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작가의 서자로 살아가는 법-115화 (115/176)

성공의 맛은 달콤하다

성문이 무너지자 레핀 사병대가 트리니다드 수도원을 장악하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기사단을 선봉으로 하여 상당수의 병력이 수도원으로 쏟아져 들어갔고.

“으아악!”

“알레스 신이시여, 우리를 지켜주···.”

성문 앞에 진을 치고 있던 수도사들을 순식간에 몰아붙였다.

“투항하라! 투항하는 자는 목숨은 살려주겠다!”

“알레스 신의 검은 꺾이지 않는다!”

수도사 하나가 기개 있게 대꾸했지만.

“불응하는 자는 죽여도 좋다!”

그런 외침과 함께 기마대가 맨 앞줄의 수도사들을 산 채로 밟아버리는 광경에,

수도사들은 하나둘씩 투항하기 시작했다.

“···항복! 항복하겠다!”

누군가가 최후의 발악처럼 폭탄을 터뜨리려 했지만.

“알레스 신께 영광 있으리-”

탕!

불꽃을 내뿜는 총구 앞에서 무너져내렸으니.

병력의 압도적 차이.

그 절대적인 우위 앞에 수도사들이 할 수 있는 것은 얼마 없었다.

그렇게 전투가 마무리되고 투항한 포로들이 포박되는 가운데.

“저기··· 세자르 공자님이 나오신다!”

그 말대로였다.

희뿌연 연기에 감싸인 수도원 본관에서 빠져나오는 인영들이 레핀 군의 시야에 포착되었다.

아이를 하나씩 안은 세자르 레핀과 그 가신 디터의 모습에 병사들이 일제히 환호성을 질렀다.

“공자님께서 무사히 나오셨다!”

“인질을 구해내셨다!”

그리고.

그 둘이 나오기를 누구보다도 간절히 기다리던 사람이 있었으니.

“얘들아!”

“엄마! 아빠!”

···다름 아닌 퍼킨스 자작 부부였다.

두 사람은 미친 듯이 세자르와 디터에게 달려갔고.

“아이들은 무사합니다.”

세자르들이 내려주자 아이들은 눈물을 터뜨리며 부모에게 안겨들었다.

“엄마.”

“무서웠지, 정말 잘 견뎌냈다.”

“흑흑···.”

세자르 일행과 있을 때만 해도 비명 한 번 지르지 않고 듬직하던 아이들은,

부모를 보자마자 참았던 눈물을 터뜨렸다.

···그리고 그것은 디터 역시 마찬가지였는데.

“흑, 세, 세자르 님. 정말··· 잘됐어요.”

세자르는 디터의 눈물을 모른 척하며 그래, 라고만 대꾸했다.

한동안 아이들을 달래주던 부부가 뒤늦게 고개를 들며 두 사람에게 말했다.

“세자르 공자님, 디터 경. 정말로 감사합니다.”

“이 은혜를 어떻게 갚아야 할지···.”

눈물 범벅이 된 얼굴로 감사의 말을 수차례 되풀이하는 퍼킨스 자작 부부.

세자르는 잠시 멍해졌다가 이내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아뇨, 괜찮습니다.”

디터 또한 민망한 것인지 얼굴을 붉힌 채 연신 고개만 끄덕이는데.

그가 안고 나온 여덟 살짜리 소년이 동그래진 눈으로 디터를 가리켰다.

“어? 아줌마가 아니라 아저씨였네.”

“···.”

“근데 아저씨 옷이···.”

“응?”

그 말에 무심코 제 몸을 내려다본 디터의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변신의 약’ 효능이 다한 것인지 원래 모습으로 돌아온 것까지는 좋았는데.

워낙 덩치가 크다 보니, 입고 있던 자작 부인의 드레스가 다 뜯어져 너덜너덜해진 것.

“킥킥, 아저씨 너무 웃겨.”

“···얘, 그러는 거 아냐.”

“음, 디터. 이거라도 걸쳐라.”

세자르는 차마 못 볼 꼴을 봤다는 듯 고개를 돌리며 망토 하나를 건네주었고.

그것을 걸친 디터가 머쓱해하며 부인에게 말했다.

“저, 부인. 죄송합니다. 어쩌다 보니 옷이 다 뜯어져서···.”

“아뇨, 옷은 얼마든 뜯어져도 상관없어요.”

