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럼 됐어
리암이 웃는지 우는지 알 수 없는 표정으로 얼굴을 일그러뜨리자.
카렌이 그를 돌아보며 픽 웃었다.
“리암, 울지 마.”
“···안 울거든.”
눈가가 살짝 붉어진 리암을 보며 내가 말을 이었다.
“네 가족들에 관해 질문한 건 바로 그 때문이야.”
“내 가족 중 누군가가 그런 의뢰를 한 게 아닐까 해서?”
리암은 곧바로 상황을 이해한 듯했다.
용병단에 의뢰할 때 보통 가문의 인장을 많이들 쓰니까.
“그래. 가문의 인장을 사용하면 너를 얼마든 사칭할 수 있으니까.”
“조만간 본가에 알아보겠다.”
“너희 가문 구성원의 소행이 아니라 인장을 도난당했을 가능성도 있으니 너무 날카롭게 굴지는 말고.”
리암이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근데 내분을 일으키기 위한 거라고 보기엔 수가 너무 얕은데.”
카렌의 말에 나 역시 동감이었다.
“그래. 너무 얕다 못해 배후가 누굴지 의심부터 할 정도이니까.”
“세자르 네 동선은 어떻게 알아낸 걸까? 우리 가신들과 여기 사용인들 외에는 여행을 간다는 것도 모를 텐데.”
“나도 그게 제일 궁금해.”
나는 총관에게 공작저 내의 정보가 새어나간 적이 있는지 심문을 지시했다고 털어놓았다.
“이 얘기는 이 정도면 될 것 같고. 이제는 벡카드 가문의 협상 결렬 얘기로 돌아가고 싶은데. 대체 이유가 뭐라고 생각해?”
어째서 상황이 갑자기 변한 걸까.
도전과제 내용으로도 그렇고, 바바의 예언도 공국과 벡카드 가문 사이에 협상이 이뤄진다고 했다.
내 말에 카렌이 입을 열었다.
“이건 추측일 뿐이지만 리아나 부인이 개입했을 여지가 있어.”
“리아나 부인이?”
지난번 조사하기로는 벡카드 가문과 접촉 중이라 했던가.
“그 여자가 대체 무슨 수를 썼는지, 자기보다 한참 어린 찰스 벡카드를 꾀어냈다는 소문이 있던데.”
“찰스 벡카드라면··· 벡카드 가문의 장남이라고 했던가?”
현 벡카드 백작의 뒤를 이어 가주가 될 인물로 꼽히는 인물.
미치광이 같던 타릭과는 달리 규칙과 절제를 신조로 삼는 모범생 타입인데다 아내와 아이를 무척 아낀다 들었는데.
‘매혹의 이능 앞에서는 어쩔 수 없는 법이지.’
카렌이 내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내 생각은 이래. 그녀가 찰스를 통해 제 입김을 행사해 협상을 틀어지게 한 게 아닐까라는 거지.”
“하지만 카렌, 리아나 부인이 그러는 건 좀 이상하지 않아? 오히려 둘 사이의 협상을 부추겨서 우리 쪽에 복수하려고 마음먹으려면 모를까.”
리암의 반박도 일리가 있다.
어쨌거나 그녀의 가장 큰 적은 여전히 이 세자르 레핀일 테니까.
‘하지만.’
결국 따지고 보면 팰러스를 죽인 것은 타릭이다.
그 사실을 리아나가 믿을지 어떨지는 모르겠지만, 정체를 숨긴 채 이곳에서 은밀한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는 건···.
‘그녀도 뭔가를 알아차린 것이 아닐까?’
팰러스를 죽인 것은 타릭이지만, 그 진짜 배후는 칼 오프러스 대공이라는 것을.
그녀가 무엇을 알고 있는지는 좀 더 조사해봐야 할 것 같다.
“그럼 난 먼저 나가볼게.”
카렌이 시기적절하게 나간 틈을 타.
나는 리암에게 말을 붙였다.
“리암, 너와 잠깐 하고 싶은 얘기가 있는데.”
“응?”
“돌려말하는 건 내 적성이 아니니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지. 나한테 말 못 한 불만 같은 게 있나?”
