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작가의 서자로 살아가는 법-120화 (120/176)

개나 소나 구혼해

* * *

“···그래서 어떻게 됐어?”

내 얘기를 흥미진진하게 듣던 카렌이 재촉하듯 물었다.

국왕의 충격적인 폭로가 있은 지 일주일째이지만.

생각 외로 그 사실은 왕궁 바깥으로 잘 알려지지 않았으니까 말이다.

“당연히 난리가 났지.”

폭탄을 떨어뜨린 것이나 다름없는 반응.

아수라장이나 다름없던 회의장은 의장인 노바스 공작이 나무 망치를 두들겨도 한동안 진정되지 않았다.

그때 자리에서 일어선 것이 다름아닌 레핀 공작이었으니.

‘폐하의 말씀에 다들 귀 기울여주시오.’

테레사가 남장을 하지 않았더라면 다음 왕이 되었을 1순위 계승권자가 한 발언에,

귀족들은 당황하여 입을 다물었다.

그 틈을 타 테레사는 일목요연하게 제 입장을 밝혔다.

2왕자의 장녀인 자신이 어떻게 남장을 하게 됐는지. 당시의 정세가 어땠는지.

왕좌가 다른 가문에게로 곧바로 넘어갈 시, 이 나라에 얼마나 어마어마한 정치적 혼란이 닥칠 것이었는지.

‘무슨 말을 해도 변명처럼 들릴 것이라는 건 알고 있소. 허나.’

‘이것 하나만큼은 확실히 말할 수 있소.’

‘동생을 대신하여 왕위에 오르기로 결심했을 때부터 지금까지, 단 한 순간도 이 나라를 위해 일하지 않은 순간은 없다는 걸.’

그 말에 대신들이 제 앞에 선 소녀를 올려다보았다.

아직은 작은 키, 가냘프다 못해 가녀린 체구, 어린 티가 역력한 조그마한 얼굴.

곱게 화장을 해 가리기는 했으나 피곤한 기색이 역력한 모습이 아닌가.

모후인 안느는 허울 좋은 섭정일 뿐, 실제로는 이 어린 국왕이야말로 에스닐의 대소사를 책임지고 있었으니 말이다.

‘···그러고 보니 어제도 밤까지 보고를 받으시지 않았던가.’

누군가가 중얼거린 말에 나이든 대신들의 마음이 뭉클해졌다.

물론 그것만으로 여론이 뒤집힌 것은 아니었다.

‘허, 지금 왕위가 장난인 줄 아십니까! 말이 좋아 이 나라를 위한 것이지, 결국은 노바스 가문의 야욕을 위한 사기 행각이 아니오!’

도발적인 발언의 주인공은 다름아닌 수도 귀족파의 원로 귀족, 파벨 경.

그 파격적인 언사에 여론이 흔들리려던 순간, 레핀 공작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것은 아니라고 확실히 말씀드릴 수 있소.’

‘···로건 공?’

‘폐하께서는 이 노구를 직접 불러 모든 것을 고백하셨고, 최대한 혼란이 발생하지 않을 방식으로 왕위를 물려받을 것을 종용하셨으나···.’

로건 드 레핀은 멀찍이 선 국왕과 눈을 마주치며 말을 이었다.

‘나는 왕좌에 오를 마음이 없소. 내 아들 또한 마찬가지이고.’

‘···뭐, 뭐라고요!’

‘그다음 계승권자인 나의 사촌아우에게 물어도 같은 대답을 할 거요. 아우가 거절한다면 그다음 계승권자는 저 먼 나라의 어느 귀족인 것으로 알고 있는데.’

레핀 공작이 엄정한 눈빛으로 좌중을 둘러보았다.

‘이 노구는 국왕 폐하야말로 그 누구보다도 이 나라의 왕좌에 걸맞은 인물이라고 생각하오. 공들의 생각은 어떻소? 게다가···.’

그는 다른 의원들이 끼어들 틈을 주지 않고 다시 테레사에게 발언권을 넘겼다.

‘폐하께서는 이 상황의 허점을 보완할 만한 좋은 생각이 있으신 듯한데.’

‘···로건 공, 고맙네.’

테레사는 자신에게 쏠린 눈빛들을 의식하며 준비해온 카드를 펼쳐 보였다.