퍼킨스 자작 부인과 자작이 아이들을 품에서 놓은 뒤 두 사람에게 무릎을 꿇었다.

“자작님, 부인, 얼른 일어나시지요.”

당황한 세자르가 그들을 일으키려 했지만, 두 사람은 일어나지 않았다.

“아뇨. 정말로··· 감사드립니다.”

“···.”

그때.

고개를 든 퍼킨슨 자작과 세자르의 눈이 마주쳤다.

자작은 진심을 가득 담은 목소리로 말했다.

“세자르 공자님. 이 퍼킨슨 가문의 명예를 걸고, 공자님과 가신 분들을 저희 가문의 영원한 친구로 여길 것을 약속드립니다.”

세자르는 어쩐지 먹먹해진 얼굴로 한참이나 입을 열지 않더니.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감사합니다, 라고 대답할 뿐이었다.

* * *

작전을 성공적으로 마치고 공작저로 돌아가자.

“도련님! 감축드립니다!”

누구보다도 조마조마해했다는 제이콥을 시작으로 모든 사용인들이 뛰쳐나와 전투의 승리를 축하했고.

나뿐이 아니라 작전을 수행한 모두를 축하하기 위한 주연이 벌어졌다.

가신들과 병사들이 신나서 축배를 들었다.

“축하드립니다!”

“세자르 공자님 만세!”

“공자님을 위해 다들 건배!”

“와아아!”

거기에 공작저의 식속들까지 가세해 본격적인 술판이 벌어지는 가운데.

“그래. 다들 고맙다.”

나는 짧게 감사의 말을 남긴 뒤 공작의 집무실로 향했다. 제이콥이 ‘각하께서 계속 기다리셨다’라고 슬쩍 귀띔해줬기 때문.

문을 노크하자, 들어오라는 공작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버지, 기다리셨다 들었습니다.”

“···무사해서 다행이구나.”

“그럼요. 그뿐 아니라 대승을 거두었습니다.”

나는 조금 우쭐한 마음으로 그에게 자초지종을 털어놓았다.

어떻게 잠입했는지.

어떤 식으로 인질을 구출하고, 또 바깥에서는 수도사들의 초점을 분산시키기 위해 어떤 작전을 수행했는지.

한참을 신나게 이야기하고 나니 그제야 공작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그래, 다행이구나. 정말로··· 다행이야.”

공작이 주름진 손을 천천히 뻗었다.

나도 모르게 붙잡은 그 거칠고 투박한 손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걱정했다.”

“···.”

그 한 마디에, 나는 공작이 진정으로 궁금해했던 것은 나의 전황이 아니라 안위였음을 깨달았다.

그 손을 놓는데 어쩐지 가슴이 뭉클했다.

“···저는 괜찮습니다, 아버지.”

그 때문일까.

오늘 처음으로, 레핀 공작을 ‘아버지’라 부르는 게 어색하지 않게 느껴졌다.

* * *

일주일 뒤.

나는 가신단을 데리고 왕궁으로 가게 되었다.

“도련님, 준비되셨습니까?”

조심스레 방에 들어온 제이콥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야, 이거 우리 도련님은 언제 봐도 멋있으시지만 오늘은 한층 더 눈부시군요!”

“적당히 해, 제이콥.”

“아니, 아닙니다. 이 제이콥이 과장하는 게 아닙니다요.”

전신 거울 앞에 서서 복장을 점검하는 나를 보며 제이콥이 감탄의 탄성을 냈다.

“야, 이렇게 입으니 정말 어느 먼 나라의 왕자님 같으시군요.”

“고맙다.”

아무렇지 않은 척하긴 했지만,

오늘 의상이 화려하다는 데에는 나 역시 동의하는 바였다.

‘재봉사가 오늘 따라 힘을 준 모양이군.’

목과 소매에 보석을 잔뜩 달아놓은 것은 물론이요, 망토에도 금사로 일일이 자수를 놓았다.

허리춤에 다는 장식용 검도 화려하기가 이를 데 없으며.

공작새 깃털을 무거울 정도로 달아놓은 커다란 모자야말로 이 17세기 룩을 완성시키는 아이템이랄까.

“하긴 오늘은 보통 날이 아니니, 누구보다도 돋보이게 입으시는 게 마땅하지요.”

“···그래도 좀 지나친 감이 없잖은데.”

