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작가의 서자로 살아가는 법-113화 (113/176)

변신의 귀재

그다음 날 아침,

가신들 전원이 내 집무실에 모였다.

“소집한 이유는 다들 알고 있겠지?”

“트리니다드 수도회 소탕 작전을 맡게 되셨다 들었습니다만.”

발닉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도면 하나를 책상 위에 펼쳤다.

카렌이 힘써준 덕분에 어렵게 구한 도면이었다.

“이게 바로 트리니다드 수도원의 구조다.”

하늘을 찌를 듯 세워진 높은 수도원 건물.

스테인드글라스 창문과 각종 보석이 박혀 화려하기 그지없는 모습을 자랑하지만, 겉을 둘러싼 단단한 석벽이 방어물의 역할을 하는 구조다.

“상당히 견고해 보이지만, 정공법으로 공략하는 것도 충분히 가능할 것 같습니다만.”

디터의 말에 앨빈이 아쉬운 듯 말했다.

“그러게요. ···인질만 잡혀 있는 상황이 아니라면 좋았을 텐데.”

그 말대로였다.

이 정도 두께의 성벽은 공성병기 외에도 대포를 동원하면 허무는 것 자체는 문제가 아니지만.

‘그럼 저 안에 잡힌 영지민들은 물론이고, 퍼킨스 자작의 자녀들까지 싸그리 죽여버리겠지.’

꼭지가 돌아버린 광신도 놈들이니 그보다 더 끔찍한 짓도 저지를 수 있을 거다.

예로부터 미친 놈은 더러워서 피하는 게 아니라 무서워서 피한다고 했다.

“그 말이 맞다, 앨빈. 지금처럼 전 백성의 관심이 인질들의 생사에 걸린 상황에서, 섣불리 행동했다간 안 하는 것만도 못 한 결과가 될 수 있어.”

“어쩌다 이런 까다로운 일을 맡게 된 거야? 괜히 자칫했다간···.”

툴툴거리는 우만.

나를 바라보는 그의 눈동자에 우려하는 빛이 스쳤다.

“걱정 마, 우만.”

“내가 언제 걱정했다고-”

“물론 떠밀려서 맡게 된 거고, 분명 까다로운 작전임은 명백하지만.”

나는 한쪽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이번 일을 성공적으로 수행하면 의회의 정식 승인을 받아 왕실 의전관이 될 예정이니까.”

“!”

가신들의 눈에 기대감이 어렸다.

‘왕실 의전관’이 어떤 자리인지 다들 잘 알 터이니 말이지.

“게다가 내겐 절대 실패하지 않을 전략도 있다.”

그들의 눈에 떠오른 기대감이 한층 강렬해졌다.

“카렌, 부탁한 건 다 준비됐나?”

카렌은 준비해온 자료를 건넸다.

내가 요청했던 대로 수도원의 현 상황, 수도원 건물의 약점, 과격파 수도사들의 구성 따위가 나열돼 있었다.

이건 사실 얼마 전에 부탁한 사항들인데, 그녀에게 미리 언질을 줄 수 있었던 것은.

‘도전과제 목록이 영 심상치 않았거든.’

‘변장의 약’을 보상으로 받은 후, 과제목록이 대폭 갱신되었는데.

-아카데미를 무사히 졸업했나요?

-트리니다드 수도원 사건을 해결했나요?

-트리니다드 수도원에 붙잡힌 인질들을 무사히 구출했나요?

-왕궁 의전관으로 임명되었나요?

-반란의 조짐을 파악했나요?

봐라. 두 번째와 세 번째.

수도원 사건 관련만 두 개에다 ‘변장의 약’을 보상으로 주는 걸 보니.

‘이 수도원 사건을 내가 해결해야 하는 상황이 찾아올 것 같군.’

결국 그 예감은 보기 좋게 들어맞은 셈이다.

어쨌거나.

‘카렌의 보고서는 언제 봐도 훌륭하군.’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이는데, 내 옆얼굴을 바라보던 카렌이 입을 열었다.

“암문의 암호도 알아냈어.”

“정말?”

그녀의 입술이 호를 그리며 구부러졌다.

“물론 쉽지는 않았지만.”

새삼 카렌의 밀정대가 정보력이 어마어마하구나 싶다.

‘부탁하긴 했지만, 암문 암호까지 알아낼 줄은 몰랐는데.’

‘암문’이란 일종의 비밀 통로 혹은 쪽문을 말한다.

성곽의 후미진 곳에 적이 알지 못하게 뚫어놓아 아군이나 군수품을 몰래몰래 들여보내는 용도로 쓰이는 문.

