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아나의 등장
* * *
오프러스 공국의 수도, 오프빌.
에스닐의 수도로부터 말로 사흘을 꼬박 달려야 닿을 수 있는 곳이었다.
그 오프빌의 한복판에 오프러스 대공성이 자리했다. 에스닐의 왕성보다 크기는 작으나 화려함과 세련됨만큼은 뒤떨어지지 않는 외관을 자랑했다.
“에스닐이 생각 외로 조용하다고?”
대공성 집무실에서 칼 오프러스 대공은 비서관의 보고를 받는 중이었다.
“무사히··· 결혼식이 마무리되었다고 하는군요.”
“그 말이 의미하는 바는 한 가지뿐이군.”
“자, 자객의 시도가 실패로 돌아간 듯합니다.”
“···벡카드 가문과 협상하러 간 자도 되돌아오지 않았다고 했나?”
“그렇···습니다.”
비서관은 면목이 없다는 듯 고개도 제대로 들지 못했다.
대공의 얼굴은 엉망으로 일그러졌다.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꽉 쥔 주먹이 부들부들 떨렸다.
“···소, 송구스럽습니다.”
침묵이 길어질수록 비서관의 공포는 커져만 갔다.
“고개를 들거라, 그롤.”
마침내 대공이 입을 열었고.
비서관 그롤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든 순간.
철썩!
솥뚜껑만 한 손이 그의 얼굴을 갈겼다.
“크윽!”
철썩! 철썩! 퍽!
가격은 몇 차례나 더 이어졌다.
비서관의 입에서 고통에 찬 신음이 새어나왔다. 그의 얼굴이 퉁퉁 부어오를 무렵에야 대공은 손을 거두었다.
“흐, 흐윽, 흑···.”
“어때, 좀 정신이 드나?”
“예, 옙. 감사합니다, 대공 전하.”
비서관은 달달 떨며 허리를 꾸벅 숙였다.
대공은 임무를 지시대로 해내는 자에겐 후한 보상을 베풀지만.
임무 수행에 실패하는 자에게는 가차없기로 유명했다.
그롤은 자신의 처벌이 그저 단순한 구타 정도로 끝나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다른 이들이라면 벌써 목을 벴겠지만, 자네는 아직 젊고 경험이 부족해. 그 점을 감안해 내가 한 번 더 기회를 주는 것이네.”
“그, 그럼요, 전하··· 이 하혜 같은 은혜를 어찌···.”
“그러니 다음은 없다, 그롤.”
싸늘한 목소리에 그롤의 몸이 바싹 굳었다.
입안에서 느껴지는 피 맛이 유독 비릿했다.
“제일 중요한 것은 이번 사건에서 공국의 흔적을 모조리 지우는 것. ···약은 확실히 먹여뒀겠지?”
“그럼요. ‘순간 이동자’도 그렇고, 벡카드와의 협상용으로 내보낸 자도 제대로 먹여뒀습니다.”
제 회중시계를 확인한 비서관 그롤이 덧붙였다.
“지금쯤이면 둘 다 숨이 끊어졌겠군요.”
대공이 말하는 ‘약’이란 일종의 시한폭탄이나 다름없는 독극물이었다.
먹고 나서 얼마간은 멀쩡하지만, 복용량에 따라 정해진 시간이 지나고 나면 갑자기 목숨이 끊어지는 성질의 것.
대공이 지닌 특별한 해독제 없이는 목숨을 구해낼 수 없는 극독이기도 했다.
“그나마 다행이로군.”
대공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두 사람 다 성은 고사하고, 제대로 된 이름조차 없는 거리의 고아들 출신.
에스닐에서 아무리 애를 써봤자 그 둘의 신원을 밝혀낼 수 없을 거다.
그러나 비서관은 다른 부분을 걱정하고 있었다.
“···에스닐에서 이걸 빌미로 삼아 선전 포고를 해오면 어쩌죠?”
전쟁이라는 것이 그렇다.
물증이 없다 해도 심증만으로, 아니 감정이 상한 것만으로도 언제든 벌어질 수 있는 일이니까.
‘하물며 암살 시도로 모자라 모반을 공모하기까지 했잖아?’
