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작가의 서자로 살아가는 법-124화 (124/176)

나는야 여섯 살

* * *

딱히 그 말 때문에 그런 건 아니지만.

결국은 테레사의 제안을 받아들였고.

“노 리스크 노 리턴, 하이 리스크 하이 리턴.”

이런 말을 중얼거리며 말을 달려 들판을 질주하는 중이었다.

“저 도련님. 그건 혹시 무슨 마법 주문입니까?”

“발닉 경, 아시겠지만 마법은 그 흔적만 남아 있을 뿐 오늘날엔 그 효력이 아예 사라진 지 오래입니다.”

“허, 용병들 사이에는 이런 말이···.”

“그건 그냥 미신···.”

“미신이라니! 이건 분명하게 증명된···.”

처음만 해도 잔뜩 긴장해 있던 가신들은 여정에 익숙해지자 농담 따먹기까지 했다.

말을 달린 지도 어느덧 하루째.

우리는 발닉이 찾아낸, 몸을 숨기기 좋은 곳에서 하루 야영을 한 뒤 계속 말을 달렸고.

“저기 스완 성이 보입니다!”

운이 좋은 건지 어쩐 건지,

도적 떼 한 번 만나지 않고 무사히 목적지에 도달했다.

“이야, 정말 근사한걸요.”

“와···.”

오후의 햇살 아래 황금빛에 물든 스완 성.

그리고 그 주변을 감싼 고즈넉한 풍경은 호수와 어우러져 탄성을 자아내게 했다.

가까이 다가갈수록 가슴이 두근거리는 가운데, 드디어 성문에 들어섰고.

“어서 오십시오!”

미리 다 얘기가 된 덕분인지 문지기가 그대로 통과시켜주었을 뿐 아니라.

“먼 길 오시느라 고생 많으셨습니다. 방을 준비해두었으니 이쪽으로 오시지요.”

사전에 준비한 것이 분명한 손님방과 뜨끈한 목욕물, 보기만 해도 배가 부를 듯한 상차림까지.

우리는 시종들의 극진한 대접을 받으며 여독을 풀었다.

그다음 날 오전.

아침 식사 시간에 맞춰 시종이 내 방문을 두드렸다.

“세자르 공, 조찬이 준비되었습니다.”

문을 열고 나가자 시종이 머리를 조아리며 덧붙였다.

“주제넘게 귀띔드리자면, ‘그분’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번쩍.

그 말에 머리에서 졸음기가 싹 사라졌다.

“알겠네. 곧바로 준비하고 내려가지.”

그래.

내가 이곳에 온 진짜 목적은 휴양 따위가 아니었으니까.

잠시 후.

앨빈을 대동하고 식당 안으로 들어서자 중후한 인상의 사내가 보였다.

나는 그 앞으로 나아가 예법에 따라 인사를 했다.

[먼 길 오느라 고생했소.]

저자가 바로 ‘휴양’을 핑계로 ‘조카의 성에 놀러온’ 커글랜드 국왕, 피터 3세.

미리 봐둔 초상화와 판박이다.

나는 준비해둔 어색한 커글랜드어로 인사했다.

[신 세자르 레핀, 커글랜드의 왕을 뵙사옵니다.]

고개를 든 나와 피터 3세의 눈이 마주쳤다.

* * *

오십을 바라보는 나이에도 여전히 지치지 않는 체력을 자랑하는 피터 3세.

그러한 그로서도 최근 몇 달간은 정말 쉴 틈이 없었다.

일단 제일 큰 이유는 얼마 전 왕비와 사별한 뒤, 오랫동안 그의 정부로 지내온 컨델 후작부인을 왕비 자리에 앉혔으며.

‘이들은 모두 짐의 핏줄을 이은 정당한 후계자임을 선포한다.’

그녀가 낳은 자신의 두 아이를 서자가 아닌 ‘적자’로 인정하겠다고 공표했기 때문이다.

반발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거셌다.

‘허, 말세요 말세! 왕비 전하께서 돌아가신 지 얼마나 되었다고···.’

‘켄델 백작부인이 그렇게 사치가 심하다는데···.’

‘한 나라의 왕이 색에 빠져 허우적대는 꼴이라니.’

‘사생아는 어디까지나 사생아가 아닌가!’

문제는 그것뿐이 아니었다.

남쪽의 에스닐과의 영토 분쟁이야 오래된 사안이었지만.

