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작가의 서자로 살아가는 법-121화 (121/176)

내가 어쩌다

“그, 저, 두 분이 아주 가까운 사이라는 소문이 파다하던데.”

···그런 소문은 대체 어디서 도는 거야.

나는 딱 잘라 말했다.

“아닙니다.”

“정말로?”

“아니라니까요.”

“아니, 둘이 나이대도 비슷하고···.”

참 잘 어울리는데 어쩌고 저쩌고 하며 중얼거리는 크로이츠 백작.

이 아저씨가 왜 이러나 싶어 나는 설명을 덧붙였다.

“폐하가 저보다 한참 어리시지 않습니까. 제겐 그저 여동생뻘-”

“한참 어리다니, 겨우 서너 살 차이 아니오? 올해 세자르 공이 성년이 되는 걸로 알고 있는데.”

···아.

세자르의 몸은 이제 곧 열여덟 살이 된다는 걸 잊고 있었다.

하지만 빙의 전의 나이 때문인지 내게 테레사는 그저 어린애처럼 보일 뿐이다.

내 침묵을 어떻게 해석했는지, 백작은 얼른 말을 바꿨다.

“아, 이미 마음에 담은 여인이 따로 있는 모양이로군.”

“···.”

“늙은이가 괜한 주책을 부렸소. 마음 쓰지 말고.”

어색한 분위기를 타파하고자 백작은 곧바로 말을 이었다.

“아, 그럼 이것 하나만은 확실히 하시게나.”

“···네?”

“2주 후에 왕궁 무도회가 열리지 않소.”

매해 정기적으로 열리는 왕궁 무도회이지만.

이번만큼은 남다른 의미를 지닐 거라는 것이 백작의 견해였다.

“만약 공이 정말로 구혼하려는 마음이 없고, 다른 이를 마음에 둔 것이라면.”

“···.”

“그 상대와 함께 무도회에 참석해야 구설수에 오르지 않을 거요.”

요컨대 파트너 없이 간다면,

잠정적인 구혼 상대로 여겨지는 분위기가 될 거다 이 말이다.

“그러니 사전에 확실히 하란 얘기요. ···주변에서 괜한 추측이 더 이상 나돌기 전에.”

“그건 생각지도 못했군요, 조언 감사합니다.”

“이게 뭐 대수라고.”

백작은 주름진 얼굴로 씩 웃더니, 그 말을 끝으로 몸을 홱 돌려 멀어졌다.

나는 그의 뒷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다 공작저로 돌아왔다.

* * *

그날 저녁.

긴히 할 이야기도 있고 해서 나는 우만을 따로 집무실로 불러냈다.

“···할 얘기가 있다며.”

우만은 잔뜩 긴장한 기색으로 내 맞은편에 앉았다.

“뭔지는 모르겠지만, 괜히 빙빙 돌리지 말고 편히 얘기해.”

나는 그 얼굴을 잠시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저, 우만.”

“응?”

“내가 무도회에 가야 하고, 누군가는 내 파트너가 되어야 한다면.”

갑작스레 튀어나온 ‘무도회’라는 단어에 우만은 살짝 벙찐 얼굴이었다.

“역시 카렌이랑 가는 게 맞겠지?”

한쪽 눈썹을 홱 들어올린 그가 신경질적으로 물었다.

“···지금 그거 물으려고 날 부른 건가?”

“아, 아니. 진짜 용건은 따로 있는데.”

“그리고 말이야.”

우만은 어깨를 으쓱하더니 하, 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카렌이랑 가는 게 맞냐니, 설마 산 채로 단검의 표적이 되고 싶다는 말을 돌려서 하는 건 아니겠지?”

“···.”

음, 역시 그렇겠지.

···더는 망설여서는 안 될 것 같다.

“그래.”

“그럼 이제 용건이나 꺼내봐.”

그 말에 뒤늦게 정신이 들었다.

나는 준비해둔 서류를 우만에게 내밀었다.

“···.”

망설이던 우만이 서류를 받아 첫 장을 넘겼다. 그가 다 읽을 때까지 나는 말없이 기다렸고.

마침내 정독을 마친 우만이 흔들리는 눈빛으로 입을 열었다.

