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기의 결혼식
* * *
고민이 한가득 남은 채로 혼례날이 되었다.
비단 바바가 했던 얘기 때문이 아니더라도 걱정되는 것이 많았는데.
‘일단 경호하는 것이 쉽지 않다는 거지.’
에스닐 왕실의 결혼 전통은 다음과 같다.
1단계. 신랑 신부가 마차를 타고 왕성 주변을 돌며 백성들에게 얼굴을 비추고 온다.
‘하지만 이건 생략하기로 했지.’
이유는 신랑 신부의 안전을 위해.
장본인들은 물론이고 다행히 의회의 동의까지 다 받아냈다.
그다음 2단계.
시종 시녀들이 들고 있는 캐노피 아래에 신랑 신부가 들어가 신관이 서 있는 제단까지 함께 걸어간다.
3단계. 이 둘이 제단에 도착하면 대신관의 집전 아래 결혼식이 시작되고, 두 사람은 ‘부부의 맹세’라는 것을 암송한다.
‘둘 다 제대로 외웠으려나.’
상당히 길이가 길지만 테레사야 뭐 한 번 슥 보고도 외울 거고.
문제는 레온인데···.
‘제가 책임지고 외우시게 하겠습니다!’
유모가 의욕적으로 말하긴 했지만 어떨지 모르겠다.
마지막 4단계. 식이 끝나면 피로연이 밤새도록 이어진다. 이 과정을 전부 마치고야 두 사람은 정식 부부로 인정받는 것이다.
한마디로 체력을 상당히 요하는 코스인데, 테레사도 테레사이지만.
‘꼬마 신랑님이 그 시간을 과연 버텨낼 수 있을까.’
아니, 버티긴커녕 중간에 잠들지나 않으면 다행일지 모른다.
한숨을 푹 내쉬는데, 집무실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들어오게.”
문 뒤로 나타난 것은 남장 차림의 카렌과 어쩐지 움츠러들어 보이는 바바.
“오랜만이야, 세자르.”
“주인님, 간만입니다.”
“···둘 다 며칠 전에 보지 않았던가?”
카렌이 맞은편 의자에 앉자 바바도 뻘쭘한 기색으로 그 옆에 앉았다.
내 책상 위를 슥 훑어본 카렌이 입을 열었다.
“폐하의 결혼식이 내일이던가?”
“그래. 정신이 없다 못해 돌아버리기 직전이다.”
왕실 의전관.
그 직함을 받았을 때만 해도 별 생각이 없었는데.
‘왜 하필 내가 의전관일 때 폐하는 결혼을 하신단 말인가.’
결혼 준비가 이토록 힘들고 지난한 일인 줄은 꿈에도 몰랐다.
물론 의전관이 나 하나뿐이 아니긴 하지만···.
‘폐하께서는 세자르 공을 신뢰하시니 이건 귀공이 맡는 것이···.’
‘이것도 공이 폐하의 의향을 여쭈어줄 수 없겠소?’
‘세자르 공이 보기에는 어떻게···.’
테레사와 가깝다는 이유로 일이 죄다 내게로 오는 듯한 느낌은 그저 착각일 뿐일까.
내 말에 카렌이 픽 웃었다.
“네가 웬일로 우는 소리를 하나 했더니 얼굴이 쪽 말랐네. 일이 많긴 한가 봐?”
“많긴 한가 봐, 라니 아주 일에 파묻힐 지경이다.”
“꿈을 이뤄서 좋겠네.”
카렌의 농담에 바바가 맞장구를 쳤다.
“그럼요, 손가락 쪽쪽 빠는 것보단 일에 파묻히는 것이 훨씬 낫지요!”
“난 널 보면 가끔 땅속에 파묻고 싶던데.”
“···레, 렌 님. 지난 과오는 부디 잊어주시고···.”
둘의 촌극 같은 대화에 문득 부아가 치밀었지만.
따지고 보면 저들이 저렇게 밤낮 없이 일하는 것도 나 때문이니,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자, 둘이 으르렁거리는 건 그 정도로 하고.”
“그럼 나부터 보고하지. 전에 리아나 부인이 찰스 벡카드와 접촉 중이라 했던 것 기억나지?”
카렌이 준비해온 보고서를 책상 위에 내려놓았다.
그것을 빠르게 살펴본 나는 나도 모르게 미간을 좁혔다.
“리아나 부인의 행적이 또다시 묘연해졌다고?”
“목표를 이루어 도망쳤거나, 목표에 실패해서 도망쳤을 수도 있고.”
카렌의 대답에 바바가 한마디 거들었다.
“아니면 누군가에게 붙잡혀 있을 수도 있지요.”
“흠.”
“게다가 한 가지 더 이상한 게 있어, 세자르.”
그 말에 고개를 들자 카렌이 나를 마주 보며 말을 이었다.
“찰스 경의 모습도 보이지 않는다 하더라고.”
“찰스 벡카드 말이야?”
“응. 둘이 사랑의 도피라도 한 건 설마 아닐 테고, 이 미묘한 시기에 둘 다 행적이 묘연해졌다는 건 좀 이상하지 않아?”
