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작가의 서자로 살아가는 법-127화 (127/176)

나는 아니야

* * *

용병들을 처리하고 돌아가는 동안, 우리 셋은 말이 거의 없었다.

다그닥 다그닥.

말 달리는 소리와 이따금 들려오는 새 소리 외에는 적막이 가득한 가운데.

“저··· 주군.”

보다 못한 디터가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아까 그놈이 했던 말을 믿으시는 겁니까?”

“그놈이 했던 말이라니?”

한동안 딴생각에 빠져 있던 내가 옆을 돌아보자.

걱정스러운 기색이 가득한 디터의 얼굴이 보였다.

“반월 용병대의 나부랭이가 했던 얘기 말입니다. 주군을 습격하라고 사주한 것이···.”

아.

난 또 뭐라고.

“걱정할 필요 없어, 디터.”

“네?”

“당연히 안 믿지. 그런 허무맹랑한 소릴 믿을 리 없잖아?”

“···하지만 아까 놈에게는.”

“그거야.”

나는 방금 전, 디터의 주먹 앞에서 달달 떨던 용병을 떠올렸다.

“다른 정보도 캐낼 겸, 놈의 말이 진실인지 확인해보고 싶었으니까.”

몇 시간 전.

디터의 주먹을 보며 달달 떨던 용병은 전혀 생각지도 못한 이름을 내뱉었고.

‘의뢰자의 이름이 뭐야?’

‘그건···.’

나를 비롯한 세 명은 모두 아연실색하고 말았다.

‘왜, 아는 이름이요?’

그리고 내가 가장 먼저 던진 질문은 이거였으니.

‘네가 소속된 용병단의 이름이 뭐지? 공인을 받은 곳인가?’

대부분의 용병단은 의뢰를 받을 때 상대를 가리지 않는다.

그 말인즉 의뢰인의 신원을 밝힐 필요가 없다는 것.

그러나 규모가 큰 일부 용병단은 에스닐 왕국의 공인을 받아서 활동하는데.

이들은 국가의 의뢰를 수주하는 대신 개인 의뢰를 받을 때도 의뢰인의 신원을 확인해야 한다.

‘반월 용병단. 이래 봬도 왕실의 의뢰도 심심찮게 받는 곳입니다. 분위기를 보아하니 그자가 나리를 배신했나 보군요?’

배신이라니, 설마.

나는 그저 의뢰자의 신원이 확실한 것인지를 확인하고 싶었던 것뿐이다.

‘어디 감히 그런 소리를!’

용병은 건방진 소리를 했다는 죄목으로 디터에게 몇 대 더 맞았다.

우리는 사지가 멀쩡한 이들만 묶어서 끌고 왔고.

중간에 마주친 경비대 초소에 놈들을 넘긴 뒤, 공작저로 말을 계속 달리던 중이었다.

“다시 한 번 확실히 말하지. 이건 누군가 우리 사이에 내분을 일으키려고 쓴 조잡하고 얕은 수에 불과해.”

그 말에 디터와 발닉의 얼굴이 확 밝아졌다.

“그럼 그럼요. 그분이 그럴 리가 없지요.”

“주군, 돌아가는 대로 이번 일을 조사해보겠습니다.”

나는 두 사람에게 대충 고개만 끄덕여준 뒤 다시 입을 다물었다.

그들에게는 그렇게 말했지만, 일말의 불안감은 사라지지 않은 터였으니까.

‘내게 말하지 못한 불안이 있다고 했는데.’

설마 이번 일이 그것과 연관된 걸까.

아니면 그의 가족 중 누군가가 내게 불만을 품고 이간질을 하려 한 걸까.

‘가문의 인장을 가진 가족이라면 그의 신분을 사칭하는 것도 얼마든 가능하지.’

용병대장의 목소리가 여전히 머릿속을 맴돌았다.

‘의뢰자의 이름은··· 리암 페킹튼입니다.’