“이거··· 진짜야?”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단순했다.

···여기에 적힌 대로, 에르곤 왕자를 죽음으로 몰고 간 것이 공국의 사주이며.

자신의 부모는 누명을 쓰고 죽은 것이 맞느냐는 확인의 말.

“진짜야.”

사실.

이 서류를 그에게 보여줘도 될지 오랜 시간을 고민했지만.

‘우만에게 보여주지 않는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나.’

어쨌거나 그는 내 가신이 되는 길을 택했고, 그렇다면 나 또한 그의 신뢰에 보답해야 하는 법이니.

“오랜 시간이 지난 만큼 물적 증거를 찾기는 어렵겠지만, 여기 적힌 대로 단서를 추적해나간다면 아예 불가능한 일은 아닐지 몰라.”

우만은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미간을 잔뜩 구긴 채 고민에 빠진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한참 후에야 말을 붙였다.

“금방 결정할 수 있는 사안은 아닐 거야. 필요하다면 좀 더 고민해보고 천천히-”

“아니, 괜찮아.”

내 말을 끊은 우만과 눈이 마주쳤다.

방금 전만 해도 복잡하기 그지없던 그의 표정이 한층 후련해 보였다.

“난 지금 이대로도 괜찮으니까.”

“···하지만 너희 가문의 명예를 복권시킬 기회가 될지도 모르는데.”

그것뿐이 아니다.

우만은 지금 행정상 하급 귀족으로 되어 있지만, 빈터 가문이 복권된다면 상당한 지위의 귀족으로 인정받을 수 있을 거다.

그런 말에도 우만은 변함이 없었다.

“지금 내게 하급 귀족이니 고급 귀족이니 하는 건 아무 의미도 없어.”

“···우만.”

“네게 얘기는 안 했지만, 지난번 작전에서 느낀 바가 많았다.”

그날 우만은 목숨을 잃을 뻔했다.

그러나 바바의 이능 덕분에 그의 위기를 사전에 감지했고, 농농이가 적절한 대처를 한 덕분에···.

“농농이가 내 목숨을 살려주었지 않나. 사실 그 전까지 나는 별다른 목표도, 욕구도 없이 지내던 터였다.”

우만은 담담하게 제 속내를 털어놓았다.

“어떻게 보면 나는 내 욕망대로 살아가기보단, 누군가의 욕구를 대신 실현해주기 위해 움직이는 도구나 다름없는 존재였지.”

다름 아닌 팰러스의 도구였다는 것.

그런 시간이 너무 오래 이어진 나머지 우만은 스스로 욕망하는 법을 잊어버렸다고 덧붙였다.

“그런데 그때, 롯이 이런 말을 했어.”

‘이젠 의미없는 목숨이라는 얘기는 안 하실 거죠? 농농 님 덕분에 건진 목숨이니까.’

롯이 했던 말을 읊던 우만의 얼굴에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넌 모르겠지만, 나는 그 후로 많이 변했거든.”

아니.

나 또한 들어서 알고는 있었다.

‘우만이 최근 수련장에 자주 나타난다고 했던가.’

오랫동안 손을 떼었던 검술 수련을 다시 시작했고.

앨빈과 함께 서고를 들락거리며 어려운 책을 읽는 것은 물론이요, 학자들도 혀를 내두를 정도로 심도 있는 토론도 나눈단다.

[옹, 앙··· 빠빠!]

‘농농 님에게도 하루 한 번씩 꼭 와서 인사하고 가십니다. ···아, 네, 왕자님은 우만이 본인한테 시비를 거는 것 같다고 하시는데···.’

“나는 이렇게 달라진 내가, 지금 이 상황이 마음에 들어. ···과거를 바꾸려고 매달리기보단 새로이 태어난 지금의 나로 지내고 싶다.”

이야기를 마친 우만이 고개를 들었다.

흔들림 없는 눈동자는 방금 그의 말이 진심임을 알려주는 듯했다.

그런 우만의 얼굴을 잠시 마주 보다 입을 열었다.

“···네 결심이 정 그렇다면.”

나는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낯을 바꿨다.

“우만 네게 맡기고 싶은 중대한 임무가 있는데.”

