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작가의 서자로 살아가는 법-123화 (123/176)

달콤살벌한 제안

* * *

왕궁무도회는 새벽까지 이어졌다.

몇 가지 사소한 해프닝을 제외하고는 별다른 일은 없었는데.

“로, 로테일 백작! 아기가 오줌을 싼 것 같은데···.”

“으아아악! 내 새 자켓이!”

“쯧쯧, 그러게 욕심도 과하지 갓난애를 여기 데리고 오면 어떡하나.”

결국 왕궁 시녀장의 도움으로 간신히 아이를 재운 로테일 백작이라든가.

“너 이 나쁜 새끼! 약혼까지 깨버린 주제에 여기가 어디라고 고개를 들이밀어?”

“이, 이디스! 내가 잘못··· 으악, 제, 제발!”

전 약혼녀에게 귀가 붙잡혀 도살장으로 향하는 소처럼 질질 끌려간 어느 청년이라든가.

“데스할트 공에게 이런 장성한 자제분이 있는 줄 몰랐군요.”

“음, 그것이···.”

“데스할트 공, 아니 아버지···.”

양자로 들인 지 일주일밖에 되지 않아 영 사이가 어색한 부자지간까지.

좌중에 웃음을 자아냈던 해프닝 몇 가지를 빼면, 제일 큰 관심을 받은 것은 역시 ‘여왕의 춤 상대’였다.

“대체 폐하가 누구의 춤 신청을 받아들이실까?”

“그러게, 저 많은 자들과 다 춰주셨다간 쓰러지시겠는걸.”

그녀가 등장하기 전부터 구혼자들이 진을 치며 대기했던 탓에.

이게 춤을 신청하는 청년들인지 맛집 앞에 줄을 선 고객인지 분간이 안 되는 정도였으니까.

“음.”

테레사는 잠시 고민하다가 말했다.

“맨 앞부터 10명까지 선착순으로 끊겠소.”

“우우우우.”

구혼자들은 불만이 가득했지만 어쩔 수 없는 법.

그 탓에 테레사가 내게 내린 왕명, 즉 자신과 한 번 춤을 추자는 제안은 소용이 없게 되었다.

“폐하, 오늘의 왕명은 다음 번으로 미루시는 게 어떻습니까.”

연달아 춤을 춘 탓에 숨을 몰아쉬던 테레사가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헉, 헉, 그래. 이거 원 여왕 노릇도 못 할 짓이군.”

“폐하가 인기가 너무 많으신 걸 어떡합니까.”

“방금 웃음을 간신히 참는 것 같았는데, 아닌가?”

그 말에 결국 나는 웃음이 터지고 말았다.

* * *

왕궁 무도회가 성황리에 마무리된 지 사흘이 지났다.

나는 가신들 몇을 데리고 외국 여행길에 오르게 된 터.

“잘 다녀올게.”

배웅하고자 모여든 가신들 앞에서 인사하자,

제일 먼저 3형제가 우르르 달려들어 한 목소리로 말했다.

“주군!”

어후, 누가 들으면 한 명이 말하는 줄 알겠네.

“주군의 앞길에 알레스 신의 가호가 있기를!”

“주군의 길을 방해하는 자에게는 죽음을!”

“주군을 음해하려는 자에게는 대대손손 저주를!”

···어우 귀청 떨어질 뻔.

누가 보면 컨셉질을 한다고 여길 법한 세 명의 모습에 웃음을 터뜨리자.

옆에 서 있던 롯의 얼굴이 수치심으로 붉게 물드는 것이 보였다.

‘아차.’

안 그래도 오빠들이 부끄럽다고 하는 롯인데.

그녀가 공손하게 말했다.

“잘 다녀오세요, 세자르 님.”

“그래. 전에 얘기했던 것처럼 바바 놈 좀 잘 감시해줘.”

조금만 감시를 늦춰도 무슨 짓을 벌일지 알 수 없는 놈이니.

“걱정마세요.”

“그리고 농농이도 잘 부탁하고.”

그러자 롯의 품에 안긴 농농이가 반발하듯 외쳤다.

[옹, 앙옹앙, 아부부 빠빠!]

“세자르 님, 왕자님이 장난하냐고, 누굴 누구에게 부탁하느냐 하시는데요.”

앨빈, 너 굳이 그런 말까지 통역해야겠냐.

롯은 결연한 얼굴로 말했다.

“그것도 걱정마십시오, 세자르 님. ···바바 님과 농농 님뿐 아니라 제 오빠들까지 잘 감시하고 있겠습니다.”

아, 그래. 걔네도 요주의 인물이었구나.

“···말하고 보니까 롯한테 너무 부담을 지우는 것 같은데.”

“뭘 그런 걱정을 하고 그래.”

뒤늦게 나타난 우만이 툭 던지듯 말했다.

“나도 같이 있을 거니까, 걱정 마라.”

“그래.”

카렌과는 이미 며칠 전에 인사를 해둔 상황.

