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작가의 서자로 살아가는 법-130화 (130/176)

이능을 방해하는 자

당황한 것은 나와 테레사뿐이 아니었다.

여왕의 남편이 될 이웃나라 왕자를 보필하기 위한 수십 명의 시종 역시 벙찐 반응을 보였는데.

테레사의 의중을 파악한 내가 얼른 시종들을 돌려보냈다.

“이곳은 내게 맡기고 모두 물러가시오.”

아무리 왕가의 아이래 봤자 고작 여섯 살이다. 부모에게서 떨어져 낯선 곳에 온 것도 서러운데, 모르는 어른들 수십 명이 자기를 둘러싸고 있으니 얼마나 불안하겠는가.

“흐윽, 흐윽···.”

시선이 줄어든 탓일까.

레온의 울음소리도 조금 작아졌다. 그 때를 틈 타 유모가 얼른 테레사에게 양해를 구했다.

“저, 폐하. 이런 모습을 보여드려 죄송합니다만, 잠시 레온 전하를 안고 달래도 괜찮을까요?”

“편히 하거라.”

유모가 얼른 달려가 레온을 껴안았다. 아이를 번쩍 안아들고서 달래주는 모습이 꼭 친엄마 같은 느낌이다.

“저이가 레온 전하의 유모입니까?”

커글랜드의 시녀 하나가 내 질문에 대답했다.

“네. 태어날 때부터 지금까지 레온 전하를 보필해온 유모입니다. 전하의 모친이신 재닌 왕비 전하를 오래 전부터 모셨다 합니다.”

“···외모를 보니 이민족 출신인 듯한데.”

테레사의 말마따나, 40대 중후반으로 보이는 유모는 피부가 가무잡잡하고 이국적인 인상을 풍겼다.

그 말에 시녀가 맞다며 고개를 끄덕이자, 테레사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혼인하러 타국으로 떠나는 자식에게 달랑 유모만 붙여서 보낸다라···.”

내가 예전에 올렸던 보고서의 내용을 떠올리는 눈치였다.

-올해 여섯 살인 레온 왕자는 어머니의 사랑을 거의 받지 못한 채 컸으며.

-정식 왕자로 책봉되기 전까지는 아버지의 얼굴도 몇 차례 보지 못했다. 1년 전부터 비로소 피터 3세와 함께 살며 그의 사랑을 받기 시작했다.

-이민족 출신 유모를 친어머니처럼 따르며, 그 외 시녀 몇 명만이 전부인 곳에서 외딴 섬처럼 살았다.

테레사의 눈길이 레온 왕자와 그를 안은 유모에게 머물렀다.

왕자는 여전히 코를 훌쩍였지만 울음은 그친 터였다.

“우리 멋진 레온 왕자님. 왕자님은 저기 계신 아름다운 여왕님과 혼인하러 오신 거예요. 이 아에갈이 말씀드렸잖아요.”

“그래도··· 흑, 나 혼자 왔잖아.”

레온은 딸꾹질을 해가며 말을 이었다.

“누님도, 아바 마마도 이곳에 없잖아. 아에갈이랑 시녀들 빼고는 아무도 없잖아. 우리 가족은-”

“이제는 여왕 폐하가 전하의 가족이 될 거예요.”

레온이 또다시 입술을 삐죽거리던 순간, 테레사가 그 둘에게 다가갔다.

유모는 깜짝 놀라 왕자를 품에서 놓아준 뒤, 테레사 앞에 무릎을 꿇었다.

“편히 하거라.”

그 말에 유모가 몸을 일으켰다. 테레사가 레온에게로 몸을 돌렸다.

잔뜩 굳어 있는 아이에게 여왕은 상냥하게 웃어 보였다.

“에스닐로 오는 길은 평안하셨나요?”

“어···.”

그 부드러운 미소에 레온은 얼굴이 스르르 풀리더니.

테레사의 얼굴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외쳤다.

“초상화에서 본 누나잖아!”

그 해맑은 반응에 그녀의 눈이 커졌다.

레온이 활짝 웃으며 말했다.

“초상화보다 훨씬 예뻐요!”

그 순간, 적막이 흘렀고.