“넌 가끔 보면 날 이상할 정도로 신뢰한단 말이야.”

“그게 어때서?”

“아니, 대체 뭘 믿고 그러는지 알 수가 없다는 거지.”

툴툴거리는 우만.

나는 그런 그에게 그저 미소만 지어 보였고.

“할래, 말래?”

“···내가 언제 임무 거부하는 것 본 적 있어?”

* * *

우만과 기분 좋게 대화를 마친 뒤 나는 잠시 혼자만의 시간을 가졌다.

‘우만이 대체 뭘 믿고 자신에게 그런 임무를 맡기냐고 물었지.’

처음만 해도 나는 호감도창에 나타나는 수치 외에는 아무것도 믿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은 어떤가.

어느새 나는 가신들을 자연스레 ‘내 사람’이라 여기고, 그들의 눈빛만 봐도 무슨 생각을 할 수 있는 경지에 이르렀으니.

‘그러고 보니 한동안 까맣게 잊고 있었네.’

호감도 창의 존재.

상대가 내게 지닌 호감도뿐 아니라 각 가신들의 충성도까지 보여주지만,

꽤 오랫동안 확인하지 않고 있었다.

“간만에 살펴볼까.”

일단은 우만부터.

『가신 우만(충성도 100점)

- 이능자 ‘벽을 통과하는 자’(2단계 개방)

- 특성 : ‘타성’, 쿨내, 츤데레, 완벽주의적 성향

- 비고 : 농농이를 귀여워하지만, 티를 안 내려고 조심함.』

···충성도가 무려 100이다.

순간 그가 내게 이렇게나 충성을 바치고 있는 건가, 싶었지만.

특성에 ‘타성’이라 적힌 것처럼, 팰러스와 함께 보낸 시간 때문이라 보는 게 맞을 거다.

‘말하자면 누군가에게 충성을 바치는 게 습관화된 인물이라는 뜻.’

조금 씁쓸한 사실이긴 하지만, 지금이라도 원하는 삶을 살고 있다니 다행이다.

···농농이한테 시비를 거는 게 아니라 귀여워하는 줄은 몰랐는데.

“그럼 다른 가신들도 확인해볼까.”

충성도가 50점인 바바를 제외하고는, 다들 충성도는 차고 넘칠 정도로 높았다.

그 외에는 ‘비고’에 적힌 내용들이 좀 웃겼는데.

농농이

- 사내놈들이 머리를 쓰다듬는 걸 좋아하지 않음.

‘···그랬구나.’

그 외에 눈에 띈 것은 3형제의 호감도 창에 나온 비고의 내용이었는데.

나답

- 전장에 나가 적의 머리통을 부수고 싶어 몸이 근질근질함.

나훔

- 전장에 나가 적의 머리통을 부수고 싶어 몸이 근질근질함.

나만

- 전장에 나가 적의 머리통을 부수고 싶어 몸이 근질근질함.

“···.”

···아니, 쌍둥이도 아니고 이럴 수가 있나?

‘전장에 내보내주지 않으면 폭동을 일으킬 기세인걸.’

나는 고개를 설레설레 젓고는 다음으로 넘어갔다.

롯의 호감도 창에 적힌 비고의 내용은 이럤다.

- 오빠들을 사랑하지만, 가끔은 오빠들이 부끄러움.

“···.”

그래. 그럴 수 있지.

현실 남매란 이런 거구나, 생각하며 리암의 호감도 창을 확인하는데.

생각지도 못한 문구에 눈길이 갔다.

리암

- 세자르에게 차마 말하지 못한 불만이 있음.

“차마 말하지 못한··· 불만?”

그게 대체 뭘까.

이번 작전에서 리암은 가장 눈에 띄는 공을 세운 만큼 맨 앞에서 서임을 받았고,

그의 아버지인 페킹튼 백작 또한 굉장히 대견스러워한 것으로 알고 있는데.

‘불만이라.’

아무리 생각해봐도 감이 오지 않았다.

여유가 될 때 리암을 슬쩍 불러내 얘기를 나눠봐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 * *

수많은 이들이 손꼽아 기다리던 왕궁 무도회가 열리는 날이 되었다.

