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작가의 서자로 살아가는 법-122화 (122/176)

비밀이야

* * *

무도회라니.

몇 번을 봐도 신기한 광경이다.

“뭘 그렇게 주변을 두리번거려?”

“어?”

그 말에 돌아보자 카렌이 퉁명스럽게 말했다.

“너 지금 시골에서 갓 상경한 촌뜨기 같은 거 알지?”

엄밀히 말하면 아주 틀린 건 아닌데.

세자르의 몸에 빙의한 지 꽤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무도회에 온 건 이번이 처음이니까.

“누가 그런 널 보고 왕궁 의전관이라고 믿겠어.”

“음, 그러고 보니 그렇네.”

말하자면 직장 내 행사인 건가.

그래도 신기한 건 어쩔 수가 없다.

‘다들 엄청 차려입었잖아.’

정기의회에 참석하는 귀족들이야 다들 금수저들이니 그렇다 쳐도.

이 왕궁에서 일하는 하급 관리들까지도 오늘을 위해 전 재산을 털은 듯한 느낌으로 잔뜩 치장하고 왔다.

지금 우리는 무사히 무도회장 안으로 입장해 구석에 자리를 잡은 상황.

적당히 음악에 맞춰서 춤이나 출까 했더니, 어째 이 사람 저 사람이 다가와 말을 붙이는 통에 춤은 시작도 못 해봤다.

한 가지 재미난 거라면.

“오! 세자르 공 반갑소이다!”

“아, 더플랜드 경···.”

“그런데 옆에 계신 이 미인은 누구십니까?”

“아, 이쪽은.”

“세자르 공자님! 이런 자리에서 뵙다니 우연이 아닙니까!”

“티찰라 공께서도 자리하셨군요.”

“오, 공자님과 함께 오신 이분은!”

“아···.”

카렌 돌로레스.

지방 후작가의 영애.

저 두 줄의 설명을 열서너 번은 반복한 것 같다.

내게 인사하는 건 핑계이고, 다들 카렌에게 말 한 마디라도 붙여보려고 기를 썼으니.

“오, 이분은!”

“정말 아름다우십니다!”

“실례지만 어느 가문의 레이디이신지···.”

카렌은 그들에게 심드렁한 얼굴로 대충 맞장구를 쳐주었으나.

곧 폭발할 것 같은 얼굴로 나를 돌아보며 눈알을 굴렸다.

‘야! 어쩔 거야!’

카렌이 곤란해하는 것을 지켜보는 것도 재밌긴 하지만.

이대로 가다간 정말 우만이 말했던 대로 단검에 찔릴 것 같아 얼른 끼어들었다.

“카렌 양은 워낙 수줍음이 많은 편이라. 여러분이 이해하시지요.”

그 말을 끝으로 카렌의 손을 잡고 얼른 무리를 빠져나가자.

우리의 등 뒤로 허허거리는 사내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역시 좋을 때요, 좋을 때.”

“정말로 선남선녀가 아닌가. 둘의 모습이 참 보기 좋구먼.”

“지금은 다 늙어빠졌지만 나도 한때는 저런 싱그러운 시절이 있었는데.”

“···공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지 않으셨소?”

어쨌거나.

나는 그녀를 데리고 구석으로 향한 채 무도회장 안을 지켜보았다.

‘재미난 광경이네.’

어느 한 구석도 빠짐없이 사람으로 복작거리지만.

그중에서도 제일은 저 앞, 국왕 폐하의 등장을 기다리며 진을 치고 있는 청년들 무리다.

공작새처럼 화려하게 꾸민 ‘구혼자’들은 서로를 노골적으로 견제하고 있다.

“카렌, 저거 봤어? 구혼자들이 한자리에 모였는데.”

“야.”

“응?”

카렌의 목소리가 조금 묘하다.

돌아보니 얼굴도 살짝 상기돼 있다.

“더워?”