그리고 이 암문으로 수도원에 잠입하는 게, 내가 세운 전략 중 하나였으니까.

내 얼굴 표정을 본 카렌이 활짝 웃었다.

“이 정도면 꽤 훌륭하지 않아?”

어디 그냥 훌륭할 뿐인가.

넌 최고의 밀정이야 카렌! 이라고 동네방네 소문내고 다니고 싶은 것을 꾹 참고 말했다.

“응, 엄청나게.”

이 정도 칭찬에도 카렌은 만족한 눈치였으니.

나는 나머지 가신들을 보며 브리핑을 이어나갔다.

“나를 포함한 다섯 명이 수도원에 잠입한다.”

그중 절반은 과격파 리더를 상대하고, 나머지 절반은 인질을 풀어내 그들의 안전을 확보한다.

“나머지 가신들은 사병대를 이끌고 각종 공성병기, 대포를 활용해 바깥에서부터 성벽을 부순다.”

여기서 중점은 최대한 요란하게, 화려하게 공격할 것.

···수도사들의 관심을 바깥으로 돌리기 위한 양동작전의 일종이다.

가신들의 얼굴에 어린 긴장감을 눈치채며 내가 말했다.

“그럼 누가 잠입할래?”

거의 대부분이 자원한 가운데, 나는 그중 네 명을 골랐고.

이틀 뒤에 곧바로 작전에 돌입할 것임을 알렸다.

“이틀 뒤면 너무 급박하지 않겠습니까?”

발닉의 지적은 합당했지만.

“급박하더라도 최대한 빨리 시작해야 해. 내가 이 작전을 맡았다는 얘기가 퍼져 나가는 건 순식간이다.”

정보가 수도사들의 귀에 들어가기까지 얼마나 걸릴까.

그들이 쓸데없는 경계의 날을 세우기 전에 작전을 시행해야 한다.

“리암, 앨빈, 3형제.”

“네!”

“이틀 안에 부대 정비를 마치고, 곧바로 전투에 투입할 준비를 해두도록.”

“알겠습니다!”

그렇게 분주한 이틀이 흘러갔고.

나는 가신들을 불러 그들 앞에 ‘변신의 약’을 꺼내 보였다.

“최대 여섯 시간 동안 너희들의 모습을 바꿔줄 약이다.”

나와 같이 수도원에 잠입하기로 한 나머지 네 명이 고개를 끄덕였다.

보기만 해도 구역질이 날 듯한 점액질의 액체가 든 병에 제각기 라벨이 붙어 있다.

라벨에 적힌 이름은 ‘퍼킨스1’, ‘퍼킨스2’, ‘수도사1’, ‘수도사2’, ‘수도사3’.

‘퍼킨스 자작가와 합의도 잘 마무리되어 다행이군.’

아주 오래 전에 받은 ‘중세식 편지쓰기 키트’.

그걸 간만에 활용할 기회가 생겼고, 덕분에 재활용 관련 특수과제를 달성해 보상도 받았지만···.

‘그건 나중에 한꺼번에 확인해야지.’

나는 그중 ‘퍼킨스 1’이라고 적힌 병을 들어올리며 말했다.

“원샷이다.”

“···원샷이 뭡니까?”

“한 번에 다 마시라고.”

내 신호에 맞춰 다섯 명은 약병의 내용물을 입안에 통째로 털어놓았다.

으엑, 꽥, 쿨럭, 우욱.

맛이 얼마나 끔찍한지 절로 올라오는 구역질을 억눌러야 할 정도였지만.

“···맙소사.”

약을 먹지 않은 리암이 경악의 신음을 뱉었다.

‘변신의 약’을 먹은 지 한 10초쯤 되었을까.

우그그그, 드드드드.

기이한 소리와 함께 복용자들의 외모가 뒤틀리기 시작했으니까.

잠시 후 모두의 변신이 완료되었고.

나는 원래 내 손보다 훨씬 커진 손바닥을 내려다보았다.

“···이 정도면 아무도 눈치 못 채겠는데?”

그렇게 말한 순간,

그 목소리마저 내 것이 아니라는 사실에 소름이 쫙 돋았다.

* * *

에스닐의 동부지대에 자리한 트리니다드 수도원.

가운데에 자리한 본관 건물을 둘러싼 석벽 위에 수도사 몇 명이서 보초를 서고 있다.

누군가는 검을, 누군가는 뭉툭한 메이스를 차고 있는 모습이 어색하지가 않다.

기실 그들은 대부분 무기 다루는 법을 정식으로 익힌 ‘전투 수도사’들이었으니까.