“그러니까, 그 자리에서 정략혼담 이야기를 꺼내셨단 거지?”

내 얘기를 홀린 듯 듣고 있던 카렌은 깜짝 놀란 모양이었다.

“응.”

그 직전까지 폭탄을 떨어뜨린 듯 뒤숭숭한 분위기였다면.

‘짐은 여러분의 자식과 조카들을 비롯해, 나라 안팎에서 구혼자를 받을 것이네.’

‘···!’

‘수많은 구혼자 중 가리고 가려 골라낸 이와 정식으로 혼례를 올린 뒤.’

입을 다물 줄 모르는 대신들을 향해 테레사는 회심의 한 마디를 던졌다.

‘나의 남편에게 이 나라의 공동 통치권을 부여할 셈이네.’

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회의장은 그야말로 뒤집어지기 일보 직전이었으니까.

···좋은 의미로 말이다.

‘그, 그럼!’

‘공동 국왕으로 인정하시겠다는···.’

‘가만 있자, 우리 조카 나이가···.’

방금 전만 해도 국왕파, 귀족파로 나뉘어 말싸움을 하던 이들의 태도가 순식간에 바뀌었다.

본인의 아들, 혹은 조카가 몇 살인지.

이미 맺어놓은 약혼을 물릴 수 있을지.

그도 아니면 방계의 남아를 데려와 양자로 삼는 것은 어떨지.

···떡 줄 사람은 생각지도 않는데 벌써부터 김칫국을 마시던 늙은 의원들을 떠올리니 또다시 웃음이 나온다.

“진짜 웃겼다니까. 벌써부터 자기가 폐하의 시아버지가 된 것처럼 행동하더라니까?”

전세는 순식간에 역전되었다.

똘똘 뭉쳐서 국왕파에 맞서던 귀족파들은 금세 와해되었고.

제 자식을 ‘공동 국왕’으로 만들겠다는 부푼 꿈을 안고 국왕에게 조금이라도 더 잘 보이려 했으니까.

카렌은 그저 혀를 내두를 뿐이었다.

“와, 아무리 봐도 열세 살 소녀라고는 믿어지지가 않는걸.”

“맨날 보는 나도 못 믿겠는데 넌 오죽하겠어.”

내 말에 웃음을 터뜨린 카렌이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어쨌거나 생각보다 잘 마무리되어 다행이네.”

“응. 게다가 폐하가 준비를 철저히 해놓으셨더라고.”

반대 여론이 커질 것을 우려해 나라 최고의 법리학자들까지 포섭해놓았다.

회의장에 출두한 그들은 에스닐의 법리학에 의거해 ‘테레사가 왕위를 유지하는 것이 어째서 법에 어긋나지 않는지’를 현란한 말솜씨로 설명했는데.

‘내가 보기엔 끼워맞추기 이론이나 다름없었지만.’

이미 ‘여왕의 남편감이자 공동 국왕’이라는 잿밥에 눈이 먼 대신들은 신경쓰지 않는 눈치였다.

덕분에 왕이 대기시켜놓은 최고 재판소의 법관들은 헛걸음을 하고 돌아갔으니.

어쨌거나 내 결론은 이랬다.

‘테레사는 역시나 절대 적으로 두고 싶지 않은 타입이라는 것.’

열세 살의 나이에 이렇게 철두철미할 정도인데, 성인이 된 후에는 얼마나 더 어마어마해질지 상상조차 안 된다.

한편.

이야기를 다 들은 카렌은 자신이 준비해온 서류를 내밀었다.

“리아나 부인 기억나?”

타릭의 손에 팰러스가 목숨을 잃은 후.

라페스 자작가를 떠난 리아나 부인은 공국으로 향했는데, 들리는 소문으로는 대공성에서 비밀 리에 도망쳤다고 했다.

그 후로 행적이 묘연해졌다고 말이지.

카렌에게 그녀의 행방을 찾아달라 요청했었는데 이제야 실마리를 잡은 모양이다.

“이름은 다르지만 인상 착의가 리아나 부인과 정확히 일치하는 여인이···.”

그렇다면 신분을 숨기고 가짜 이름을 대가며 행세하는 모양인데, 라고 생각하는데.

카렌이 의외의 말을 했다.