리암.

그의 입에서 나온 것은 나의 친우이자 가신의 이름이었으니까.

* * *

무사히 여행을 마치고 공작저로 돌아오자.

총관 카얀이나 제이콥을 비롯한 식솔들, 나의 가신들이 우리를 반갑게 맞이했다.

“도련님! 별일은 없으셨습니까.”

“아, 제이콥.”

“스완 성은 어땠습니까? 지금 계절이면 참으로 아름다울 텐데···.”

그림으로만 봤지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다.

도련님은 직접 다녀오셨으니 얼마나 좋으셨을까.

그렇게 부러움을 토로하던 제이콥에게 나는 가져온 선물을 건넸다.

“도련님, 이건···?”

“스완 성에서 직접 담근 벌꿀주라는군. 가서 다른 사용인들과 나눠 마시도록.”

“서, 선물까지··· 감사합니다!”

사실 여행 선물은 생각지도 못했지만.

내가 아무것도 챙기지 못했다니까 발닉과 디터가 어이없어한 터였다.

‘도련님, 아무리 그래도 첫 여행인데 선물 하나 챙기지 않으셨다니!’

‘주군, 다들 선물을 기대하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게 저희가 마을 상점가에 갈 때 같이 가시지···.’

여기도 그런 문화가 있는 줄은 생각도 못 했다. 어쨌거나 발닉과 디터는 자신들이 챙긴 것을 내게 주었고.

‘저희가 주는 것보단 도련님이 주시는 걸로 알고 받는 편이 훨씬 기쁠 겁니다!’

디터 말로는 제이콥이 독특한 술을 좋아한다더니, 벌꿀주를 받고서 입꼬리가 잔뜩 올라가 있다.

어린아이처럼 신이 나서 부리나케 하인들 처소로 향하는 제이콥의 뒷모습에 피식 웃음이 나왔지만.

리암과 불편한 대화를 나눠야 할 것을 생각하니 마음이 무거웠다.

“카얀.”

리암과 카렌이 기다리는 중이라는 집무실로 가기 전, 나는 총관에게 들렀다.

“공자님, 여행은 어떠셨습니까.”

나의 가신들과 레핀 공작을 제외한 모든 이들은 내가 그저 휴양차 여행을 다녀왔다고만 알고 있다.

커글랜드의 전통 무늬가 새겨진 은제 담배 케이스를 내밀자 총관의 얼굴이 잔뜩 환해졌지만.

“그대에게 한 가지 확인하고 싶은 것이 있는데.”

“확인이라니··· 무엇을 말씀이십니까?”

내가 정색하고 꺼낸 말에 다시 심각해졌다.

“우리 공작저의 사용인들 중에 정보를 빼돌리는 자가 있는 것 같다.”

“그게 무슨!”

“스완 성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용병들의 습격을 받았거든. 놈들을 문초해보니 누군가가 우리의 동선을 일러준 모양이다.”

“···!”

이제 총관의 얼굴은 창백하다 못해 새파랗게 질린 터였다.

“내가 스완 성으로 여행을 떠났다는 사실을 아는 것은 가신들과 공작저의 식솔뿐.”

“···사용인들을 단단히 심문하겠습니다.”

나는 손을 휘휘 저었다.

“아니, 괜히 엄한 사람 꾸짖지 말고. 정보를 빼돌리는 이가 있는지, 만약 있다면 그것이 어떤 경로를 통해 바깥으로 흘러나갔는지. 그걸 중점으로 조사해줘.”

총관은 꾸벅 고개를 숙여 보인 뒤 방을 나섰다.

나는 한숨을 내쉬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 * *

집무실에 들어가자 카렌과 리암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세자르! 잘 다녀왔어? 여행은 어땠어?”

여행이 아니라 임무 수행을 다녀온 것임을 알면서도 능청스레 묻는 카렌.

“···.”