“그건 아닌데 이것 좀.”

“응?”

카렌이 입술을 살짝 깨물더니 내 손을 확 놓았다.

···아.

아까부터 계속 잡고 있었구나.

“미안, 아팠어?”

“···아니.”

음.

내가 너무 무신경한 건가.

생각해보면 카렌도 이제 겨우 십 대 후반의 소녀인데 쑥스러울 만하지.

어쩐지 머쓱해져 무슨 말을 꺼내야 할지 모르겠는데.

“뭐야, 저기 왜 아기가 있어?”

카렌의 눈길이 향한 곳을 돌아보자.

건장한 체구의 사내가 갓난아기를 안고 쩔쩔매고 있었고.

“우아우앙아앙!”

아기는 회장이 떠나가라 울어대는 중이었다.

보아하니 낯선 곳에, 그것도 사람이 많은 곳에 와서 스트레스를 받은 모양이다.

구혼자들 사이에 있었던 걸 보니 누구인지 알겠다.

“로테일 백작과 그 오남 퍼시 경이야.”

“뭐··· 누구라고?”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폐하께 혼담을 넣은 구혼자 중 최연소 후보이지.”

“···저 아기가 말이야?”

어이없어하던 카렌은 이내 풋 웃음보가 터졌고.

로테일 백작이 결국 아기를 데리고 회장 밖으로 나가자 그 근처에 있던 사람들도 하나둘 웃음을 터뜨렸다.

카렌은 얼마나 웃었는지 눈꼬리에 고인 눈물까지 닦아냈다.

“아, 정말 다들 웃겨 죽겠어.”

“그러게. 목록에서 보긴 했지만 나도 설마 백작이 애를 데리고 올 줄은 상상도 못 했네.”

극성 부모 때문에 애만 고생하는구만.

그때, 돌연 악사들의 연주가 멈췄다.

“에스닐의 태양, 국왕 폐하와 모후 전하 납시오!”

전령의 외침에 다들 대화를 멈추고 앞으로 몸을 돌렸다.

나와 카렌 또한 그쪽을 주시했고.

활짝 열린 문으로 들어오는 테레사와 모후 안느, 그 뒤를 따르는 노바스 공작이 보였다.

테레사의 모습에 카렌이 탄성을 내뱉었다.

“와···.”

전에 회의장에 들어설 때도 모두의 눈길을 사로잡을 정도로 아름다웠지만.

오늘의 테레사는 그 이상이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보석을 잔뜩 단 화려한 드레스를 한 치의 지나침도 없이 소화해냈는데.

불타오르는 듯한 붉은색 의상이 우윳빛 피부와 대조되어 아름다움이 한층 강조되었다.

“왕궁의 정기 무도회에 와준 것을 환영하오.”

그것을 시작으로 간략하게 몇 마디 더 했지만, 사람들은 이미 그녀의 말에는 관심이 없었다.

“정말로 아름다우시지 않은가.”

“나는 무슨 천사님이 들어오시는 줄 알았네.”

“예전에 안느 전하도 미모로 이름을 날리셨지만, 폐하는 그 이상이실 것 같군.”

카렌은 홀린 듯 테레사를 쳐다보더니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폐하, 정말 예쁘시다.”

“그래?”

뭐, 확실히 예쁘기는 하지만.

내가 보기엔 예쁘기보단 멋있다는 표현이 더 어울리는 듯하다.

‘전에 레핀 공작이 그랬나. 테레사는 양가의 장점만 쏙 빼닮은 얼굴이라고.’

나는 본 적이 없어 모르겠지만, 고 에르곤 왕자도 대단한 미남이었다고 한다.

아직은 어려서 티가 잘 안 나지만, 테레사가 크면 인상이 강렬하고 화려한 미인이 되지 않을까.

그에 반해 카렌은···.

“넌 귀여우니까 괜찮아.”

“뭐?”

놀린다고 생각하고 화내는 건 아니겠지?