나와 시녀들이 눈치만 보는 가운데.

“···풋.”

테레사는 참던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그렇게 한참을 웃어젖히는 그녀의 모습에 레온이 고개를 갸우뚱했다.

“왜요, 왜 웃어요? 나 웃긴 말 안 했는데.”

테레사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고개를 젓자, 레온이 뒤늦게 생각났다는 듯 손뼉을 짝 쳤다.

“아, 맞다!”

그러더니 테레사 앞에 근사하게 폼을 잡으며 말한다.

“나는 커글랜드의 위대한 왕 피터의 다섯 번째 왕자이며 더플랜드의 공작, 커프턴의 백작, 카이일 남작인 레온 더글라스 도노반 커글랜드요.”

기디긴 이름과 작위를 외우는 데 성공한 자신이 뿌듯한지 레온이 씩 웃었다.

테레사가 한 발 다가서더니 아이를 꼭 껴안아주었다.

“만나서 반가워요, 레온 전하. 난 테레사예요.”

“테레사··· 전하?”

아이의 조심스러운 말에 테레사가 빙긋 미소지었다.

그녀가 내게 당부했던 ‘경계심’ 같은 것은 찾아볼 수 없는 태도였다.

“편하게 ‘테스’라고 불러줘요.”

“반가워요, 테스. 테스도 날 레오라고 불러요.”

걱정했던 것과 달리 둘의 대화가 제법 화기애애하다.

유모 아에갈 또한 그것을 느꼈는지 눈에 띄게 안심하는 모양새였다.

“폐하는 정이 많은 분이시니 너무 염려하지 않아도 됩니다.”

“친절한 말씀 감사합니다, 세자르 공.”

“···제 이름을 아십니까?”

“그럼요. 국왕 폐하께서 에스닐로 가면 세자르 공만 믿으면 된다고 신신당부하셨습니다.”

“그렇···군요.”

하, 이것 보게.

유모의 말에 나는 속으로 혀를 찼다.

이어지는 말은 더욱 가관이었으니.

“세자르 공을 어찌나 신뢰하시는지, 얼굴을 익혀놓으라며 공의 초상화까지 따로 주실 정도였답니다.”

그럼 그렇지.

아들 바보 왕이 대책없이 애를 보냈을 리 있나.

허나 그 심정이 이해가지 않는 것은 아니다.

‘지금쯤 아들 걱정으로 전전긍긍하려나.’

풍채 좋은 피터 3세가 안절부절못하는 모습이 떠올라 피식 웃음이 나왔다.

* * *

이웃 국가 커글랜드의 5왕자가 ‘여왕의 남편’으로 발표된 시점으로부터 시간이 꽤 흘렀으며.

이제는 결혼식을 며칠 앞두고 왕자가 에스닐로 직접 행차했음에도 반발하거나 불만을 지닌 세력은 여전히 있었다.

그것은 왕궁 의회도 예외가 아니었다.

“결국 우리 에스닐의 청년들은 희망 고문만 당한 셈이 아니오?”

방계의 서자를 입양하는 무리수까지 둔 귀족 하나가 분통을 터뜨렸다.

“폐하께서 다 마땅한 절차를 거쳐 결정하신 거라 하지 않았소.”

“지금 그 말을 곧이 곧대로 믿는 이가 몇이나 되겠소이까? 공들은 아무렇지 않소?”

공감을 유도하는 말에 그때껏 침묵을 지키던 원로 귀족이 입을 열었다.

왕실에 반하는 의견을 꾸준히 개진해온 파벨 경이었다.

“우리 모두 결국은 폐하의 손바닥에서 놀아난 셈이 아니겠소.”

“···손바닥에서 놀아나다니요?”

“생각해보시오. 나라와 나라 간의 정략결혼이 그리 쉽사리 결정되는 것이겠소? 하물며 여느 소국도 아니고 강대국인 커글랜드요.”

의회장의 의원들은 그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하나둘씩 알아차렸다.

무려 커글랜드 왕자와의 혼담을, 에스닐 쪽에서 일방적으로 결정할 수 없다는 것.

