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콤한 제안
* * *
“폐하, 목욕물 온도는 괜찮으신지요.”
“폐하, 향유는 둘 중 어느 것으로···.”
“미리 욕의를 준비해두었으니 이쪽으로···.”
테레사는 시녀들의 시중을 받으며 따뜻한 물에 몸을 담그는 중이었다.
그리 오랜 여정은 아니었지만, 내내 긴장한 채로 마차를 탄 탓인지 몸 여기저기가 쑤셨다.
가볍게 목을 돌리자, 눈치 빠른 시녀 하나가 그녀의 목을 주물러줬다.
‘그나저나 별일이 없어서 다행이군.’
이곳으로의 여정은 걱정했던 것이 무색할 정도로 무던하게 흘러갔으며.
스완 성에 도착하고 나자 아름답기 그지없는 정경이 그들을 맞이했다. 만일의 사태에 대비한답시고 경호단을 주렁주렁 끌고 온 것이 민망할 정도로 평화로웠다.
“폐하, 시중을 들어드리겠습니다.”
테레사는 피로가 풀린 덕분에 노곤노곤해진 몸으로 고급스럽고 정갈한 식사를 마쳤다.
극진한 대접을 받는 것은 테레사뿐이 아니었다.
그녀의 가신들과 경호단 역시 그에 못지 않은 환대를 받았다.
“아니, 이런 귀한 걸 먹어볼 줄은 상상도 못 했는데.”
“내 평생 이런 대접을···.”
“경호단에 자원하기를 잘했군!”
첫날에는 편안히 여독을 푸는 데만 집중했고, 둘째날 아침이 되어서야 테레사는 피터 3세와 대면하게 되었다.
물론 단둘이서는 아니었고, 양쪽 다 통역관을 대동한 채였다.
두 사람은 간단한 안부 인사부터 주고받았다.
피터 3세는 초면임에도 애정이 뚝뚝 떨어지는 눈길로 테레사를 보았다. 어쨌거나 자신이 가장 아끼는 아이의 아내가 아닌가.
[초상화로만 보다가 직접 보게 되니 어쩐지 감개무량하구려.]
그 말에 테레사는 생긋 웃으며 말을 받았다.
[저 역시 마찬가지이군요. 초상화로 뵈었던 것보다 훨씬 근사하십니다.]
그녀 또한 상대의 대가 없는 호의를 부담스러워하는 편은 아니었다. 도리어 그 호의를 십분 활용하는 성격에 가깝다고나 할까.
[아에갈 말로는 우리 레온과 사이가 좋다 하던데. ···녀석이 아직 어려서 응석받이이니, 많이 이해해주셨으면 좋겠소.]
[응석받이라뇨, 레온 전하는 저를 늘 든든하게 지지해주고 있습니다.]
피터 3세는 자신 못지 않게 능구렁이처럼 대꾸하는 소녀 국왕의 모습에 절로 웃음이 나왔다.
‘아무래도 내가 자식 장가 하나는 잘 보낸 것 같단 말이지.’
세자르 레핀 공.
에스닐의 사신이 했던 말은 전혀 과장이 아니었던 것 같다.
‘테레사 폐하는 얼굴만 아름다우신 게 아니라 훌륭한 왕의 재목이기도 하니까요. 직접 만나보시면 바로 감이 오실 텐데, 이것 참···.’
그래, 그 말대로 직접 만나보니 바로 감이 왔다.
이 소녀는 그저 예쁘장한 허수아비 왕이 아니라, 에스닐이라는 대국을 능히 통치해낼 자질을 갖춘 인물이라는 것이.
피터 3세는 어쩐지 뿌듯한 마음으로 세자르의 얘기를 꺼냈다.
[그러고 보니 사절단에 세자르 공이 오지 않았더군. 이 혼담에서 매파 역할을 맡았던 청년 사신 말이오.]
‘매파’라는 말에 테레사가 웃음을 터뜨렸다.
[확실히 매파치고는 좀 젊긴 하지요. 세자르 레핀 공은 국내에서 맡은 임무가 있어 오지 못했습니다.]
피터 3세의 눈치를 슬쩍 본 그녀가 덧붙였다.