돌연 무장을 하고 나타난 국경지대의 유목민들 때문에 민간인 피해가 급증했으며.

원거리 무역을 떠난 무역선들이 침몰하는 사고가 일어나는 등 국내외로 쌓인 문제들이 한 번에 폭발했다.

성난 민심을 달래려고 얼마나 애를 써야 했는지 모른다.

그렇게 급한 불을 끈 뒤 얻은 간만의 휴식.

근 몇 년 만에 방문한 스완 성은 여전히 아름다웠고, 조카 필로스의 대접은 언제나처럼 극진했으며.

‘에스닐 비밀 사절과의 만남이라.’

커글랜드의 국왕은 고개를 들어 맞은편에 앉은 이들을 날카로운 눈으로 훑어보았다.

척 봐도 귀족적인 인상의 청년과 그가 데려왔다는 통역사는 갓 성년을 지난 듯 보였다.

저 나이에 왕실 의전관이라는 직책을 맡고 있다고?

‘이런 민감한 사안에 대체 뭘 믿고 이런 애송이들을 보낸 걸까.’

다시 생각해봐도 신기했다.

이제 막 정식 왕자가 된 자신의 막내아들에게 혼담이라니.

‘딱히 진지하게 받아들일 마음은 없지만···.’

반쯤은 호기심 때문이랄까.

이곳에서 휴식도 취할 겸, 얘기나 들어보자 싶어 논의 제안을 받아들인 차였다.

[일단은 먼저 한마디 해두자면, 짐은 빙빙 돌아서 얘기하는 걸 싫어하오.]

통역관이 재빨리 말을 옮기자 청년이 고개를 끄덕였다.

[내 성격도 그렇지만, 이곳에서 보내는 소중한 휴식 시간을 헛되이 하고 싶지 않거든. 그러니 곧바로 본론으로 들어가지 않겠소?]

그러자 청년이 대답했고, 통역관이 그 말을 옮겼다.

[저 또한 직설적인 것을 좋아하는데, 폐하와 저는 통하는 부분이 있을 것 같군요.]

피터 3세는 살짝 놀랐다.

첫째는 통역관의 유창한 발음에, 둘째는 그 대담한 발언에.

이웃나라 왕을 태어나 처음 뵙는, 그것도 한 나라를 대표해서 왔다는 비밀 사절 치고는 참으로 겁이 없는 말이 아닌가.

‘에스닐에 이런 청년들이 있단 말이지.’

과거 유스톤 3세가 통치했던 시절, 에스닐은 대륙에서 가장 부강한 나라였다.

그러나 나라의 흥망성쇠란 예측할 수 없는 법.

온 대륙을 두려움에 떨게 했던 그가 노환으로 병석에 누운 지 얼마 안 되어 아들들이 불운한 사고로 세상을 떠났고.

엄마 품에 안겨 있을 나이의 어린 아이가 왕위에 오르자, 에스닐의 운명은 순식간에 풍전등화가 되어버렸다.

‘물론 우리에게는 그때가 바로 기회였지만.’

에스닐이 쇠약해진 때를 노릴 생각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커글랜드 또한 나라 안팎의 온갖 갈등이 터져나오던 상황.

제 문제만으로도 버거운 때에는 이웃의 큰 나라와 잘 지내는 것만큼 중요한 게 없는 법이다.

‘아무래도 에스닐의 통치자 역시 나와 같은 생각을 한 모양이군.’

소년 왕이 죽고 그 사촌누나가 왕위에 올랐다고 했던가.

그녀의 생각인지 측근들의 생각인지 알 수는 없으나.

한 가지만은 확실했다.

‘우리 커글랜드의 힘을 이용해 약해빠진 왕권을 강화할 생각인 모양인데.’

어디 그런 같잖은 수를 쓰려고.

피터 3세가 입을 뗐다.

[에스닐의 제안은 나의 4남 레온과 그대의 주군인 테레사 1세의 혼담을 비밀리에 진행하자는 것이 아니오?]

[그렇습니다.]

[말하자면 이 둘의 결혼을 전제로 한 두 나라 간의 거래를 하자는 건데···.]

피터 3세의 눈이 가늘어졌다.

[거래란 양측 모두에게 도움이 되어야 하는 것. 이 혼담이 대체 우리 커글랜드에게 무슨 이득이 된단 말이오?]

