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작가의 서자로 살아가는 법-118화 (118/176)

부탁 하나만 들어줄래?

* * *

그 후로 시간은 빠르게 흘러갔다.

왕궁은 언제나처럼 분주했고, 의회장에서는 수많은 안건이 논의되었으며.

최근에 논의된 것 중 가장 화제가 된 것은 다름 아닌 ‘왕위계승법 개정안’이었다.

개정안의 골자는 아래와 같았다.

기존 법의 핵심이 오로지 남성의 계승권만을 인정하는 거라면.

‘남성 후계자의 권리를 우선하되 여성의 계승권 또한 인정한다.’

사실 여성의 계승권은 대부분의 대륙 국가에서 인정하는 만큼 크게 문제될 것은 없는 셈이었지만.

어째서 이 시국에 개정안을 발의하는 것이냐고 반발하는 이들이 없잖아 있었다.

“···역시 가장 강력하게 반대하는 건 크로이츠 백작을 중심으로 한 세력인가요?”

테레사의 물음에 안느가 고개를 끄덕였다.

어릴 적부터 노바스 공작 가문의 적녀로 자라난 그녀에게는 지금도 수도 귀족계의 눈과 귀가 되어주는 이들이 많았고.

그들의 의견은 한결같았다.

‘크로이츠 일파를 설득하지 않는 한, 개정안을 통과시키는 것은 불가능하다.’

안느가 어두운 얼굴로 설명을 이어나갔다.

“크로이츠 가문과 그 가신 세력은 원래부터 우리 노바스 가와 사이가 좋지 않았던 데다 작위를 박탈당한 헬리오스 가문, 팰러스 레핀을 따랐던 벡카드 가문들의 잔당이 그쪽에 붙어 있으니까요.”

테레사는 생각에 잠긴 얼굴로 고개만 끄덕였다.

“그럼 폐하, 저는 이만 나가보겠습니다.”

등을 돌리려던 그녀를 국왕의 목소리가 붙잡았다.

“어머니, 잠시만요.”

그 말에 다시 돌아보자 테레사는 멋쩍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나가시기 전에 잠시··· 조금 바보 같은 질문 하나만 해도 될까요?”

바보 같은 질문이라니.

제 딸이 간만에 보이는 어린아이 같은 행동에 안느는 활짝 웃었다.

“뭐든 물어보시지요, 폐하.”

“···너무 뜬금없는 질문일지 모르겠지만, 어머니는 아버지를 사랑해서 결혼하셨나요?”

안느는 저도 모르게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이내 침착하게 대꾸했다.

“우리 대귀족들은 특권을 지니고 태어나지만, 그것을 뒷받침하는 것은 책임과 의무이지요.”

“···책임과 의무.”

“이 어미는 결혼식 전까지 전하와 말을 섞어본 적조차 없었답니다. 하지만.”

안느는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딸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전하와 일생을 함께하기로 결정한 순간부터 생겨난 마음이, 바로 사랑이 아니었을까 싶어요.”

이제는 우리 딸이 이런 데에 관심을 갖게 되었구나 싶어 가슴이 뻐근해졌다.

그래서일까.

“폐하.”

안느는 저도 모르게 다가가 그녀를 꼭 껴안은 뒤, 귓가에 속삭였다.

“언젠가는··· 폐하 또한 저와 마찬가지로 이런 아름다운 드레스를 입게 되실 겁니다.”

그렇게 말을 마치고 몸을 떼자,

테레사가 애정을 가득 담은 눈동자로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어머니.”

“네, 폐하.”

안느의 마음이 복잡하게 휘몰아쳤다.

남동생의 행세를 하는 것으로도 모자라 이 가녀린 어깨에 무거운 짐을 가득 지게 하다니.

딸에 대한 대견함과 미안함으로 가슴이 요동쳤지만, 막상 테레사는 다른 부분에 집중하고 있었다.

‘특권은 책임을 다하는 데서부터 나온다.’

복잡한 눈빛의 어머니를 올려다보며 테레사가 말했다.

“저는 일개 여인이 아니라 이 나라의 왕입니다.”

“···폐하.”

“그런 의미에서 드리고 싶은 말씀이 있습니다.”

그다음 이어진 말에 안느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하지만.”

“지금이야말로 기회입니다, 어머니.”

허공에서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다.

“···진실을 밝히고, 그것을 역으로 이용해 저들에게 우위를 점할 수 있는 기회.”

테레사의 흔들림 없는 눈빛을 보며.

안느는 제 딸이 어느새 훌쩍 커버렸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다.

* * *

특별 보상으로 받은 프리퀄 외전의 골자는 단순했다.

사고라고만 알려졌던 이언 왕세자의 죽음은 공국 측에서 보낸 암살자에 의한 것이며.

