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하나의 폭탄
* * *
햇살이 따사로운 한낮의 커피하우스.
모처럼 혼자만의 시간을 즐기러 이곳에 발걸음을 한 크로이츠 백작은,
자신이 어째서 일면식도 없는 청년과 단둘이 마주 앉아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는지 알 수 없었다.
‘···참으로 당황스럽군.’
사건의 발단은 이랬다.
언제나처럼 단골 커피하우스에 들러 자리를 잡던 찰나, 사환이 다가와 이런 말을 속삭였고.
‘백작 각하를 존경한다는 청년 하나가 각하께 조언을 청하고 싶다는데··· 어떻게, 저희들 선에서 거절할까요?’
평소 같으면 그런 말도 안 되는 청에 응할 리 없었지만.
얼마 전 들은 세자르 레핀의 무용담에 큰 인상을 받은 터였을까.
‘어른이 되어서 청년의 고민 하나 들어주지 못할 게 무어 있겠는가.’
그렇게 호기롭게 대답하며 덥썩 요청을 받아들였고.
정신을 차려보니 어느새···.
‘세자르 레핀!’
지금 이 수도에서 제일 유명하다는 청년과 독대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너무 걱정마시지요, 백작님.”
그러한 그의 심정을 청년은 다른 의미로 받아들인 듯했다.
세자르 레핀이 웃는 낯으로 말했다.
“이곳에서 나누는 대화는 여간해서는 바깥으로 새어나가지 않습니다. 다른 말로 하자면 밀담이 나누기에는 이 공간만큼 좋은 곳도 없다고나 할까요.”
틀린 말은 아니었다.
이곳 커피하우스는 엄선된 이들만 드나들 수 있는 회원제 가게였으며, 그 안에서도 지금 두 사람이 앉은 이 방은 사전에 예약한 VIP에게만 내주는 곳이었으니까.
“뭐, 그거야 그렇지만.”
···어쩌다 내가 이자와 밀담을 나누게 된 것인지.
크로이츠 백작은 반쯤 체념한 채 곧바로 본론에 들어갔다.
“이렇게 같잖은 수까지 써서 나와 밀담을 나누려 한 이유가 뭐요, 세자르 레핀 공?”
그 말에 세자르 레핀이 속내를 들켰다는 듯 헛웃음을 지었다.
이렇게 가까이서 보니 뭐랄까.
남들의 얘기를 들을 때 떠올렸던 이미지와는 사뭇 달랐다.
‘제 아버지처럼 기골이 장대한 무인을 막연히 예상했는데..’
날렵한 얼굴선에 섬세한 이목구비.
팔다리가 길고 늘씬해 잘생겼다기보다는 아름답다는 표현이 더 어울리는 청년이 아닌가.
“···백작님?”
그의 얼굴을 너무 빤히 쳐다봤다는 것을 깨달은 크로이츠가 헛기침을 했다.
“제가 이 자리에 백작님을 모신 이유는 단순합니다. 긴히 드리고 싶은 말씀이 있어서지요.”
“긴히 드리고 싶은 말이라니?”
세자르는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곧 있으면 ‘왕위계승법 개정안’을 표결에 부치지 않습니까?”
전혀 예상치도 못한 말에 백작이 미간을 좁혔다.
···설마 개정안의 배후에 저자가 있었던 건가?
‘하지만 대체 어째서.’
아무리 생각해도 이 법안은 세자르 레핀에게 도움될 만한 구석이라고는 하나 없지 않은가.
크로이츠 백작의 머릿속이 복잡해지는데, 세자르의 말이 이어졌다.
“만일 개정안이 부결된다면 가장 큰 이유는···.”
세자르의 날카로운 눈빛이 자신에게 향한 순간, 백작은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백작님과 그 주변 의원들의 반대 때문이겠지요.”
“그러니까 지금 내가··· 내 주변을 설득해 개정안을 통과시켜주길 바라는 거요?”
세자르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 이해가 안 되는군. 그렇게 시급한 법안도 아닌데 어째서 굳이 나를 포섭하려고까지···.”
순간.
정계에서 오랜 시간을 보낸 크로이츠 백작의 두뇌가 빠르게 돌아갔고.
그의 본능은 이 개정안의 이면에 상상 이상의 무언가가 있다는 경고를 보냈다.
“대체 이유가 뭐요?”
“이유라뇨?”
“그 법안을 통과시키려는 진짜 이유가 무엇이냐고.”
“···아직은 말씀드릴 수 없지만 곧 알게 되실 겁니다.”
“개정안이 통과된다면 말이오? 하. 어이가 없군.”
“한 가지 분명히 말씀드릴 수 있는 게 있다면, 이 법안은 그 누구에게도 피해를 줄 만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이 나라의 미래를 지키기 위한 것에 가깝지요.”
청년의 청산유수 같은 언변에 백작은 혀를 찼다.