물론 커글랜드에는 득이 됐으면 됐지, 해가 될 일은 전혀 없는 혼담이다.

허나 피터 3세는 상대가 주는 대로 받는 성향의 인물이 아니었다.

하나를 준다면 두 개를, 두 개를 준다면 네 개를 기어코 받아내고야 말았으며.

게다가 4남 레온은 다른 자식들과는 조금 특별한 의미로 다가오는 아이였다.

[흠, 이거 의외인걸요.]

그렇게 상대를 압박하듯 던진 말에 청년은 의외로 미소를 지으며 대꾸했다.

[의외라니, 무슨 소리요?]

[저는 애초 폐하께서 이 혼담이 지닌 진정한 가치를 알아보시고서 이 자리를 마련하신 줄로만 알고 있었거든요.]

[계속 이야기해보시오.]

딱딱하게 굳어진 피터 3세의 얼굴 앞에서도 청년은 미소를 잃지 않았다.

[일단 질문하신 것에 대답부터 드리자면, 이 혼담은 저희 에스닐보단 커글랜드에 더욱 이로운 제안이라고 봅니다.]

[어째서 그렇소?]

[첫째로, 최근 들어 쇠약해졌다고는 하나 에스닐은 대륙에서 두 번째로 큰 나라이지요. 그런 나라와 혼담을 맺어 좋은 관계를 구축하는 것은 양국에 이로운 일일 뿐더러.]

청년은 이런 질문이 나올 것을 예상했다는 듯 청산유수로 말했다.

[둘째, 이런 말씀을 드리기는 조심스럽지만 저희 테레사 폐하는 왕가의 적녀이며 명실상부한 여왕이십니다. 그러한 폐하와-]

[-한낱 서자를 맺어주는 것이니, 우리 커글랜드가 더 이익을 보는 거래다, 지금 이 말이오?]

피터 3세는 저도 모르게 그의 말을 끊고 들어갔다.

‘한낱 서자’.

자신의 입으로 내뱉은 말이 자신에게 칼이 되어 돌아오는 듯했다.

‘지나치게 발끈하고 말았군.’

그가 민감하게 반응한 데는 나름의 이유가 있었는데, 피터 3세 또한 선왕의 서자 출신이었기 때문이다.

한때 정복왕으로 추앙받던 선왕은 그다지 좋은 남편이나 아버지가 아니었는데.

‘커글랜드의 국교를 알레스 정교가 아닌, 커글랜드교로 채택함을 천명하노라.’

아내와 이혼하고 새 애인을 왕비 자리에 앉히기 위해,

부부의 이혼을 원칙적으로 금하는 알레스 정교 대신 새로운 종교를 만들어 국교로 삼을 정도였으니.

(선왕은 이후 아내를 세 번이나 더 갈아치웠다.)

어쨌거나 피터 3세는 그렇게 생겨난 수많은 서자 출신의 왕자 중 하나였고.

피 튀기는 골육상쟁 끝에 왕좌를 차지했지만 그놈의 출신 성분 때문에 여전히 비난을 받곤 했으니.

‘신의 축복을 받지 못한 한낱 서자가 왕위에 오르다니!’

‘나라에 망조가 들려고···.’

커글랜드교로 국교가 바뀐 이후, 적자와 서자의 차별을 금지하는 법이 생겨났지만.

세간의 인식은 여전히 그대로였으니 말이다.

[딱히 그런 의미로 드린 말씀은 아니었는데요.]

‘세자르’라는 이름의 청년은 당황한 모양새였다.

잠시 고개를 갸웃하더니 뭔가를 꺼내 보이며 말을 이었다.

[저희 테레사 폐하가 어느 모로 보나 빠짐이 없는 완벽한 신부감이라고 말씀드린 거였는데···.]

그것은 다름 아닌 테레사 1세의 초상화.

피터 3세는 저도 모르게 헛웃음을 짓고 말았다.

[보시죠, 참으로 어여쁘시지 않습니까?]

[음···.]

고개를 쭉 빼고 들여다보니 과연 그 말대로다.

어여쁘다는 말로는 부족하고, 보는 이의 눈길을 사로잡을 정도로 화려한 미모랄까.

어쩐지 비현실적인 느낌마저 들어 실례가 되는 질문을 무심코 던지고 말았다.

[그··· 초상화가 과하게 잘 그려진 것은 아니오?]

[네?]