에스닐의 여왕이 아무리 소문대로 차가운 피의 소유자라 해도 이번 일을 그냥 넘기진 않을 거다.
그롤이 조심스럽게 묻는 말에 대공이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선전 포고! 전쟁을 선포해온단 말인가?”
“그렇습니다만···.”
“그롤.”
그롤은 멍들어 잘 보이지 않는 눈으로 대공을 마주 보았다.
대공은 한쪽 입꼬리를 끌어올린 채 웃고 있었다.
“에스닐이 정말로 전면전을 선포할 수 있다고 생각하나?”
“물론 에스닐로서도 잃을 게 많은 싸움이기는 합니다만···.”
쭈뼛거리던 비서관이 말을 이었다.
“만일 그들이 전면전을 결심한다면 우리 오프러스로서는 절대 이길 수 없는 싸움이 될 겁니다.”
군사력만 따진다면 에스닐 쪽이 압승이라는 말에 대공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자네의 말은 틀리지 않았네. 하지만 테레사 여왕의 왕권은 아직도 허약하기 그지없는 상황이지. 그런 가운데서 전 국토를 전쟁의 폐허로 몰아넣는다?”
대공은 책상 위에 올려진 보고서에 첨부된 초상화의 얼굴을 흘끗거렸다.
“고작 열몇 살에 불과한 계집아이가 그런 용단을 내릴 수 있을 것 같은가?”
“그렇지만 만일 그녀의 섭정이···.”
“하, 섭정?”
대공의 입가에 걸린 비웃음이 한층 짙어졌다.
“그 어린 계집의 어미나, 그 오라비라고 하는 자들은 테레사 여왕만큼도 못한 허수아비들 아니었나?”
그래. 그러니 그 열몇 살짜리가 국정을 좌지우지하게 놔두는 것이겠지.
그 허점투성이 나라에서 유일하게 경계할 만한 이가 있다면···.
“그런 쓸데없는 걱정은 집어치우고, 자네는 이자에게 밀정을 붙여놓도록.”
대공은 보고서에 적힌 이름 중 하나를 가리켰다.
“세자르··· 레핀 말씀이십니까?”
세자르 레핀.
처음에는 리아나, 그 계집의 약해빠진 의붓아들로 이름도 모르는 존재에 불과했으나.
어느새 그 존재감이 커져 국왕의 최측근이 되었다.
어쩌면 이번 작전이 수포로 돌아간 것도 이자의 입김이 작용했기 때문이 아닐까 싶을 정도였다.
“그래. 이자에게 밀정을 붙여 그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토록 해라.”
“밀정이라면···.”
머리를 굴리던 비서관이 제안했다.
“‘그림자에 거하는 자’는 어떠십니까?”
공국에는 이능자를 전문으로 육성하는 기관이 있다.
거리의 고아 중 이능을 지닌 이들을 데려다가 전문 자객이나 밀정으로 키워내는 곳으로, 이들은 사람 이름 대신 ‘순간 이동자’ ‘그림자에 거하는 자’ 따위의 이능명으로 불렸다.
“흠, 확실히 그놈이라면 나쁘지 않겠군. 그리고···.”
잠시 망설이던 대공이 덧붙였다.
“리아나. 그 빌어먹을 계집이 어디로 갔는지도 찾아봐.”
리아나.
자신이 키워주다시피 한 은혜를 저버리고 도망치더니, 벡카드 가문에 붙어 공국과 놈들 사이를 이간질했을 줄이야.
간발의 차로 그녀를 붙잡는 데 실패한 기억을 떠올리며 대공이 이를 바득 갈았다.
‘···대륙 끝까지 뒤져서 찾아내고 말겠다.’
* * *
죄인들을 왕성에 데려다놓고 보니 어느새 아침이 되었다.
나뿐 아니라 가신들과 병사들 역시 한숨도 못 잔 채 밤새도록 말을 달린 터였다. 기진맥진한 이들을 데리고 공작저로 간신히 돌아왔다.
“눈만 좀 붙이겠네.”
제이콥에게 깨워달라 얘기하고는 그대로 잠들었다.
