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밀의 정체
* * *
정식으로 왕실 의전관이 된 지 며칠 만에 나는 ‘갈려나간다’는 표현이 무엇인지를 몸소 체험하는 중이었다.
‘괜히 녹봉을 많이 주는 게 아니었군.’
그깟 녹봉 따위 금광 수입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닌데···.
편하게 지낼 수 있었는데 내 손으로 굳이 무덤을 판 것일까, 하고 뒤늦은 후회를 하는데.
“세자르 공. 폐하께서 부르십니다.”
내 마음의 소리가 들린 걸까.
갑작스러운 호출에 불려간 나는 평소처럼 알현실이 아닌, 국왕의 개인 집무실에서 테레사를 알현했다.
“폐하, 신 세자르 레핀 들었나이다.”
“편하게 하게, 공.”
맞은편에 앉자마자 국왕은 본론으로 들어갔다.
“경이 궁금해할 것 같아서 말이지.”
지난번 사건이 마무리된 후.
폭파 미수 사건의 주모자인 ‘과격파 리더’가 경비대로 호송되었다.
수도원에 잠입하기 전, 디터에게 이렇게 신신당부했거든.
‘디터, 원장실에 가면 우두머리로 보이는 놈은 절대 죽여선 안 된다.’
‘네!’
‘···딱 죽지 않을 만큼만 쳐서 기절시켜.’
디터는 내 명령을 그대로 수행했고.
덕분에 과격파 리더는 저 혼자 ‘섬멸의 일격’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것.
“그자를 고문해서 알아낸 바, 이번 일도 공국의 입김이 작용했던 것 같네.”
“···또 공국입니까.”
테레사의 미간이 꿈틀거렸다.
“그래. 그 사실을 알고 나니 뒤늦게 이해가 가더군.”
아무리 잘못된 신앙에 눈이 먼 광신도들이라고 해도 이 정도로 과격하게 나올 수 있나.
그녀의 의문은 ‘공국’이라는 배경이 있었음을 알고 나자 해결되었다.
“애초 둘 사이에 거래가 있었던 것 같다. ···나를 암살하는 대신, 공국 서부의 작은 영지를 내주겠다는.”
영지의 자치권만이 아니라 교단에서 독립된 ‘별개의 종교’로 인정해주겠다는 파격적인 제안.
트리니다드 수도회의 과격파들은 그 먹음직스러운 미끼를 덥석 물었고.
수도원장을 비롯한 온건파들을 싸그리 살해하는 것뿐 아니라 감히 건국기념제에 왕을 암살하려 했던 것이다.
“아마도 짐을 죽일 수 있을 거라 확신했던 것 같네. 그러니 이렇게 과감한 도박에 모든 것을 걸 수 있었겠지.”
“···.”
“하지만.”
테레사의 눈이 장난스럽게 반짝였다.
“짐에게는 ‘미래를 보는’ 세자르 레핀 공이 있다는 사실은 저들은 몰랐던 것이지.”
“···폐하.”
민망한 기분에 흠흠 헛기침을 하자 국왕이 설명을 이어나갔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둘 사이에 거래가 오갔다는 실질적 증거는 전혀 남아 있지 않아.”
설령 남아 있다 하더라도 그걸 빌미로 전쟁을 일으키는 건 쉽지 않은 상황이다.
외교적인 압박이야 가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예상이 빗나가 작전이 실패로 끝나고, 설상가상으로 상황이 돌아가자 공국 측의 지원이 아예 끊겼다는군.”
덕분에 나는 손쉽게 수도원을 공략할 수 있었고 말이지.
“이거.”
그때, 국왕이 서류 하나를 꺼내 내게 건넸다.
“이게 뭡니까?”
“수도원을 뒤져서 얻어낸 기밀 서류. ···어쩌면 그대가 유용하게 쓸 수 있을 것 같아서 말이지.”
서류를 빠르게 훑어본 나는 나도 모르게 탄성을 내뱉고 말았다.
‘이건!’
몇 달 전 수도원에 여장까지 해가며 잠입해서 얻어낸 정보에 관련된 것이 아닌가.
···이런 귀중한 기밀을 그냥 주다니.
그런 내 속내를 읽었는지 테레사가 씩 웃었다.
“물론 짐이 쓸 수도 있었겠지만, 그대에게 감사의 마음을 표현하기 위해서라고 생각해주게나.”
그 말대로다.
에스닐 왕실 차원에서 얼마든 유용하게 쓸 수 있는 정보를 맨입으로 줬다는 건.
국왕이 내게 대단한 호의를 베풀었다는 의미이니까.
‘그렇다면 나 또한.’
···진실을 알리는 것이 옳지 않겠는가.
침을 꿀꺽 삼킨 뒤 고민 끝에 말문을 열었다.
“···저 역시 알려드리고 싶은 것이 있는데.”
그게 뭐냐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뜬 테레사의 눈앞에,
나는 얼마 전 과제 보상으로 받은 얇은 책자를 꺼내 보였다.
“이건··· 제가 밀정을 통해 간신히 구한 기밀 보고서입니다.”