매년 봄, 왕궁 정원의 꽃들이 만개하는 시기에 맞춰 개최하는 연례 행사에 불과하나.

“저기, 저기 마차 행렬 좀 봐!”

“이야, 어마어마하군. 눈이 부실 정도가 아닌가.”

“다들 마차를 얼마나 치장한 거야?”

이번만큼은 그 의미가 남달랐다.

테오 2세가 아닌 ‘테레사’로서 왕위에 오른 여왕의 구혼자들이 한 자리에 모이는 기회이며.

또한 여왕과 그 측근들이 수많은 구혼자들을 남몰래 살펴보는 자리가 될 터였으니까.

“그 왜, 여왕 폐하에게 구혼하는 이들이 몇십 명은 된다며?”

“아예 조건이 안 돼 탈락한 경우나 관리들 선에서 잘린 것까지 치면 족히 백을 넘는다고 하더군.”

“허어, 이 나라에 그런 훌륭한 신랑감이 백 명이나 있었단 말인가?”

그런 만큼 구혼 당사자와 해당 가문의 구성원들은 물론이고.

그와 상관없는 이들의 관심사 또한 이번 무도회에 집중된 터였다.

어느새 어둑해진 하늘 아래 기다란 마차 행렬은 하나씩 왕성의 정문을 통과했고.

마차에서 내린 승객들이 무도회장 안에 들어섰다.

“크로이츠 백작과 그의 삼남 리오넬 경 입장이오!”

“퍼킨슨 자작과 그의 조카 아르탄 경 입장이오!”

척 보기에도 남자다움을 자랑하는 건장한 청년들이 자신의 가족과 입장하는가 하면.

“로테일 백작과 그의 오남 퍼시 경 입장이오!”

···눈이 똘망똘망한 갓난아이를 안고 입장하는 이도 있었으니.

그러나 오늘 이 자리에 모인 사람들의 가장 큰 관심사는 ‘세자르 레핀 공’의 결정이었으니.

‘듣기로는 혼담을 넣지 않았다는데, 과연···.’

‘오늘 자리에 레이디를 대동하지 않고 혼자 온다면 역시 그런 의미가 아니겠소?’

‘하긴, 두 사람이 서 있는 그림이 제법 근사하던데···.’

그들이 목소리를 한껏 낮춰 수군거리던 가운데, 드디어 화제의 인물이 입장했다.

“세자르 레핀 공과 카렌 돌로레스 영애 입장이오!”

유난히 신경 쓴 야회복 차림인 덕분에 평소보다도 더욱 빛이 나는 세자르야 그렇다 치더라도.

“누구···라고?”

“카렌 돌로레스?”

모두의 시선이 그 옆에 선 아리따운 여인에게로 향했다.

화려하기보다는 청초한 느낌의 드레스보다도, 치렁치렁한 붉은 머리와 도자기 인형처럼 오밀조밀한 이목구비의 소유자.

“이거, 어마어마한 미인인데.”

한눈에 모두의 시선을 사로잡는 미녀의 등장에 무도회장이 한순간 술렁였고.

···문제의 미녀는 옆에 선 세자르 레핀 공의 귓가에 뭔가를 속삭였다.

“허어, 지금껏 세자르 공이 혼인하지 않은 건 저 아가씨 때문인가?”

“이런, 저렇게 아름다운 이를 지금껏 어디다 숨겨놓고···.”

그런 모두의 상상과는 달리.

카렌은 세자르에게 이렇게 말하는 중이었다.

“···너, 오늘 돌아가면 두고 봐.”

“아 왜.”

“나 이렇게 주목 받는 거 싫어하거든.”

“나 때문 아님.”

“너 때문이 아니면 누구 때문인데?”

“···설마 ‘니 미모 때문’이라고 대답해주길 바라는 건 아니겠지?”

“말이나 못 하면.”

세자르는 씩 웃더니,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다.

“모처럼 무도회에 왔으니 춤이나 추자고.”

“···나 춤 잘 못 추는데.”

“괜찮아.”

잘생긴 청년은 환하게 웃으며 덧붙였다.

“난 아예 못 추거든.”

“···.”

그러니 네가 리드해, 라는 말에 카렌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내가 어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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