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로 할래 주먹으로 할래
망설이던 커글랜드의 왕이 물었다.
[그 말은··· 레온을 위해 목숨을 걸겠다는 말이오?]
음 그건 조금 정도도 아니고 많이 무리인데.
망설이던 순간.
한동안 뜬 적이 없는 호감도 창이 눈앞에 나타났다.
『커글랜드의 국왕 피터 3세(호감도 35점)
- 특성 : ‘왕위 다툼의 승리자’, 끈질김, 강인함, 지쳐 있음, ‘레온 바보’
- 비고 : 젊은 시절 강한 야욕을 지닌 정력적인 통치자였지만, 인생 말년에 이르러 가치관이 많이 바뀌었다. 두 번째 왕비에게서 얻은 두 아이, 그중에서도 레온을 특히 아낀다.
아이들의 안위가 가장 큰 걱정거리.』
이걸 보니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확신이 생긴다.
나는 대답을 기다리는 피터 3세를 보며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물론입니다, 폐하.]
아버지, 아버지 목숨까지 마음대로 걸어버려서 죄송합니다.
마음속으로 사죄하며, 준비해온 작은 상자를 피터 3세에게 건넸다.
[그리고 제가 레온 전하를 위해 작은 선물을 준비했습니다.]
[이건···.]
그 내용물은 다름 아닌 꿀벌 모양 브로치.
왕은 햇살 아래서 눈부시게 빛나는 장신구를 멍하니 내려다보았다.
‘아무 의미 없는 물건이 보상으로 나왔을 리 없지.’
지금껏 지켜본 바.
피터 3세는 이번 혼담이 자국에도 득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듯하지만.
가장 큰 마음의 장애물은 이거였다.
···아직 많이 어린 아들이 혹시나 타국의 왕위 다툼에 휘말려 목숨의 위협에 처하지 않을지 걱정되는 것.
[커글랜드에서는 꿀벌을 영원불멸과 권력을 의미하는 영물로 여긴다고 들었습니다.]
[그 말이 맞소. 그래서 왕족의 의상에는 유독 이 꿀벌이 수놓아지곤 하지.]
판을 까는 건 이 정도면 충분하고.
[제 아버지는 그 사실을 모르셨던 듯합니다만···.]
[설마 부친께서 선물로 주신 거요?]
의아한 얼굴로 나를 돌아보는 피터 3세.
나는 최대한 선량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네. 제 몸을 여태껏 지켜준 물건이지요.]
[그렇게 의미 있는 물건을 어찌 이렇게 준단 말이오.]
[아닙니다. 이제 이 물건은 제 손을 떠날 때가 되었으니까요.]
[떠날 때가 되었다니?]
나는 약을 제대로 치기로 작정했다.
[저의 부친은 젊은 시절 고대종족의 전설을 찾아 수많은 던전을 탐험하셨습니다.]
그 말에 피터 3세는 ‘철혈의 공작’이라 불렸던 로건 드 레핀의 명성을 떠올린 모양이었다.
[짐 역시 그런 소문을 들은 적 있소.]
[이것 또한 그런 던전에서 발견된 보물 중 하나입니다.]
[호오.]
[몸에 지닌 이를 단 한 번, 목숨의 위기에서 구해주는 물건이지요. 더불어 말씀드리자면···.]
피터 3세는 영 반신반의하는 얼굴이었지만.
나는 꿀벌 브로치를 향해 아련한 눈빛을 보내려 노력했다.
[얼마 전, 제 심장을 노린 총탄을 막아준 것 역시 바로 이 브로치였습니다.]
그 말에 피터 3세는 깊은 인상을 받은 눈치였다.
나는 어떤 귀족 자제와의 결투에서 암살당할 뻔했던 일을 엑기스만 뽑아 설명했다.
[그대의 목숨을 구한 브로치라는 말이지.]
[믿기지 않으신다면 나중에 신관을 통해 감정해보셔도 좋습니다.]
···약이 좀 과했나.
사실 그때 내 목숨을 구해준 건 방패 스킬이었지만, 이것만큼은 거짓말이 아니다.
이게 ‘착용자를 단 한 번 위기에서 구해주는’ 특수 아이템이라는 사실.