그런 생각에 흠짓하며 옆을 돌아보자.

“···.”

카렌은 알 수 없는 표정으로 입술을 삐죽거렸다.

음, 또 뭔가 어색한 분위기네.

쉽사리 할 말을 못 찾고 있는데, 갑자기 근처에서 수군거리는 것이 들렸다.

“어머, 폐하께서···.”

“역시 그런 건가.”

음? 폐하가 뭐?

뒤늦게 앞을 돌아보자, 내가 선 쪽으로 다가오는 테레사가 보였다.

카렌도 그것을 눈치챘는지 멍한 얼굴이다.

“뭐해, 네가 예쁘다고 했던 폐하가 오는데.”

“어, 어···?”

“인사드려야지.”

나는 씩 웃으며 그녀의 손을 잡아 이끌었고.

어느새 내 코앞까지 다가온 테레사에게 예법에 따른 인사를 했다.

“폐하, 신 세자르 레핀 인사드리옵니다. 오늘 정말로 아름다우시군요.”

평소라면 이런 말을 능글맞게 받아쳤을 텐데.

오늘의 테레사는 어쩐지 당황한 기색으로 나와 카렌을 번갈아 보았다.

“그··· 세자르 공.”

“네.”

“이분은.”

“아, 소개드리는 게 늦었군요.”

나는 잔뜩 얼어 있는 카렌을 억지로 인사시키며 말을 이었다.

“이쪽은 오늘의 제 춤 상대인 카렌 돌로레스 양. 저 지방 귀족가의 영애입니다.”

“아··· 그렇···구나.”

“···?”

뭐가 그렇다는 걸까.

“그럼 공에게는 이미 춤을 출 상대가 정해져 있다, 이 말이겠지?”

방금 말한 게 바로 그건데.

대답 대신 고개만 끄덕이자, 테레사의 얼굴이 샐쭉해졌다.

“그렇군. 나는 가서 저기 복도에서 울음을 그친 퍼시 경이랑 춤이나 춰야겠어.”

“···태어난 지 1년이 채 안 된 퍼시 경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웃음을 꾹 참으며 대꾸하자 테레사가 토라진 얼굴로 말했다.

“그래. 그래도 오늘 밤은 기니, 짐이랑도 한 번은 춰야 하네. ···이건 왕명이야, 알겠나?”

“여부가 있겠습니까.”

테레사가 카렌을 돌아보더니 부드럽게 웃으며 덧붙였다.

“카렌 양도 반갑소. 오늘 이 자리를 충분히 즐기다 가셨으면 좋겠군. 그럼 두 분이 즐거운 시간을 가지게나.”

그럼 이만, 이라고 말을 맺은 국왕은 곧바로 몸을 돌렸다.

그런 그녀를 수많은 구혼자 무리가 뒤따르는 가운데.

나는 휴 한숨을 내쉬며 카렌을 돌아보았다.

“폐하를 직접 뵌 소감은?”

“···세자르 너, 바보야?”

“응?”

카렌은 미간을 좁힌 채 나를 노려보다 중얼거렸다.

“폐하가 너를··· 아니다, 말을 말자.”

“카렌.”

나는 그녀의 손목을 부드럽게 붙잡았다.

카렌은 일순 움찔했지만 내 손길에 몸을 맡겼다.

어느샌가부터 흥겨운 왈츠 가락이 다시 흘러나오는 터였다.

“일단 춤부터 추면서 얘기할까?”

카렌은 내 눈을 똑바로 보지 않은 채 고개만 끄덕이더니.

개미만 한 목소리로 말했다.

“···내 허리를 잡아.”

“응?”

“허리 잡으라고!”

한 손은 그녀와 맞잡고, 다른 손은 그녀의 허리를 잡고.

카렌은 내 어깨에 손을 얹고.