“좀이 아니라 많이 이상하지.”
에스닐과 커글랜드 간의 정략 결혼식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벡카드 가문은 지금쯤 몸이 달아 있어야 정상이다.
백방으로 움직여도 모자란 시기에 종적을 감추었다고?
‘혹시 이게 나를 습격하라고 사주했던 일과 연관이 있는 걸까.’
리암의 이름을 사칭해 의뢰했던 사실이 모종의 루트로 새어나갔고, 그것을 뒤에서 지시한 것이 리아나 부인이었음이 드러났다면···.
“흐흐, 마누라한테 들켰나 보죠?”
“응? 그게 무슨 말이지?”
“아니 왜, 이 찰스 경이라는 분은 유부남이라면서요. 리아나 부인은 대단한 미인으로 유명한데 이 둘이 그렇게 붙어다녔다면···.”
바바가 어깨를 으쓱했다.
“마누라가 남편의 머리채를 잡아도 모자란 상황이 아니겠습니까?”
“바바, 그건 좀···.”
“아니, 제 말이 어디 틀렸습니까?”
카렌과 바바가 옥신각신하는 가운데 가만히 생각에 잠겼다.
‘리아나 부인과 찰스 벡카드의 만남을 달가워하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예를 들자면 찰스의 모친 벡카드 백작이라든가.
온건파였던 찰스와 달리, 벡카드 백작은 왕실에 대놓고 적대적이지 않았나.
“···공국의 움직임은?”
그 말에 카렌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세자르, 공국에서 무언가 새로운 계획을 세운 게 분명해. 최근 국경지대에서 심상찮은 움직임들이 포착되었거든.”
평소 그곳을 지나다니던 화물 마차들과는 다른, 유난히 짐을 잔뜩 실은 거대한 마차들이 그쪽을 자주 들락거린다는 것이다.
“무엇보다 우리 쪽 밀정이 발각되었어.”
“뭐? 그게 정말이야?”
“응. 그래서 그 이상의 정보를 얻어내는 데 실패했어.”
카렌은 전부 자신이 부족한 탓이라며 자책했지만,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지금까지 고생많았으니 너무 마음쓰지 마.”
밀정이라는 것은 언젠가는 반드시 발각되기 마련이다.
그보다는 지금 상황에서 손 쓸 수 있는 방법을 찾는 것이 최우선.
“그렇다면 바바.”
지금껏 딴청하던 바바가 내 말에 화들짝놀랐다.
“넵?”
“지난번 질문은 실패했었지?”
테레사 여왕의 결혼식에 어떠한 위험이 닥칠까, 라는 것이 지난번의 질문이었다.
“네. 누군가가 그날의 예지를 방해하는 것이 분명합니다.”
“그렇다면 질문을 바꾸도록 하지.”
갑작스레 행방이 묘연해진 리아나 부인, 마찬가지로 종적을 감춘 찰스 벡카드.
밀정을 발견해낼 정도로 경계 수준을 높인 공국, 국경지대를 지나는 화물 마차들.
수많은 사인들이 어지럽게 흩뿌려져 있지만.
그것들을 잘 정리해보면 의미하는 바는 하나뿐이다.
···공국과 벡카드 가문이, 지난번 결렬되었던 협상을 재개할 것이라는 것.
“공국과 벡카드 가문은 언제 어디서 접선을 할까?”
“···맡겨만 주시지요!”
자신 있게 대꾸한 바바가 책상 위에 종이를 펼쳤다.
대머리 점술가는 곧바로 이능을 사용했고.
“···!”
새하얀 종이에 절로 그림이 나타나는 장면은 언제 봐도 신기하기 그지없었다.
“주인님, 보시지요.”
바바가 그것을 내 쪽으로 밀었다.
네 칸으로 등분된 종이에 그려진 것은-.
“모래(sable), 묶여 있는 사람, 태양 속의··· 수탉?”
“묶여 있는 사람? ‘노예’를 의미하는 건가?”
하지만 노예와 모래, 그리고 수탉이 대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나는 마지막 그림으로 넘어갔다.
남자와 여자가 손을 붙잡고 있지만, 여자의 손에 꽃다발이 들린 것으로 미루어볼 때···.
“결혼식을 의미하는 거 아냐?”
“···.”
카렌의 말에 나는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내가 했던 질문은 ‘언제, 어디서’ 두 세력이 접선하느냐는 것.
‘설마··· 여왕의 결혼식 당일에 어디선가 접선을 한다는 의미인가?’
그렇다면 문제는 장소를 알아내는 것인데.
안타깝게도 나머지 그림들이 의미하는 바를 추측할 수 없었다.
“글쎄, 묶여 있는 사람은 네 말대로 노예 같은데. 나머지는 전혀 감이 오지 않는걸.”
이전에 바바의 사인을 손 쉽게 추리해냈던 우만조차도 이번에는 그 진의를 밝혀낼 수 없었다.
그렇다면···.
“우만, 나만, 나답, 나훔.”
나는 네 사람을 따로 불러내었고.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내 사병대를 대기시켜놓으라고 지시하는 것에 만족해야 했다.
