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작가의 서자로 살아가는 법-125화 (125/176)

설득의 귀재

나는 당황한 나머지 앨빈에게 되묻고 말았다.

“···진짜야?”

역시나 당황을 감추지 못하며 고개를 끄덕이는 앨빈.

음, 이거 예상 외의 복병인걸.

침을 꿀꺽 삼킨 뒤 입을 열었다.

[저··· 폐하.]

[허허, 고놈 참. 어쩜 이렇게 똑똑할까!]

[폐하?]

[아.]

두 번을 부르고 나서야 피터 3세는 머쓱한 얼굴로 나를 돌아보았다.

[이거 미안하게 되었소. 짐도 나이를 먹은 탓인지 이 녀석만 보면 정신을 못 차리겠군.]

눈에 넣어도 안 아픈 막둥이다 이거지.

헌데 아무리 봐도 테레사가 말했던 나이로는 도무지 보이지 않는걸.

나는 말을 골라가며 조심스레 물었다.

[저··· 제가 알기로 레온 전하는 올해 열두 살이라고 들었습니다만.]

[아, 그것이.]

피터 3세의 얼굴에 곤란해하는 기색이 나타났다.

[어찌 생각할지는 모르겠지만, 이 아이의 나이를 속여서 알려야 하는 나름의 사정이 있었소. 일부러 속인 것은 아니지만 상황이 곤란하게 되어버렸군.]

[그렇군요. 사정은 말씀해주시지 않아도 됩니다.]

안 들어도 뻔하다.

왕위 계승 순위라든가 뭐 그런 복잡한 왕실 내 후계 구도 때문에 그랬겠지.

그거야 그렇다 치고.

‘이거 일이 어려워지겠는걸.’

일단 둘의 나이 차이가 상당하다.

테레사가 올해로 열셋이니 레온과는 일곱 살 차이.

지금은 아예 어린이와 어른 정도의 느낌이고, 성인이 되고 나서도 그 차이는 상당할 터다.

‘게다가 피터 3세가 레온을 아껴도 너무 아끼는 것도 문제야.’

거의 손주뻘의 아들이니 얼마나 예쁘겠는가. 이곳 스완 성까지 데리고 온 것만 봐도 그렇다.

저렇게 아끼는 아들을 정략혼의 도구로 삼으려 할 리가 없지 않은가.

···어쩌면 이 모든 것이 물거품으로 돌아갈지 모른다는 생각에 문득 불안해진 순간.

나는 얕은 꾀를 내보았다.

[저 전하.]

[네?]

[이 초상화 한 번 보시겠습니까?]

테레사가 그려진 초상화를 슥 내밀자.

레온의 눈이 초롱초롱해졌다.

[와···.]

[제가 모시는 여왕 폐하입니다. 어떻습니까, 아름다우시지요?]

[엄청 이뻐요! 이렇게 이쁜 사람은 처음 봐!]

비록 그 옆에 앉은 피터 3세는 날 보며 대체 뭐 하는 짓거리냐는 듯한 눈빛으로 노려보았지만.

나는 생글거리며 대답했다.

[결혼이란 역시 당사자들의 의사가 제일 중요하니까요.]

[···하, 이것 참.]

피터 3세는 어이없어하며 혀를 차더니.

초상화에서 아직도 눈을 떼지 못하는 레온을 보며 피식 웃었다.

[하긴 그대의 말도 아예 틀리지는 않구려. 일단은 며칠 더 머무르며 논의를 해보는 게 어떻소?]

···앉은 자리에서 단칼에 거절당하지는 않아 다행이다.

나는 고개를 숙여 보이며 속으로 안도했다.

* * *

극진한 대접은 그 후로 계속 이어졌다. 음식이면 음식, 침구면 침구, 목욕이면 목욕.

뭐 하나 부족할 것 없는 대우를 받는 동안.

스완 성에서 제공하는 전서구를 이용해 몇 통의 서신을 주고 받았다.

첫 번째 상대는 테레사 국왕이었는데.

『폐하, 레온 왕자가 여섯 살이랍니다! 이거 어쩌죠?』

이래저래 미사여구를 곁들이긴 했지만 요점은 이것뿐인 편지에,

테레사는 이러한 답장을 보냈다.