나는 슬쩍 눈치를 살피며 덧붙였다.
[타지로 떠날 어린 자식의 안위를 걱정하는 마음은 어떤 어버이든 같지 않겠습니까.]
[···.]
피터 3세는 잠시 말이 없었다.
브로치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내 얼굴을 다시 돌아본다.
[고맙소.]
[···.]
[그대의 말을 믿지 않는 것이 아니라 짐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애초 믿지 않는 성격이라. 그럼에도···.]
완고해 보이는 입매가 살짝 올라갔다.
[그대가 보여준 진심만큼은 의심할 수가 없구려.]
···됐다!
피터 3세는 미소 띤 얼굴로 보석 상자를 닫아 제 품에 고이 집어넣었다.
[이 선물은 레온에게 잘 전해주겠소.]
[감사합니다.]
[감사하긴, 오히려 짐이 고마울 따름이지. 게다가 커글랜드보다는 오히려 에스닐이 안전하다는 그대의 의견은 확실히 일리가 있소.]
커글랜드에는 적통의 후계자가 너무 많지만 에스닐은 한 명뿐이다, 라는 사실에서 오는 차이.
아무리 계승법에 따라 계승순위를 지닌다 한들.
왕가 적통의 후손들과는 그 명분과 정당성에 차이가 있기 마련이니까.
[네, 게다가···.]
나는 생긋 웃으며 한 마디를 보탰다.
[테레사 폐하는 얼굴만 아름다우신 게 아니라 훌륭한 왕의 재목이기도 하니까요.]
[허.]
[직접 만나보시면 바로 감이 오실 텐데, 이것 참 뭐라 말로 표현할 방법이 없군요.]
그 자신만만한 표현에 피터 3세가 호탕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이것 참 마음에 드는 친구로군!]
그때.
떨어진 새를 찾으러 갔던 사냥터지기가 개를 몰고 돌아왔다.
개의 입에는 살이 아주 통통하게 오른 새가 물려 있었다.
[게다가 사냥까지 잘하고 말이오.]
[음···.]
어쩌다 보니 피터 3세의 호감까지 잔뜩 얻어버린 것 같은데.
나를 슥 돌아보던 왕의 눈빛이 묘하게 빛났다.
[그러고 보니 세자르 공.]
[네?]
[그대는 정혼자가 있소?]
어쩐지 눈동자가 이글거리는 듯 보이는 건 내 착각일까.
당황해 곧바로 대꾸하지 못하자 피터 3세가 흐흐 웃으며 말했다.
[짐에게도 그대와 비슷한 또래의 딸이 하나 있거든.]
[아, 어···.]
당혹감이 두 배로 커진 순간.
[이제 열한 살이니 좀만 크면 둘이 잘 어울린 텐데.]
네? 몇 살이요?
그 말에 번뜩 정신이 든 나는 얼른 고개를 저었다.
[폐하, 참으로 황송한 말씀이십니다만 저는 이미 마음을 준 이가 있어서.]
어쩐지 카렌의 얼굴이 머릿속에 떠올랐지만.
‘지금 이 판국에 무슨 생각을.’
나는 얼른 고개를 저어 그 이미지를 몰아냈다.
[흠, 아쉽구려. 하긴 그대 같은 훌륭한 청년에게 정혼자가 없는 것도 말이 안 되겠지.]
[참으로 황송한···.]
나는 황송하다는 말을 로봇처럼 몇 번이나 반복했고.
피터 3세는 영 아쉽다는 듯 입맛을 다셨다.
* * *
일주일간의 체류를 마치고 스완 성을 떠나는 길.
나보다 하루 먼저 떠난 피터 3세는 출발하기 직전 나를 불러 이렇게 말했으니.
[혼담을 받아들이겠소.]
[···!]
[구체적인 논의사항은 짐이 테레사 1세와 직접 얘기하도록 하지.]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예스!
그와 동시에 도전과제를 달성했다는 메시지가 띠링, 하고 기분 좋은 소리를 내며 나타났고.
나는 꽤 후련한 마음으로 떠날 채비를 할 수 있었다.