“어···.”
리암은 이런 질문이 나오리라고는 전혀 예상 못 한 눈치였다.
당황한 얼굴로 망설이며 말을 꺼내길.
“너 여행 가 있을 때 공작저 관리를 우만에게 맡겼잖아. 나보다 이제 우만을 신뢰-”
“설마 불만이 그거야?”
“아니, 그건 그냥 투덜거리는 거고.”
잠시 입을 다물고 있더니 고개를 들어 나를 마주 본다.
“평생 마음속에만 담아두려고 했던 건데.”
“음?”
“물어보니까 말하는 거다.”
리암의 눈동자가 진지하게 빛났다.
“너, 왜 네가 직접 왕이 되지 않는 건데?”
“···.”
전혀 예상치 못한 말에 이번에는 내가 당황했다.
“그래. 물론 네가 폐하께 충성을 바치는 건 알아. 나 역시 얼마 전까지는 그랬고. 하지만···.”
리암의 입매가 완고해졌다.
“따지고 보면 폐하는 정당한 왕좌의 주인이 아닌 셈이잖아? 너도 알겠지만 왕위계승법은 소급 적용이 되지 않는다고.”
“리암.”
“말로는 나라를 위해 어쩔 수 없는 희생이었다 하지만, 결국은 자기 가문을 위해 온 백성을 상대로 속임수를 쓴 거나 다름없잖냐고!”
리암은 제 말이 거칠어졌음을 깨달은 듯했다.
입을 다문 채 조용히 마주 보자, 리암이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미안, 내가 실언했어. 난 네가 왕좌에 오를 자격과 정당성이 충분하다고 생각해서 아쉬운 마음에···.”
“딱히 실언한 거 아니니 사과할 것 없어.”
“응?”
리암의 당황한 눈빛을 보며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틀린 말은 아니니까.”
엄밀히 말하자면 대국민 사기극이나 다름없는 사건을, ‘여왕의 남편은 대체 누구?’라는 리얼리티쇼나 다름없는 이벤트로 눈속임하는 셈이다.
하지만.
“다만 네가 알아둬야 할 게 있다면, 나는 왕좌에 요만큼도 관심이 없다는 거야.”
“···정말?”
“줘도 안 가질 거니까.”
리암은 말이 안 된다는 반응이었다.
“아니, 어째서? 사내라면 무릇 누구나···.”
음.
현대인이 지닌 가치관적 차이를 어떻게 납득시키면 좋을까.
“총알받이라는 말 알아?”
“총알··· 뭐?”
“그런 위험한 자리는 죽어도 싫다, 이 말이야.”
리암은 알쏭달쏭하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넌 알다가도 모르겠다.”
“굳이 알려고 할 필요 없어, 리암. 제일 중요한 건 이거야.”
나는 목소리에서 장난기를 싹 거둔 채 진지하게 말했다.
“너는 내 가신이다, 리암.”
“···!”
“내가 폐하를 섬긴다면, 너 역시 폐하를 충성을 다 바쳐 섬기는 게 인지상정. ···내 말이 틀렸나?”
리암은 생각지도 못했다는 얼굴이었다.
어두워진 그의 표정을 보며 말을 이었다.
“물론 불만을 가지는 건 자유이지만. 그게 네 행동에 실질적인 영향을 미쳐서는 안 돼. ···그것만 지켜주면 된다, 알겠지?”
“미안. 내 생각이 짧았어.”
나는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다.
“앞으로도 계속 잘 부탁한다, 리암.”
“···나도.”
그때.
간만에 보는 메시지가 나타났다.
[가신 ‘리암’의 충성도가 10 증가했습니다.]
충성도가 이렇게 한꺼번에 오르는 것도 오랜만이네.
어쨌거나 속내를 터놓고 이야기한 덕분일까.
가슴속에 묵은 체증이 싹 가신 기분이 들었다.
* * *
테레사에게는 이미 서신으로 보고를 마친 터였다.
혼담 논의가 어떻게 진행되었으며, 공국과 벡카드 가문 간의 접선 기미가 보여 가신들을 보냈지만 현장 검거에 실패했다고.
어쨌든 결과적으론 잘된 거긴 하다.