『생각보다 많이 어리긴 하지만 상관없네. 어차피 정략혼인데 여드름투성이 소년보단 귀여운 아이 쪽이 낫지 않겠나.』

가만 보면 진짜 그릇이 크다니까.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두 번째 상대는 카렌이었는데.

단단하게 봉해진 그녀의 편지에는 중요한 기밀이 들어 있었다.

‘···공국이 본격적인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고?’

한동안 분위기를 살피느라 벡카드 가문과 접촉하지 않던 공국이, 벡카드 쪽의 반란파와 비밀스럽게 접선하기로 했다는 것이다.

보아하니 꽤 애가 타는 모양이다.

‘테레사의 혼담이 성립되면 왕권이 지금보다 공고해지기 마련이니까.’

누가 그녀의 남편이 되든 그것은 마찬가지일 테니, 공국은 그러기 전에 일을 벌이고 싶을 터였다.

그렇다면···.

그녀에게 보낼 답장을 쓰려던 찰나.

[도전과제 ‘수상한 움직임?’ 달성! - 반란의 조짐을 파악했습니다.]

[보상 ‘꿀벌 브로치’를 수령했습니다.]

[도전과제 목록이 갱신되었습니다.]

보상으로 뭘 받았다고?

눈을 크게 뜬 순간, 책상 위에 뎅그랑 하며 무언가가 떨어졌다.

“정말 꿀벌 모양 브로치잖아?”

몸통에 보석이 박혀 반짝반짝한다. 크기가 워낙 작으니 그리 귀한 물건은 아닌 것 같지만···.

『‘꿀벌 부적’(가격 : ????)

- 설명 : 옷에 다는 브로치 형태의 아이템. 착용자를 크나큰 위기로부터 단 한 차례 지켜준다.

- 비고 : 커글랜드에서는 예로부터 꿀벌을 영원불멸과 권력을 상징하는 곤충으로 여겼다.』

흠 그렇단 말이지.

···어디에 어떻게 활용해야 할지 대충 감이 오는걸.

나는 브로치를 불빛에 이리저리 비추어본 뒤 4차원 주머니에 잘 넣어뒀다.

새로 생긴 도전과제 목록도 확인해보았다.

-피터 3세에게 혼담을 승낙받았나요?

-돌아가는 길에 습격을 당했나요?

-리아나 부인의 행방을 파악했나요?

-반란군을 소탕하는 데 기여했나요?

-테레사에게 만족스러운 결혼 선물을 주었나요?

첫 번째 과제를 보니 어떻게 해서든 피터 3세의 입에서 ‘예스’라는 말을 끌어내야 할 것 같다.

무엇보다 여기엔 내 승진도 걸려 있고 말이지.

그거야 그렇고.

“습격은 또 웬 습격이야.”

이거야 미리 가신들에게 주의를 주어 단단히 대비하면 될 일이지만.

‘누가 내 목숨을 노리는 걸까.’

공국? 아니면 벡카드 가문이나 헬리오스 가문?

그도 아니면 내가 파악조차 하지 못한 제3자일까.

나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은 뒤 다음 과제로 넘어갔다.

‘반란군 소탕이라.’

내가 반란의 조짐을 파악하는 게 너무 늦어버린 걸까.

아니면 벡카드 가문이 반란을 일으키는 것이 바꿀 수 없는, 예정된 미래에 가까운 걸까.

둘 중 어느 쪽이든 단단히 대비해야 한다.

‘돌아가자마자 폐하께 말씀드려야겠군.’

그리고 리아나 부인.

그녀가 예상치 못한 곳에서 걸림돌이 될 수 있으니 사전에 행방을 파악할 필요가 있을 거다.

그렇게 도전과제 파악을 마친 나는 다시 편지로 되돌아왔다.

한 통은 카렌에게, 다른 한 통은 리암에게.

요는 간단했다.

···이 사실을 국왕 폐하에게 알리는 한편, 리암에게도 알렸는데.

‘공국의 사신이 벡카드 가문과 접선하는 현장을 잡아라.’

그것이 내가 리암에게 맡긴 임무였다.

카렌에게는 리암에게 자세한 사항을 알리고 그를 보조하라고 지시했다.

잠시 고민하다가 카렌에게 보내는 편지에는 이렇게 덧붙였다.

『나는 건강하게 잘 있으니 쓸데없는 걱정 말고.』

그 외에 우만이 보낸 편지도 왔는데.