에르곤 왕자와 그의 아들을 죽게 한 마차 사고 또한 공국이 사주한 결과라는 것.

‘이거 원 웬만한 궁중 암투극은 저리 가라 할 정도인데.’

문제는 이 문서 자체만으로는 그 무엇도 증명할 수 없다는 점이지만.

그래도 여기 나온 대로 하나씩 단서를 추적해나가다 보면 무언가 증거가 나오지 않을까.

‘게다가 이 에르곤 왕자의 죽음에는 우만의 부모님이 얽혀 있잖아?’

우만의 부모인 빈터 부부는 왕자의 마차 사고를 사주했다는 죄목으로 죽임을 당했는데.

이 문서에 따르면 그들은 억울하게도 정치 싸움의 희생양이 된 셈이다.

‘···우만에게도 얘기를 해야 하지 않을까.’

그러나 어떤 식으로 말을 꺼내면 좋을지 알 수 없었다.

그렇게 며칠간 고민만 하고 있던 터, 나는 또다시 국왕의 집무실로 불려가게 되었다.

“세자르 공.”

“네.”

“일단은 귀중한 정보를 넘겨준 것에 감사하네.”

테레사는 그 며칠간 많은 고민을 한 모습이었다.

“아닙니다. 당연한 일인걸요. ···이 문제는 다른 누구보다도 폐하께 직접 연관된 것이 아닙니까.”

내가 이 문서를 국왕에게 보여준 것은 오로지 그 이유 때문이다.

솔직히 말하면 나와는 크게 상관이 없는 일이지만.

‘그러나 테레사에게는 부모의 죽음이 걸린 일 아닌가.’

2왕자 에르곤은 그녀의 아버지.

공국의 음모로 국왕은 아버지와 동생을 동시에 잃었으니까.

그러니···.

“선택은 어디까지나 폐하의 몫입니다.”

“···.”

테레사는 잠시 침묵을 지키다 입을 열었다.

“선택은 하나뿐이네, 공.”

천천히 고개를 든 그녀의 눈동자에서,

일순 불꽃이 이는 듯했다.

“짐은 내 사람들을 해한 자를 절대, 용서하지 않아.”

그 말에 동의하듯 고개만 끄덕이는데.

테레사가 내 눈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그렇다면 그대는 어떤가?”

“···네?”

“이 문서에 언급된 죽음은 짐의 아버지와 동생의 것만이 아니지 않나.”

그녀가 뜻하는 바를 나는 한 박자 늦게 알아차렸다.

“아.”

다름 아닌 이언 왕세자의 죽음.

테레사는 나의, 아니 ‘세자르’의 생물학적 아버지가 이언 왕세자가 아니냐는 것을 돌려 묻는 셈이었다.

“그러니 그대 역시 분노할 자격이 충분하다고 생각하는데.”

나는 무슨 대답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하루 아침에 ‘세자르’라는 인물이 된 지도 어언 몇 년이 흘렀고.

이제는 이 몸과 이 세계에 어느 정도 익숙해졌으나.

“···모르겠습니다.”

“모르겠다니?”

“아실지 모르겠으나 저는 단 한 번도 그분을 뵌 적이 없습니다.”

“···.”

테레사가 돌연 조용해졌다.

표정을 보니 ‘사생아의 말 못 할 안타까운 사정’ 같은 것을 제멋대로 상상하고 있는 것 같은데.

“그뿐 아니라 레핀 공작 또한 제게는 남이나 다를 바 없는 존재였죠.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아버지’라고 부르는 게 자연스러워지는 데 한참 걸렸으니까요.”

일부러 미소 지으며 가볍게 말했지만, 소녀의 표정은 진지했다.

“말하고자 하는 바는 잘 알겠네.”

“네, 그러니 딱히 신경 쓰실 건-”

“괜한 상처를 건드린 것 같군.”

···어라?

“짐이 또래보다 똑똑하다는 소리는 자주 듣네만, 아직은 다른 사람을 배려하는 데 서툴 때가 있네. ···공이 잘 이해해줬으면 좋겠군.”

또래보다 똑똑하다는 말을 보통 본인 입으로는 잘 안 하지 않나? 아니 그보다.

‘얘, 내가 상처받은 줄 아나 보네.’

입술을 삐죽거리며 눈을 피하는 테레사를 보니 절로 웃음이 나왔다.

이럴 때 보면 영락 없는 십 대 소녀라니까.

‘마음 같아선 좀 더 놀려주고 싶지만.’

그랬다간 진짜 울어버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나는 얼른 국왕을 달랬다.

“전혀 아닙니다, 폐하. 그저 제게는 그분의 존재가 소설 속 등장인물 같은 느낌일 뿐.”

따지고 보면 등장인물이 맞긴 하다만.

“지금 저는 제 삶에 늘 만족하며 감사하고 있으니 전혀 염려하실 필요 없습니다.”

