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수의 시간
* * *
왕궁 결혼식에서 일어난 여왕 암살 시도 사건.
그와 더불어 벡카드 모반 사건까지 터지자 에스닐인들의 불안감은 한층 커졌지만.
“나라가 어찌 되려고 이런 흉흉한 일들이···.”
“그래도 다 붙잡았으니 다행 아닌가! 왕명으로 엄히 다스리신다 하셨으니···.”
“헌데 이번에도 세자르 공자님이 공을 세우셨다 했지?”
“허어, 그것 참 대단하구만!”
그 무서운 사건들이 이미 종결되었으며, 이번에도 ‘세자르 레핀’ 공자의 활약 덕분이라는 사실이 널리 알려졌다.
세자르 공의 성공담을 속속들이 아는 귀족들뿐 아니라 일반 평민들, 빈민가 주민들까지 나를 영웅시한다는 카렌의 말에 머리를 긁적였다.
“어쩐지 좀 민망한데.”
따지고 보면 내게는 치트키나 다름없는 시스템이 있고, 그것을 잘 활용한 것뿐이니 말이다.
“그 정도로 민망해하면 곤란한데.”
“그게 무슨 말이야?”
“거리의 아이들 사이에 네 노래가 유행하는 것 알아? ‘세자르 공은 무엇이든 할 수 있다네~’”
“카렌, 그만.”
“나 끝까지 부를 수 있는데···.”
“왜 그런 쓸데없는 것까지 외우고 다니는 건데?”
퉁명스럽게 대꾸하자 카렌이 깔깔 웃었다.
가끔 보면 날 놀릴 때만 눈이 빛난다니까.
“진짜야. 넌 걔들한테 완전 영웅이거든?”
“됐다니까.”
“아, 근데 무작정 빈민가로 갔다간 너 봉변 당할 수도 있어.”
“봉변? 왜?”
카렌이 으스스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 동네에선 네 머리카락만 잘라서 가져도 행운이 온다는 속설이 돌고 있거든.”
이건 좀 소름인데.
“그러니까 난 지금 ‘행운을 가져다주는 토끼 발’과 같은 취급을 받고 있다, 이거지?”
“응, 근데 토끼발 따위보다 훨씬 강력한 행운?”
고개를 절레절레 젓자 카렌이 또 까르르 웃는다.
어쨌거나 이렇게 맘 편히 웃을 수 있는 건, 최근의 사건들이 어느 정도 정리되었기 때문이다.
먼저 벡카드 모반 사건으로 말하자면.
현장에서 잡힌 벡카드의 차남과 헬리오스 백작을 비롯해 해당 가문 구성원 전원, 그 밖에도 모반에 가담했다는 증거가 명백한 지방 호족들 모두가 처형당했다.
그 이야기가 나오자 카렌이 혀를 내둘렀다.
“테레사 폐하도 대단하다니까.”
“대단하다니?”
나와 가신들이 체포해온 이들을 테레사는 곧바로 약식 재판에 회부했다.
재판에서 테레사와 마주하게 된 그들은 여왕 앞에 무릎을 꿇고 선처를 호소했다.
“그냥 선처를 호소한 게 아니지. 부양할 자식이 있니 노모가 편찮으시니 하며 눈물을 펑펑 흘렸잖아. 그냥 놔뒀으면 폐하의 발에 매달렸을걸?”
그들의 눈에 비친 테레사는 어리디 어린 십 대 소녀.
아마 동정심을 자극하면 목숨만은 건질 수 있겠다는 계산이었을 거다.
그러나 테레사는 평범한 소녀가 아니였으니.
‘지금 짐을 우롱하는 것인가?’
여왕은 얼굴 표정 하나 변하지 않은 채 모반 가담자 전원에게 법정 최고형인 사형을 주장했고.
그 말에 피고들이 울부짖자 한 손을 들어올리며 덧붙였다.
‘아, 그리고 주모자 두 사람은 참수형 대신 교수형을 구형하되, 그 둘의 목을 잘라 성문 앞에 사흘간 효시해두겠다.’
‘···!’
