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작가의 서자로 살아가는 법-132화 (132/176)

너희를 체포한다

번쩍이는 불꽃과 총포음.

그와 함께 발사된 무형의 총알이 자객의 넓적다리에 명중했다.

“크악!”

‘절대 빗나가지 않는 총’에 맞은 자객이 바닥으로 고꾸라졌다. 어느새 달려온 경비병들이 그 곁을 순식간에 포위했다.

“꺄악!”

“자, 자객이다!”

“어찌 신성한 결혼식에서 이런 일이···.”

하객들 사이에서 비명이 터져 나오는 순간, 테레사가 손을 들어올렸다.

핏기가 싹 가셔 창백한 얼굴이었지만, 소녀는 위엄 있는 말투로 경비병들에게 지시를 내렸다.

“이자를 한시 바삐 이곳에서 끌고 나가라!”

“네!”

“경비대장, 저자를 왕실 감옥에 가두어놓도록!”

경비병들이 재빠르게 움직였다.

덕분에 좌중의 소란이 한결 가라앉은 가운데, 테레사가 경악에 빠진 하객들을 돌아보았다.

“짐의 결혼식에서 이런 불미스러운 경험을 겪게 하여 송구하기 그지없소.”

그녀는 굳은 얼굴을 풀며 일부러 미소를 지어 보였다.

“허나 나라 간의 결혼이란 한 번뿐이 아니라는 것을 다들 알고 계시지 않소?”

왕실 간에 혼인을 맺을 때는 양국에서 한 번씩, 총 두 번의 결혼식을 치른다.

보통은 둘 중 신분이 높은 쪽의 나라에서 결혼식을 먼저 하는데.

테레사는 왕이고 레온은 왕자이니 에스닐에서 먼저 결혼식을 올린 것이다.

“일주일 후에 커글랜드에서 치러질 결혼식에서는 이러한 불상사가 없을 것이니 다들 걱정 마시오.”

그녀의 농에 일부 하객들이 가볍게 웃음지었고, 덕분에 잔뜩 긴장되었던 분위기가 조금이나마 풀어졌다.

하지만 하객들을 헤치고 맨 앞에 서 있던 내게는 똑똑히 보였다.

···아무렇잖아 보이는 테레사의 손 끝이 파르르 떨리는 것이.

‘내가 준 팔찌를 차고 온 게 천만다행이야.’

원래 결혼식의 신부는 머리에 쓰는 관 빼고는 장신구를 잘 착용하지 않는다.

하지만 테레사는 만일의 위협에 대비한다며 ‘터키석의 가호’를 착용하고 온 것.

‘만일 그게 아니었다면···.’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눈앞이 아찔해진다.

한편.

“테스! 테스!”

지금껏 입도 뻥끗 못하고 있던 레온 왕자가 테레사에게 달려가 울음을 터뜨렸다.

아직 어려서 정확한 상황 파악은 안 되는 듯했지만, 놀라긴 놀랐나 보다.

“어··· 레온 공.”

“테스! 괜찮아? 괜찮아요? 나 놀랐어요.”

테레사는 제 품에 안겨 훌쩍거리는 레온을 보며 어쩔 줄 몰라하다가, 별 수 없이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그 사랑스러운 신랑 신부의 모습에 하객들 사이에서 잔잔한 웃음이 퍼져나갔다.

‘잘 버텼다, 테레사.’

마음속으로 그녀의 의젓함을 칭찬하는 한편, 이런 의문이 들었다.

저 자객은 대체 어떻게 이곳으로 들어온 것일까.

‘분명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서 나타났어.’

그렇다는 말은 이능자 자객이라는 의미일까?

농농이처럼 순간이동을 할 수 있는 이능자라면, 철통처럼 삼엄한 경비를 자랑하는 곳이라도 제 집처럼 드나들 수 있을 테니 말이다.

저자가 공국 출신이 맞다면, 오프러스 공국은 대놓고 선전 포고를 한 셈이다.

···앞에서는 상대 국가의 왕을 암살하고, 뒤에서는 그 나라의 반란 세력과 손을 잡아 나라를 뒤엎겠다고 말이지.

그와 동시에 내가 어제 바바에게 던졌던 질문과 그에 대한 대답 또한 떠올랐다.

‘공국과 벡카드 가문은 언제 어디서 접선을 할까?’

모래.

묶여 있는 사람(노예).

