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신이 아니라 친구로서
* * *
내가 왕실 의전관으로 임명됨과 더불어 가신들 전원이 기사 작위를 받고 돌아온 그날.
공작저에서는 그 어느 때보다도 휘황찬란한 연회가 열렸다. 지난번 주연이 레핀 가문의 식솔들을 위한 자리였다면, 이번은 외부인들도 참석하는 연회.
‘상다리가 부러진다’는 표현이 걸맞을 정도로 화려하게 차려놓은 음식에 수십 년 된 귀한 술을 아낌없이 내놓는 것은 물론이요, 오늘을 위해 따로 부른 악사들이 흥을 한창 돋웠다.
“축하합니다, 앨빈 경!”
앨빈은 그새 왕궁에서 인맥을 만든 모양인지, 초대받은 경비대원 몇몇과 반가이 인사를 나누었고.
다른 이들처럼 서임은 받지 못했지만 마음만큼은 다르지 않은 카렌, 바바, 농농이들도 참석해 기쁨을 함께 나눴다.
화색이 가득한 얼굴로 즐거워하는 가신들을 흐뭇하게 바라보는데.
“저, 세자르 공자님.”
에드윈 레핀이 내 눈치를 살피며 말을 붙였다.
“에드윈 경, 연회는 잘 즐기고 계십니까?”
그는 간단히 안부를 묻더니 뜬금없이 도나를 왕궁 시녀로 취직시켜줘서 고맙다고 했다.
“아, 그리고 한 가지 덧붙이자면 크로이츠 백작이 요즘은 더는 그런 말을 꺼내지 않더군요.”
그런 말.
두루뭉술한 표현이었지만 무엇을 가리키는지는 명확했다.
‘왕위 계승권이니 어쩌니 하는 말을 입에 담지 않는다는 거겠지.’
다들 국왕이 나를 총애해서 후한 보상을 내렸다고 생각하지만, 테레사는 그렇게 만만한 위인이 아니다.
일종의 거래에 대한 보상이랄까.
‘줄 만하니까 준 거다, 이 말이지.’
수도사의 테러 사건이 터진 직후, 수도의 여론은 왕실에 매우 안 좋게 돌아갔다.
그런데 소위 ‘테오 2세의 픽’이나 다를 바 없는 애송이, 세자르 레핀이 사건을 극적으로 해결하고 인질까지 구출해냈다?
여론이 한순간에 뒤집혔을 뿐 아니라, 국왕의 사람 보는 눈까지 입증된 셈이 아닌가.
덕분에 지금은 왕가에 대한 여론이 많이 좋아진 상황이며.
‘크로이츠 백작이 저런 얘기를 꺼내기에는 그닥 좋지 않은 타이밍이라는 것.’
나는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인 뒤 에드윈과의 대화를 마쳤다.
술을 한 잔 할까 싶어 연회장 중앙으로 걸어가자.
거나하게 취한 디터와 발닉이 손님들에게 잔뜩 둘러싸인 채 무용담을 늘어놓는 것이 보였다.
“그래서··· 여기 있는 디터 경이 놈들의 머리통을 박살! 냈다 아닙니까.”
“아, 이거 왜 이러십니까 발닉 경. 발닉 경이야말로 수도사들 모르게 바람처럼 들어와 인질들을···.”
“디터 경!”
“발닉 경!”
···어제부터 아주 촌극이 따로 없다.
둘이서 서로 ‘디터 경!’ ‘발닉 경’ 하며 주거니 받거니 하는 모습을 보니 절로 웃음이 나왔지만.
‘얼마나 좋으면 그러겠어.’
그러고 보니 언젠가 내가 저 둘에게 했던 말이 기억난다.
그때가 아마 아카데미에 들어간 지 얼마 안 됐을 때였던 것 같은데.
‘지금 생각해보면 무슨 배짱으로 공수표를 날렸는지 모르겠지만.’
아마 저 둘도 딱히 그 말을 믿진 않았을 거다. 철없는 귀족 도련님이 귀엽게 구는구나, 정도로 생각했겠지.
그런데 작위를 돈으로 산 것도 아니고 무려 ‘국왕’에게 서임을 받았으니 얼마나 기쁘겠는가.
···내가 내건 공약이 공약空約으로 끝나지 않게 된 것도 참으로 다행이고 말이다.
나는 두 사람의 이야기가 끝나길 기다렸다. 손님들이 다른 곳으로 흩어지고 나서야 둘에게 다가가 말을 붙였다.
“정식 기사가 된 것을 축하한다, 발닉 경, 디터 경.”
“···주군.”
“도련님.”
나와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다.
이제 이 두 사람과는 굳이 말로 하지 않아도 마음을 다 아는 사이가 된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데.
“이 발닉, 도련님을 위해 평생을 바칠 것을 다시 한 번 맹세드립니다.”