[아, 아니.]

그러자 청년은 기분 좋은 웃음을 터뜨렸다.

[아, 실물과 다르지 않을까 걱정이 되나 보시는군요.]

[···.]

[설마요. 실물은 이보다 열 배는 더 아름답습니다.]

하긴.

생각해보면 유스톤 3세의 자식들도, 그 부인들도 눈부신 외모로 유명했으니 그 사이에서 태어난 딸이 아름다운 것은 당연하겠지.

[폐하, 실례를 무릅쓰고 말씀드리자면.]

초상화에서 눈을 떼고 고개를 들자.

사뭇 진지해진 세자르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폐하께서 무엇을 우려하시는지는 잘 알겠습니다. 적서 차별을 법으로 금지하는 커글랜드에서조차 여전히 그것이 공공연하게 이루어질 정도인데.]

[하물며 여전히 정교회를 믿는 에스닐에서 전 왕비님 소생이 아닌 왕자 전하께서 어떠한 대접을 받으실지, 그런 것이 걱정되시는 거겠지요. 허나···.]

피터 3세는 입을 다문 채 그의 말을 경청했다.

그래. 겉으로 티는 내지 않았으나 사실 4남은 그가 가장 아끼는 자식.

···한 나라의 왕으로서는 구미가 당기는 제안이나, 자식의 어버이로서는 걱정이 되는 게 사실이었다.

[저 역시 서자입니다. 아니, 한때 서자였지요.]

서자 출신이었던 자가, 최연소 의전관이 되었단 말인가?

물론 에스닐은 예전에도 커글랜드보다는 능력을 중시하는 분위기의 풍조이긴 했으나···.

그 후로 한동안 이어지는 세자르의 말을 피터 3세는 홀린 듯 듣고 있었는데.

똑똑.

문 두드리는 소리와 함께 시종의 목소리가 났다.

[폐하, 레온 왕자님이 합석해도 괜찮으실까요?]

[레온이 왔다고?]

피터 3세는 저도 모르게 활짝 웃으며 세자르에게 양해를 구했다.

[내 아들이 함께해도 괜찮겠는가?]

[물론입니다, 폐하.]

* * *

그로부터 잠시 후.

나는 눈앞에 펼쳐진 광경을 잠시 의심해봐야만 했다.

‘이게 대체 무슨···.’

분명 피터 3세와의 대화는 꽤 괜찮은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물론 호락호락한 상대는 절대 아니었다.

대체 이 혼담이 우리 커글랜드에 무슨 득이 되냐며 도발에 가까운 말을 초판부터 던지는 것은 물론이요.

대화 내내 불퉁한 얼굴로 경계를 풀지 않았지만.

‘저 역시 서자입니다, 폐하.’

‘에스닐은 커글랜드와는 다릅니다. 결국은 신분보다는 능력을 중시하는 철저한 관료제 사회이니까요.’

가려운 곳을 시원하게 긁어준 덕분에 이웃나라 왕은 점차 의심을 거두었고.

수락의 대답을 받아내기 직전!

혼담의 장본인, 레온 왕자가 들어왔다.

‘···.’

그의 외모를 본 순간,

무척 당황하고 말았다.

[응?]

[어, 안녕하세요!]

식당으로 들어온 것은 웬 똘망똘망한 어린이.

처음 만났을 때의 테레사는 저리 가라할 정도로, 누가 봐도 그냥 어린아이였다.

···분명 테레사 말로는 본인과 비슷한 나이라고 했는데?

‘저건 누가 봐도 그냥 어린애잖아!’

그런 나의 당황감은 아랑곳하지 않은 채 피터 3세가 제 앞에 다가온 아들을 껴안았다.

[오구구, 우리 이쁜 것!]

그것으로도 모자라 얼굴을 마구 부비댔으니.

[앗, 따가워. 아바마마 수염이 따가워요.]

[에고고, 이 귀여운 것!]

···한마디로 아들 없이는 못 사는 아들 바보다, 이 말이지.

이제야 이해가 가는구만.

[저, 한 가지 질문해도 될까요?]

[응?]

[저··· 실례지만 레온 전하는 올해로 나이가 어떻게 되시는지.]

그 말에 피터 3세가 살짝 난감해하는데.

어린이가 손가락 여섯 개를 펼쳐 보였다.

[여섯 살이요! 이제 아기 아니고 형아예요!]

···뭐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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