태양 속의 수탉.

서로 손을 잡은 남녀(결혼식).

‘언제’에 대한 답변이 ‘결혼식’, 즉 오늘이라면.

나머지 그림들이 ‘어디서’에 대한 답변이 될 텐데···.

‘모래와 노예?’

그 순간.

꽤 오래전에 내가 가신들과 함께 들이닥쳤던 노예 창고의 모습이 떠올랐다.

···허허벌판의 사막 한가운데에 자리한 붉은 벽돌 건물의 모습이.

하지만 어디 사막에 자리한 노예 창고가 그것 하나뿐이겠나 싶어 고개를 설레설레 젓는데.

‘잠깐만.’

문득 그리스 신화의 내용이 떠올랐다.

천계에서 태양과 수탉을 상징하는 청년 신의 이름이···.

“헬리오스!”

갑작스러운 깨달음에 혼잣말이 입 밖으로 튀어나온 순간.

저 앞에서 테레사가 레온 왕자에 대한 부부의 맹세를 마저 마치는 것이 보였다.

“어··· 세자르 공?”

옆에 서 있던 크로이츠 백작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이쪽을 돌아보았다.

“크로이츠 백작님.”

결혼식이 3단계까지 마무리됐으니 남은 것은 밤새도록 이어지는 피로연뿐이다.

말하자면 본식은 끝났고 뒷풀이만 남았다, 이 말이지.

“너무도 송구스럽고 죄송한 일이지만, 저는 피로연에 참석하지 못한 채 곧바로 자리를 떠나야 할 것 같습니다.”

“아니 왜 갑자기? 대체 무슨-”

“···라고 폐하께 저 대신 전해주실 수 있으십니까?”

그 말에 크로이츠 백작의 눈빛이 황망해졌다.

‘아니 왜 그런 무서운 일을 나한테 맡겨, 뒷감당은 어떡하라는 겐가!’라고 눈빛으로 말하는 백작을 무시하며 그대로 나가려 하자.

백작이 애절한 목소리로 내 옷깃을 붙잡았다.

“자, 잠깐 세자르 공! 폐하께 말씀드릴 이유라도 말해줘야지!”

한마디로 ‘뭐라고 핑계대냐고!’라는 백작의 물음에 이렇게 대답했다.

“폐하가 제게 주신 ‘체포 특권’을 쓰러 간다고 전해주십시오.”

“체포 특권? 그, 그게 무슨··· 세자르 공!”

그 말을 끝으로.

나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대연회장을 달려나왔다.

* * *

왕궁에서 공작저까지 말을 전속력으로 몰았다.

‘이럴 줄 알았으면 농농이를 데려오는 건데.’

숨을 헐떡이며 도착하자마자 나는 우만과 3형제를 찾았다.

“주군! 오셨습니까!”

“지시한 대로 병사들을 대기시켜놨다, 세자르.”

3형제가 이끄는 기마대는 기강이 잘 잡혀 있었다.

롯 또한 무장한 상태로 오빠들 옆에 서 있었다.

“세자르 님, 저도 합류해도 될까요?”

“대환영이다.”

롯을 비롯해 이들은 모두 노예 창고를 직접 경험해본 적이 있지 않은가.

덕분에 한층 든든한 기분으로 나는 간단히 작전을 브리핑했다.

“이번 작전의 핵심은 공국과 벡카드 세력이 모반을 공모하는 현장을 붙잡는 것이다!”

기동력을 최대한 높이기 위해 나와 가신들, 기마부대가 먼저 떠나고.

만일의 경우에 대비해 우리를 보조하기 위한 병력을 디터와 발닉이 데려오기로 했다.

“그럼 지금 바로 출발한다!”

“옙!”

우리는 문제의 장소, 동부 국경지대의 노예창고를 향해 출발했다.

한 무리의 기마대가 일사불란하게 달리는 모습에 장관이나 다름없었다.

지휘관들이 독촉하듯 외쳤다.

“속도를 높여라! 한시라도 늦어선 안 된다!”

전속력으로 말을 달리는 중에도 마음이 불안하기 그지없었다.

‘간발의 차로 놓치기라도 하면···.’

협상이 끝나는 대로 놈들은 모든 증거를 들고서 본거지로 돌아갈 테니, 지금 현장에서 잡아들이지 못한다면-

‘이 나라는 내전의 포화에 잡아먹히고 말 거다.’