“지나치긴요! 무려 왕실 의전관으로 임명받으시는 건데요.”

그 말이 맞다.

지난번 트리니다드 수도회 사건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한 후, 곧바로 의회의 승인이 떨어졌고.

오늘은 국왕과 귀족회 의원들이 모두 자리한 가운데서 왕실 의전관으로 공식 임명받을 예정.

‘생각만 해도 뿌듯하군.’

우여곡절이 있긴 했지만, 결국은 일이 계획대로 진행된다는 생각에 콧노래가 절로 나오는데.

“···이 제이콥은 참으로 감개무량합니다, 도련님.”

제이콥의 목소리가 어쩐지 먹먹하게 들린다.

옆을 돌아보니 그의 눈가가 붉어져 있다.

“주책이라고 하실지 모르지만, 예전 생각을 하면···.”

“비루 먹은 망아지처럼 빌빌거렸던 시절 말이야?”

내 농 섞인 말에 제이콥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때도 도련님은 총명하셨지요. ···어린 몸으로 부당하게 괴롭힘 받는 것을 보며 아무런 도움도 드릴 수 없는 것이 참으로 죄송했는데···.”

부당한 괴롭힘.

독을 넣은 수프라든가, 같잖은 놈에게 채찍으로 학대당한다든가.

제대로 된 음식조차 먹지 못하던 시절이 있었더랬지만···.

“제이콥.”

나는 그의 어깨를 가볍게 짚었다.

“다 지난 일이야. 그리고 자네 덕분에 내가 그 시절을 어느 정도 버텼다면 그 말을 믿을 텐가?”

“도련님.”

“이젠 그때와는 모든 것이 달라졌으니까 말이야.”

그 말을 끝으로 나는 1층으로 내려왔다.

“출발하지.”

나 못지 않게 화려하게 차려입은 가신단이 활짝 웃었다.

“네, 주군!”

* * *

왕궁의 대연회실.

커다란 홀에 사람들이 가득 찼다. 웅성거리는 소리가 높은 천장에 부딪쳐 반향을 일으키는 가운데.

“에스닐의 태양, 국왕 폐하 납시오!”

테오 2세, 아니 테레사가 여느 때보다 더욱 화려한 의상을 입고 등장했다.

벨벳 카펫을 밟고 그녀가 왕좌로 걸어가는 동안, 모든 이들이 그녀 앞에 고개를 조아렸고.

테레사가 왕좌에 착석하자, 그 옆에 선 시종이 두루마리에 적힌 이름들을 하나씩 읽어내려갔다.

“레핀 가문의 장자, 세자르.

페킹튼 가문의 차남, 리암.

레핀 가문의 가신, 발닉···.”

이후로 디터, 우만, 롯, 나담, 나훕, 나만의 이름이 차례로 불리는데.

리암이 연신 어딘가를 흘긋거리는 게 보였다.

저기에 누가 있길래, 싶어 돌아보니 기사단장인 페킹튼 백작이다.

“어흠, 흠!”

애써 티를 안 내려고 하지만 얼굴이 잔뜩 상기돼 있다. 누가 봐도 ‘아들의 성장이 뿌듯해서 견딜 수 없는 아들 바보 아버지’가 아닌가 싶다.

나는 옅은 미소를 지은 채 가신들을 돌아보았다.

“후우, 후우···.”

잔뜩 긴장해서 심호흡을 하는 발닉은 물론이고.

사람이 너무 많다며 식은땀을 흘리는 앨빈, 하도 달달 떨어서 이를 딱딱 부딪치는 디터는 물론이고.

“롯, 그만 좀 떨어.”

“저 안 떨었는데요··· 우만 님이 떠는 게 아닐까요?”

“내가 언제.”

공작저에서 출발할 때만 해도 아무렇잖아 보이던 우만까지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물론 가신단 전원이 이 자리에 참석한 것은 아니다.

‘나는 그런 자리에서 정체를 드러내면 안 되는 것 알지?’

카렌은 밀정으로 활약해야 하는 만큼 목록에서 빠지겠다는 의사를 확실히했고.

바바 또한 존재를 감추는 게 더 편하다고 했으며.

인간이 아님이 드러나서는 안 되는 농농이 역시 마찬가지였다. 본인은 무척이나 아쉬워했지만 말이다.

[옹, 아웅 부앙, 어맘맘마! 어마맘마!]