협상이 결렬된 만큼 두 세력이 다음 번 접촉하기 전까지 시간적 여유가 생긴 셈이니까.
그 전에 우리는, 아니 테레사는.
‘혼담을 최대한 빨리 기정사실로 만들어버리면 되니까!’
다음 날 날아온 그녀의 답장에서는 여유가 엿보였다.
『그간 고생이 많았으니 왕궁에는 며칠 더 쉬다가 오게, 세자르 공.』
나는 그로부터 이틀 뒤에 왕궁을 찾았다.
하루도 안 되어 여독은 전부 풀렸을 뿐더러, 다음 날이 되자 공작저에서 빈둥대는 것이 지루하게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좀 더 쉬고 오랬더니 그대도 어쩔 수 없는 일 중독자인가 보군.”
여왕은 전보다 한결 밝아진 얼굴로 나를 맞이했다.
“몰랐는데 그런 것 같습니다.”
“그러게. ‘온몸이 근질근질해서 죽겠다’라고 얼굴에 씌어 있는데?”
그녀의 농에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겨우 2주 못 보았을 뿐인데 그 사이 또 훌쩍 큰 느낌이다.
성장기의 아이들이란 쑥쑥 큰다니까.
“고생많았네. 안 그래도 피터 3세와는 구체적인 일정을 조율 중이야. 전부 그대가 활약해준 덕분이네.’
“과찬의 말씀입니다. 이는 전부 폐하가 아름다우신 덕분이지요.”
내 말에 테레사가 이를 드러내고 웃었다.
“그런 농담도 가끔 듣기엔 나쁘지 않군.”
“아니, 진심입니다. 사실 초반에 살짝 위기가 있었거든요. 그때 다행히 이 초상화의 존재가 기억났고.”
나는 커글랜드 왕에게 내보였던 초상화를 돌려주며 말을 이었다.
“시기적절하게 마주친 레온 왕자에게 이 초상화를 보여줘서 시간을 끌었죠.”
여섯 살짜리 아이가 초상화를 보고 넋이 나갔다는 말에 테레사가 깔깔 웃었다.
“이 나라 최고의 화가를 초빙해 초상화를 그리게 한 보람이 있는데?”
“그럼요. 뿌린 대로 거두는 법인걸요.”
“···너무 그렇게 동조하면 화가가 본판보다 잘 그린 덕분이라는 식으로 들리는데 말이지.”
“아, 오해이십니다.”
나는 씩 웃으며 덧붙였다.
“그림은 거들 뿐, 결국은 폐하의 얼굴이 다한 셈이니까요.”
“말이나 못 하면 밉지는 않을 텐데 말이야, 그렇지?”
음, 그 대사는 카렌한테도 많이 듣던 건데.
“아, 그리고 폐하께 드릴 선물이 있는데.”
내가 꺼내 보인 것은 터키석으로 만든 팔찌.
푸른 바탕에 금빛 무늬가 아로새겨진 보석이 상당히 신비해 보인다.
“그 파란 보석은···.”
“터키석입니다. 커글랜드에서는 자신이 태어난 달에 해당하는 탄생석을 몸에 지니면 불행을 쫓아낼 수 있다는 속설이 있더군요.”
그 말에 테레사의 표정이 묘해졌다.
“···내 생일을 알고 있나?”
“그럼요. 12월 14일 아니십니까?”
모를래도 모를 수가 없다.
온 나라가 다 함께 축하하는 국왕 탄신일이니까.
테레사는 말없이 고개만 주억거렸지만.
“뭐 그냥 속설로만 여기셔도 상관없습니다만, 이 팔찌는 특별한 효능을 지닌 거라서요.”
“특별한 효능이라니?”
보통 사람이 보기엔 그저 평범한 장신구에 불과하지만.
이건 마도구의 일종이니까.
나는 상자째로 팔찌를 국왕에게 건넸다.
“폐하의 힘이 커질수록 폐하의 몸을 노리는 이들도 많아질 겁니다. 곧 혼사를 앞두고 계신 만큼 더욱 안전에 만반을 기해야 할 것 같아서요.”
그러거나 말거나.