첫 장에 적힌 <왕자살해자의 배후>라는 제목에 테레사의 눈이 커졌다.
“네, 예상하시는 게 맞습니다. 이건 폐하의 백부이신 고 이언 왕세자, 그리고.”
고개를 들자 입술을 깨문 테레사가 보였다.
잠시 망설이던 내가 말을 이었다.
“친부이신 에르곤 왕자의 죽음을 사주한 것이··· 다름 아닌 칼 오프러스 대공이라는 사실을 고발하는 내용이니까요.”
“···!”
테레사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 * *
수도의 어느 커피하우스에 자리한 귀족 전용 모임실.
얼마 전만 해도 희희낙락하던 귀족회 의원들의 얼굴은 어둡기 그지없었다.
“그야말로 뼈 아픈 패배가 아니고 무엇이겠소!”
지난번 모임에서 ‘승냥이’가 등장하는 저잣거리의 노래를 언급하며 의원들에게 일침을 놓았던 원로 귀족.
그는 이번 일로 인해 귀족회의 입지가 더욱 약해질 것임을 직감한 터였다.
“국왕을 비롯한 온 왕실이, 아니 나라 전체가 채 스무 살도 안 된 어린애의 농간에 놀아나고 있는 것 아니오.”
“저, 파벨 경. 그 심정은 이해가 갑니다만 지금은 어쩔 수가 없잖습니까. 그때만 해도 누가 성공하리라 생각이나 했습니까? 다들 어린애의 치기이려나 넘어갔지요.”
누군가의 반박에 또 다른 젊은 귀족이 맞장구를 쳤다.
“맞습니다. 이미 상황이 이렇게 된 이상, 지금은 때를 보며 조심스럽게-”
“허어, 때를 보자고? 다들 어찌 그리 여유가 넘치시는 거요!”
원로 귀족이 테이블을 쾅 소리 나게 내리치자, 주변의 귀족들이 움찔했다.
제이슨 파벨 경.
그는 한때 정계의 중심부에 선 권력자였으나 헬리오스 가문을, 더 나아가서는 팰러스를 지지했던 탓에 현재는 그 기반이 사라진 상황이다.
어쨌거나 하나 확실한 게 있다면.
“지금도 이미 많이 늦은 상황이오. 그자의 세력이 더욱 커지기 전에 막아야 합니다!”
···지금 상황에서는 무엇을 어떻게 하든, 자신이 세자르 레핀의 눈에 들 가능성은 0에 가깝다는 것.
검버섯이 가득 핀 얼굴로 열변을 토하는 나이든 귀족을 바라보던 크로이츠 백작이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파벨 경, 한 가지 궁금한 게 있는데.”
“오, 각하야말로 제 의견에-”
“그대가 그토록 세자르 레핀 공에게 적대적인 이유가 무엇이오?”
파벨 경이 주름진 눈을 크게 떴다.
아니, 얼마 전만 해도 저보다 더 앞장서서 세자르 공을 척결해야 한다고 주장하지 않았던가!
“배, 백작 각하께서 그리 말씀하시는 이유가···.”
“얼마 전만 해도 나 역시 그대와 생각이 같았소. 하지만 이번 일로···.”
크로이츠 백작은 수도 경비대에서 활약 중인 삼남이 했던 말을 떠올리며 말을 이었다.
“···생각이 좀 바뀌었거든.”
크로이츠 가문은 본디 무가가 아니다.
그러나 충의의 증거로서 그들은 세대마다 적자 한 명씩을 군에 종사토록 했고.
백작의 자식들 중에서는 어릴 때부터 무예에 소질을 보였던 그의 삼남이 자진해서 수도경비대에 들어갔으며, 승승장구하여 대장의 직속 부관이 되었다.
남들에게는 말하지 않지만 삼남은 그가 가장 자랑스러워하는 자식이었는데.
‘아버지, 세자르 레핀 공은 아버지가 생각하시는 것과는 좀 다른 인물인 듯합니다.’
아마 세자르가 부대를 이끌고 수도원에 뛰어들기 직전이었을 터다.
‘무슨 말이냐?’
‘세자르 공이 오늘 오후에 저희 경비대를 방문했습니다. 평소 워낙 소문이 안 좋게 돌기도 했고, 괜히 호승심이 일어···.’
삼남은 세자르에게 총은 쏠 줄 아느냐고 도발했고, 그의 도발에 세자르는 행동으로 응수했다.
거침없이 총을 들어 쐈고 그 결과는!
‘가히 명사수라 할 만하더군요.’
‘···총을 쏠 줄 안다고.’
‘네. 솔직히 저 역시 놀랐습니다.’
그의 삼남은 세자르에게 꽤 좋은 인상을 받은 듯했다.
그뿐 아니라 에드윈 레핀 경 또한 비슷한 얘기를 했지 않은가.
···그자가 세자르에게 사주를 받고 이중 첩자 노릇을 한 것은 중간부터 눈치채고 있긴 했지만.
어느 날의 만남에서 에드윈은 이렇게 털어놓았다.
‘백작 각하,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저는 세자르 공을 인간적으로 존경하고 있습니다.’