“그렇다면 경은 이 혼담이 사전에 이미 결정된 것이고, 나머지는 그저 들러리를 섰을 뿐이라는 얘기를 하시는 거요?”

“어찌 그런···!”

“파벨 경의 말씀에 일리가 있군요.”

의회장의 분위기가 자신이 유도한 대로 흘러가는 것을 파벨은 만족스럽게 지켜보았다.

그렇다면 다음으로 공격할 상대는···.

그의 눈에 구석에 앉은 잘생긴 청년이 들어왔다.

“세자르 공!”

그의 외침에 모두의 시선이 세자르 레핀에게 집중되었다.

막상 장본인은 태연한 얼굴로 고개를 들었으나.

“네?”

파벨은 저 유들유들한 얼굴을 반드시 구겨주리라고 다짐했다.

“세자르 공이야말로 폐하의 최측근이 아니오. 공은 알고 계셨던 것 아니오?”

“알고 있다니, 무엇을 말씀이십니까?”

“우리 에스닐과 커글랜드 사이에 혼담이 오가는 걸 사전에 알고 있었던 것 아니냐 묻는 겁니다!”

웅성웅성.

당황한 좌중에서 수군거림이 터져 나온 순간.

“약혼녀가 없는데도 폐하의 혼담 목록에 이름을 올리지 않은 귀족 청년은 세자르 공이 유일하지 않았소!”

“설마!”

“어쩐지 그래서···.”

파벨 경의 지적에 의원들의 눈이 커졌다.

그들의 시선이 한몸에 쏠리는 가운데서도 세자르의 표정에는 변화가 없었다.

“무슨 의미로 말씀하시는 건지 모르겠군요.”

“허어, 이렇게 끝까지 시치미를 뗄 참인 거요? 우리를 기만해도 유분수이지-”

“파벨 경.”

힘 있게 울리는 목소리에 파벨이 움찔한 순간.

이제 겨우 성년에 들어선 청년이 그를 위압적인 눈빛으로 노려보았다.

“지금 그것이 중요합니까?”

“···.”

“나라와 나라 간의 혼담이 맺어지려는 상황에, 저 같은 일개 가신이 이 사실을 알고 있었는지 여부가 과연 중요하냐는 얘기입니다.”

그 말에 파벨이 입을 다물었다.

세자르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발언을 이어나갔다.

“오히려 저는 결과가 공표되었을 때 안심했습니다.”

“안심하다니, 어째서요?”

청년은 질문이 들려온 곳을 돌아보며 반문했다.

“귀공들께서는 정말로 이 중의 누군가가 왕실의 외척이 되길 바라시는 겁니까?”

“···!”

왕실의 외척, 이라는 표현에 좌중이 조용해졌다.

“우리 에스닐의 귀족들 중 특정 가문이 왕실의 외척이 되는 것보단, 커글랜드의 왕자가 폐하의 남편이 되는 것이 여러모로 낫지 않냐는 얘기이지요.”

오직 세자르 레핀의 목소리만이 넓은 의회장 안에서 울려퍼졌다.

청년은 서두름 없이 조목조목 제 의견을 개진했다.

“이때의 이점은 첫째, 커글랜드라는 강국이 우리의 동맹이 된다는 것이며 둘째는 조금 외람된 이야기일 수 있겠지만···.”

세자르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깃들었다.

“5왕자인 레온 전하는 2왕비의 소생으로 국내외에 확실한 정치 기반이 없는 데다 나이도 아직 어리시죠.”

에둘러 표현했지만, 서자 출신인 덕분에 딱히 그를 지지하는 세력이 없다는 것.

즉 에스닐에 위협이 될 가능성이 낮다는 의미였다.

“공동 국왕이 되어 이 나라를 제멋대로 휘두르려는 사내보다는 훨씬 훌륭한 남편감이 아닙니까. 저는 오히려 그러한 결정을 내리신 폐하의 혜안에 감탄했을 정도였는데, 귀공들은 우리 중 누군가가 선발되지 않았다는 사실에 이토록이나 집착하고 계실 줄 상상도 못 했습니다.”

세자르는 진심으로 이해가 안 간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이 나라에 또 하나의 방패가 되어줄 외국과의 동맹혼과, 그 자신들을 제외하고는 누구에게도 이로울 일이 없는 국내의 외척.