“저, 도련님. 정오가 되었습니다.”
꿈도 꾸지 않은 채 정신없이 자고 일어나니 어느새 해가 중천에 떠 있다.
아직도 잠 기운이 가시지 않은 채로 억지로 눈을 뜨자, 제이콥은 가신들이 돌아왔다고 알렸다.
“디터 경과 발닉 경이 방금 전에 막 도착했습니다.”
그러고 보니 그 두 사람은 진짜로 한숨도 못 잤겠는데.
나는 벌떡 일어나 둘이 기다린다는 곳으로 내려갔다.
“디터, 발닉.”
도착한 지 얼마 안 됐다는 말이 정말인지, 둘은 아직도 상기된 얼굴이었다.
“주군, 지시대로 수행하고 왔습니다.”
“혹시라도 낌새를 채고 도망치는 이가 있을까 봐 벡카드 쪽부터 먼저 가봤습니다.”
발닉은 벡카드 백작과 장남인 찰스를 비롯해 주요 구성원들을 전원 체포했다고 덧붙였다.
공국과의 협상이 오래전부터 시작된 것임을 증명해주는 증거 자료도 찾았다고 했다.
이 자료가 얼마나 법적 효력이 있을지는 제대로 살펴봐야 알겠지만, 일단은 물증이 나왔다는 것만으로도 상당한 수확이다.
“아주 훌륭하군. 그런데 찰스 벡카드도 저택에 있었다고?”
그렇다면 어째서 그가 협상 자리에 나오지 않은 걸까.
내 의문을 예상하기라도 한 듯 발닉이 답을 들려주었다.
“장남은 자기 방에 갇혀 있었습니다. 이유는 정확히 모르겠지만요.”
그 말에 나는 카렌과 나눴던 대화를 떠올렸다.
리아나가 장남 찰스 벡카드에게 접근해 그를 휘두르려 했고, 이후 장남은 제 모친인 벡카드 백작과 계속해서 마찰이 있었다고 했지.
‘장남이 공국과의 협상을 방해할까 봐 방에 가둬놨나 보군.’
벡카드 백작도 대단한 여자네, 라고 생각하며 이어지는 보고를 경청했다.
“헬리오스 가문은 워낙 장남 브렉의 사망 이후 많은 구성원들이 외국으로 망명했고, 헬리오스 가주에게 동조하는 이도 많지 않았던 터라···.”
헬리오스 가문 구성원 중 추가로 체포된 이는 두 명이 전부라는 것이 결론이었다.
“좋아, 그럼···.”
“아, 그리고 주군. 한 가지 더 보고 드릴 것이 있는데···.”
“뭔데?”
디터는 어쩐지 우물쭈물하며 제대로 말을 못 했다. 그런 디터를 슥 돌아보던 발닉이 입을 열었다.
“저어··· 벡카드 백작저의 지하감옥에서 예상치 못한 인물을 발견해 이곳으로 데려왔습니다.”
“여기로 데려왔다고? 대체 왜?”
“그것이, 음···.”
발닉이 눈에 띄게 주저한다. 그냥 편하게 말해보래도 쉽게 입을 떼지 못하는데.
돌연 디터가 외쳤다.
“마님이!”
“마님이라니?”
“리아나 마님이···.”
익숙한 이름에 내 눈이 커진 순간.
디터가 울상으로 말을 이었다.
“리아나 마님이 고문을 당한 채로 지하감옥에 갇혀 계셨습니다.”
···뭐라고?
나도 모르게 미간을 좁히고 말았다. 그것을 어떻게 해석했는지, 디터는 더욱 주저하며 말했다.
“그래서··· 공작저로 데려와 지금 손님 방에서 치료 중입니다.”
“···뭐? 누구 마음대로?”
“···.”
디터는 쉽사리 입을 열지 못했다.
나와 리아나 부인의 흑역사를 제일 잘 아는 것이 이 두 사람이니 더욱 조심스러운 것이겠지.
“저어··· 도련님.”
그때 발닉이 끼어들었다.
“저희는 일단 이곳으로 데려왔습니다만, 당장 치료하라고 명하신 건 공작 각하의 부분였습니다.”