몰랐던 사실이지만, 이곳에서는 참수형보다 교수형이 더욱 불명예스러운 집행 방식이라 했다.
‘재판관들은 어찌 생각하는가?’
여왕의 암살을 기도하고, 왕실을 뒤엎을 모반을 계획하다가 현장에서 잡힌 자들.
재판관들이 왕의 뜻에 반대할 이유는 전혀 없었다.
“덕분에 지금껏 폐하를 ‘어린 계집애’라며 무시했던 이들의 입이 떡 벌어지게 된 거지.”
“···공국의 사신을 함께 처형하지 못한 건 아쉽지만 말이지.”
내 말에 카렌이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어쨌거나 머리는 함께 걸어두었으니 상관없잖아?”
공국의 사신을 처형하지 못한 이유는 단 하나뿐.
···그가 이미 감옥에서 죽어 있었기 때문이다.
‘짐도 알려줄 것이 있는데.’
그날, 테레사가 나를 불러 하려고 했던 이야기가 그것이었다.
공국의 사신.
그녀를 암살하려 했던 이능자 자객.
이 두 사람이 감옥에서 한날 한시에 죽어 있었다는 사실 말이다.
* * *
테레사의 표정은 그다지 좋지 않았다.
“감옥의 경비는 물 샐 틈 없이 철저했어. 자살도 하지 못하게 만반의 수를 써뒀지만···.”
시신의 몸에는 아무런 상처도 없었다.
부검을 마친 왕궁의의 말로는 독에 의한 죽음이며, 그것도 아주 희귀한 종류의 독이라 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진작 고문이나 해서 정보라도 알아낼 걸 그랬지 뭔가.”
“그···렇군요.”
그렇게 말하는 테레사는 조금 소름끼치긴 했지만.
“그렇게 말씀하시니 짚이는 바가 있습니다.”
나는 리아나가 해준 이야기 중 일부를 들려주었다.
칼 오프러스 대공은 독물학의 대가일 뿐 아니라 고아들을 모아놓고 그들에게 독을 시험하길 즐기는데.
그중 ‘시한폭탄’처럼 특정한 시간이 지나야만 체내에 작용하는 독이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해독제는 대공의 손에 있어, 임무를 완수하고 돌아온 후에야만 받을 수 있다는군요.”
“하, 정말로 목숨을 건 임무라 이 말이군.”
어쨌거나 에스닐에는 그다지 좋은 소식은 아니었다.
가장 중요한 물증이라 할 수 있는 두 사람이 옥중에서 죽어버렸고.
“여러모로 빈틈이 없는 자야, 칼 오프러스 대공은.”
설상가상으로, 벡카드 가문과의 협상문에 쓰인 공국의 인장이 위조된 것이었음이 드러났으니 말이다.
···즉 공국은 자국은 이 사건에 관여하지 않았다며 발뺌할 수 있다는 것.
“아쉽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지.”
그녀의 말이 끝나자 나는 한켠에 미뤄뒀던 용건을 슬그머니 꺼냈다.
“농농이가 이런 얘기를 들려줬는데요.”
농농이가 알려준 순간 이동에 관한 정보.
그를 바탕으로 ‘두 번째 결혼식의 장소를 바꿔야 한다’고 주장하자, 여왕은 일리가 있는 말이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안 그래도 짐 또한 결혼식 장소를 바꿀까 싶어 피터 3세와 논의하던 중이었네. 농농이 말대로 두 번째, 세 번째 암살자를 보낼지 모르기도 하고···.”
그녀가 책상 위의 지도를 짚어 보이며 말했다.
“커글랜드 왕성까지는 거리가 상당하니, 이동 중에 변고가 생길 가능성이 높아서 말이지.”
“가급적 이곳 왕성과 가깝고, 외부인에게 노출된 적이 없는 장소를 찾아야겠군요.”
“그래. 농농이가 순간 이동을 지닌 이능자인 줄은 몰랐군.”
테레사는 농농이가 노움족이라는 사실은 모른다. 그저 특별한 능력을 지닌 아이라고만 알고 있는데, 순간이동 이능자라니까 납득하는 눈치였다.
“어쨌거나 중요한 건 이것일세.”
“네?”