“일단 나는 그대를 완전히 신뢰할 수 없소. 공이 누구보다도 국왕 폐하의 총애를 받고 있다고는 하나.”
얼마 전 그에 대한 생각을 바꾼 자신이 우습게 느껴질 정도로,
직접 만난 세자르는 여전히 의뭉스러워 보였다.
“그대야말로 폐하가 무너지면 제일 큰 이득을 볼 인물이 아니오? 레핀 공작이야 나이가 나이이기도 하고, 애초 정치에는 뜻이 아예 없는 사람이지만-”
“저도 왕좌에 관심이 없습니다. 진심으로요.”
“그걸 어떻게 믿소?”
세자르는 여전히 웃는 낯이었지만.
한층 단호한 목소리로 질문에 답했다.
“믿기 어려우시다면 교단에 요청해 ‘진실을 판별하는 이능자’를 데려와 확인해보셔도 상관없습니다.”
세자르가 그렇게까지 나오리라고는 예상 못 했던 만큼, 백작은 멍하니 입을 벌렸다.
잠시 당황하던 그는 이내 정신을 차렸다.
“하지만 무릇 제안이나 거래란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전제로 해야 하는 법. ···지금 그대는 내게는 아무런 이득이 없는 제안을 들고 와서 도와달라고 생떼를 쓰는 셈이 아니오?”
상대가 어떻게 나올지 궁금한 마음에 일부러 노골적인 표현까지 써가며 도발했다.
그의 눈을 잠시 마주 보던 세자르가 입을 열었다.
“크로이츠 백작.”
“···!”
방금 전과 달라진 호칭에 백작은 몸을 움찔했지만, 세자르의 표정에는 변화가 없었다.
“뭔가 오해가 있나 본데, 나는 당신과 거래하러 온 것이 아닙니다.”
“그게 무슨.”
“도와달라고 부탁하러 온 겁니다.”
세자르의 흔들림 없는 눈빛이 그를 정면으로 마주했다.
고요한 수면처럼 빛나는 그 눈동자를 보며 크로이츠 백작은 오래된 기억 하나를 떠올렸다.
‘그분이 생각나는군.’
아주 오래 전.
저 역시 눈앞의 세자르 레핀처럼 치기 어린 청년이었던 시절.
자신이 평생을 바쳐 섬기리라고 마음속으로 맹세했던 이가 있었다.
위험한 전장에서는 자신의 목숨을 아끼지 않고 늘 선봉에 섰으며.
부드러운 카리스마로 상대의 진심을 자연스럽게 끌어내었던,
가신들 사이에서는 ‘타고난 제왕의 재목’이라 불렸던 자.
‘···이언 전하를 떠올리게 하는 푸른 눈이 아닌가.’
그런 제 생각에 흠칫 놀란 순간,
세자르의 말이 이어졌다.
“뭣하면 아까 말씀하신 대로 ‘생떼를 쓰러 왔다’고 해도 상관없습니다.”
“···.”
“백작께서 스스로 이 나라를 위하는 애국자라 생각하신다면. 자신의 이해관계를 위해 반대를 위한 반대만을 일삼는 다른 대신들과 다르다 생각하신다면.”
호소력 짙은 목소리가 늙은 백작의 가슴을 울렸다.
“한낱 어린아이에 불과한 몸으로 매일처럼 혹사하고 계시는 국왕 폐하를 위해, 단 한 번만 도움을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그 말을 끝으로 세자르가 고개를 숙여 보였다.
제 앞에 고개를 숙인 공작가의 후계자를 보며 백작은 마른침을 삼켰다.
“···세자르 공, 고개를 드십시오.”
그러나 세자르 레핀은 막무가내였다.
도와주겠다는 약속을 받아낼 때까지 계속 그러고 있겠다는 듯.
‘허, 이것 참.’
크로이츠 백작 자신도 한때는 저런 시절이 있었다.
왕궁에 처음 발을 들여 말단직 관리로 매일같이 과중한 업무에 시달리던 시절.
그럼에도 청년 시절의 그는 늘 행복했다.
왕가를 위해, 이 나라를 위해 일한다는 것이 자랑스럽고 감격스러웠다.
‘분명 그런 시절이 내게도 있었는데···.’
지금의 자신은 어떠한가.
문득 고개를 숙이자 테이블 위에 올려둔 주름진 제 손이 보였다.
과연 자신은 늘어난 주름의 갯수만큼, 흐른 세월만큼 더 나은 사람이 되었나?
···그런 고민을 여지껏 단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음을 깨닫자.
백작은 보이지 않는 망치에 머리를 얻어맞는 기분이 들었다.
“세자르 공.”
세자르는 여전히 고개를 숙인 채 말이 없었다.
“얼마 전만 해도 나는 그대를 아주 좋지 않게 생각했지만.
···그것이 그릇된 선입견이었다는 것을 이제야 확신하게 되었소.”