스스로를 ‘알레스 신의 검’이라 칭하는 트리니다드 수도사들은 살육 또한 신의 뜻이라면 정당화된다고 여겼다.

본디 트리니다드 수도회는 엄격한 수행, 더 나아가서는 끔찍한 고행까지 불사하는 원칙주의적 집단이었지만.

얼마 전 내분이 일어나 원장이 살해당한 후, 그 엄격하던 규율은 다소 느슨해졌고.

그러한 분위기는 보초를 서는 수도사들에게서도 나타났다.

“···이 짓도 지긋지긋하군.”

석벽의 암문을 담당하는 수도사가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왕실에 정면으로 반기를 들고 수도원 안에 틀어박힌 지 한 달째.

운 좋게 귀족가 자녀를 인질로 잡은 덕분에 왕실군이 함부로 공격하지 못할 것은 명백했지만.

“이거 원, 뱃가죽이 등에 들러붙을 지경이니 말입니다.”

그의 말을 다른 수도사 하나가 받았다.

그 말대로, 지금 수도원은 심각한 식량 부족에 시달리는 중이었다.

덕분에 사기는 떨어질 대로 떨어진 상황.

“그래도 그 뭐냐, 퍼킨스 자작이 온다고 했잖아. 돈이랑 식량을 잔뜩 가져올 테니 자식들을 풀어달라고.”

“인질을 그렇게 쉽게 풀어줘도 됩니까? 그랬다가 왕실군이 그 사실을 알기라도 하면···.”

젊은 보초의 말에 나이든 보초가 교활한 미소를 지었다.

“새 원장이 어디 그럴 위인으로 보여? 뽑아낼 것만 뽑아내고 쥐도 새도 모르게 처리해버리겠지.”

“아···.”

그렇게 둘의 대화가 이어지던 순간.

구석에 자리해 눈에 띄지 않는 암문에서 누군가가 모습을 드러냈고.

놀란 보초들이 벌떡 일어나 외쳤다.

“누구냐!”

들어온 것은 트리니다드 수도회 정복 차림의 수도사 세 명.

그들이 두건을 벗어 탁발한 머리를 내보이자 보초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누군가 했더니 클라우스 너였군. 그래도 규정은 규정이니, 암호를 대라.”

클라우스라 불린 수도사가 입을 열었다.

“이 세상을 만든 알레스 신께서는 한 손에는 사랑을, 한 손에는 검을 쥐셨도다.”

“좋아, 들어가. 대체 어떻게 빠져나온 거야? 몰래 도망쳤다가 온 건가, 클라우스? 너도 그날 현장에 나갔었잖아.”

클라우스는 불편한 기색으로 어색하게 말했다.

“그게··· 붙잡힐 뻔했는데 경비병들을 간신히 따돌렸다네. 저 둘과 합류해서 돌아왔지.”

그 말에 나이든 보초가 우뚝 멈춰서더니.

‘클라우스’를 천천히 돌아보며 물었다.

“너, 나한테 언제부터 반말을 했었지?”

“···.”

클라우스가 입을 꾹 다문 순간.

그 옆에 서 있던 수도사 하나가 돌연 뭔가를 휙 날렸고.

“윽!”

나이든 보초가 신음하며 픽 쓰러졌다.

그 모습에 젊은 보초의 눈이 커진 순간.

휙!

또 한 번 바람을 가르는 소리와 함께 젊은 보초 또한 쓰러졌다.

“가시죠.”

“방금 뭘 날린 겁니까, 롯 님?”

탁발 수도승으로 변신한 롯이 쓰러진 이들을 슥 돌아보며 말했다.

“카렌 님이 따로 챙겨주신 마비침입니다. 맞으면 하루 정도 기절하게 된다고 하는군요.”

“호, 두 분이 언제 그렇게 친해지신-”

“잡담은 그 정도 하고.”

나머지 수도사가 미간을 잔뜩 좁힌 채 안쪽으로 향하는 통로를 가리켰다.

“시간이 없으니 얼른 가자고.”

클라우스, 아니 발닉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우만 님.”

“···여기서 제발 좀 이름으로 부르지 말지.”

탁발 수도사로 변신한 발닉과 롯, 우만.

세 사람은 석벽을 지나 수도원 건물 안으로 들어갔고.

이내 다른 수도사들 사이에 자연스럽게 섞여들었다.

* * *

수도원의 중앙에 자리한 원장실.

성물과 성유함 따위가 사방을 빼곡하게 장식해놓은 가운데.