나는 이곳으로 떠나기 직전, 우만에게 총관을 도와 공작저의 관리를 담당하는 임무를 맡긴 터였다.

가신들의 상황을 파악하는 것은 물론이요, 그들에게 혹시 무슨 일이 생기면 내게 제일 먼저 알려달라고.

우만의 편지 또한 요점은 간단했다.

공작저는 아무 문제 없이 잘 돌아가고 있으니 걱정하지 말라고.

다만 딱 한 가지, 이런 추신을 남겼는데.

『요즘 리암의 기분이 좀 좋지 않은 것 같은데 왜인지 모르겠군.

나를 보면 유난히 날카롭게 구는 느낌이기도 하고 말이야.』

그러고 보니 리암이 내게 불만이 있다고 하지 않았나.

돌아가는 대로 그와 대화를 나눠봐야 할 것 같다.

그렇게 며칠을 보낸 뒤.

시종이 어느 날 아침 내 방문을 두드렸다.

[혹시 오늘 시간이 괜찮으신지요?]

[시간이야 늘 괜찮네만, 무슨 일인가?]

[폐하께서 함께 사냥을 나가자고 하시는데요.]

사냥이라.

나는 창문 밖에 펼쳐진 드넓은 숲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 * *

탕!

타당!

내 총이 불을 내뿜과 동시에, 저 멀리서 날던 새가 떨어졌다.

피터 3세가 탄성을 터뜨렸다.

[명중이군!]

솔직히 맞을 줄은 나도 몰랐지만.

운 좋게 한 방 맞혔을 뿐인데 피터 3세는 눈까지 반짝이며 나를 돌아보았다.

[에스닐이 그 사이에 그리 바뀐 것이오?]

[바뀌다니요?]

앨빈은 총을 들고 있지 않았다.

말을 타고 우리의 대화를 통역하는 것만으로도 버거웠으니까.

[짐이 알기로 에스닐 귀족들은 총기를 낮잡아본다고 들었는데.]

[아.]

[총이란 한낱 병사들이나 쓰는 무기이지, 진정한 무인이란 검을 쓰는 것이라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씀이 맞습니다. 아직도 에스닐의 귀족 사회엔 그런 풍조가 남아 있죠. 저는 그저 개인적인 호기심에서 훈련했을 뿐이라.]

[호오, 개인적인 호기심이라.]

그 말을 끝으로 한동안 대화는 이어지지 않았다.

다그닥 다그닥.

달리는 말 위에서 맞이하는 봄바람이 상쾌하기 그지없다.

하늘을 찌를 듯이 서 있는 나무들은 신록을 자랑한다. 보는 것만으로도 힐링이 되는 기분이랄까.

[스완 성 자체도 아름답지만, 이 숲의 풍경은 더욱 근사하군요.]

감탄해서 한 말에 피터 3세 또한 고개를 끄덕였다.

[짐이 이곳에 매년 봄에 들르는 이유도 바로 그 때문이오.]

본인은 사냥을 그리 즐기는 편이 아니지만, 말을 타고 이 숲을 달리는 기분은 그 무엇에도 비할 바가 아니라고.

[레온을 함께 데리고 나오지 못한 것이 아쉽구려.]

레온 왕자는 미열이 있어 방에서 쉬고 있다고 한다.

나는 오동통하고 발그레한 뺨의 어린이를 떠올리며 말을 받았다.

[자식에게 좋은 것을 보여주고 싶은 마음은 어느 어버이나 같지 않겠습니까.]

[짐은 여느 어버이와 다르다는 게 문제 아니겠소. 왕을 아비로 둔 이상, 그리고 정식 왕비가 아니라 그의 정부를 어미로 둔 이상···.]

피터 3세의 목소리에서 착잡함이 묻어났다.

[레온은 절대 다른 아이들처럼 평범한 삶을 살 수 없을 터이니.]

저 멀리 울창한 숲을 바라보는 사내의 낯에 그늘이 졌다.

한 나라의 왕이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아버지의 얼굴을 한 그를 보며, 나는 조심스레 물었다.

[···레온 전하의 안위를 걱정하시는 겁니까?]

그 말에 피터 3세가 말을 멈추고 나를 돌아보았다.

그 자신 또한 서자 출신이며, 결국은 나머지 형제자매를 모두 죽여버리고 왕위에 등극한 남자.