그 말에 청년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 눈동자에 담긴 기대감에 백작은 저도 모르게 기분이 좋아졌다.
“우리가 비록 가치관은 많이 다르지만 이 나라를 생각하는 마음은 같지 않겠소.”
“그렇다는 말씀은-”
“세자르 레핀 공, 나 역시 일개 의원일 뿐이오. 그러니 확언할 수는 없지만···.”
청년의 눈을 똑바로 마주하며 늙은 백작은 한 자, 한 자 힘주어 말했다.
“내가 할 수 있는 선에서 최대한 노력해보겠소.”
마침내 세자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 정도 말씀이면 충분합니다.”
* * *
몇 주 뒤 왕궁 정기의회.
이번 회기 의장을 맡은 노바스 공작의 진중한 목소리가 회의장 안을 울렸다.
“북부 국경지대 수비대의 증원 방책은 만장일치로 통과되었습니다.”
왕실 고문관을 비롯한 상급 의원들만 정중앙의 기다란 탁자에 둘러앉는 한편.
일반 의원들은 그 주변을 둘러싸듯 배치된 좌석에 앉는다. 일종의 극장 좌석과 비슷한 형태라고 해야 하나.
···그리고 내가 앉은 자리는 말석 중의 말석이었으니.
‘나이에 비하면 의전관이 높은 직급인 데다 일단 이 회의에 참석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대단하긴 하지만.’
왕실 고문관 급은 되어야 논의를 주도할 수 있는 분위기다, 여기는.
“그리고 그다음 안건이었던···.”
나는 다음 안건을 화두에 올리려는 노바스 공작에게 시선을 집중했고.
공작은 날카로운 눈으로 주변을 둘러보며 말을 이었다.
“···왕위계승법 개정안 역시 통과되었음을 알립니다.”
물론 바로 전의 안건처럼 만장일치는 아니었지만.
크로이츠 백작이 열심히 제 편을 설득해준 덕분인지 정족수를 간신히 채워 통과되었다.
웅성웅성.
논란의 여지가 많았던 안건인 만큼 의석 여기저기에서 수군거림이 들려왔다.
그때, 공작의 맞은편에 앉은 나이든 왕실 고문관이 손을 들고 발언했다.
“한 가지 궁금한 게 있습니다.”
“질문하시지요.”
“이 개정안의 발의자는 공작 각하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노바스 공작이 고개를 끄덕이자 질문자가 조심스레 말을 이었다.
“저는 이 개정안의 내용 자체에는 큰 문제가 없다고 봅니다. 시대의 흐름을 따라서 언젠가는 반드시 바뀔 것으로 보였던 법안이긴 합니다만···.”
좌중을 스윽 둘러본 고문관이 본론을 거냈다.
“어째서 이 개정안을 다른 안건보다 우선시했는지 이해가 안 됩니다. 촌각을 다투는 사안도 아니지 않습니까.”
그러한 의문을 지닌 것은 다른 의원들도 마찬가지인 듯했다.
노바스 공작이 말문을 열자 모두의 시선이 그에게로 쏠렸다.
“그것은···.”
공작은 입술을 지그시 깨물더니 후우 한숨을 내쉬었다.
“이 자리에 곧 오실 폐하께서 설명해주실 겁니다.”
“···폐하가 이 자리에 오신다고요?”
국왕이 왕궁 회의에 참석하는 게 불가능한 건 아니지만, 흔히 있는 일은 아니다.
사소한 사항은 행정부 관료들 선에서 결정되며 그보다 중대한 사항은 의원들의 투표로 확정되니까.
국왕이 온다는 말에 의회장 안의 소란이 한층 커지는데.
“···저건 누구지?”
“어느 가문의 영애인가?”
“근데 왜 갑자기 여기에···.”
의회장 앞쪽에 홀연히 나타난 소녀의 모습에 실내가 술렁였다.
짧은 머리를 사랑스럽게 손질한 소녀는 레이스가 풍성하게 달린 드레스 차림이었다.
그녀가 천천히 의회장 중앙으로 걸어옴에 따라 시끌시끌하던 실내가 고요해졌다.
“···.”
그 나이대의 소녀들과는 뭔가 다른 느낌이었다.
그저 예쁘기만 한 것이 아니라 보는 이에게 위압감을 주는 듯한 아름다움의 소유자랄까.
몇 년만 지나도 눈부시게 아름다워질 것이 분명한 소녀의 미모에 반쯤 넋이 나가 있던 의원들은.
“나의 가신들이여.”
“···!”
···그녀의 입에서 흘러나온 익숙한 목소리에 눈을 크게 떴다.
“짐이 그대들에게 고백할 것이 있으니.”
테오 2세, 아니 테레사가 이어서 꺼낸 말에 회의장은 폭탄을 떨어뜨린 듯한 분위기로 급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