“···벡카드 가문과 접촉하려는 모양이야.”

“벡카드 가문?”

“응. 그것도 왕실에 적대적인 반란 찬성파와 접촉 중이라고.”

이해가 안 간다.

설마 팰러스를 죽인 진범이 타릭 벡카드라는 걸 모르는 걸까?

‘아니, 그렇다면 대공성을 도망쳤을 리 없지.’

저 나름대로 무언가 음모를 꾸미고 있는 게 아닐까.

“리아나 부인의 행적을 예의주시해줄 수 있어?”

그 말에 카렌은 씩 웃더니.

사실은 이미 밀정을 붙여놨다고 대답했다.

···거참 믿음직스럽네.

* * *

그 후로 시간이 빠르게 흘렀고, 제법 많은 일들이 있었다.

그중 하나를 꼽아보자면 테오 2세의 국장이 치러졌다는 것.

‘의원들을 비롯해 국정에 직접 참여하는 이들은 실상을 알고 있지만.’

사회적인 혼란을 우려해 세간에는 병약하던 테오 2세가 죽고, 그의 사촌여동생인 테레사가 왕위에 오르되 그 남편 될 자가 공동 국왕이 될 것이라고 공표되었다.

···사실 나로서는 이런 주먹구구식 행정이 과연 통할까 싶었지만.

‘백성들은 자신들의 머리 위에 선 것이 누구인지 신경쓰지 않네, 세자르 공.’

‘그들이 신경 쓰는 것은 오늘 내일 먹을 양식이 충분하냐는 것. ···전쟁을 일으키지 않고, 그들의 생업을 안전하게 유지하는 것만으로도 나랏님으로서의 역할은 충분히 하는 셈이네.’

테레사의 말대로였다.

왕좌의 사정이란 어디까지나 있는 자들 간의 싸움일 뿐.

갑작스러운 국장 소식에 충격이 일기는 했지만, 며칠이 지나자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세상은 원래대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그다음으로 언급할 만한 일이라 한다면.

“세자르 공, 그것 아나?”

테레사가 싱글거리며 운을 띄웠다.

“요즘 왕궁으로 나의 혼담이 쏟아져 들어오고 있다네.”

“그것 참··· 경축드릴 일이로군요.”

그녀는 구혼자의 상세사항을 정리해 만든 목록을 내밀었다.

그것을 쓱 훑어보자니 가관이 따로 없다.

‘이게 바로 사돈의 팔촌까지 동원한다는 건가.’

테레사의 남편감을 구한다는 얘기에 너도 나도 눈이 뒤집힌 것까지는 좋았는데.

문제는 수도 귀족가의 젊은 자제들 중 미혼이 드물다는 것이다.

“대부분 성년인 열여덟 살만 넘기면 혼인을 하는 추세이니까.”

“···그렇습니까?”

“열서너 살부터 약혼도 하는데 혼인이 대수이겠는가.”

테레사는 나를 지그시 바라보더니 덧붙였다.

“그대 같은 경우가 특이한 거지.”

“···.”

물론 내게 혼담이 들어오지 않은 건 아니다.

솔직히 말하자면 너무 많이 들어와 곤란할 정도였지만.

···혼인만큼은 현대적 가치관을 적용하고 싶은 것이 솔직한 심경이라 말이지.

“어쨌든 우습지 않은가. ···권력의 중심에 설 가능성이 눈앞에 보이니까, 나를 죽이려고 달려들던 자들이 한순간에 손바닥 뒤집듯 태도를 바꾸는 것이.”

자조적으로 말하던 소녀가 말을 이었다.

“결국 나를 미워하는 것이나, 내게 잘 보이려는 것이나 그 기저에는 권력을 탐하는 마음이 자리할 뿐이겠지만.”

나는 다시 한 번 구혼자 목록을 살펴보았다.

‘데스할트, 퍼킨스, 페킹튼, 드컨···.’

웬만한 귀족 가문, 심지어 벡카드 가문까지도 전부 다 혼담을 넣었다.

‘크로이츠 백작의 삼남도 명단에 이름이 올라 있군.’

내 기억으로 그자는 나이가 꽤 있는 듯했는데 아직 미혼인 건가, 생각하는데.

테레사의 말이 이어졌다.