기본 자세가 조금 민망하긴 했지만, 나는 눈치껏 주변을 따라하며 그녀의 움직임에 몸을 맞췄다.

‘스텝은 대충 이렇게 밟으면 되는 건가.’

처음하는 거라 어색했지만, 카렌이 부드럽게 리드하는 덕분에 잠시 후에는 꽤 적응이 되었다.

“카렌, 나는 바보가 아냐.”

“내가 지금껏 본 바로는 바보 맞는 것 같은데.”

“폐하는 놀라울 정도로 영민하시지만, 아직 어리시지.”

자신의 ‘치명적인 비밀’까지 지켜주며 곁에서 물심양면으로 도와주는 청년.

심지어 그 청년의 외모가 준수하기까지 하다면, 십 대 소녀가 사랑에 빠지는 건 한순간이 아니겠는가.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한순간’의 일일 뿐.

“그래서, 다 그만저만한 풋사랑이다 이거야?”

“뭐 그렇기도 하고, 그분은 자신의 감정보다는 이 나라의 명운을 결국 중시하실 분이니.”

무엇보다 나와 테레사는 혈연 관계다.

과거에야 사촌이고 뭐고 상관없이 혼인을 했다 쳐도.

현대인의 감성을 여전히 유지하고 있는 내 입장에서는 도무지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이며.

그 이전에 테레사는 여동생 이상으로는 전혀 보이지 않으니까.

“어쨌거나 지금은 여기에만 집중하자고.”

“···그래.”

그렇게 우리는 한동안 음악에, 춤에 몸을 맡겼다.

회장 안을 가득 메운 쌍쌍의 남녀들 틈에 껴 빙그르르 돌다 보면 어쩐지 마음의 평화가 찾아온다.

그때 카렌이 툭 한마디 던졌다.

“신기해.”

“뭐가?”

“이렇게 너랑 무도회에서 춤을 출 줄은 꿈에도 몰랐거든.”

“나도 마찬가지···.”

“아니, 너 처음 봤을 때를 생각하면 말이야.”

카렌은 예전 기억을 더듬어보는 모양이었다.

“그때 내가 다가가 말 붙인 거 기억나?”

“아, 설마 그때부터 나한테 관심 있던 건 아니지?”

그게 대체 무슨 개소리냐는 듯, 카렌의 얼굴이 순식간에 썩어들었다.

···농담이라고, 농담.

“너 팰러스 똘마니들한테 둘러싸여 괴롭힘당하고 있었잖아.”

“아, 한마디로 그냥 동정심에 다가온 거다?”

“굳이 따지자면 그렇겠지?”

“고오맙다.”

내 대꾸에 카렌이 킥 웃음을 터뜨렸다.

그 얼굴을 보니 어쩐지 이런 질문이 튀어나왔다.

“그럼 지금은?”

“응?”

“지금은 어떤데?”

카렌은 잠시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이내 미소 짓는다.

“지금은 어떠나면···.”

이제 곧 ‘턴’을 돌 타이밍.

음악에 맞춰 그녀가 내 품을 떠나 뱅그르르 한 바퀴를 도는데.

“···절대 알려주지 않을 거야.”

어쩐지 시간이 무척 느리게 흘러가는 감각이다.

그녀의 움직임에 맞춰 드레스가 꽃잎처럼 팔랑거리고.

치맛자락이 시야에 잔상들을 남긴다.

그 가운데 카렌의 얼굴이 홀로 빛나는 듯 보이는 건, 내 착각일까.

“···.”

그녀를 멍하니 바라보는데.

카렌이 어느새 내 앞으로 돌아왔다.

“···어?”

“뭐해, 안 받아주고.”

“어, 그, 그래.”

나는 그녀의 허리와 손을 붙잡았다.

방금 전만 해도 아무렇지 않았는데.

지금은 어쩐지···.

“···왜 그래, 세자르?”

그녀와 맞닿아 있는 부분이 유난히 뜨거운 기분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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