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으로 공격할 차례
* * *
‘그 아이는 너 따위가 엄두도 못 내는···.’
‘어디 감히 이런 계집이 내 아들을 홀리려 들어!’
‘찰스의 머리 위에 있다고 생각했나?’
치이익.
인두가 새빨갛게 달궈졌다.
인두의 뾰족한 끝 부분이 점차 다가온다.
안 돼, 안 돼, 하지만 도망갈 수가 없다.
움직이려 해도 포박된 온몸은 꼼짝하질 않는다.
그렇게 인두가 눈앞으로 다가온 순간!
“꺄아아아악!”
리아나는 땀에 푹 절은 채로 깨어났다.
허억, 허억, 허억.
거칠게 숨을 몰아쉬고 나서야 눈앞의 광경이 제대로 보였다.
어쩐지 익숙한 색깔의 커튼, 넓은 창틀 너머로 펼쳐진 익숙한 초록빛 풍경···.
‘여기는 설마.’
화들짝 놀라 고개를 돌린 순간.
다시 보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한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너는···!”
“깨어났군.”
한쪽 눈꺼풀은 퉁퉁 붓고, 다른 쪽 눈꺼풀은 반쯤 흘러내리다시피했음에도.
리아나는 힘겹게 눈을 떠가며 상대방의 얼굴을 재차 확인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그 남자를 닮아가는, 선이 곱고 잘생긴 얼굴.
체격 또한 전에 봤을 때보다 훨씬 건장해진 것이 이제는 누가 봐도 완연한 성인 남성이었다.
“세자르···.”
그녀는 그 이름을 저주하듯 내뱉었다.
결국.
이 모든 불행은 이자로부터 시작된 것이 아니었나!
그럼에도 어쩐지 마음은 차분했다.
끓어올라야 마땅할 분노 같은 것은 느껴지지 않았고, 차갑고 냉정한 이성만이 그녀의 머릿속을 지배했다.
지금 이 상황을 십분 이용해 목표를 이뤄야 한다는 생각뿐.
“전에 봤을 때보다 안색이 많이 안 좋아 보이는데. 벡카드 가문에서 꽤 고초를 겪었나 보지?”
이 몰골을 보고 고초 운운하다니, 이 무슨 질 나쁜 농담인가.
머리부터 발 끝까지 성한 데가 없는 것은 물론이고, 이목구비가 완전히 망가져 예전의 미모가 송두리째 사라져버렸는데.
“고문과 고초라는 단어를 평소에도 자주 헷갈리나 보지?”
그녀의 앙칼진 대답에 세자르가 픽 웃음을 터뜨렸다.
“대답하는 것 보니 정신은 멀쩡한가 보네.”
“그러는 그쪽은 이 모습을 보고 농담을 건네는 것 보니 정신 건강에 심각한 문제가 있어 보이는데.”
리아나가 짓씹듯 내뱉은 말에 세자르는 가만히 그녀를 보더니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럴지도 모르지.”
그러고 한동안 말이 없는 세자르를, 리아나는 복잡한 마음으로 바라보았다.
자신이 그토록 죽이려 했지만 결국은 실패한 대상.
한때 시궁창의 쥐나 다름없던 소년은 멀쩡히 장성하여 이 레핀 가문의 적자가 되었을 뿐 아니라, 에스닐의 정세를 좌지우지하는 인물이 되었다.
‘그에 반해 나의 팰러스는···.’
나의 팰러스.
세상 모든 것이 눈앞에 있었지만, 바로 윗 계단으로 올라가지 못하고 저 아래로 떨어진 불쌍한 그녀의 아들.
양아버지에게는 단 한 번도 인정받지 못한 것으로도 모자라, 친아버지가 보낸 맹독을 삼키고 가장 믿었던 친우의 손에 목졸려 죽었다.
이 얼마나 비참한 운명인가.
그 사실을 되새기는 것만으로도 리아나는 온몸이 타들어가는 기분이었다.
“내 가신들이 당신을 발견해 이곳으로 데려왔다. 당신을 치료하라고 한 건 아버지이지, 내가 아니야. 그냥 알아두라는 거다.”
“···로건.”
바보 같을 정도로 우직하고 답답한 남자.
아주 오래된, 빛바랜 기억들이 그녀의 마음속을 어지럽히는 가운데.