그거야말로 내가 가장 바라지 않는 시나리오였다.

* * *

창문 틈새로 들어오는 바람이 건조했다.

피부에 모래가 와 닿아 버석거리는 느낌마저 날 정도.

닐 벡카드는 이런 곳을 ‘협상 테이블’로 제안한 헬리오스 가주의 혜안에 감탄한 터였다.

‘이곳이라면 정말 누구에게도 눈치채일 일이 없군.’

인가라고는 없는 허허벌판의 사막.

그 한가운데에 자리한 붉은 벽돌 건물이 적막한 어둠 속에 잠겨 있었다.

과거에는 노예를 국외로 빼돌리기 전에 모아두는 창고로 쓰였다고 했으나, 이제는 그마저도 발각되는 바람에 아예 폐건물이나 다름없는 곳이 되었으니.

이 장소를 제공한 헬리오스 백작은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설마 예전의 노예창고를 협상장소로 써먹으리라고는, 왕실에서도 생각 못하지 않겠소?”

브렉 헬리오스.

한때 수도 사교계의 총아로 불리던 장남을 결투에서 잃은 뒤, 헬리오스 백작은 반쯤 정신이 나가 있었다.

유일한 희망이었던 팰러스 레핀마저 죽어버리자.

그는 벡카드 가문과 힘을 합쳐 이 빌어먹을 나라를 뒤엎기로 마음먹었다.

‘이미 지방에는 딴 마음을 먹은 영주들이 상당하다.’

헬리오스 백작은 아버지대부터 이어온 인맥을 활용해 지방 영주들의 공감을 이끌어냈고.

오늘, 공국과의 협상만 무사히 잘 마무리된다면 그들 또한 ‘거사’에 동참하기로 약속을 받아낸 터였다.

“백작의 말씀이 맞습니다. 덕분에 저희 공국 또한 안심하고 오늘의 논의에 참여하게 되었지요.”

공국의 사신은 사근사근한 인상으로 두 사람의 비위를 살살 맞췄다.

늘상 웃는 낯을 유지했지만, 정작 중요한 사항에서는 한 치의 양보도 하지 않는 걸 보면 이런 종류의 협상에 도가 튼 모양이었다.

‘이 애송이라면 저 사내가 하는 말에 껌벅 넘어갈지도 모르겠지만.’

헬리오스 백작은 옆에 앉은 론 벡카드를 흘끔거렸다.

장남인 찰스나 모친 벡카드 백작을 대신해 차남이 대신 나왔다고 들었다.

‘산전수전 다 겪은 내게는 어림도 없는 일이지.’

협상의 요지는 단순했다.

백카드 가문과 헬리오스 가문을 비롯한 ‘반왕실파’ 세력은 군대를 일으켜 해로드 왕가를 왕좌에서 물러나게 한다.

그렇다면 공국은 무엇을 제공하느냐.

공국은 이들에게 군대와 병장기, 군량을 제공하는 한편.

최상급의 자객을 보내 ‘주요 요인’을 제거해준다.

‘아낌없이 제공해주는 거야 좋지만.’

그에는 다 대가가 따르는 법.

반왕실파 세력의 모반이 성공하는 경우, 공국은 자국의 지원에 대한 보상으로 다음과 같은 것을 요구했다.

“로안 강 지대를 공국에 돌려주고, 거기에 필로스 광산에 관련된 전권을 가져가는 것으로도 모자라, 다음 왕을 결정하는 데 있어서 발언권을 달라니.”

에스닐 최대의 곡창지대인 로안 강 유역.

역시 최대의 금 채굴량을 자랑하는 필로스 광산.

이 두 가지를 넘기는 것만으로도 배가 아픈 일이지만, 세 번째는 ‘내정 간섭’으로도 받아들일 수 있는 사항이 아닌가.

“이건 많이 지나친 사항이 아니오?”

“지나치다니, 무슨 의미로 하시는 말씀인지 모르겠군요.”

헬리오스 백작의 말에도 공국의 사신은 웃는 낯을 유지했다.

“두루뭉술하게 표현돼 있지만 결국은 공국이 우리 에스닐의 왕권에 감 놔라 배 놔라 하겠단 얘기 아니냔 말이오!”

“···내정 간섭의 가능성을 우려하시는 겁니까?”

“그렇소.”