나는 디터와 발닉, 앨빈을 데리고 출발했다.

다다다다.

말을 달리기 시작하자 저 뒤편에서 우만이 크게 외치는 것이 들렸다.

“몸조심해라!”

그것을 시작으로 다른 가신들도 한마디씩 했다.

“조심히 다녀오세요!”

[옹, 앙앙앙! 부떼부떼!]

“주군, 다 쳐부수고 오십시오!”

“놈들의 머리통을···.”

“뼈와 살을 분리···.”

대체 뭘 하라는 거야, 저 살벌한 놈들은.

아니 그보다 나 싸우러 가는 거 아닌데.

그렇게 공작저를 나서서 평야 초입에 닿았을 때, 디터가 질문했다.

“주군, 행선지까지 이틀 정도면 충분할까요?”

나 대신 앨빈이 대답했다.

“이틀이 채 안 걸릴 거예요, 디터 경. 우리의 목적지는 커글랜드 왕국과의 국경지대에 자리한 스완 성인데···.”

스완 성.

백조 무리가 서식하는 호수 때문에 그런 이름이 붙여진 이 고성은 아름다운 풍경으로 유명한 곳인데.

에스닐과 커글랜드 사이에 자리한 탓에 착각하는 사람들도 많지만, 이곳은 엄밀히 커글랜드령이었다.

‘왜냐, 커글랜드 국왕의 조카인 필로스 공 소유의 땅이니까 말이지.’

더불어.

이번만큼은 두 나라 사이에 이루어질 밀담의 장소로 채택된 곳이다.

“그래. 간만의 여정인 만큼 다들 체력을 보존하는 데 집중하도록.”

이번의 일정은 짧으면 1주, 길면 2주까지 이어질 수 있다.

그 사이 공작가의 일에 공백이 생기지 않도록 가신들에게 업무를 나누어 맡겼으며.

내 곁을 호위하는 가신은 최소한으로 두었다.

‘디터, 발닉, 앨빈.’

레핀 공작은 사병대 일부를 내 호위로 붙여주겠다고 했지만 내 쪽에서 거절했다.

그렇게 다니면 너무 눈에 띄잖아?

‘여기 내가 바로 레핀 가문의 세자르 공자요! 하는 꼴도 아니고.’

오히려 더 위험에 빠질 가능성이 있으니, 이번 임무에 걸맞는 유능한 가신들로만 콤팩트하게 팀을 구성한 거다.

디터야 뭐 말할 것도 없는 최고의 경호원이고.

발닉은 이동과 야영의 전문가이며.

앨빈은···.

“앨빈, 이번 일에서 네 역할이 제일 중요한 거 알지?”

앨빈이 침을 꿀꺽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나라도 이런 일에는 긴장이 될 것 같다.

‘앨빈은 아주 민감한 협상에서 통역을 담당하게 될 거니까.’

커글랜드와 에스닐은 국경 하나를 사이에 둔 이웃나라이지만.

사용하는 언어는 달랐다.

그리고 앨빈은 커글랜드 언어를 자유자재로 사용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인재 중 하나였고.

“최선을 다하긴 하겠지만, 제가 통역을 해본 적은 없어서···.”

망설이던 앨빈이 이렇게 물었다.

“뭣하면 하라라 님을 불러내는 건 어떨까요? 이제는 빙의지속시간이 제법 길어졌는데.”

“아니, 거절할게.”

“···.”

그 성격 이상한 인간을 불러냈다간 나라 간의 이 민감한 논의를 파투낼 게 뻔하다.

“앨빈 네가 더 나아. 너무 부담갖지 말고, 알겠지?”

“네에···.”

부담갖지 말란 말과는 달리 앨빈은 흙빛이 된 얼굴로 한숨을 푹 내쉬었지만.

어쩔 수 없다.

이번 일은 나도 꽤 부담이 되거든.

“그런데 도련님.”

“응?”

“그럼 이번 일정은 폐하가 명하신 겁니까?”

발닉의 질문에 나는 고개만 끄덕였다.

워낙 기밀 사항인 만큼, 이번 일의 진짜 목적은 이 세 사람 외에는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았다.

내 옆얼굴을 돌아보던 발닉이 중얼거렸다.

“폐하의 신뢰를 받고 있는 것은 감사한 일이지만, 도련님 입장에선 부담스러우실 수도 있겠군요.”

부담스러울 수도 있는 게 아니라 엄청 부담스럽다.

하지만 어쩔 수 없지.

승부란 무릇 하이리스크, 하이리턴이 아닌가.

‘테레사는 약속을 반드시 지키는 인물이기도 하고 말이지.’

나는 얼마 전에 들었던 국왕의 제안을 다시금 떠올려보았다.

* * *

그때가 아마 왕궁 무도회가 열리기 얼마 전이었을 거다.

테레사 여왕에게 혼담이 쏟아져 들어오던 때.

“세자르 공, 나의 제안은 간단하네.”