세자르의 차가운 목소리가 이어졌다.
“당신은 대공의 최측근이자 밀정이었다며. 왜 대공을 배신한 건가?”
리아나는 그의 두 눈을 마주 보았다.
그녀를 향한 증오도, 분노도, 복수심도 느껴지지 않는 무감정한 눈동자였다.
“대답은 예상하고 있지 않나?”
“···팰러스의 죽음을 사주한 것이 대공이라는 걸 알게 되어서?”
“그래. 하지만 그것뿐은 아니야.”
그렇게 대답하는 이 순간에도 리아나는 생명이 조금씩 줄어들고 있음을 느꼈다.
목숨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깨달은 사람들이 으레 그렇듯, 그녀 또한 모든 비밀을 털어놓고 싶은 강렬한 충동에 사로잡혔다.
“대공이 팰러스의 아버지이기 때문이지.”
“···!”
그렇게 털어놓은 비밀이 상대에게 예상치 못한 충격을 선사한다면,
그것은 더할 나위 없는 기쁨이 될 터이고 말이다.
커진 세자르의 눈을 보며 리아나는 삐뚤어진 만족감을 느꼈다.
“나는 그 누구보다도 너를 증오해왔다. 이 세상에서 너 이상으로 증오할 수 있는 존재는 없다고 믿었지. 그런데···.”
그녀는 침을 꿀꺽 삼켰다.
자신이 엿듣던 그 순간에도 차마 사실이라고는 믿어지지 않던 끔찍한 말들이 다시금 머릿속을 울렸다.
‘팰러스 놈이 드디어 죽었다고 합니다.’
‘기다렸던 소식이로군.’
단 두 문장에 그녀의 세상이 무너진 순간이었다.
“내가 믿어온 모든 것이 거짓이며 허상에 불과했다는 걸 깨달은 순간.”
남들을 장기말처럼 조종하며 꼭대기로 올라왔다는 본인의 믿음과는 달리.
“나와 팰러스야말로 대공의 뜻대로 움직이는 장기말에 불과했다는 걸 알게 된 순간···.”
···그러한 멍청함 때문에, 하나뿐인 자식마저 대공의 장기말로 희생시키고 말았다는 쓰디쓴 죄책감이 그녀의 목을 졸랐다.
설령 대공의 목숨을 제 손으로 끊어놓는다 해도 평생을 갈 종류의 감정이었다.
“나는 그 남자를 내 손으로 죽이고 말겠다고 마음먹었다.”
허나 지금 자신의 꼴은 어떠한가.
레핀 가문에서 사실상 쫓겨나 아무런 입지도, 영향력도 없는 그녀가 쓸 수 있는 것은 매혹의 이능뿐이었고.
간신히 얻어낸 찰스 벡카드의 호감은 결국 부메랑이 되어 그녀의 사지를 만신창이로 만들어버렸다.
그녀는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들었다.
“팰러스가 죽을 때 제일 마지막까지 지켜본 것이 세자르, 너라고 들었다.”
그 말에도 세자르의 얼굴은 여전히 무표정했다.
“팰러스는, 내 아이는··· 어떻게 세상을 떠났지? 유언 같은 건 남기지 않았나?”
최대한 아무렇지 않게, 품위를 유지하며 말하려 했는데도.
어쩐지 목소리는 애원하는 듯 들렸다.
세자르는 섣불리 입을 열지 않았고, 그녀는 결국 매달리듯 독촉하고 말았다.
“제발, 내게 알려주면 안 될까? 내 아이, 내 가련한 팰러스가 어떻게··· 너무 외롭지는 않았-”
“어머니의 안부를 걱정했다.”
“···.”
그 말에 리아나의 입이 절로 다물어졌다.
세자르는 천천히, 조곤조곤 팰러스의 최후를 설명했다.
“죽음 앞에서도 팰러스는 태연하더군. 몸을 고통스럽게 만드는 종류의 독이 아니었는지, 멀쩡하다가 어느 한 순간 숨이 끊어졌어.”
리아나는 그 말을 믿지 않았다. 대공은 늘 상대에게 끔찍한 고통을 주는 독을 쓰기를 애용했으며, 설령 그 대상이 자신의 핏줄이라 해서 본인의 방식을 바꿀 자는 아니었다.