머리에 피도 마르지 않은 어린애에게 그런 표현을 쓰는 게 가당치도 않게 느껴지긴 했지만.
불혹을 훌쩍 넘긴 에드윈의 표정은 진지했다.
‘그분 덕분에 제 자식들이 사람답게 지내고 있는 건 알고 계시겠지만, 그것만이 아닙니다. ···이렇게 음흉한 속내를 지닌 제게도, 그분은 처음부터 기회를 주셨으니까요.’
지위와 권력으로 압박한 게 아니라 기회와 선택권을 주었다.
에드윈이 했던 말을 크로이츠 백작은 이후에도 한참이나 곱씹어보았다.
그리고 최종적으로 백작의 마음이 바뀌게 된 가장 강력한 계기는···.
“여기 계신 경들께도 한 가지 질문하겠소.”
좌중의 시선이 백작에게 집중되었다.
“경들 중 아들을 전장에 직접 내보내거나, 종군시킨 분이 몇이나 되오?”
“···.”
그 말에 섣불리 대답은 나오지 않았다.
다들 서로의 얼굴만 돌아보며 눈치를 살폈고, 결국 한두 명만이 천천히 손을 들었다.
그들의 얼굴을 확인한 크로이츠 백작이 말을 이었다.
“나 역시 내 자식 중에는 삼남인 리오넬만이 유일하오.”
“···.”
“그 아이가 그러더군. 세자르 레핀 공이 총을 쏠 줄 안다고, 그것도 명사수라고.”
귀족들이 웅성이기 시작했다.
‘귀족이 총을 쏠 줄 안다고?’
‘왜 굳이···.’
‘굳이 그럴 필요가 있나.’
그 사실에 깊은 인상을 받기보다는 오히려 깎아내리려는 반응에 백작은 내심 혀를 찼다.
‘이것이 이 나라 귀족들의 현 주소인지도 모르지.’
어쩌면.
자신은 스스로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생각이 짧았는지도 모르겠다.
“이 사실이 잘 와닿지 않는 것 같아 한마디 더 보태자면···.”
수군거리던 귀족들의 초점이 그에게로 향했다.
“세자르 공은 이번 작전을 지휘만 한 것이 아니오. 본인이 직접 퍼킨스 자작으로 변장하여 수도원에 잠입했고, 그의 자녀들을 맨몸으로 구출해나왔지.”
“···그런!”
“말도 안 돼···.”
귀족들에게서 경악의 신음이 터져 나왔다.
이번 작전으로 세자르 레핀이 후한 보상을 받은 것만 알려져 있지, 그가 직접 적지에 뛰어들었다는 사실은 그다지 알려져 있지 않았으니까.
‘그리고 그 사실이야말로.’
크로이츠 백작이 세자르에 대한 평가를 뒤바꾼 결정적인 이유였으니.
“여러분. 나는 지금껏 세자르 공을 요사스러운 모사가라고만 생각했소. 어린 국왕 폐하의 마음을 미혹시켜 제멋대로 힘을 휘두르려 하는.
···그러나.”
크로이츠 백작은 모임실 안에 둘러앉은 귀족들의 면면을 돌아보았다.
“실은 세자르 공이야말로 인덕이 있는 청년이 아닌가 싶소. 도량이 크고 인덕이 있는-”
“···무슨 그런 말씀을!”
파벨 경의 외침을 시작으로, 다른 귀족들 또한 반대의 뜻을 내비쳤다.
“어불성설이십니다!”
“백작 각하 또한 그자에게 미혹되신 겁니까!”
“소소한 작전 하나를 성공적으로 수행해냈다 하여···.”
“목숨을 걸었다기보단 그냥 보여주기식 연극이나 다를 바 없는 것이지요!”
허.
한마음 한뜻으로 목소리를 높이는 귀족들을 보며 백작은 생각했다.
이 나라의 대소사를 결정한다는 의원들이 그 노랫말대로 정말 ‘승냥이’에 불과할지도 모르겠다고.
“···목숨을 건 게 아니라 보여주기식 연극이었다고?”
“···.”
“제 몸의 영달보다 더 중한 것을 위해 목숨을 걸어본 적 없는 사람이라면, 감히 그러한 말을 함부로 해서는 안 되지!”
서릿발 같은 목소리에 다들 조용해진 순간.
누군가가 문을 벌컥 열고 나타났다.
“한참 논의 중에 늦게 나타나서 죄송합니다만.”
···다름 아닌 퍼킨스 자작이었다.
“저 또한 크로이츠 백작 각하의 말씀에 동의합니다. 그뿐 아니라.”
자작은 테이블에 둘러앉은 귀족들을 한 차례 돌아보며 말했다.
“우리 퍼킨스 가문은 세자르 레핀 공을, 더 나아가 그의 가문과 가신들 모두를 영원한 친구로 여기기로 알레스 신 앞에 맹세했습니다.”
“···!”
“그러니 여러분이 어떻게 말씀하시건 간에 저는 그분을 진심으로 지지할 겁니다.”
자작의 단도직입적인 말에 모임실 안의 공기가 급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