···둘 중 무엇이 이 나라에 이로울지는 명확하지 않겠습니까?”

의회장 안에 적막이 자리잡았다.

다들 서로의 얼굴만 돌아보거나 제 손을 내려다보며 생각에 잠긴 가운데.

“저는 이만 일어나겠습니다.”

세자르 레핀이 자리를 나섰다.

* * *

의회장 문을 나서자 절로 안도의 한숨이 나왔다.

‘파벨 경이 설마 그런 얘기를 할 줄이야.’

양국 간의 혼담을 미리 알고 있었던 게 아니냐는 얘기에 내심 뜨끔했던 터다.

저자가 뭔가를 알고서 날 떠보는 건가 싶었지만 그건 아닌 듯했고.

‘이 정도면 임기응변으로는 나쁘지 않겠지?’

얼른 공작저로 돌아가야겠다는 생각에 발걸음을 빨리하는데.

“세자르 공.”

누군가가 뒤에서 어깨를 붙잡았다.

흠칫 놀라 뒤를 돌아보자 크로이츠 백작이었다.

“그대가 방금 한 말에는 나 또한 동감이네.”

“그리 말씀해주시니 안심이군요. 연륜 있으신 의원님들 앞에서 하기엔 조금 건방진 소리가 아닐까 싶었는데.”

백작이 코웃음을 쳤다.

“설마 그럴 리가. 거기엔 진작 무덤에 갔어야 할 늙은이들이 많아서 말이지.”

“하하.”

나는 웃음을 터뜨렸지만, 백작은 의외로 진지했다.

“한 나라의 의원이 되어가지고 자네처럼 고매한 생각을 지닌 청년을 알아보지 못한다니, 안타깝기 짝이 없는 일이 아닌가.”

“···.”

음 이건 좀 민망한걸.

게다가 꽤 많이 찔리고 말이야.

“과찬의 말씀이십니다.”

“그런데 세자르 공.”

“네?”

크로이츠 백작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

“그··· 폐하의 혼례 준비는 잘 되어가는 건가?”

“그럼요.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있습니다.”

“그대가 그렇게 말한다니 안심이 되지만···.”

“왜, 뭐 마음에 걸리는 거라도 있으십니까?”

백작은 망설이다가 덧붙였다.

“에스닐 왕실의 역대 결혼식에선 위험한 일들이 자주 일어났었거든.”

“···위험한 일들이요?”

“군중이 돌연 폭도로 돌변해 달려든다든가, 근처를 지나던 가축이 뛰어들어온다든가···.”

시간이 지나고 조사해도 그 명확한 원인을 찾을 수 없는 사고들.

아무리 경비를 강화해도 그런 예기치 않은 사건 사고들을 막기 쉽지 않았다는 거다.

“그저 노파심에서 하는 얘기이니 너무 마음 쓰지는 말게, 공.”

백작은 그렇게 말하고는 자리를 떴지만, 나는 그 자리에 못 박힌 듯 서서 한동안 움직이지 못했다.

며칠 전 바바가 내게 했던 말이 떠오른 탓이었다.

‘주인님, 이거··· 아무래도 심상치가 않습니다.’

‘그게 무슨 말이야?’

‘주인님이 지시하신 대로 폐하의 결혼식 날의 운명을 예지하려고 하는데···.’

바바의 표정이 아주 곤란해 보였다.

‘그날만 이상하게 전혀 보이지가 않습니다요, 꼭 먹구름이 잔뜩 낀 것처럼···.’

그 말을 증명하기라도 하듯,

그가 ‘미래를 점치는 이능’을 사용한 뒤의 종이는 온통 새카맣게 얼룩져 있었다.

바바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누군가 의도적으로 제 힘을 방해하는 것 같단 말이지요.’

타인의 이능을 의도적으로 방해할 수 있는 이능자를 보유하고 있는 곳.

그런 이능자를 이용해 하필이면 ‘테레사 여왕의 결혼식’에 관한 예지를 막으려고 할 만한 곳이, 내 머릿속에선 단 한 군데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오프러스 공국이··· 무언가를 계획하고 있는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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