사신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설령 그것이 맞다 하더라도, 이게 어째서 지나친 요구인지 이해가 안 되는군요.”

“타국의 내정에 간섭하는 것이-”

“내정의 간섭은 지나친 관여라고 여기면서, 타국의 왕을 대신 제거해주는 것은 지나친 호의로 느껴지진 않나 보군요?”

“···.”

그 말에 헬리오스 백작이 입을 합 다물었다.

사신의 말이 이어졌다.

“일개 귀족도 아니고 왕을 암살하는 것은 저희로서도 크나큰 위험을 감수하는 일입니다. 그걸 알면서도 저희 오프러스에 돌아올 몫을 자꾸 줄이고 싶어하는 태도가 달갑게 느껴지지 않는군요.”

헬리오스 백작이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그래. 저 사신의 말대로 모반의 첫 단추를 끼우는 것은-

‘오늘 결혼식에서 있을 테레사 여왕의 암살이니까.’

풍문에 따르면 오프러스 공국은 이능을 지닌 고아들을 데려다가 ‘이능자 자객’ 집단을 육성해왔다고 한다.

그리고 그중 제일 유능한 자객이 오늘의 거사를 맡을 것이라고.

“···공의 말씀이 맞소. 이 노구가 조금 흥분한 것 같구려.”

헬리오스 백작이 한 발 양보하자, 사신은 금세 웃는 낯이 되었다.

“그렇게 말씀해주시니 감사합니다.”

론 벡카드는 협상문에 이의가 없었다.

세 사람은 곧바로 눈앞의 문서에 서명을 했고, 가문의 인장까지 찍었다.

서류의 밀랍이 딱딱하게 굳을 무렵, 헬리오스 백작의 예민한 감각이 무언가를 감지했다.

“···방금 무슨 소리가 들리지 않았소?”

“소리요?”

그렇게 반문한 론 벡카드, 그리고 사신 모두 입을 다물고 귀를 기울였다.

저 아래쪽에서 우당탕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래층에는 누구도 올라오지 못하게 지키라고 남겨둔 경비병들뿐인데.’

외부 병력은 믿을 수 없어 헬리오스 백작이 직접 끌고 온 사병들이었다.

그런데 그들이 소란을 일으킬 리는 없고, 짐작이 가는 것은 단 하나뿐.

“어디선가 계획이 새어나간 거요!”

헬리오스 백작이 그렇게 외친 순간.

쾅!

잠가놓은 문이 강제로 열렸다.

“반갑습니다, 여러분.”

열린 문 뒤로 나타난 것은 익숙한 얼굴이었다.

“너, 너는!”

“···오랜만이군요, 헬리오스 백작님.”

세자르 레핀의 모습에 헬리오스 백작은 뒷목을 잡을 뻔했다.

자신의 장남을 죽인 저주스러운 사내!

“내, 내 반드시 너를 죽이고!”

“백작! 정신차리십시오!”

“벡카드 경, 아직도 모르겠소? 저자는 모든 불행의 원흉···.”

갑작스러운 상황에 이성을 잃어버린 이 둘과는 달리,

공국 측 사신은 지금 당장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알았다.

···바로 앞의 촛대를 쓰러뜨려 협상 서명문을 불태우는 것!

“롯.”

사신이 촛대로 손을 뻗은 순간, 세자르의 입에서 이름 하나가 흘러나왔고.

사신의 움직임이 그대로 멈춰버렸다.

“크윽, 이, 이게 어찌 된···.”

몸이 밧줄로 포박당하기라도 한 듯 움직이지 않는다.

그 기이한 감각에 사신이 몸서리를 치는데, 세자르가 다른 둘을 향해 총을 겨눴다.

“나만, 나답, 나훔은 저 둘을 포박하도록.”

아직도 상황 파악이 안 된 론 벡카드와 헬리오스 백작에게 3형제가 달려들었다.

3형제가 우악스러운 손길로 두 사람을 밧줄로 옭아매는 가운데, 세자르가 말을 이었다.

“헬리오스 가문의 수장, 마빈 헬리오스.

벡카드 가문의 차남, 론 벡카드.”

“나, 세자르 레핀은 테레사 여왕 폐하의 명을 받들어-

너희를 오프러스 공국과의 내통 및 왕실을 향한 모반, 테레사 여왕 암살 모의 혐의로 체포한다!”

두 사람의 눈에서 초점이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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