“일단 앨빈, 정말 수고 많았다.”
“수고라뇨, 세자르 님이 훌륭히 해내신 덕분이지요.”
“아냐, 네 통역이 아니었으면 애초 불가능한 일이었으니까.”
진심으로 한 말에 앨빈은 쑥스러운 반응을 보였다.
뭣도 모르는 내 귀에도 그의 커글랜드어는 훌륭했는데, 언젠가 피터 3세 또한 이렇게 말했을 정도였다.
‘그대의 통역관 또한 아주 능력이 출중하더군. 혹시 우리 커글랜드에서 지낸 경험이 있는 자요?’
‘그건 아니고 독학으로 익혔다고 들었습니다만.’
‘허어, 독학이라니! 대단하구려.’
피터 3세는 그 후로도 앨빈을 탐내는 뉘앙스의 말을 몇 차례 했지만.
나는 그때마다 모른 척했으니 말이다.
어쨌거나.
“그리고 디터, 발닉.”
앨빈에게 치하의 말을 충분히 해준 뒤, 두 사람에게 고개를 돌렸다.
디터와 발닉은 어쩐지 머쓱한 얼굴로 헛기침을 했다.
“흠, 흠.”
“그··· 잘 마무리되셨다니 다행입니다, 주군.”
“그러게 말입니다. 저희는 뭐 너무 편히 있었어서···.”
도둑이 제 발 저린다더니.
자꾸만 눈을 피하는 두 사람의 모습에 헛웃음이 나왔다.
‘얄미울 정도로 잘 놀기는 하더라.’
나와 앨빈이 진땀을 뻘뻘 흘리며 옆나라 국왕과 어울리는 동안.
디터와 발닉은 세상 제일 행복한 사람들처럼 먹고 마시고 즐겼다.
‘이야, 역시 맥주는 커글랜드산이 최고라더니 역시 죽여주는군요!’
[뭐라고 하는진 모르겠지만, 맛있게 드시는 걸 보니 기분이 좋구먼요!]
‘발닉 경, 어디 맥주만 명물이겠나요? 여기 있는 이 생선 튀김, 이게 커글랜드의 유명한 음식이라는데···.’
[흐흐, 이것도 한 입 드셔보시지요.]
커글랜드어로 한 마디 할 줄 몰라 말을 통하지 않을 텐데.
어쩐 일인지 이 성의 사용인들과 십 년은 알고 지낸 듯 친해져서 놀러다니는 게 아닌가.
‘한 번은 술에 취한 채 어깨동무까지 하고 돌아다니던데.’
저 둘이 무슨 배낭여행객인 줄 알았다.
맘 같아선 너네끼리 꿀 빨아서 좋겠다, 하고 싶었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용건이 있으니까 말이다.
“지금부터 너희의 역할이 중요해질 거다.”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영문을 몰라하는 두 사람을 번갈아보며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공작저로 돌아가는 길에 누군가 우리를 노리고 습격할 가능성이 있다.”
“카렌 님이 알려주신 정보입니까?”
“뭐 그렇지.”
이런 거에는 무조건 카렌의 이름을 갖다대면 만사형통이다.
“알겠습니다 주군!”
“경계를 한층 강화하겠습니다.”
머리를 맞대고 의논한 두 사람은 자신들이 각각 전방과 후방을 맡겠다고 했다.
그렇게 긴장을 늦추지 않으며 말을 달린 지 여섯 시간째.
“···잠시만요, 도련님.”
발닉의 날카로운 감각이 무언가를 감지해냈고.
그의 말에 나머지 세 명이 말을 멈춰세우고 무기를 고쳐세운 순간.
휘잉!
어디선가 날아온 화살이 내 옆을 스치고 지나갔다.
“···!”
놀라지 않았다면 거짓이겠지만.
겁이 난다기보다는 드디어 올 게 왔다는 느낌이었다.
“디터, 앨빈, 발닉. 준비해라.”
“네!”
세 사람이 일제히 대답한 순간.
울창한 숲 사이에 매복하고 있던 한 무리의 사내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검과 방패는 물론이고 가죽갑옷까지 갖춰 입었다. 전문 훈련을 받은 자객이라기보단 경험 많은 용병단에 가까운 느낌.