[세자르 공이 폐하를 다시 뵙고 싶어했는데 상황상 그럴 수가 없어 무척이나 아쉬워 하더군요.]
[허어, 그렇단 말이오.]
테레사가 예의상 하는 말이라는 것을 알았지만 그럼에도 기분이 좋았다.
피터는 자신이 어여쁘고 영민한 ‘새아가 바보’가 되어가고 있음은 꿈에도 생각 못 하는 중이었다.
[이건 딴소리이지만, 세자르 공에게 혹시 정혼자가 있소? 참 괜찮은 청년이던데···.]
그 말에 테레사는 잠시 움찔했지만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네, 미래를 약속한 약혼녀가 있다 들었습니다.]
[하긴 그런 청년에게 짝이 없을 리가 없지. 그래도 아쉬운 건 어쩔 수가 없구려.]
세자르 본인에게 대답을 받았음에도 피터 3세는 아쉬운 마음에 재차 질문했다.
아무리 봐도 우리 막내딸과 참 잘 어울릴 텐데 말이지, 라고 내심 생각하며.
[그렇다면 이제···.]
한 쌍의 능구렁이처럼 사이좋게 대화를 주고받은 두 사람은 본격적인 대화에 돌입했다.
주요 화제는 최근의 여왕 암살 및 모반 미수 사건, 그리고 에스닐과 공국 간의 갈등이었다.
이미 다 아는 내용이긴 했지만 사건 당사자에게서 한 번 더 정황을 들은 피터 3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 참 끔찍한 일이로군. 참으로 고생이 많으셨소.]
[한 나라의 왕이라면 어쩔 수 없이 겪게 되는 일 중 하나일 뿐이지요.]
그 대담한 말에 커글랜드의 왕은 맞은편에 앉은 소녀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도자기 인형을 연상케 하는 뽀얀 피부에 뚜렷한 이목구비.
아마도 시간이 지나면 그 아름다움이 만개할 것이 분명한 소녀는, 눈빛만큼은 엄연한 일국의 왕이었다.
[···공국과는 어찌 할 생각이시오?]
이번 사건을 어찌 처리할 것이냐.
혹시라도 선전 포고를 할 것인지를 조심스럽게 돌려 묻는 질문에 테레사는 고개를 똑바로 들었다.
[글쎄요. 일단은 분위기를 보아가며 서서히 압박을 할 생각이지만···.]
그녀가 흔들림 없는 눈빛으로 피터 3세를 마주 보았다.
[저희 두 나라는 이제 가족의 연으로 맺어진 터, 언젠가 때가 되면 도움을 부탁드려도 괜찮겠습니까?]
커글랜드 왕은 저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일부러 ‘도움’이라고 뭉뚱그려 표현했으나 그녀가 가리키는 바는 명백했으니까.
‘만일의 경우 공국과 전쟁을 하게 될 시, 커글랜드의 동맹군을 파병해줄 수 있냐는 질문이로군.’
이제 겨우 열몇 살이라는 소녀가 어찌 이리 맹랑할까.
속이 뻔히 들여다 보이는 수에 기분이 나쁠 법도 했지만, 피터 3세는 되려 기분이 좋았다.
그러한 속내를 감추며 냉랭하게 되물었다.
[글쎄, 아무리 가족이라 한들 군사를 보내는 것은 자국 백성의 목숨을 담보로 하는 것이 아니오.]
가만히 제 말을 경청하는 테레사를 보며 커글랜드 왕이 말을 이었다.
[즉 최소한의 명분과 실리가 전제되어야 한다는 말이오.]
실리는 상당할지 모른다.
공국이 비록 에스닐의 선왕 유스톤 3세 때의 전쟁으로 알토란 같은 곡창지대를 빼앗기긴 했으나 이 대륙에서 가장 온난한 기후를 자랑하는 나라가 아닌가.
매장 자원 또한 풍족하기 그지없으며 ‘알레스 신의 축복을 받은 땅’이라는 표현이 있을 정도로 사람이 살기 좋은 곳이다.
전면전을 벌인다면 승전의 대가는 상당히 달콤할 것이다.
‘허나 오늘날의 전쟁에서는 명분 또한 중요하다.’