반면 리암은 어쩐지 어두운 얼굴로 말이 없었다.

나는 그런 두 사람의 얼굴을 살피며 준비해온 물건을 건넸다.

“아주 좋았지. 이건 선물.”

“야, 진짜 선물까지 사왔네!”

카렌은 선물상자에 담겨 있던 머리핀을 곧장 제 머리에 꽂았고.

그 모습을 본 리암도 제가 받은 장식 단추를 소매에 달았다.

“고맙다.”

나는 대답 대신 어깨만 으쓱했다. 리암의 호감도 창을 슬쩍 확인해보자.

-충성도 80점

지난번에 확인했을 때와 변함이 없다.

무엇보다 리암의 충성도는 가신들 가운데서도 가장 높은 축에 속하는 편이니.

그렇게 호감도 창을 보고 나자 부끄러움이 밀려들었다.

이렇게 수치로 확인하지 않고서는 신뢰를 유지할 수 없는 자신에 대한 자괴감이랄까.

‘그래도 확실히 하는 게 맞아.’

카렌의 말마따나 이제 나는 내 한몸만 책임지는 상황이 아니지 않은가.

“리암, 근데 표정이 왜 그렇지?”

내 말에 카렌이 여전히 어두운 얼굴의 리암을 슥 돌아보았다.

“리암, 네가 자책할 이유가 전혀 없다니까. ···내가 대신 얘기해?”

“아니. 내가 직접 할게.”

무슨 얘기를 하려고 이러나.

리암은 긴장한 표정으로 입술을 지그시 깨물더니, 나를 똑바로 보며 말했다.

“네가 맡긴 작전에 실패했다.”

리암이 말한 ‘작전’이란 이거다.

오프러스 공국과 벡카드 가문의 접선 현장을 잡는 것.

···놈들이 본격적인 모반을 일으키기 앞서 그 싹부터 잘라낼 생각이었으니까.

“실패했다니?”

내 물음에 리암의 얼굴이 참담해졌다.

“바바의 이능으로 정확한 시간과 장소까지 확인했다. 그때에 맞춰 현장에 들이닥쳤는데, 양측 간에 신호가 안 맞았던 모양이야.”

“공국과 벡카드 사이의 협상이 결렬되었다는 의미인가?”

리암이 고개를 끄덕였다.

“벡카드 가문에선 아무도 나오지 않았다. 접선 자리에 온 건 공국 쪽 사신뿐이었고, 결국 그는 허탕을 치고 돌아간 셈이지.”

그렇다면 리암이 별다른 행동을 취하지 못한 것도 이해가 간다.

벡카드 쪽과 모반을 논의 중이었다면 현장에 들이닥쳐 증거를 확보하는 대로 경비대에 넘길 수 있었겠지만.

그러한 것 없이 타국의 인물을 함부로 다뤘다간 공국에 빌미만 줄 수 있는 셈이니까.

나는 생각을 정리한 뒤 리암에게 고개를 돌렸다.

“리암, 고생했다. 네 과오가 아니니 신경쓸 것 없어.”

“하지만···.”

이게 뭐라고 저렇게 낙담해한담.

나는 잔뜩 풀죽어 있는 리암의 이름을 불렀다.

“리암.”

“···.”

“사소한 실패에 연연하지 마라. 네 잘못도 아니고, 가끔은 예기치 않은 상황이 찾아오게 마련이니까.”

리암은 마지 못해 고개를 끄덕이더니 입을 열었다.

“네가 처음으로 맡겨준 임무이니만큼 성공하고 싶었거든.”

“···처음으로?”

내가 너한테 맡긴 게 그게 처음이 아닐 텐데.

그러거나 말거나 리암은 제 할 말만 했다.

“늘 네가 앞장 서서 위험한 작전을 지휘했잖나. 이제는 나도 그런 역할을 하게 됐다는 생각에 내심 뿌듯했는데. 이렇게 완벽하게 실패해버리다니···.”