그녀의 집무실에 들어선 이후.
테레사는 처음으로 미소 지어 보였다.
“이번 사건으로 짐은 그대에게 왕실 고문관이라는 직책을 그 누구의 반대도 받지 않고 줄 수 있게 됐다는 거지.”
“···.”
왕실 고문관.
까맣게 잊고 있었다.
“의회의 승인은 이미 떨어진 참이네.”
공식적인 승진은 그녀가 커글랜드에서 결혼식을 마치고 돌아오는 대로 이뤄질 것이라고, 테레사는 덧붙였다.
“최연소 왕실 고문관이 되는 소감은 어떠한가, 세자르 공?”
테레사가 장난스럽게 물었지만 나는 그저 얼떨떨할 뿐이었다.
[도전과제 ‘고속 승진’ 달성! - 왕궁의 최연소 왕실 고문관이 되었습니다.]
···시야 한구석에 뜬 도전과제 달성 메시지조차 알아차리지 못할 정도로.
* * *
카렌의 보고를 다 들은 세자르는 곧바로 왕궁으로 출발했다.
피터 3세와 논의 끝에 커글랜드 왕성 대신 스완성에서 비밀리에 결혼식을 올리기로 한 여왕 일행을 배웅하기 위해서였다.
‘스완성이라니 그나마 다행이군.’
스완성은 피터 3세를 비롯한 소수의 왕족 외에는 그 누구도 방문한 적이 없는, 지극히 사적인 공간이었다.
그 말인즉 공국에서 지난번 같은 계략을 쓸 수 었다는 의미였으니.
세자르는 농농이를 비롯한 가신들을 테레사의 경호단으로 붙여주기로 했다.
“발닉, 이번 일에선 네 역할이 가장 중요한 것 알지?”
“걱정마십시오, 도련님.”
그리고 이 임시 경호단의 지휘를 맡은 것이 바로 발닉이었으니.
“제 목숨, 아니 영혼도 걸 수 있습니다!”
어쩐지 제 가슴까지 탕탕 두드리며 큰소리를 치는 발닉을 보며 세자르가 의아해하자.
역시 경호단에 소속되었으며 여왕의 통역을 맡기로 한 앨빈이 그의 귓가에 속삭였다.
“그··· 발닉 경이 어떤 시녀를 보고 첫눈에 반한 모양이던데요.”
“시녀라니?”
“레온 전하의 유모 말입니다.”
이민족 출신의 유모 말인가?
척 보기에도 연배가 좀 있는 것 같은데, 라고 세자르가 생각하며 옆을 돌아보자.
“그 아름다운 분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걸지 못할 것이···.”
그렇게 중얼거리는 발닉을 보며 세자르는 입을 다물었다.
···뭐 본인이 좋다는데 무슨 상관인가 싶기도 하고.
왕궁에 도착한 세자르는 곧바로 여왕의 앞에 당도했다.
“폐하, 조심해서 다녀오십시오.”
그녀가 탄 마차, 그리고 마차를 지키는 경호 부대가 왕궁을 떠나는 뒷모습을 오래도록 지켜보는 가운데.
테레사 또한 멀어지는 그의 모습을 한참이나 시야에 담았다.
‘정말로 그것이 가능할까.’
커글랜드의 스완성에서 열릴 두 번째 결혼식보다도.
며칠 전 세자르가 했던 말이 그녀의 머릿속을 온통 차지하는 중이었다.
‘우리 또한, 공국의 내전을 일으키는 겁니다.’
그 말에 자신은 저도 모르게 이렇게 물었다.
“그게 대체 무슨 소리인가, 세자르 공.”
세자르는 그 말에 대답하는 대신 도리어 이렇게 반문했다.
“폐하, 공국에 선전 포고를 하실 겁니까?”
공국에 선전 포고.
그 문장 하나만으로도 그녀의 마음이 거세게 출렁였다.
“마음 같아서는 당연히 하고 싶지.”
아니, 그 정도가 아니었다.
이미 테레사의 머릿속에선 수차례 전쟁이 벌어졌다.
공국의 기름진 땅에 포탄을 퍼붓고.
