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작가의 서자로 살아가는 법-133화 (133/176)

최고의 결혼 선물

* * *

다시 몇 시간 전.

전속력으로 달려 목적지에 닿고 보니 어느새 해가 졌다.

“저기 보이는 붉은 건물이 맞습니까?”

지휘관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흐릿하게 어두운 시야 끄트머리에 빨간색 벽돌 건물이 보였다.

3형제가 구출된 바 있는 문제의 노예 창고였다.

옆을 돌아보니 나답, 나훔, 나만이 안 좋은 기억을 떠올렸는지 이를 바득 간다.

“여기서 잠시 정지.”

내 명령에 부대가 일사불란하게 멈췄다.

부대 하나를 통째로 이끌고 우르르 달려가면 아무리 조심해도 큰 소음이 발생하게 된다.

그건 결국 적에게 ‘잡으러 왔으니 얼른 도망치시오!’ 하는 꼴밖에는 되지 않는 셈.

“나답, 나훔. 너희 둘이서 동태를 살피고 와라.”

말을 탈 때뿐 아니라 맨 다리로도 엄청난 속도를 자랑하는 두 사람을 척후병으로 보냈다.

알겠다며 달려간 두 사람은, 잠시 후 무탈한 모습으로 되돌아왔다.

“어떤가?”

소수의 병사들만이 창고 밖과 1층을 지키고 있다고 한다.

용병은 아니고 어느 가문의 사병으로 보인다고.

“좋아. 그렇다면 나와 우만, 3형제를 비롯한 몇 명이 먼저 출발한다.”

이른바 선발대가 최대한 조용히 기습하는 데 성공하면.

선발대가 2층으로 올라가 현장을 붙잡는 동안 후발대가 1층을 완전히 정리하는 것이 내 계획이었다.

“저희가 앞장서겠습니다.”

3형제가 길잡이를 자처한 덕분에 선발대는 금방 현장에 도달했다.

“누구냐!”

사막이란 몸을 가려줄 엄폐물이 없는 지형이다.

우리는 처음부터 전면전에 돌입하는 길을 택했고.

“크윽!”

“기, 기습이다!”

나머지 병사들이 소음이 큰 총 대신 활을 쏴서 적병들을 혼란케 하는 사이,

나와 우만, 3형제와 롯은 곧바로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다름 아닌 우만의 이능을 사용해.

문이 아닌 벽으로 튀어나간 순간.

1층을 지키던 병사들이 우리를 보고 당황했다.

“···어?”

그들이 2층에 신호를 보내기 전, 3형제가 곧바로 놈들에게 달려들었고.

‘시간이 없다!’

나와 우만, 롯은 바로 2층으로 올라갔다.

“우만, 문을 열어줄래?”

우만은 한꺼번에 여러 명을 통과시킨 탓인지 지친 기색이었지만.

문으로 손을 통과시켜 안쪽에서 손잡이를 돌려 문을 열었다.

쾅!

“반갑습니다, 여러분.”

역시나.

문 뒤에는 내가 기대했던 조합의 인물들이 앉아 있었다.

브렉의 아버지 헬리오스 백작.

벡카드의 차남 론 벡카드.

그리고 얼굴을 모르겠는 세 번째 사내는···.

‘공국이 보낸 인물이겠지.’

그다음은 뻔했다.

헬리오스 백작과 론이 당황한 사이 세 번째 사내가 협상문을 불태우려 했지만.

롯이 시기적절하게 ‘포박의 이능’을 썼고.

덕분에 우리는 완전무결한 증거를 손에 넣을 수 있었다.

“우만, 신호탄을 쏴라.”

신호탄을 본 후발대는 잠시 후에 도착했고.

그로부터 한 시간 후, 디터와 발닉이 지휘를 맡은 지원부대 또한 우리가 있는 곳에 도달했다.

현장에 도착한 발닉은 툴툴거리듯 말했다.

“아니, 이렇게 활약할 기회조차 주시지 않고 도련님이 다 해버리시면 저희 가신들은 어쩌란 말입니까.”

그의 말마따나 현장은 거진 다 정리가 된 상황이었다.

건물 밖과 1층을 지키던 사병들은 애초 수가 얼마 되지 않았기에 쉽게 제압할 수 있었으며.

2층에 있던 주모자들은 전원 포박된 상황.

특히 공국 측 사신은 약 따위를 써서 자살할 것을 대비하고자 몸 수색까지 철저히 했다.

“자네와 디터가 해줄 일은 따로 있는데?”

“뭐든 맡겨주시지요!”

나는 제 가슴을 탕탕 두드리는 발닉에게 위임장을 건넸다.

“이건 소지하고 있는 자에게 ‘체포 특권’을 부여하는 여왕 폐하의 위임장이다.”

“이, 이런 귀한 물건을···.”

“아무나 체포하라고 주는 건 아니고.”