우두머리로 보이는 자가 나머지에게 외쳤다.
“단 한 놈도 살려서 돌려보내선 안 된다!”
“네!”
용병들이 일제히 소리치며 우리를 포위했다.
그 수는 대략 이십여 명.
완벽한 수적 우위에 용병들은 자신들의 승리를 확신하는 듯했지만.
“디터.”
“네!”
“잘 부탁한다.”
우리 네 명은 단 한 순간도 우리의 승리를 의심하지 않았다.
* * *
나와 발닉, 앨빈 모두 일당백으로 활약했지만.
“크억!”
“이··· 이건 괴물이야!”
그중에서도 제일은 단연코 디터였다.
제아무리 좋은 방패로 몸을 가린다 한들 상식을 뛰어넘는 괴력 앞에선 소용없기 마련이니까.
“아니, 바, 방패가!”
“말도 안 돼!”
디터가 휘두른 메이스 한 방에 방패가 쩌억 갈라지는 것은 기본이요.
딱히 ‘섬멸의 일격’ 같은 스킬을 쓰지도 않았는데 그가 지나갈 때마다 용병들이 종이인형처럼 나동그라졌다.
그것을 본 용병대장은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버렸고.
“후, 후퇴···.”
후퇴하려고 했지만 후퇴조차 여의치 않자 혼자 도망치는 길을 택했다.
나는 그의 등을 바라보며 디터에게 명령했다.
“잡아서 데려와라, 디터.”
“네.”
“물어볼 게 있으니 목숨은 붙여두고.”
“네.”
그리고 잠시 후.
디터는 말 그대로 ‘목숨만 붙여둔’ 상태의 용병대장을 끌고 돌아왔다.
“···.”
이건 무슨 얼굴을 갈아엎은 것도 아니고.
아예 딴사람이 돼 있는 대장의 몰골을 멍하니 쳐다보자.
디터가 머리를 긁적이며 변명하듯 말했다.
“제 한 몸 살겠다고 부하들을 버리고 달아나는 꼴을 참을 수 없어서···. 죄송합니다.”
“아니, 잘했다. 점점 손놀림이 숙련되는 것 같단 말이지.”
“네?”
나는 만족스럽게 웃으며 디터의 어깨를 두드려주었다.
“죽이지 않고 패는 기술이 늘고 있다는 얘기야, 디터.”
“칭찬 감사합니다 주군!”
“···.”
용병대장이 뭐 이런 미친 새끼들이 있나, 하는 눈빛으로 나를 올려다보았지만.
“어딜 우리 주군에게 그딴 불경한 눈빛을 보내나!”
디터의 일갈에 용병대장은 깨갱 하고 꼬리를 내렸다.
나는 짐짓 사람 좋은 미소를 지어 보이며 용병대장의 뺨을 톡톡 두드렸다.
“그럼 어디 우리, 마음을 탁 터놓고 진솔한 대화를 시작해볼까?”
“크윽···.”
“아, 물론 선택은 자네 몫이야.”
용병대장은 이를 갈았지만.
“언어를 사용해서 나와 사람다운 대화를 나눌지 아니면.”
나는 거대한 주먹을 문지르며 옆에 선 디터를 가리켜 보였다.
“여기 있는 디터와 사내답게 주먹의 대화를 나눌지.”
디터와 눈이 마주친 순간,
용병대장은 화들짝 놀라며 침을 꼴깍 삼키고 말았다.
물론 그의 선택은 들으나 마나였고.
“정말, 정말입니다요! 이런 일인 줄 알았다면 애초에 의뢰를 수락하지도 않았을 겁니다.”
용병대장은 자신은 목표물이 ‘세자르 레핀’이라는 거물인 줄 꿈에도 몰랐으며.
그냥 어중이떠중이 여행자 세 명을 처리해달라는 의뢰를 받았을 뿐이라고 말이다.
“그건 상관없고.”
나는 바닥에 무릎을 꿇고 앉은 놈에게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의뢰자의 이름이 뭐야?”
“그건···.”
용병대장의 입에서 나온 의외의 이름에,
나는 눈을 크게 뜨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