테레사는 그제야 안심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의 화제는 어느새 다시 공국과의 갈등으로 되돌아갔고.

국왕은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

“···그대도 알다시피 이런 일로 타국에 책임을 묻기란 쉽지 않지. 국가간의 문제는 쉽게 전쟁으로 번지는 데다···.”

테레사의 손이 책상 위 펼쳐진 지도를 훑었다.

“아직은 국경지대 여기저기가 불안정한 상황. ···이런 상태에서 전쟁을 벌여봤자 우리 쪽이 손해라는 걸 공국은 너무도 잘 알고 있을 거야.”

그러니 겁 없이 이런저런 일을 잔뜩 벌였겠지.

나 또한 그 말에 동의하는 바이지만.

“그렇다면 그러한 분위기를 환기하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내 말이 가리키는 바는 명확하다.

···테레사가 사실은 여자임을 밝히고 그녀의 남편, 어쩌면 공동 국왕이 될지도 모르는 구혼자를 받겠다고 공표하자는 것.

‘그러면 수도 귀족들 사이에 대혼란이 일어날 테고.’

예기치 못한 상황의 발생.

본디 공국은 반군 세력을 서서히 키워나갈 의도인 듯했지만, 정세가 급변하면 더는 그렇게 여유를 부릴 수 없을 터.

‘그리고 우리는 그들이 당황해서 무리수를 둘 때를 노리는 거지.’

그 두루뭉술한 말을, 역시나 테레사는 바로 알아차린 듯했다.

“그래. 짐 또한 그렇게 생각했지. 그래서···.”

집무실 구석에 자리한 커튼을 걷자 그 뒤에 자리한 마네킹 그리고···.

“미리 준비를 마쳤다네.”

“···.”

마네킹이 걸친 드레스가 모습을 드러냈다.

“어, 그러니까.”

“어머니와 삼촌께는 이미 말씀드렸네.”

“···.”

“여성의 계승권을 인정하는 법안만 통과되면, 짐은 커글랜드 왕실과 비밀리에 혼담을 논의할 생각이야.”

머리부터 발 끝까지 화려하기 그지없는 드레스를 보니 어쩐지 마음이 복잡해졌다.

‘테레사가 저 드레스를 입는단 말이지.’

저걸 입고 모두 앞에 성별을 밝히고, 노골적인 비난을 한몸에 받고.

이미 두 어깨에 지고 있는 무거운 짐으로도 모자라, 자신의 결혼을 담보로 정치적 위기를 헤쳐나가고···.

‘애초에 내가 제안한 아이디어이지만.’

어쩐지 어린애한테 못할 짓을 시키는 것 같아 기분이 영 착잡한데.

“표정이 왜 그런가, 세자르 공?”

그 말에 문득 고개를 돌리자 생각 외로 아무렇지 않아 보이는 테레사가 보였다.

아니, 외려 의기양양한 얼굴에 가깝지 않은가.

“걱정 말게. 짐은 오히려 이 상황이 반갑기까지 하니.”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가시는 셈이니까요?”

“그래. 물론 욕은 좀 먹겠지만, 비밀을 훌훌 털어버리면 마음이 훨씬 편할 것 같아. 게다가.”

말하다 말고 테레사가 킥 웃었다.

저럴 때 보면 좀 귀여워 보이기도 한다.

“그대나 어머니나 어쩐지 짐을 짠하게 여기는 것 같지만, 전혀 그리 생각할 것 없네.”

열세 살 소녀라고는 도무지 믿기지 않는 눈빛으로 그녀가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다.

“짐의 손아귀에 강력한 무기가 들어왔다는 것이 아주 반가울 정도이거든.”

“그렇습니까.”

“그런 의미에서 그대가 한 가지 해주었으면 하는 일이 있는데.”

그 말과 동시에 서류 하나를 꺼내 책상 위에 올려놓는다.

나는 그 제목만 스윽 훑어보고도 그녀의 요청이 무엇일지 짐작할 수 있었다.

‘왕위계승법 개정안.’

이대로 간다면 수도 귀족파들의 반대 때문에 계류되거나 최악의 경우 무산될 수 있는 상황.

그런 가운데서 테레사는 내가···.

“···크로이츠 백작을 설득해주길 바라시는 거죠?”

국왕이 환하게 웃었다.

···어떻게 보면 소녀처럼 싱그러운, 또 어떻게 보면 능구렁이처럼 보이는 묘한 미소다.

“그대는 가끔 보면 내 마음을 읽는 것 같단 말이야.”

무슨 십 대 소녀가 이렇게 능글맞게 말을 할까.

차오르는 웃음을 삼키며 생각했다.

···아무래도 나는 그녀를 여전히 과소평가해왔는지도 모르겠다고 말이지.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