* * *
다음 날의 혼례는 생각 외로 수월하게 진행되었다.
일단 백성들 앞에서 행진하는 것이 생략된 덕분에 큰 걱정을 던 셈이었으니까.
‘화려한 행진 구경을 기대했던 이들은 아쉬워하겠지만.’
이번 결혼을 기념해 왕실에서는 백성들에게 식량을 무상 배포하기로 했다.
덕분에 행진 취소에 실망했던 여론이 상당히 호의적으로 바뀌었다는 것이다.
“신랑 신부 행진이오!”
지금 이곳은 결혼식이 막 시작된 왕궁 대연회장.
대신관의 외침에 맞춰 신랑 신부가 제단을 향해 걸어나갔다. 양옆에 선 시종들이 그 위로 캐노피를 높이 든 채 보조를 맞췄다.
“날씨도 화창하고, 이거 하늘도 두 분의 결혼을 축하한다는 의미가 아니겠습니까!”
“아직 어리긴 해도 두 분이 참 잘 어울리십니다.”
신랑 신부 행렬이 가운데 양탄자를 밟으며 앞으로 전진한다면.
그 양옆을 가득 메운 것은 오늘의 결혼식에 초대받은 소수의 하객들이었다.
“선남선녀가 따로 없군요.”
“레온 전하도 전하이지만 여왕 폐하는 어쩜 저렇게 근사하신지···.”
“점점 더 아름다워지시지 않습니까?
그 말대로 테레사는 오늘 따라 유독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아직은 어깨까지밖에 오지 않는 머리를 곱슬곱슬하게 꾸몄으며.
큼지막한 보석이 박힌 왕관에 화려한 드레스까지 그야말로 그림 속에서 튀어나온 모습이었다.
‘왕궁의 시녀들이 온 정성을 다해 치장했다고 했던가.’
너무 힘을 준 탓인지 옆에 선 레온 왕자는 그녀를 모시는 화동 같아 보일 정도였다.
대신관의 축복이 끝나고 어느새 ‘부부의 맹세’를 암송하는 차례가 되었다.
‘나도 여느 하객들처럼 맘 편히 웃고 떠들 수 있으면 좋겠지만.’
실은 내내 긴장을 늦추지 못하고 있는 터였다.
대체 누가 어떤 이유로 바바의 예지를 방해하고 있는 것이며.
그것도 하필이면 이 결혼식을 콕 짚은 것인지 의문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봐봐! 두 분이 부부의 맹세를 읊으신다!”
누군가의 외침에 하객들의 시선이 모조리 꼬마 신랑 신부에게 향했다.
보기만 해도 입가에 흐뭇한 미소가 번지는 두 소년 소녀가 서로를 향해 돌아섰다.
둘 사이의 거리는 기껏해야 두어 걸음 정도.
신랑 쪽이 먼저 맹세를 시작했다.
“나 레온 더글라스 도노반 커글랜드는 에스닐의 여왕 테레사를 평생의 반려자로 맞이하여···.”
오늘 아침만 해도 잔뜩 얼어 있더니 제법 의젓하게 잘한다.
떨지도 않고 청산유수로 말하는 어린 아이의 모습에 하객들이 모두 엄마 아빠 미소를 지었다.
걱정했던 것과 달리 신랑의 맹세는 무사히 마무리되었고, 이제 신부의 차례가 된 순간.
‘잠깐, 이 느낌은···.’
저 앞쪽에서 피어오르는 익숙한 이질감.
모종의 힘을 행사할 때 느껴지는 이 감각은-
“경비병!”
내 외침에 연회장 가장자리에 서 있던 경비병들이 나를 돌아보았다.
그러나 그것으로는 부족했다.
“꺄악!”
신랑과 신부 사이.
아무것도 없던 공간에서 누군가의 모습이 스르륵 나타났고.
그 모습에 맨 앞에 서 있던 하객 하나가 비명을 질렀다.
“···겨, 경비병!”
테레사 또한 당황해서 외쳤다.
경비병들은 이미 그녀를 향해 달려오는 중이었지만.
“에스닐의 여왕이시여.”
그녀 앞에 나타난 자객이 스릉, 하고 날 선 단검을 빼들었다.
“무례를 용서하소서.”
안 돼! 저자를 막아라!
폐하! 피하십시오!
온갖 비명, 소음, 신음, 외침이 대연회장 안에 울려퍼지는 가운데.
“···.”
얼음처럼 굳은 테레사에게 자객의 단검이 날아든 순간!
쾅!
먹먹한 충격음과 함께 검날이 무형의 벽에 부딪혔다.
“이게 대체···!”
예기치 않은 상황에 자객이 당황한 사이, 경비병들이 그를 향해 달려들었다.
“모두 비키십시오!”
나는 그 틈을 타 자객을 향해 조준을 마쳤다.
‘문제는 과연 이 권총이 테레사를 나의 우군으로 인식해주느냐인데.’
탕!
내 손에 들린 ‘절대 빗나가지 않는 권총’이 불꽃을 내뿜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