제아무리 이 두 사건의 배후가 공국이라 한들, 현재처럼 증거가 불충분하며 공국이 혐의를 사실상 부정하는 상황에서는 여론을 주도하기 쉽지 않다.
최악의 경우 큰 나라가 일방적으로 작은 나라를 핍박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는 일이니. 거기에 대륙 최대강국인 커글랜드까지 합세한다?
‘보기 좋은 그림이 아님은 분명하지.’
그러니 그들에게는 명명백백한 명분이 필요한 것이다.
그 누구의 눈에도 이 전쟁이 정당한 것으로 비칠 만큼 강력한 명분이!
[공국은 제 아비와 동생의 죽음을 사주했습니다.]
[···!]
그렇게 이어지던 사고의 흐름은 테레사의 말에 끊기고 말았다.
피터 3세는 눈을 크게 뜬 채 그녀를 마주 보았다.
[그뿐 아니라 저의 백부 또한 그들에게 암살당하셨지요.]
지금 이 순간.
테레사는 세자르가 ‘우리 쪽에 투항한 공국 측 밀정’이 내놓았다는 증거 자료를 떠올리는 중이었다.
···그의 아버지와 동생을 비롯해 지금까지 이어져 온 수상한 사건들의 내막이 상세하게 적힌 자료를.
[공국이 아주 오래전부터 저희 에스닐 왕실을 멸문으로 몰아넣고자 더러운 음모와 암수를 써왔다는 것을 입증하는 자료를 입수했습니다.]
그녀는 그 말을 하는 것조차 증오스럽다는 듯 한 글자 한 글자, 씹어내뱉듯 말했다.
[이 정도면 그 무엇이든 감싸고도 남을 명분이 되지 않겠습니까?]
자신을 똑바로 마주 보는 테레사를 보며 피터 3세는 완전히 압도되고 말았다.
그녀의 눈동자 깊은 곳에서 무엇이든 삼킬 법한 강렬한 증오의 불꽃이 타오르고 있었다.
* * *
두 사람의 심각한 대화를 앨빈이 땀을 뻘뻘 흘리며 통역하는 동안.
스완 성의 복도를 잔뜩 긴장한 채 서성거리는 사내가 있었으니.
“그··· 아에갈 님께 대체 뭐라고 말을 걸어야 할까요?”
오늘 따라 머리부터 발 끝까지 때 빼고 광을 낸 차림의 발닉이었다.
“뭐라고 말을 걸긴요, 그냥 자연스럽게 인사부터 하셔야죠. 그러고 레온 전하의 안부도 물으시고요.”
롯이 뭐가 그리 어렵냐는 듯 모범 답안을 제시했지만, 발닉은 여전히 진정이 되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 자연스럽게 인사라고 하면.”
롯의 옆에 서 있던 농농이가 답답하다는 듯 [옹, 아옹! 부아부앙!] 하고 뭐라 뭐라 얘기했지만.
그의 말을 통역해줄 앨빈은 양국 정상 간의 회담으로 바쁘다는 것이 문제였다.
그렇게 발닉이 발만 동동 구르던 중.
복도 맞은편에서 아에갈이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
“발닉 경!”
롯의 속삭임에 발닉의 고개가 그쪽으로 돌아갔다.
복도 끝에서 이쪽으로 걸어오는 아에갈이 흡사 선녀처럼 보인다는 생각을 하며, 발닉은 멍하니 입을 열었다.
“그, 저···.”
그러다 아에갈 님이 그대로 지나가겠어요! 라고 롯이 소리 죽여 속삭였지만.
“어, 으···.”
발닉은 알 수 없는 소리만 내며 말도 붙이지 못했다.
그렇게 그녀를 그대로 지나쳐 보내려는 순간!
[앙, 옹···.]
농농이가 아에갈의 다리에 달라붙었다.
“어머!”
깜짝 놀란 아에갈이 작게 소리를 질렀지만, 제 발치에 붙어 있는 아기를 발견하고는 이내 미소 지었다.
[옹, 마마!]
“어머, 귀여워라. 넌 누구니? 어디선가 봤던 것도 같은데···.”
[앙옹, 부아···.]
아에갈은 아주 자연스러운 자세로 농농이를 안아올렸다. 농농이 또한 그 품에 폭 안기는 동안, 롯이 발닉의 허리를 쿡 찔렀다.