장난기가 싹 가신 발닉의 얼굴을 마주 보며 말을 이었다.

“자네 둘은 지원 부대를 이끌고 벡카드 가문과 헬리오스 가문의 본가로 향하도록.”

가문 구성원 전원을 체포하라, 라는 말에 둘의 얼굴이 자못 심각해졌다.

나는 그 뒤에 대기하던 우만과 롯, 3형제에게 시선을 돌렸다.

“너희들도 할 일이 있다.”

죄인을 호송할 최소한의 병력을 제외한 채, 이들에게 병력을 배분해주었고.

2층에서 발견된 명단 하나를 우만에게 건넸다.

“이번 모반에 참가할 의향을 보였던 이들의 명단이다. 여기 나온 이들을 전부 포박해오도록.”

묶여 있는 세 사람을 돌아보며 덧붙였다.

“여기 세 사람은 내가 직접 왕궁으로 호송하겠다.”

나는 이곳으로 올 때 데려온 전서구를 이용해 테레사에게도 이 소식을 알렸다.

어느덧 어둑어둑해진 하늘이 눈에 들어왔다.

오늘 따라 하루가 참 긴 기분이었다.

* * *

그때 그 시각, 에스닐 왕궁의 피로연장.

결혼식의 모든 절차가 끝나고 나니 하늘이 어두워져 있었다.

“폐하, 감축드리옵니다!”

“폐하,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신부가 되옵소서!”

수많은 사람들이 다가와 축하 인사를 건넸지만 테레사는 어쩐지 공허한 기분이 들었다.

어제까지만 해도 솔직히 별 생각이 업었다.

남들은 결혼이 일생일대의 결정이라 했지만, 그녀의 정략혼은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에 불과했으니까.

‘하지만 막상 예식을 치르고 나니 기분이 묘하군.’

복잡 미묘하면서도 마음 어딘가에 구멍이 뚫린 기분이라고 할까.

더욱이 오늘의 결혼식은 평범한 행사가 아니었지 않나.

부부의 맹세를 하던 와중 암살자가 나타나 목숨을 해치려 드는 경험을 하는 경우는 드물 터였다.

‘이 팔찌가 아니었다면.’

테레사는 세자르가 준 터키석 팔찌를 내려다보았다.

시녀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이 팔찌를 끼고 오길 고집하지 않았더라면···.

‘이미 저 세상에 가 있었을지도.’

허공에서 돌연 나타난 자객의 모습을 떠올리자 뒤늦게 등골이 오싹해졌다.

놈의 정체는 과연 무엇일까.

자신과 마찬가지로 이능을 지닌 인물일까?

그런 생각을 하는 것만으로도 머릿속이 복잡해지는데, 크로이츠 백작도 축하 인사를 건네고 갔다.

“폐하, 진심으로 축하드리옵니다.”

자신에게 늘 적대적이던 크로이츠 백작은 언젠가부터 눈에 띄게 호의적으로 변한 터였다.

‘저··· 폐하.’

헌데 피로연장으로 오자마자 다가와 이렇게 귀띔하는 것이 아닌가.

‘세자르 공이 중간에 연회장을 떠났습니다. 폐하가 주신 체포 특권을 쓰러 간다고 하는데, 정확한 연유는 잘···.’

‘알겠네.’

‘···네?’

‘전달해줘서 고맙네, 백작.’

체포 특권.

크로이츠 백작의 입에서 그 말이 나온 순간, 테레사는 세자르의 의도를 짐작할 수 있었다.

‘드디어.’

공국과 반왕실파 귀족들의 밀월 현장을 잡으러 가는 것 아니겠나.

그 사실을 알면서도,

그녀는 세자르가 이 자리에 없다는 것이 내심 아쉽고 불안했다.

‘내게 세자르는 어떤 존재일까.’

그런 생각을 하자 문득 세자르의 정혼녀가 떠올랐다.

‘카렌 양이라고 했지.’

붉은 머리가 눈부시게 아름다운 약혼녀.

그녀와 세자르는 누가 봐도 잘 어울리는 한 쌍이었다.

그 둘을 봐도 별다른 질투심이 일지 않는 것을 보면 세자르를 딱히 사내로서 좋아하는 것은 아니었으나.

‘단순한 가신을 대하는 마음은 아닌 것이 분명해.’

굳이 따지자면 친오빠처럼 의지하고 싶은 사람이랄까.

테레사는 조금 우습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머니 앞에서도 어른스럽게 구는 자신이 세자르에게는 어리광을 부리고 싶을 때가 있다는 것이.

‘그래서 지난번에 카렌 양에게는 무엇을 사줬냐며 캐물었지만.’

상대가 곤란해하는 모습을 보고 싶어 한 행동이었지만, 세자르는 그것조차 알아채지 못한 듯했다.

‘뭐, 그런 올곧은 면이 좋은 거지만.’

