셨습니까?”
“···그래요.”
“그렇다면 어째서 이렇게까지 하는지 말씀드리지요.”
카렌은 숨을 흡 들이마시더니 이내 말했다.
“테레사 폐하 또한 칼 오프러스 대공의 손에 백부와 부친, 친동생을 잃으셨기 때문입니다.”
“뭐라고요?”
눈이 휘둥그레진 그녀에게 카렌은 에스닐 왕실의 연속된 비극을 털어놓았으며.
그 배후가 칼 오프러스 대공임을 입증하는 증거를 얻었다고 설명했다.
언뜻 허무맹랑하게 들릴 수도 있는 얘기였으나.
“···.”
이사벨은 생각에 잠긴 기색으로 침묵을 지켰다.
카렌이 쐐기를 박았다.
“폐하의 입장에선 다른 무엇도 아닌, 그저 정당한 복수일 뿐입니다. 그리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정당한 복수라···.”
이사벨의 눈동자에 한순간 복잡한 감정의 파문이 일었다.
그녀는 미간을 살짝 찡그리더니 힘겹게 말을 이었다.
“저 또한 비슷한 경험이 있는 터라, 그 심정이 이해가 가는군요.”
“그렇다면 제안을 받아들이시는 겁니까?”
카렌의 조심스러운 질문.
그러나 나는 그녀가 이능을 사용했음을 느낄 수 있었고.
이사벨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네,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그 편이 어리석은 것이겠지요.”
드디어!
나는 속으로 쾌재를 질렀다.
‘예상했던 대로군.’
이사벨이 저 말을 듣고 결심을 굳힌 것은,
그녀 또한 어머니를 비롯한 친족들의 의문사가 아버지의 소행이라고 의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내가 그 사실을 알게 된 것은···.
-반란군을 소탕하는 데 기여했나요?
-테레사에게 만족스러운 결혼 선물을 주었나요?
지난 도전과제들을 달성하고서 보상으로 받은 ‘이사벨 공녀’의 상태창 덕분이었다.
『오프러스 1공녀 ‘이사벨’ (호감도 0점)
- 특성 : 야망, 저돌적, 권력욕, 복수심
- 비고 : 어머니를 비롯해 자신의 외가를 죽음으로 몰아넣은 것이 아버지 칼 오프러스 대공의 소행이라고 생각하지만, 심증만 있는 상황. 언젠가 대공을 몰아내고 자신이 권좌에 오르는 것이 목표다.』
‘비고’에 적힌 내용을 본 순간 깨닫고 말았다.
···이사벨 공녀는 부친인 대공에 대한 신뢰가 전혀 없으며, 아버지를 향한 복수심만으로 가득하다는 것을 말이다.
* * *
이사벨 공녀와의 협상은 기대 이상으로 잘 마무리되었다.
그렇게 그녀를 배웅하고 돌아서려는데.
“말로만 듣던 세자르 레핀 공자를 만나게 되어 영광이었어요.”
···생각지도 못한 호명에 나는 뻣뻣이 굳어버리고 말았다.
카렌은 애써 침착을 유지했지만, 이사벨은 이미 다 눈치챘다는 듯 후후 웃었다.
“왜요, 정말로 눈치 못 챌 줄 알았나요? 요즘 세자르 공만큼 유명 인사가 어디 있다고.”
“···무례를 범해 죄송합니다.”
고개를 숙여 보이자 이사벨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사정은 이해해요. 공처럼 이름이 알려진 분이 이런 일을 대놓고 맡기 쉽지 않을 테니까요.”
“이해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리고 한 가지, 순수한 호의에서 우러난 조언을 하나 드리자면.”
이사벨의 눈이 의미심장하게 빛났다.
“밀정을 조심하세요.”
“네?”
“저희 아버지에겐 수많은 이능자들이 있죠. 그리고 그중 대다수가 밀정 임무를 수행하는 데 최적화된 이들이에요.”
그냥 밀정도 아니고, 이능자 밀정이라는 건가.
긴장감에 입술을 지그시 깨물자 이사벨은 안심하라는 듯 미소를 지었다.
“아, 지금 여기엔 없는 게 확실하니까 걱정 마시고요.”
“그걸 전하는 어떻게 확신하십니까?”
“왜냐면···.”
이사벨은 자신의 목에 건 목걸이를 가리켜 보였다.
“제 어머니가 주신 성물이에요. 어머니는 그런 자들을 ‘사특한 힘을 지닌 자’라며 경원시하셨는데, 이 목걸이는 그런 자들의 힘을 억압하는 역할을 하죠.”
성물, 마도구.
어떤 이름으로 부르든 간에 요는 이거다.
이사벨의 목걸이는 내 무효화 목걸이와 비슷한 성능을 지닌 아이템이라는 것.
“우리가 오늘 나눈 대화는 밖으로 새어나가지 않았으니 그 점만큼은 안심하셔도 돼요.”
그 말을 끝으로 이사벨 공녀가 막사를 빠져나갔다. 병사들의 호위를 받으며 그녀가 마차에 올라탔고, 이윽고 마차는 시야에서 멀어졌다.
공녀가 떠나고 단둘이 남은 가운데 카렌이 중얼거렸다.
“공녀의 목걸이가 마도구의 일종인가 보지?”
“···그런가 본데.”
그 논리대로라면 대공이 내게 밀정을 붙여도 이 무효화 목걸이로 방어할 수 있겠지만.
‘나 말고 다른 사람에게서 정보를 얻어내는 건 막을 수 없잖아?’
농농이가 있다면 기척을 바로 잡아낼 수 있겠지만, 지금은 테레사 옆에 있는 상황.
“바바에게 이능을 써보라고 해야겠군.”
그렇게 중얼거리며 나는 카렌과 함께 막사를 나섰다.
그날 저녁.
해가 저문 뒤 공작저에 도착한 내게 전서구가 와 있었다.
‘이건 발닉이 보낸 건데?’
비둘기의 다리에 묶어서 보낸 서신의 첫줄이 내 눈길을 사로잡았다.
-도련님, 주변인들을 경계하십시오.
다짜고짜 주변 사람들을 경계하라는 말에 나는 미간을 좁혔다.
발닉이 아무 생각 없이 이런 얘기를 할 사람이 아닌데.
다음에 이어진 문구에 나는 숨을 흡 들이마시고 말았다.
-대공이 키워낸 이능자 중, 누군가의 겉모습을 똑같이 흉내낼 수 있는 ‘쌍둥이의 이능자’가 있다고 합니다.
-만일 대공이 도련님께 밀정을 붙인다면 그건 아마도···.
‘도플갱어 이능자!’
그 순간.
등 뒤가 서늘해졌다.
“···.”
아까는 느껴지지 않았던 인기척에, 침이 절로 꿀꺽 넘어갔다.
나는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