그들의 터전을 불바다로 만들며.
오프러스 공국의 이름 아래 통치되는 땅이란 땅은 그 어떤 생명도 살 수 없는 불모지로 만드는 전쟁이!
···더불어 칼 오프러스 대공에게는 좀 더 특별한 죽음을 준비해줄 생각이었다.
‘내 아비와 동생의 목숨을 앗아간 것으로도 모자라 내 목숨마저 노리려 했던 자가 아닌가.’
그자의 목을 자르는 것은 기본이요, 사지를 해체하여 까마귀들의 밥으로 내어주며.
그자의 핏줄 또한 찾아내 한 명도 빠짐없이 죽음을 맛보게 해야 한다!
···그러한 강박에 테레사는 매일 같이 시달렸다.
피에 미쳐 눈이 뒤집힌 악귀가 제 귓가에 끝없이 복수를 속살거렸고.
칼 오프러스 대공을 향한 원한과 복수심이 너무 뿌리 깊은 나머지 가슴 속이 다 썩어들 정도였지만.
“허나 짐은 단순한 복수심에 쉽사리 몸을 맡겨서는 안 되는 사람이 아닌가.”
테레사는 쓰디쓴 마음으로 입술을 깨물었다.
그녀는 한 나라의 군주라는 사실을 단 한 순간도 잊은 적이 없었다.
“우리가 전면전에 나선다면 이기기야 이기겠지. 허나 쉽지는 않을 것이며 얻는 것보단 잃는 것이 많을 걸세.”
그녀의 가느다란 손가락이 지도 위 에스닐의 영토를 훑었다.
“국토의 절반 이상이 전쟁의 포화에 물들겠지. 향후 십 년은 그 여파에 시달리게 될 것이네.”
그렇게 약해진 틈을 타 지금처럼 쇠약한 왕권은 언제든 뒤집어질 수 있을 터이고.
제 주변뿐 아니라 수많은 이들의 목숨이 헛되이 사라질 것이다.
테레사의 말을 가만히 듣고만 있던 세자르가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더더욱 이 계획을 마음에 들어하실 것 같습니다만···.”
“공국에 내전을 대체 어떻게 일으키겠다는 얘기인가?”
“···위정자의 가장 큰 약점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세자르가 미묘한 표정으로 던진 질문에 테레사는 잠시 고민하다가 답했다.
“가족이 볼모로 잡히는 것?”
“아니, 가족이 최대의 적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대답하며 세자르가 꺼내 보인 것은, 오프러스 대공가의 후계 구도가 그려진 가계도였다.
“에스닐이나 커글랜드와 마찬가지로, 공국 또한 왕좌를 노리는 다툼이 치열할 수 있었지만 그러지 않았던 것은···.”
그의 손가락이 이름들을 차례 차례 짚어 보였다.
“대공이 적통의 두 딸이 아닌, 정부에게서 얻은 서자에게 왕위를 주겠다는 뜻을 공공연히 했기 때문입니다.”
두 딸 중 2공녀는 부친의 뜻에 따라 먼 외국의 어느 귀족과 정략 결혼을 했으나.
1공녀는 외국 왕족과 정략혼을 시키려는 대공의 뜻을 거부하고, 자국의 어느 한미한 귀족과 식을 올려버렸다고 한다.
···대공의 뒤를 이어 대공위에 오르고 말겠다는 의지 하나로.
“대공만큼이나 야심이 어마어마한 인물이라 하더군요. 능력도 상당한 편이라, 아직 열 살밖에 안 된 서자보다는 귀족들에게 더 많은 지지를 받고 있다 합니다.”
오죽하면 여론이 대공 지지파와 공녀 지지파로 갈라졌을 정도라고 한다.
세자르의 설명을 끝까지 들은 테레사는 한동안 고민에 잠겼다.
마침내 생각을 정리한 그녀가 입을 열었다.
“세자르 공. 그대가 공녀와 접촉해볼 수 있는가?”
그간 받은 것을 되갚아주고,
그 비열한 자의 눈에서 피눈물을 흘리게 해주겠다고.
그녀의 결단에 세자르는 해사하게 웃었다.
“여부가 있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