옛 원장이 죽은 뒤 그 자리를 차지한 새 원장은 초조한 기색으로 누군가를 기다리는 중이었다.

‘설마 안 오는 건 아니겠지.’

온건파들을 몰살한 과격파들이 ‘건국기념제 폭탄 사건’을 터뜨린 지 한 달 뒤.

풍족해 보이던 식량이 점차 바닥을 보이기 시작했고, 수도사들의 불만은 커져가던 가운데.

『제스퍼 퍼킨스입니다. 존경하는 수도원장님께 간곡히 드리고 싶은 청이 있으니···.』

그들이 인질로 붙잡고 있는 아이들의 아버지, 퍼킨스 자작이 협상안을 담은 전갈을 보내왔다.

아이들을 풀어주는 대신, 원하는 만큼의 식량 및 금전적 지원으로 보상하겠다는 내용의 글귀 아래 가문의 인장까지 찍혀 있었다.

‘이거라면!’

수도원장은 이 상황을 십분 이용할 계책을 짜냈고.

그 결과, 퍼킨스 자작 부부가 직접 이 자리에 와서 인질과 식량을 맞바꾸기로 했으니.

···물론 인질을 호락호락 풀어줄 생각은 없었다.

‘자작 부부 또한 새로운 인질로 삼으면 되지 않겠는가!’

멍청한 귀족 같으니라고.

그런 생각에 절로 웃음이 나오던 가운데,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원장님, 기다리던 손님이 오셨습니다.”

“안으로 모셔라.”

문이 열렸다.

그 뒤로 중년의 건장한 사내와 아름다운 여인이 들어섰다.

수도원장은 일어나지 않은 채 말을 건넸다.

“퍼킨스 자작 부부 되십니까.”

“···그렇소.”

퍼킨스 자작은 분을 억누르는 모양새로 대꾸했고, 자작 부인은 슬픈 눈으로 침묵을 지켰다.

그 옆에는 수도사들이 들고 온 커다란 궤짝이 놓여 있었다.

‘기다리던 선물이로군.’

퍼킨스 자작 일행은 정문으로 통과한 터였다.

수도사들은 일일이 몸 수색을 했으며 무기로 쓸 만한 게 없다는 것을 확인한 후에야 들여보냈다.

퍼킨스 자작은 이를 갈며 말했다.

“나는 약속을 지켰소. 그러니 얼른 내 아이들을 보여주시오!”

“물론입니다. 퍼킨스 영애와 영식을 데려와라!”

잠시 후.

탁발 수도사들이 두 아이를 데리고 나타났다.

이제 고작 열 살, 여덟 살에 불과한 아이들은 부모를 보자마자 울음을 터뜨렸다.

“아버지! 어머니!”

“무, 무서웠어요···.”

어머니의 품에 안겨들려는 두 아이를, 퍼킨스 자작이 붙잡아 안았다.

“얘들아.”

“···아버지?”

아이들이 알 수 없는 이질감에 고개를 든 순간.

퍼킨스 자작이 힘주어 말했다.

“둘 다 눈 감고 귀를 막거라.”

“···네?”

“아니다, 그냥 내 품에 안기거라.”

자작의 커다란 품에 두 아이가 폭 감싸이듯 안긴 순간.

자작 부인이 앞으로 나섰다.

궤짝을 손수 열더니 밀가루 포대 안에서 뭔가를 꺼냈다.

···척 봐도 무시무시해 보이는 금속 몽둥이였다.

“무, 무슨···.”

원장은 잠시 당황했지만 이내 코웃음을 쳤다.

아무리 무기를 든다 해봤자 어디까지나 아녀자가 아닌가.

‘반면 이쪽은 전투 수도사 여섯 명.’

원장을 비롯한 여섯 명의 수도사가 허리춤에서 검을 빼들고 자작 부인을 둘러쌌다.

“부인, 좋은 말로 할 때 그걸 내려놓으시지요.”

“···.”

아름다운 얼굴의 자작 부인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몽둥이를 들어올렸다.

부웅- 하고 공기를 가르며 휘두른 순간!

퍽!

그 끝에 스친 수도사 하나의 머리가 터져 나갔다.

“오, 신이시여!”

누군가의 말을 시작으로 단말마의 비명이 이어졌다.

“쿠억!”

“끄악!”

허공에서 몽둥이가 춤추며 피보라를 일으켰다.

“절대, 절대 보면 안 돼.”

퍼킨스 자작, 아니 내가 두 아이를 꼭 끌어안은 동안-

자작 부인, 아니 디터가 ‘섬멸의 일격’으로 원장실 안을 초토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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