그럼에도.
그녀는 세자르의 말을 믿고 싶었다.
“편안히, 편안히 저 세상으로 갔나?”
마지막으로 확인하듯 던진 질문에 세자르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아아.
리아나는 가슴 깊은 곳에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분명 그뿐이었는데.
벌어진 입술 사이로 오열이 새어나왔고, 얼굴은 뜨거운 눈물로 흥건했다.
···팰러스가 죽은 후 처음 흘리는 눈물이었다.
“···.”
세자르는 아무 말도, 반응도 없었다.
이런 모습을 가장 보여주고 싶지 않았던 숙적 앞에서 아들의 죽음을 애도하는 상황이 아이러니하기 그지없지만.
리아나는 그렇게 한참을 울부짖었다.
그녀의 울음이 어느 정도 진정되었을 때 세자르가 입을 열었다.
“내가 당신의 고해성사나 들으러 이 자리에 온 게 아닌 줄은 알고 있을 텐데.”
리아나는 눈물로 엉망이 된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세자르의 눈이 독수리의 그것처럼 날카롭게 빛났다.
“단도직입적으로 얘기하지. 당신의 목숨을 부지시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 만한 정보를 갖고 있나?”
그녀는 입술을 지그시 깨물다가 입을 열었다.
“아마 그 이상일걸. 내가 알고 있는 모든 정보를 네게 넘기지.”
얼굴이 망가진 이상 매혹의 이능조차 쓸 수 없는데다 살 날마저 얼마 남지 않았다.
가진 모든 것을 걸어 도박을 하기에도 모자란 상황이 아닌가.
“이걸 모종의 거래라고 봐야 하나?”
리아나는 고개를 저었다.
“내 목숨을 구해준 것에 대한 보답, 아니면 로건에게 남은 마음의 빚. 둘 중 뭐라 부르든 상관없어. 그뿐 아니라···.”
공국의 기밀 정보뿐 아니라 대공의 약점과 허점을 세자르에게 남김없이 제공하는 것.
그것을 토대로 종국에 대공의 죽음을 이끌어내는 것이-
리아나의 목표였다.
“에스닐이 쓸 수 있는, 비장의 수를 알려주지.”
세자르의 입가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깃들었다.
* * *
그날 저녁.
왕궁에 가려던 내게 농농이와 앨빈이 찾아왔다.
“저, 왕자님이 할 얘기가 있으시다고.”
[옹, 앙앙.]
“···농농아.”
오랜만에 농농이의 얼굴을 보니 힐링이 되는 기분이다.
인간보다 몇 배로 느리게 나이를 먹는 노움 족답게 농농이는 여전히 아기 같은 모습이었지만.
[옹, 바앙, 부앙···.]
두어 살짜리 아기 같았던 전과는 달리 지금은 세 살 정도는 되어 보인다.
아기와 어린이의 중간 단계라고나 할까.
“잘 지내고 있었어?”
무심코 농농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려다가 아차, 하며 손을 거두었다.
이 녀석, 사내 놈들이 자기 머리를 쓰다듬는 게 싫다 했지.
[앙옹, 앙···.]
“뭐 그럭저럭 잘 지내고 있지. 여왕 폐하가 나를 얼마나 총애하시는지 말도 못 해.”
틀린 말은 아니었다.
내가 테레사의 신변을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데려다준 이후, 농농이는 거의 왕궁에 살다시피했는데.
‘농농이, 너무 귀여워!’
‘농농아 넌 어떻게 뺨이 그렇게 토실토실하니? 꼭 빵 같아.’
‘농농아, 맘마 먹을까?’
내 앞에서는 그렇게 어른스럽게 구는 테레사가 농농이 앞에서는 평범한 소녀처럼 행동하는 듯했다.
[옹, 옹옹옹, 후앙···. 부앙, 푸아···.]
“폐하뿐이 아니다. 왕궁 안의 여인이란 여인들은 다 내게서 눈을 떼지 못할 정도이니···.”
“저기, 지금 나한테 자랑하러 온 건가?”
살짝 짜증난 말투로 얘기하자 농농이가 얼른 고개를 저었다.
[앙! 옹옹앙, 아옹, 바뿌아···.]
“왕자님, 조금만 천천히 말씀을···.”