단둘이 자리한 집무실에서 그녀는 달콤살벌한 제안을 입에 담았다.

“얼마 전 얘기했던 것처럼, 개정안이 통과되는 대로 커글랜드 왕실과 비밀 리에 혼담을 논하겠다고 하지 않았나?”

기밀에 가까운 사항을 털어놓는 테레사의 눈동자가 의미심장하게 빛났다.

“커글랜드 국왕, 피터 3세가 내 제안을 긍정적으로 보고 있다고 답신을 보내왔네.”

“···!”

자칫 두 나라의 명운을 뒤흔들 수도 있는 논의다.

그것이 생각 외로 수월하게 진행되고 있다는 생각에 가슴을 쓸어내리던 순간.

“그러니 세자르 공. ···우리 에스닐 왕실을 대표하는 비밀 외교 사절이 되어주지 않겠나?”

“외교 사절이라뇨?”

본디 한 나라를 대표하는 사절은 아무나 맡을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더군다나 이렇게 ‘비밀’이라는 글자가 붙는 자리라면 더더욱.

나는 이런 일을 할 만한 사람은 노바스 공작 정도가 아니려나, 은연 중에 생각하던 터였는데.

테레사는 그런 내 당혹감을 모른 척하며 본인의 할 말을 이어나갔다.

“그대가 해줄 것은 단 하나. ···피터 3세를 설득하는 것.”

이웃나라 왕이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정도로 예뻐한다는 막내아들.

그와 테레사의 혼담을 진행시키는 게 미션이란다.

요컨대 17세기판 뚜쟁이라고나 할까.

“하지만 폐하, 그것은···.”

입을 열었지만, 곧바로 말을 흐렸다.

차마 내 입으로 이런 말을 꺼낼 수 없었으니까.

‘그랬다가 일이 수틀려서 비명횡사라도 당하면 어쩝니까?’

외교 사절.

좋게 말하면 한 나라의 왕을 대신하여 그 뜻을 전하는 자이고,

나쁘게 말하면 외국에 가서 어떤 보호도 받지 못한 채 죽을 수도 있는 지위 아닌가.

목이 잘려서 돌아온 사신 얘기 같은 게 역사에 자주 등장하는 것처럼.

“그대가 뭘 염려하는지는 알아. 하지만.”

테레사는 나를 안심시키듯 말을 이었다.

“국경에서 줄곧 영토 분쟁이 있긴 했지만, 커글랜드와의 관계는 공국과의 관계와 달라.”

요는 이랬다.

오프러스 공국은 알토란 같은 땅을 선대에 우리에게 빼앗긴 만큼, 왕위를 이을 자를 암살하려 할 만큼 독기에 차 있지만.

“커글랜드는 우리 에스닐보다 영토도 크고 여유도 있는 나라이지. 그들에게 국경지대 분쟁은 그야말로 사소한 다툼에 불과해.”

즉, 분쟁이 일어나는 영지의 주인과 주민들에게나 심각한 상황이지.

커글랜드 왕에게는 매일 아침의 메뉴보다도 더 중요하지 않은 문제라는 거다.

“그러니 혹시나 설득하는 데 실패한다 한들, 그대가 그로 인해 피해를 받는 일은 없을 거야. 유일하게 조심해야 하는 것이 있다면.”

테레사가 목소리를 낮추어 말했다.

“···‘여행’의 진짜 목적이 누구에게도 알려져서는 안 된다는 것. 그리고 이동 중 위험에 노출될 수 있다는 것 정도이겠지.”

이동 중의 위험.

정계의 반짝 스타나 다름없는 내게는 이름조차 모르는 적이 파다할 거다.

‘그리고 암살의 위험이란 이동 중에는 몇 배로 높아진다.’

테레사는 그 점을 지적한 것.

“그 점은 크게 걱정하지 않으셔도 될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다행이고. ···짐은 맨입으로 고된 일을 시키지 않는다는 것, 알고 있지 않나?”

“설마 대가성의 제안이었습니까?”

“짐이 그래도 이 나라의 왕인데, 그렇게 양심 없는 제안을 할 것 같나?”

능글맞은 미소를 짓던 그녀는 이렇게 덧붙였다.

“왕실 고문관 직함은 어떤가?”

“···!”

왕실 고문관.

현대로 치자면 대통령 수석비서관급이라고 볼 수 있으며.

‘무소불위의 권력’으로 향하는 첫 관문이나 다를 바 없는 직위다.

보통은 나이 마흔 줄에 들어서야 바라볼 수 있는 자리이지만.

“일이 계획대로만 성사된다면, 그대는 역대 최연소 왕실 고문관이 될 것이야.”

나는 어버버하며 말을 받았다.

“제 나이에 왕실 고문관은 무리가 아닐까요?”

“그게 무슨 말 같지도 않은 소리인가.”

테레사가 웃음기 띤 목소리로 말했다.

“짐은 이 나이에 한 나라의 왕도 하고 있는데.”

생각해보니 그렇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