“저 역시 맹세드립니다, 주군.”
감동을 받다 못해 눈물이라도 흘릴 기세의 발닉과 디터.
그 둘을 보며 나는 일부러 장난스럽게 말했다.
“고작 기사 작위 단 것 가지고 뭘 그렇게 감동받고 그래.”
“고작이라뇨, 그게 얼마나-”
“내 말은, 이게 끝이 아닐 거라는 얘기다.”
“네?”
두 사람이 당황하는 것이 보인다.
“내가 말했었잖아. 언젠가 너희를 최소 남작 지위는 지닌 귀족으로 만들어주겠다고.”
“···!”
“이제 겨우 시작일 뿐이다, 디터, 발닉.”
두 사람의 눈이 의미심장하게 빛났다.
* * *
디터와 발닉과 이야기를 마치고 다시 자리를 옮긴 나는, 마음만큼 쉽게 움직일 수가 없었는데.
일단 초대객이 많은 만큼 연회장이 어마어마하게 북적였으며.
“세자르 공!”
“괜찮으시면 함께···.”
“세자르 공자님, 저희 조찬기마청년단에서 신입회원을···.”
“저희 데스할트 가문의 초대는 언제쯤···.”
이 자리의 주인공이라 할 수 있는 나를 붙잡고 놔주지 않으려 했기 때문이다.
유력자들 또한 적지 않았으므로 이들과 인맥을 만들어두면 좋겠지만.
“···감사합니다. 그럼 저는 이만···.”
짧은 시간 내에 수많은 사건을 연달아 겪은 탓일까.
어쩐지 피로감이 몰려온 탓에 그럴 만한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지금 내게 필요한 건-
‘마음 맞는 동료들과 술을 마시며 회포를 풀고 진득한 대화를 나누는 것.’
전에도 그랬다.
경기 마치고 나면 다같이 모여 밤새도록 달리며 그간 쌓인 스트레스나 긴장감을 풀곤 했으니까.
마치 기계에 기름칠을 해주듯 말이다.
나는 술잔을 들고 연회장 밖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정원에 들어서자 풀내음이 물씬 풍기는 밤 공기가 코를 간질인다.
‘저쪽에 잠시 앉을까.’
가운데 자리한 분수로 다가가자, 익숙한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카렌?”
“···여긴 왜 왔어, 오늘 연회의 주인공이면서.”
카렌이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간만에 드레스를 차려입은 모습이 낯설었다.
‘최근에는 거의 남장을 한 채로 봤으니까.’
나는 조금 어색해하다 그녀 옆에 앉았다.
“너야말로 왜 여기 숨어 있는데? 모처럼 근사한 드레스까지 입었으면서.”
“딱히 남들한테 보여주려고 입은 거 아니니까 상관없거든.”
“···뭐 그렇다면야.”
지나가던 누구든 뒤돌아보게 할 정도로 아름다운 차림 때문일까.
아니면 유난히 청명한 밤하늘에 잠긴 정원이 풀벌레 소리까지 들려올 정도로 고즈넉했기 때문일까.
우리 사이에 잠시 어색한 기류가 흘렀다.
“···.”
할 말을 찾지 못한 채 애꿎은 술잔만 만지작거리는데.
카렌이 먼저 입을 열었다.
“근데 이젠 그 팔찌, 안 채워도 되는 거야?”
“팔찌라니?”
“아니, 전에 바바 놈한테 채웠던 것 말이야.”
아.
카렌은 내가 그걸 에드윈 경에게 채웠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구나.
“뭐, 이젠 상관없지 않을까.”
심드렁하게 대꾸하자 카렌이 미간을 찌푸렸다.
“그 자식이 배신이라도 하면 어쩌려고?”
“글쎄, 바바가 믿을 수 없는 놈인 건 분명하지만···.”
그자가 발닉에 버금가는 자본주의의 첨병이며.
그 어디에서도 내가 주는 만큼 녹봉을 받을 만한 일자리를 찾기 어려울 것임은 확실하다.
“그렇다고 배신하진 않을 거야.”
“뭘 믿고.”
“내 눈엔 다 보이거든.”
자신감 있는 말에 카렌이 헛웃음을 지었다.
“그래, 네가 그렇다면 그렇겠지.”
그렇게 잠시 대화가 끊기나 싶었는데.
카렌은 정원을 멍하니 바라보다 돌연 이렇게 물었다.
“세자르. 이번 작전 말이야.”
“응?”
그녀가 고개를 돌려 나를 마주 보았다.
···얼굴이 너무 가깝다.
“왜 굳이 네가 직접 뛰어들었어? 그것도 가장 위험한 역할을 맡았잖아.”
“딱히 제일 위험한 건 아니었는데.”
무소불위의 괴력을 지닌 디터와 함께했을 뿐더러.