세자르의 가신들이 들으면 기함할 만한 착각(올곧다니, 대체 누가? 세자르가?)을 하며, 테레사는 다시 한 번 한숨을 내쉬었다.

그 모습에 옆자리의 레온이 물었다.

“테스, 왜 그래요?”

평소라면 아무것도 아니라고 넘어갔겠지만.

자신을 순수하게 올려다보는 눈동자에 테레사는 일순 진심을 털어놓고 말았다.

“그냥··· 믿고 의지하는 사람이 이 자리에 없으니 아쉬워서요.”

“그게 누군데요?”

“···.”

레온은 어리지만 눈치는 있는지 굳이 캐묻지 않았다.

대신 활짝 웃으며 테레사의 손을 잡았다.

“테스, 걱정말아요. 테스한테는 내가 있잖아요.”

포동포동한 손은 아이의 체온 때문인지 유난히 따뜻했다.

“아바마마가 말씀하시길, 부부란 서로를 진심으로 사랑하고 의지하는 사람들이라고 했어요.”

“아바마마가 좋은 말씀을 해주셨네요.”

“나도 테스를 진심으로 사랑해줄 거예요! 하늘만큼 땅만큼!”

레온은 부끄러운 기색도 없이 말하고는 헤헤 웃었다.

하긴, 이 나이에 부끄러움이란 걸 알 리가 없지.

테레사는 저도 모르게 레온의 머리를 쓰다듬다가 흠칫했지만.

“테스가 머리 쓰다듬어주니까 좋아요.”

아이는 웃으며 그렇게 말했을 뿐이다.

‘이 얼마나 예쁘고 순수한 아이인가.’

어릴 때부터 정쟁의 한가운데에서 살아남아야 했던 자신과는 참 다르구나.

테레사는 그렇게 생각하며 대답했다.

“고마워요 레오, 나도 그럴게요.”

“응, 그러니 걱정마세요.”

아이의 진심 어린 말 덕분일까.

아까보다 한결 편안해진 마음으로 테레사는 남은 시간을 보냈다.

“···레오, 잠들었어요?”

그로부터 몇 시간이 흘렀다.

생글생글 웃으며 앉아 있던 레온은 언젠가부터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고.

자정에 가까워지자 결국 잠들고 말았다.

테레사는 제 어깨에 기대 곤히 잠든 아이를 내려다보며 중얼거렸다.

“귀여워라.”

“저, 폐하. 괜찮으시면 저희가 레온 전하를 모시겠습니다.”

유모와 레온의 시녀들이 나섰다. 테레사는 거기에 가장 충성스러운 경비병들까지 붙여주었다.

레온이 떠난 후에도 테레사는 연회의 주인으로 최선을 다해야 했다.

많은 이들과 덕담을 나누는 것은 물론이요, 나라 안팎에서 들어온 축하 선물을 하객들과 함께 뜯어보는 것 또한 중요한 행사 중 하나였는데.

“아니, 이건 고대던전에서나 나올 법한 마도구가 아닙니까!”

“십 년에 한 번만 캘 수 있다는 희귀한 약초가···.”

온갖 진귀한 선물들의 향연에 하객들이 즐거워했지만, 테레사는 피로연이 빨리 끝나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너무 피곤해···.’

남들이 안 보는 틈을 타 슬쩍 하품을 하는데, 시종이 급히 달려왔다.

“무슨 일인가?”

“폐하, 아뢰옵기 송구하오나···.”

시종은 그녀의 귓가에 ‘세자르 공이 전서구로 보낸 급보입니다’라고 속삭였다.

“이리 주게.”

서신의 내용은 짧고도 분명했다.

『폐하, 공국과 벡카드 가문 등이 모반 협상을 하는 현장을 붙잡았습니다.』

그 한 문장으로도 충분했다.

가슴 속의 희미한 불안감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기쁨이 그 자리를 대신하기에는.

테레사의 입매가 저절로 호를 그리던 그때.

“폐하.”

옆에서 눈치를 보던 크로이츠 백작이 슬쩍 말을 붙였다.

“혹시 세자르 공이 보낸 것이옵니까?”

“그렇네.”

테레사가 백작을 돌아보며 미소 지었다.

“짐의 결혼을 축하하는 수많은 선물이 들어왔지만···.”

그녀의 시선이 산처럼 쌓인 선물더미로 향하다가 손에 든 서신으로 돌아왔다.

“세자르 공이야말로 그 누구보다도 큰 선물을 가져온 것 같군.”

“그게 대체 무슨 말씀이신지···.”

크로이츠 백작이 궁금해했지만,

테레사는 미소만 지을 뿐 설명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 순간.

‘···결혼 선물은 아직 못 줬는데?’

세자르는 ‘반란군 소탕’ 도전과제뿐 아니라 ‘테레사의 결혼 선물’ 과제까지 달성된 것에 황당해하는 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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