“그, 그 아이는···.”
아에갈이 자신을 돌아보자.
발닉의 심장이 폭주한 듯 빠르게 뛰어댔다.
‘얼른! 자기 소개부터 하시라니까요!’
롯이 답답해하며 옆에서 귓속말을 했지만, 발닉의 귀에는 들리지 않았다.
“이 아이를 여왕 폐하의 어전에서 봤던 것 같은데···.”
아에갈의 부드러운 목소리에 발닉이 퍼뜩 정신을 차리며 말했다.
“그 아이는! 제 아이입니다!”
“···.”
롯은 끄응, 신음하고 말았다.
농농이가 노움족이라는 사실은 비밀이며 공식적인 설정은 ‘발닉이 혼자 키운 아이’라는 것을 알고 있긴 하지만.
‘지금 이 상황에서 저 말은 좀 아니잖아···?’
롯이 속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 사이, 뒤늦게 자신의 말 실수를 인지한 발닉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망했구나.’
그렇게 결론 내린 순간, 아에갈이 의외의 대답을 했다.
“그렇군요. 어쩐지 아버지를 닮아 귀엽네요.”
“···?”
롯이 일순 멍해진 순간, 농농이는 그 말에 반발하듯 열심히 옹알이를 했지만.
발닉은 헤벌레 웃으며 대꾸했다.
“그, 그런가요?”
“헌데 아이 어머니는···.”
“아, 그게.”
발닉은 수차례 반복했던 설정을 그대로 읊었다.
···자신이 어느 마을에서 만났던 짧은 인연. 거기서 생겨난 아이. 엄마의 행방은 알 수가 없어 아이를 홀로 키웠고···.
“결국 세자르 공자님의 가신이 되는 행운까지 얻었지요.”
“어머나, 그런 감동적인 이야기가···.”
“자기 먹을 숟가락은 자기가 들고 태어난다는 말이 있다더니, 다 이 녀석 덕분에 얻은 요행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렇게 말하며 아기의 보드라운 머리를 거칠게 쓰다듬자 농농이는 질색했지만, 발닉은 개의치 않았다.
지금 눈앞의 여신이 제 말에 웃어주고 계시지 않은가!
“홀로 아이를 키우다니, 참 대단하시네요.”
“아에갈 님도 레온 전하를 쭉 키워오시지 않았습니까.”
“그거야 그렇지만 전 어디까지나 유모일 뿐, 친부모와는 다르죠. 그래도 제 손에서 큰 아이가 한둘이 아니니 이런 일에는 전문가라고 할 수 있겠네요.”
“오, 레온 전하 말고 다른 아이의 유모를 맡으신 적도 있으십니까?”
“그럼요, 원래는 커글랜드가 아니라···.”
아에갈의 입에서 이어진 말에 발닉을 비롯한 가신들의 눈이 화등잔만해졌다.
“오프러스 대공가에서··· 일했던 적이 있다는 겁니까?”
생각지도 못하게 얻은 힌트에, 발닉의 심장이 두근거렸다.
* * *
그때 그 시각.
나는 ‘렌’으로 위장한 카렌을 대동하고서 비밀스러운 만남을 가지는 중이었다.
“제안의 요지는 단순합니다.”
내가 내민 종이를 본 상대가 미간을 좁혔다.
언뜻 보면 백지이지만, 불에 비춰보면 글씨가 드러나는 특수 잉크로 작성한 서류였다.
상대 또한 그 사실을 금세 파악한 듯 고개를 끄덕인다.
“전하께서 국내 귀족들의 지지를 받아 정당한 권리를 주장하신다면, 저희 에스닐이 전하를 지지하겠다는 겁니다.”
“언뜻 듣기에는 달콤하기 그지없지만, 결국은 지금 나더러···.”
내 말에 묘한 미소를 짓으며 대꾸하는 상대는 다름 아닌-
칼 오프러스 대공의 장녀, 이사벨 공녀였다.
“아버지를 상대로 반란을 일으키라는 얘기 아닌가요?”
그 말을 듣는 순간.
그녀와의 협상이 그다지 녹록하지 않을 거라는 예감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