저 모습을 보니 한 가지는 확실하다.

이곳에 들어섰을 때 리암의 얼굴이 어두웠던 것은 임무에 실패한 탓이지 다른 것 때문이 아니라는 것.

“아니, 잠깐. 일단 리암, 나는 네게 금광사업부터 시작해서 많은 일을 맡기지 않았나?”

“그건··· 그렇지.”

“기사단 관리도 맡겼고.”

“응.”

“보통은 그 둘 중 하나만 하는 것으로도 아주 버거워한다는 것 알지?”

“···.”

“그런데 너는 그 두 가지를 다 훌륭히 해냈을 뿐 아니라 새로운 임무까지 맡은 셈이야. 그러니 하나 정도는 엇나갈 수도 있는 거지, 안 그래?”

내 말에 리암의 얼굴이 살짝 밝아졌다.

“···그런가.”

어쩌다 내가 청소년의 의욕 고취까지 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성심성의껏 리암의 사기를 북돋웠다.

“그러니 한 번 실패했다고 너무 낙담하지 마라. 그보다 리암.”

“응?”

“너희 가족은 나를 어떻게 생각하시지?”

리암은 벙찐 얼굴이었다.

“가족들?”

“그래. 너희 형님들이나 페킹튼 백작님이시라든가.”

“음···.”

대체 왜 이런 질문을 하는지 이해가 안 간다는 듯 망설이며 답했다.

“아버지는 말할 것도 없어. 요즘 입만 열면 네 칭찬이시니까.”

“그렇단 말이지. 그럼 형님들은?”

“글쎄. 잘은 모르겠지만 다들 널 좋게 생각하는 것 같은데.”

“대체 뭐하는 거야, 세자르? 페킹튼 가문원들에게 얼마나 인정받는 중인지 확인이라도 하려고?”

카렌이 어이없다는 듯 말했지만, 나는 그 말에 대답하는 대신 본론을 꺼냈다.

“내가 돌아오는 길에 용병대의 습격을 받았거든.”

“···뭐?”

카렌과 리암의 눈이 튀어나올 듯 커졌다.

“괘, 괜찮나? 아니, 내 말은···.”

“괜찮으니 이렇게 멀쩡하게 돌아왔겠지?”

얼굴이 창백해진 둘을 보며 일부러 장난스럽게 웃어 보였다.

“습격 자체는 문제가 아니었어. 디터 혼자서도 박살낼 만한 수준이었으니까. 다만.”

두 사람이 침을 꼴깍 삼키는 게 보였다.

“우릴 습격한 무리의 우두머리를 문초했는데, 이번 일의 의뢰자가···.”

나는 리암의 얼굴을 돌아보았다.

리암은 내 말에 잔뜩 집중한 듯, 아무런 표정 변화가 없었다.

···역시 그러면 그렇지.

“리암 페킹튼, 이라더군.”

한순간.

침묵이 자리했고.

“···뭐?”

“리암이라고?”

한 박자 뒤에야 당황한 반응이 터져 나왔다.

리암은 입만 벌린 채 어버버거리며 제대로 말도 하지 못했다.

“나, 나는 아니야!”

카렌이 옆을 돌아보며 리암에게 물었다.

“네가 그런 거 아니지?”

···리암은 느끼지 못했겠지만, 나는 그녀가 ‘참과 거짓을 판별하는 이능’을 행사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리암의 대답은 한결같았다.

“아냐, 절대 아냐. 내가 대체 왜!”

참, 카렌도 성격 하고는.

“그래, 아냐.”

“···어?”

내 말에 리암이 나를 멍하니 돌아보았다.

그 어리버리한 얼굴을 보며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난 네 말을 믿어, 리암.”

“···.”

“누군가가 우리 사이에 내분을 만들려고 얕은 꾀를 낸 게 분명하다.”

그 말에 리암의 얼굴이 천천히 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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