“우스운 게 뭔지 아나? 이 중의 태반은 기존의 약혼을 깨버리고 혼담을 넣은 이들이라네.”

“···그렇게까지.”

뭔가 대출까지 받아서 도박성 주식에 전 재산을 몰빵하는 사례가 떠오르는걸.

“일부는 방계의 자제를 양자로 삼아 직계로 만들었지.”

“열기가 엄청나군요.”

그 대목만 놀라운 것은 아니었다.

상세사항을 보니 구혼자의 나이대가 엄청나게 다양했는데.

‘테레사가 열세 살이니 위아래로 대여섯 살까지는 커버 가능하다 쳐도.’

나는 어느 한 부분을 가리키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로테일 가문의 퍼시, 로테일 백작의 5남, 올해 1세’.

“···갓 태어난 아이로 혼담을 넣는 건 좀 아니지 않나요?”

“뭐, 나야 어리면 어릴수록 다루기 편하니 상관없지만.”

어깨를 으쓱한 소녀가 말을 이었다.

“수도의 귀족 가문 중 이 목록에 이름을 올리지 않은 것은 나의 친정인 노바스 가와 그대가 속한 레핀 가문뿐이야.”

“그렇군요.”

그렇구나, 싶어 고개를 끄덕이자.

테레사가 돌연 훅 들어왔다.

“짐이 그렇게 매력이 없는가?”

“···네에?”

갑작스러운 말에 눈을 동그랗게 뜨자.

소녀가 킥킥 웃음을 터뜨렸다.

“농담이네, 농담.”

“폐하.”

“뭐, 어쨌든. 짐은 지금처럼 그대와 이렇게 농담 따먹기를 할 수 있는 게 참 좋아.”

“···.”

분명 환하게 웃는 얼굴인데, 어째서 내게는 이토록 짠하게 느껴지는 걸까.

“언제 어디서 내 목숨을 노릴지, 누군가 내 비밀을 알아낼지. ···그래서 사랑하는 내 가족들이 한순간에 처형장의 이슬이 되진 않을지.”

테레사의 웃는 낯이 살짝 일그러졌다.

“매일처럼 악몽을 꾸던 때에 비하면 지금은 천국이나 다를 바 없으니까.”

“···.”

“짐은 지금 그대의 동정심을 유발하려고 하는 것뿐이니, 너무 마음에 담아두지는 말게.”

자칫 어두워지려는 분위기를 스스로 자제하며, 테레사가 화제를 돌렸다.

“아, 그리고 모처럼 얼굴을 본 김에 제안하고 싶은 게 하나 있는데.”

“제안··· 말씀이십니까?”

“제안이란 난이도에 비례하는 대가가 뒤따라야 하는 법.”

그녀가 제안한 과제.

이를 완수하는 대가로 내건 내용에-

“···진심이십니까?”

나는 눈을 크게 뜰 수밖에 없었다.

“그럼, 짐이 농담으로 이런 얘기를 할 사람으로 보이나?”

“그···.”

먹음직스럽지만.

동시에 큰 위험을 내포한 과실 앞에서 나는 잠시 망설였다.

“하루만 고민한 뒤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러게나.”

* * *

그렇게 농담 따먹기로 시작해 자못 살 떨리는 제안으로 마무리되는 알현 직후.

“세자르 공!”

나는 왕궁에 발걸음을 한 크로이츠 백작과 운 좋게 마주쳤다.

“백작님. 안 그래도 한 번 찾아뵙고 감사의 말을 드리려 했는데.”

“찾아뵙기는 무슨.”

백작은 주변을 슬쩍 살피더니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

“공, 뭐 하나 단도직입적으로 물어도 되겠소?”

고개를 끄덕이자 백작은 뭔가 기대하는 표정으로 질문했다.

“그··· 혹시 세자르 공도 도전해보는 거요?”

“도전이라뇨?”

“아, 그 왜.”

노백작은 답답한 듯 제 가슴을 치더니, 내 귓가에 속삭였다.

“국왕 폐하와의 혼담 말이오, 혼담!”

이 무슨···.

당황해서 아무 말도 못하는데, 내게서 몸을 뗀 백작이 흐뭇하게 웃었다.

“공이야말로 제일 가능성이 높아 보이던데.”

“···제가요?”

나는 어안이 벙벙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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