발닉은 리아나의 상태가 많이 심각했다고 덧붙였다.
얼굴은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망가졌고, 몸 여기저기에 일부러 낸 상처가 가득했다고.
“맨정신으로 보기 어려울 지경의 부인을 보시자마자 각하가 주치의를 부르신 것이라···.”
“···정녕 아버지가 그러셨단 말이냐?”
거참, 공작의 명령이었다니 뭐라 할 수도 없고.
지그시 입술을 깨물던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잠시 아버지를 뵙고 오겠다.”
* * *
“아버지, 정말로 괜찮으신 겁니까?”
괜찮냐.
많은 의미를 내포한 질문에 레핀 공작은 한동안 대답하지 않았다.
아무 감정도 담지 않은 주름진 얼굴로 창문 밖 풍경을 가만히 바라볼 뿐.
나는 대답을 재촉하지 않았다.
그저 맞은편 자리에 앉아 공작이 입을 열기를 기다리는데.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이구나.”
평소와 달리 잔뜩 가라앉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글쎄. 내가 괜찮은지 어떤지는 잘 모르겠구나. 나 자신의 감정을 들여다본 지 너무 오래되어서 말이지.”
나는 대답할 말을 찾기 어려웠다.
오랜 시간에 걸쳐 자신을 독으로 죽이려 하는 여인을 아내로 두고, 자신에게 암살자를 수차례 보낸 이를 아들로 둔 사내의 심정을 상상할 수 없었으니까.
“그러나 세자르, 나를 너무 무른 사람으로 여기지는 말거라.”
“···.”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은 이들은 회한을 남기고 싶지 않기 마련이거든.”
“아버지, 무슨 말씀을 그리 하십니까.”
“재미없는 농담일지도 모르겠구나. 나이가 들면 쓸데없는 말이 많아진다더니, 그게 내 경우일 줄은 몰랐어.”
나는 대꾸하지 않으며 그의 말을 경청했다.
“가끔은 그런 생각이 들어. 리아나야 그렇다 쳐도··· 팰러스에겐 내가 너무 소홀했던 것이 아닐까.”
그의 시선은 내가 아닌 어딘가 먼 곳을 향해 있었다.
“아버지로서 과연 그 아이에게 후회없이 해줬다고 당당히 말할 수 있을까. 어쩌면, 내가 그렇게 하지 않았으면-”
“아버지.”
더는 듣기가 힘들어 그의 말을 잘랐다.
“인생은 결국 자신의 선택이 아니겠습니까? ···아버지께서 그 정도의 죄책감을 가지실 필요 없다는 얘기입니다.”
“···그래. 늙은이의 주책이 길어졌구나.”
“아닙니다.”
그 말을 끝으로 인사를 하고 물러나려는데, 공작이 내 어깨를 붙잡았다.
“세자르, 네게 줄 것이 있다. 어쩌면 너무 늦었는지도 모르겠지만···.”
그 말과 함께 공작이 건넨 것은 상당한 두께의 서류였다.
이것이 뭐냐는 표정으로 그것을 받아들자 공작이 설명했다.
“리아나와 칼 오프러스 대공의 연관 관계를 조사한 서류다. 꽤 오랜 시간을 들여 알아낸 정보들이지.”
“···그 둘 사이에 정말로 뭔가가 있었단 말입니까?”
나 또한 그 사실을 의심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어디까지나 추측에 불과했을 뿐.
그런데 공작 또한 이를 의심하여 그 둘 사이에 모종의 관계가 있음을 밝혀냈을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세자르, 여기 적힌 내용에 따르면 리아나는 대공이 오랜 시간 공들여 키워낸 밀정이 분명하다. 헌데···.”
“그런 리아나가 공국과 벡카드 가문 사이를 이간질하려다가 걸려서 고문을 당하고 있었다면, 그 둘 사이가 틀어졌다고 보는 게 맞겠군요.”
“그렇지. 리아나가 정말로 배신을 결심했다면···.”
공작의 눈이 의미심장하게 빛났다.
“그녀에게서 알아낼 것이 꽤 많지 않겠느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