그런 자가 제 아들의 미래를 걱정하는 것이 어쩐지 안 어울렸지만.

[아니라 하면 거짓이겠지.]

본인이 골육상쟁의 장본인이었던 만큼 더더욱 걱정이 되는 건지도 모른다.

내 눈에 비친 피터 3세는 듣던 것처럼 ‘피도 눈물도 없는’ 무정한 인간으로는 딱히 보이지 않았으며.

‘그런 상황에서 어쩔 수 없는 선택을 한 것일지도 모르지.’

입술을 지그시 깨물더니 이렇게 말했으니까.

[그대도 알고 있을 테지만 우리 커글랜드 왕실은 피에 물든 역사를 지녔소. 왕권을 둘러싼 세력 다툼이 너무도 극심한 나머지 자신의 피붙이를 죽이는 일들이 수없이 반복되었지.]

[···.]

[짐 또한 그런 과정을 거쳐 왕위에 올랐고. 혹자는 진정 왕좌에 걸맞는 자가 선발되기 위한 필연적인 과정이라고 얘기하기도 하나···.]

방금 전만 해도 섬뜩하게 번뜩이던 눈동자가 회한으로 물들었다.

[적어도 내 자식만큼은 그 역사를 반복하지 않았으면 좋겠소.]

[그렇다면.]

나는 침을 꿀꺽 삼키며 도박 같은 수를 던졌다.

[차라리 이대로 레온 전하가 이웃나라의 왕이 되는 편이 낫지 않겠습니까?]

이웃나라의 왕.

피터 3세는 내 말에 ‘여왕의 남편에게는 공동 통치권이 주어진다’라는 혼담서의 내용을 떠올리는 모양새였다.

잠시 고민하던 그가 말했다.

[사실 그건 중요치 않소.]

[···중요하지 않다고요?]

[중요한 건 내 아들의 안위이지 그 아이의 손에 쥐여질 권력이 아니니까.]

물론 이 아이가 커서 권력을 탐할지도 모르겠지만 말이오.

한숨과 함께 그의 말이 이어졌다.

[우리만큼은 아닐지 몰라도 에스닐에도 왕권 다툼은 존재하지 않겠소?]

그 말에 나는 빙그레 웃었다.

그가 바로 이 점을 지적하길 기다렸으니까.

[그거야 물론입니다. 저희 테레사 여왕께서 이 혼담을 제안한 것도 바로 그 왕권 다툼에서 승리하기 위해서이고요.]

[솔직하구려.]

[이제 곧 가족이 될 사이인데, 솔직하지 않으면 어쩌겠습니까.]

내 너스레에 피터 3세가 웃음을 터뜨렸지만.

나는 진지하게 말했다.

[그렇지만 이 혼담이 성사만 된다면 그 이상의 왕권 다툼은 없을 겁니다.

[어떻게 그렇지? 그다음 가는 왕위계승권자들이 있을 거 아니오.그들이 왕좌를 노린다면 결국 아무 소용이···.]

[적통의 후계자들이 여러 명인 커글랜드와는 다릅니다. 적통은 여왕 폐하 한 분뿐이며 두 번째 승권자는 저의 아버지인 레핀 공작, 세 번째 계승권자는···.]

나는 손가락으로 나 자신을 가리켜 보였다.

[바로 저, 세자르 레핀입니다. 저희 두 사람 다 왕좌에 관심이 없다는 것은 온 나라가 다 아는 사실이고요.]

피터 3세는 의외의 포인트에 깊은 인상을 받은 듯했다.

[···그대가?]

[네, 서자 출신인 주제에 왕위를 이을 후보자라니 세상사 참 알 수 없는 일이죠.]

[허.]

[물론 4위도 있습니다만 이분 또한 저의 당숙이자 왕위에는 요만큼도 욕심이 없는 사람입니다.]

나는 설득을 이어나갔다.

[게다가 저의 부친과 저는 이미 테레사 여왕께 평생 충성을 맹세한 터. 만일 레온 전하께서 저희 여왕 폐하와 함께하신다면···.]

내 말에 잔뜩 집중한 피터 3세와 눈을 똑바로 마주쳤다.

[저희 부자는 레온 전하께도 평생의 충성을 맹세할 것이옵니다.]

[···!]

피터 3세의 눈이 커졌다.

그리고 그 순간.

나는 내가 그의 마음을 움직였음을 확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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