무엇보다 예기치 않은 공격으로부터 보호해주는 스킬 ‘그림자 방패’가 있었으니까.
‘솔직히 말하면 사기캐나 다름없지.’
잠시 고민했다.
다른 사람이라면 모르겠지만 카렌에게는 말해도 괜찮지 않을까.
머뭇거리던 나는 운을 띄웠다.
“내가 미래를 볼 수 있다는 것 잊지 않았지, 카렌?”
“···.”
“원래 큰 힘에는 큰 책임이 따르는 법이라고.”
-라고 피터 파커의 벤 삼촌이 말씀하시지 않았던가.
이거야말로 이런 상황에 인용하기 딱 좋은 명문이지, 암.
“근데 그것 말고도 능력이 하나 더 있어.”
“더 있다고? 하지만 한 사람이 두 개의 이능을 가지는 게 가능해?”
“나도 정확한 이유는 몰라. 하지만···.”
나는 그녀를 마주 보았다.
아름답고 섬세한 얼굴에는 걱정하는 기색이 가득하다.
“일종의 절대 방패 같은 능력이라고 하면 비슷하려나.”
“···.”
“여튼 그런 힘도 있으니 너무 걱정하진 말란 얘기야.”
카렌은 살짝 안도하는 기색이긴 했지만, 아예 안심하진 못하는 듯했다.
“그래도 넌 이제 너 혼자만 책임지는 입장이 아니잖아. 수많은 사람들을 이끄는 주군이라고. 네게 만약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말을 흐린 그녀가 입술을 지그시 깨문다.
···전혀 예상치 못한 반응에 조금 당황한 순간.
“세자르.”
돌연, 그녀의 두 팔이 나를 감싸안았다.
갑작스러운 접촉에 살짝 굳어 있는데.
“다행이야. 네가 다치지 않아서, 무사해서···.”
내 어깨에 기댄 탓에 웅얼거리듯 흘러나오는 카렌의 목소리가 귓전을 울렸다.
그 숨결마저 느껴질 듯한 거리였다.
“나는 네 가장 충성스러운 가신이지만, 때로는 가신이 아니라···.”
가신이 아니라 뭔데.
나도 모르게 긴장해 침을 꿀꺽 삼킨 순간.
“제일 친한 친구로서 걱정하는 것, 알지?”
그 말을 끝으로 카렌은 나를 껴안은 팔을 풀었다.
그럼에도 여전히 가까운 거리에서, 환하게 웃는 그녀의 얼굴이 나를 정면으로 향했다.
‘대답해야 하는데.’
방금 전의 그 온기 때문일까.
아님 귓가를 간질이던 달콤한 목소리 때문일까.
어쩐지 목소리가 꽉 잠긴 듯 쉬이 나오지 않는다.
“···그래, 알지.”
간신히 한 말이라곤 그게 전부였다.
카렌이 피식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제 난 가볼게. 연회가 끝나려면 한참 남았으니까, 여기서 혼자만의 시간을 좀 보내다 오라고.”
그대로 뒤돌아선 그녀가 연회장으로 천천히 걸어가는데.
그 등을 향해 말했다.
“···항상 네게 고마워하는 것 알지?”
카렌은 우뚝 멈췄지만 돌아보지 않았다.
그 자세 그대로 손만 흔들어 보일 뿐.
“편히 쉬다 와, 세자르.”
그녀의 모습이 연회장 안으로 사라진 후에도 나는 그 기이한 감회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묘한 기분이네.”
그렇게 한동안 밤 풍경을 눈에 담은 채 앉아 있었다.
평소와는 다른 박자로 뛰어대던 심장이 제 페이스를 되찾고.
나를 힘주어 안았던 그 팔의 온기가 마침내 전부 사라졌을 때.
‘이제 들어가볼까.’
자리에서 일어서려던 순간,
반가운 메시지가 눈앞에 떴다.
[도전과제 ‘범인 검거’ 달성! - 트리니다드 수도원 사건의 책임자를 체포했습니다.]
[도전과제 ‘한 명도 빠짐없이’ 달성! - 트리니다드 수도원에 붙잡힌 인질들을 무사히 구출했습니다.]
[도전과제 ‘신분 상승’ 달성! - 왕궁 의전관으로 임명되었습니다.]
이번에도 일타삼피로구나.
나는 주먹을 꽉 쥐었다.
게다가 그것이 끝이 아니었는데.
[달성도가 ‘최상’을 기록해 보상이 상향 조정됩니다.]
[보상으로···]
곧 이어진 문구에 나도 모르게 눈이 커졌다.
[‘프리퀄 외전 : 왕자살해자의 배후’이 주어집니다.]
‘왕자살해자’라면···.
이언 왕세자와 2왕자의 죽음을 사주한 자를 말하는 건가?
“···.”
이윽고 눈앞에 나타난 낡은 표지의 책을, 나는 홀린 듯이 펼쳐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