두 주먹을 꼭 쥐고 동그랗게 눈을 뜬 채 열변을 토하는 농농이.
점점 빨라지는 그의 말을 앨빈이 황급하게 통역했다.
[암살자 놈의 능력이 순간이동이었잖아. 이 몸도 순간이동을 하실 수 있는 것 알고 있지?]
“그런데?”
[그자의 이능과 내 능력이 유사한 성질이라고 가정할 때 말이지만, 순간이동 능력에는 하나의 제약이 있어. 능력자 본인이 가본 장소로만 이동할 수 있다는 거지.]
농농이는 그 장소에서도 특정한 지점의 좌표를 설정해 그곳으로 순간 이동을 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좌표가 잘못되면 끔찍한 결과가 빚어질 수 있는데.
[이건 우리 노움 사이에서 오래전부터 전해지는 괴담인데, 어떤 노움이 좌표를 정확히 확인해보지 않은 채 순간이동을 했다가 그 자리에 서 있던 바위에 몸이 끼어 죽어버리고 말았대.]
요컨대, 자신이 설정한 좌표에는 아무것도 놓여 있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순간 이동을 함부로 쓰지 못하는 건 그런 이유야. 그 장소를 제대로 알고, 이동할 지점이 허공이어야 한다는 제약이 있어서지.]
농농이는 어째서 공국이 다른 날이 아니라 ‘결혼식’을 골라 암살을 시도했는지 생각해보라는 거였다.
“그럼 네 말대로라면 공국 측 암살자는 이전에 에스닐 왕궁의 대연회장을 와봤다는 거로군.”
일리가 있는 말이었다.
게다가 모든 결혼식은 제식이 동일하지 않은가.
신랑 신부가 제단 앞에 가서 부부의 맹세를 읊는 것은 기정사실이나 마찬가지이고.
‘그 이능자가 대연회장에 와봤고, 거기에 놓인 제단의 위치까지 정확히 기억했으니···.’
신랑 신부 사이에 나타나 테레사를 칼로 찌르려 할 수 있었다는 이야기다.
“좋은 정보 알려줘서 고맙다, 농농아.”
왕궁으로 향하는 마차 안에서 그 새로운 정보를 다시 한 번 되새기자.
중요한 사실 하나가 머릿속을 스쳤다.
‘커글랜드에서 열릴 두 번째 결혼식!’
공국 측이 아직 포기하지 않았다면, 두 번째, 세 번째 암살 시도를 하지 않을 리 없다.
나는 테레사 여왕에게 두 번째 결혼식의 장소를 바꿀 것을 제안하기로 마음먹었다.
* * *
집무실에 홀로 앉아 있던 테레사의 얼굴은 어둡기 그지없었다.
“아, 세자르 공.”
“폐하. 급히 알려드릴 사실이···.”
“짐도 알려줄 것이 있는데.”
“흠, 이거 누구부터 얘기할지 가위 바위 보라도 해야 하려나요.”
그 어설픈 농담에 테레사가 풋 웃음을 터뜨렸다.
“좋아. 그럼 그대부터 이야기하게.”
“네, 이야기할 게 한두 개가 아니긴 하지만···.”
나는 테레사의 맞은편에 앉은 채 리아나가 해줬던 말을 떠올렸다.
‘오프러스 공국을, 칼 오프러스 대공이란 남자를 파멸로 밀어넣을 비장의 수가 있다는 거다.’
어찌 보면 우리 에스닐은 지금껏 공국에게 일방적으로 당해왔던 꼴이다.
나라의 크기로 보나 군사력으로 보나 어느 한 군데 우위에 있지 않은 구석이 없는데도 계속 공격을 허용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공국이 지닌 정보가 우리에게는 없었기 때문.
“제일 중요한 건 이겁니다. 칼 오프러스 대공의 민감한 정보를 알아냈다는 것.”
그 말에 테레사의 눈이 희망으로 빛났다.
“그리고 그것을 이용하여, 공국이 우리 에스닐에 했던 것처럼···.”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라졌다.
···대공이 제 수족처럼 부리던 리아나가 마음을 바꿔먹었고.
그녀가 제공하는 민감한 정보를 사용하여-
놈의 수를 고스란히 되돌려줄 수 있게 되었으니까.
“우리 또한, 공국의 내전을 일으키는 겁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