‘나야말로 진정한 구국 영웅이 아닌가, 그런 내가 그 자리에 빠져야 한다니, 이 얼마나 부당한지! 라고 하시는데요···.’

시종의 낭독이 끝나자 이번에는 국왕이 입을 열었다.

“이하 세자르 레핀 공과 그 가신들은 앞으로 나오라.”

나와 가신들이 천천히 카펫 위로 걸어 왕좌로 다가갔다.

우리를, 그중에서도 내게 떨어지는 시선이 어찌나 강렬한지 등 뒤가 따가울 정도다.

국왕이 자리한 만큼 다들 목소리를 한껏 낮췄지만, 그럼에도 수군거리는 소리가 귓전까지 들려온다.

“저자가 바로···.”

“소문에 따르면 미래를 본다던데.”

“인질을 구하러 직접 뛰어들었다는데···.”

“본인이 직접? 말도 안 되는···.”

그 저변에 자리한 것이 호감이든 비호감이든.

신뢰이든 불신이든 하등 상관없었다.

지금은 그저 이 자리까지 오게 된 것.

이렇게 모두의 관심 한가운데에 있게 된 것만이 뿌듯할 뿐이었으니까.

한 발자국, 한 발자국.

천천히 나아가 왕좌 앞에 서자 테레사가 나를 부드러운 표정으로 내려다본다.

“레핀 가문의 장자, 세자르는 무릎을 꿇으라.”

예법에 맞춰 한쪽 무릎을 꿇고, 다른 쪽 무릎은 세워 앉았다.

고개를 숙이자 국왕이 의전용 검을 내 어깨에 올려놓는 것이 느껴진다.

“···을 무사히 해결한 공로를 인정하여, 세자르 레핀을 새로운 ‘왕실 의전관’으로 임명하느니.”

마음 같아서는 환호성을 지르고 싶었지만.

나는 고개를 숙인 자세 그대로 두 주먹을 꽉 쥐었다.

임명이 끝난 뒤 일어서자 이번에는 국왕의 시선이 내 가신들에게로 향했다.

“또한 세자르 레핀을 보좌하는 가신들, 리암, 발닉, 디터···.”

테레사는 단 하나의 이름도 빠짐 없이 부른 후, 그들을 돌아보며 자애로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대들 각자에게 감사의 뜻으로 금화 자루 한 개씩을 하사하며···.”

시종들이 가져온 두툼해 보이는 금화 자루에 가신들의 눈이 커졌다.

호, 폐하가 웬일로 통 크게 나오시네 라고 생각한 것도 잠시.

“가신단 전원에게 평기사 작위를 부여한다.”

“···!”

나를 비롯한 모든 가신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놀란 것은 우리뿐이 아니었다.

“무··· 무슨!”

“하, 이것 참 통이 큰 처사가 아니신가.”

“세자르 공이 국왕 폐하의 총애를 한몸에 받는다 하더니···.”

서임식에 참석한 이들 모두가 놀람을 금치 못했으니까.

어쨌거나.

테레사는 가신들에게도 한 명 한 명 서임 의식을 해주었고.

“이거··· 꿈인지 생시인지 모르겠군요.”

행사가 전부 끝나고 공작저로 돌아가는 길.

마차 안에서 발닉은 여전히 얼떨떨한 얼굴로 제 뺨을 꼬집어보았다.

“제가 기사가 되었다니, 이게 말이 되는 이야기입니까.”

“발닉 경!”

디터의 말에 발닉이 신나게 대꾸했다.

“왜 그러시나 디터 경!”

“감축드립니다 발닉 경!”

“자네도 축하하네 디터 경!”

서로의 이름에 ‘경’을 붙여 부르며 신이 난 두 사람의 모습에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가슴 어딘가가 기분 좋게 간질거리는 느낌이다.

‘언젠가부터 나만을 위해 살겠다고 다짐했건만.’

그래, 그렇게 뒤도 돌아보지 않은 덕분에 승승장구할 수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렇게 ‘내 사람들’이 잘되고 기뻐하는 모습을 보니, 나 혼자만의 성공보다 그 기쁨이 한층 크게 느껴진다.

“두 사람, 다 축하해.”

한 가지는 확실했다.

이곳에 온 후 숱하게 맛보았던 성공 가운데,

이번이야말로 가장 달콤한 성공이 분명하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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