테레사는 홀리기라도 한 듯 팔찌를 들어 샹들리에 불빛에 비춰보는 중이었다.
저런 모습을 보니 또래 여자애들 같기도 하고.
“진짜 예쁘네.”
“···제 말 듣고 계신 것 맞죠?”
“아, 미안. 그래서 어떻다고?”
어쩐지 피식 웃음이 새어나왔다.
“한마디로 이건 폐하의 몸을 위험으로부터 지켜드릴 마도구라는 얘기입니다. 진짜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요.”
마도구란 말에 테레사의 눈이 동그래졌다.
“마도구? 이런 귀한 걸 어디서 구했나?”
“뭐, 커글랜드에서도 제 운이 여전히 좋았다고 얘기해두죠.”
사실 저건 커글랜드에서 산 물건이 아니다.
이번 여행을 마치는 길에 도전과제 중 세 가지가 달성되었고.
-피터 3세에게 혼담을 승낙받았나요?
-돌아가는 길에 습격당할 뻔했나요?
-리아나 부인의 행방을 파악했나요?
덕분에 일타삼피 역시 달성되어 보상이 상향 조정되었다.
거기서 나온 아이템이 바로 이것, ‘터키석의 가호’라는 얘기.
『‘터키석의 가호’(남은 발동 횟수 : 5회)
- 설명 : 팔찌의 형태를 띤 방어마법 전용 아이템.
- 비고 : 착용자의 목숨이 위협받을 때마다 물리 계열 방어막이 자동으로 생성된다. 단 그 횟수는 5회로 제한된다. 마법이 소진된 후에는 평범한 팔찌일 뿐이다.』
요컨대 내가 지닌 패시브 형태의 방어 스킬처럼 착용자를 보호해주지만.
횟수가 5회로 제한되는 소모성 아이템이다.
‘하지만 그게 어디야.’
이쪽 세계에 마도구가 매우 희귀하다는 것을 생각하면 반은 사기급이나 다름없는 물건.
그것을 테레사 또한 깨달았는지 무척이나 감동받은 얼굴이었다.
“이런 귀한 것을 내게 주다니.”
“폐하의 옥체보다 귀한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사실 이걸 누구에게 줘야 할지 고민이 많았다.
나한테는 어차피 쓸모가 없는 물건이고.
‘···카렌에게 줄까?’
아니다.
카렌에게는 줘봤자 큰 의미가 없을 거고 그보다는 목숨을 위협받을 가능성이 큰 누군가에게 더 유용하게 쓰일 거다.
애초 다른 가신들과 대놓고 차별하는 것도 좀 아니고 말이지.
그렇게 잠시 고민하는데.
‘근데 위협받는 걸로 따지면 테레사만한 인물도 없잖아?’
언제 어디서 암살당할지 모르는 인물.
무엇보다도 혼사가 거의 성사된 마당에 그녀의 신변에 문제라도 생기면 모든 게 다 물거품으로 돌아갈 거다.
물론 그냥 주긴 뭐하니, 테레사가 마침 12월에 태어났다는 걸 이용해 약을 살짝 치긴 했지만.
“탄생석 선물이라니, 그것만으로도 낭만적인데···.”
테레사가 어쩐지 말을 흐렸다.
웃는 걸 보니 진심으로 마음에 들어하는 것 같네.
“흠. 그런데···.’
“네, 폐하.”
머뭇거리던 테레사가 입을 열었다.
“그··· 카렌 양에게는 무슨 선물을 했나?”
“네? 누구요?”
그녀가 눈길을 피하는 듯한 건 내 착각일까.
“무도회에 함께 왔던 카렌 돌로레스 양. 그대의 정혼자 말일세.”
음.
정혼자는 아니라고 정정할까 고민하다가 그냥 대답했다.
“카렌에게는 머리핀을 선물했습니다.”
“그것도 마도구인가?”
“아닌데요.”
“그냥 평범한 장신구란 말이지.”
테레사가 의미심장하게 웃으며 덧붙였다.
“그럼 됐네.”
···대체 어느 포인트가 만족스러운 건지 모르겠지만.
딱히 문제는 없는 것 같으니 넘어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