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작가의 서자로 살아가는 법-112화 (112/176)

명사수?

* * *

왕궁 회의가 끝난 직후.

크로이츠 백작을 중심으로 한 귀족회 무리는 커피하우스의 VIP 룸으로 모여들었다.

“허, 그자가 설마 미끼를 덥석 물 줄이야!”

누군가 꺼낸 말에 귀족들이 껄껄 웃어젖혔다. 계획대로 상황이 돌아간 덕분에 대체로 기분이 좋은 가운데.

원로 귀족 하나가 걱정스러운 말을 꺼냈다.

“최근 저잣거리에 처음 듣는 노래가 유행한다는 거 알고 있소?”

“노래라니, 무슨 말씀이십니까?”

“아, 혹시 승냥이 어쩌고 저쩌고 하는···.”

은근히 중독성 있는 노랫가락 때문인지 젊은 귀족 하나가 노래를 흥얼거렸다.

“사자가 없는 곳에선~ 승냥이가~”

“호, 잘 부르시는구먼!”

다들 별 생각 없이 껄껄거리며 웃는데, 그 화제를 꺼낸 원로 귀족이 말을 잘랐다.

“지금 웃을 때가 아니오. 다들 이 노래가 무얼 의미하는지 모르겠소?”

“무얼 의미하다니···.”

어리둥절해하는 귀족들 사이로, 크로이츠 백작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꽂혔다.

“필시 국왕파의 누군가가 만들어 퍼뜨린 노래이지 않겠소.”

“백작 각하 말씀대로입니다, 우리 귀족파를 승냥이 떼에 비유한 거요!”

그제야 상황을 파악한 귀족들, 특히 노래를 불러젖히며 껄껄거리던 이들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그런···.”

“허, 대체 누가 이런 노래를···.”

“뻔하지 않소. 왕실이 위기에 몰린 상황에서 혹시라도 우리가 뭔 일을 저지를까 봐 미리 입막음을 하려는 속셈인 거지.”

크로이츠 백작은 그렇게 말하고는 입을 다물었다.

그의 생각은 어느새 이 삿된 노랫말에서 다른 곳으로 향한 터였으니까.

‘자리를 원한다면 그에 걸맞는 능력을 입증해 보이는 게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아까 전.

왕궁 회의를 마치고 나오는 길에 그는 저도 모르게 세자르 레핀의 어깨를 붙잡았다.

‘그··· 세자르 공, 정말 괜찮겠소?’

노리고 던진 미끼를 그가 이렇게 덥석 물 줄은 몰랐으니까.

속으로 쾌재를 부르지 않았다면 거짓이겠지만, 너무나 당연한 듯 그 일을 해내겠다고 다짐하는 젊은이를 보니 마음 한구석에서 희미한 죄책감이 인 탓이었다.

그의 복잡한 심경과 달리, 세자르의 얼굴은 상쾌해 보였다.

‘물론입니다, 백작 각하. 저 역시 국왕 폐하의 총애 하나만으로 모두가 선망하는 의전관 자리에 오르길 바라진 않습니다.’

‘그렇다면야 다행이지만···.’

‘걱정마십시오, 무사히 잘 수행하고 돌아오겠습니다.’

한 점의 흔들림도 없던 세자르의 강직한 눈빛이 그의 뇌리를 떠나지 않았다.

‘내가 너무 섣부른 판단을 한 것일까.’

최근 수도 사교계에 파란을 몰고 오는 이가 있다.

그것이 레핀 가문의 수치라 불렸던 서자이며, 그이가 무슨 수를 썼는지 레핀 공작의 총애를 얻어 적자가 되었다.

그런데 그자가 심지어는 국왕의 마음까지 얻어 국정을 좌지우지하려 한다.

‘소문만 들었을 때는 교활하고 제 잇속만 차리는 모사가인 줄 알았는데.’

처음으로 마주한 세자르 레핀은 그의 상상과는 확연히 달랐다.

머리부터 발 끝까지 흐르는 기품.

명석함이 느껴지는 지적인 목소리와 상대방에게 신뢰감을 주는 눈빛.

어딜 봐도 서자라기보다는 공작 가문의 적장자라고 할 법한 모습이었다.

“무슨 생각을 그리 골똘히 하십니까?”

“···아.”

옆자리에 앉은 귀족의 말에 크로이츠 백작은 상념에서 깨어났다.

“잠시 딴생각을 하고 있었소.”

“백작 각하도 그런 생각을 하시는군요.”

웃음기 띤 목소리로 답한 귀족이 사실 저도 마찬가지였다며 대꾸했다.

“뭐랄까, 아까 전 회의에서 세자르 공이 했던 말들이 워낙 기억에 남아서 말이지요.”

“···기억에 남다니?”

귀족은 주위의 눈치를 잠시 살피다가 말을 이었다.

“그, 왜 저잣거리에 이런 소문이 돌지 않았습니까. ···세자르 레핀 공은 미래를 보는 능력이 있다고.”

“그거야 그냥 소문이 아니었소?”

“한때는 저도 허무맹랑한 소문이라고만 생각했습니다만, 그 청년을 볼 때마다 알 수 없는 확신이 들더군요. ···그자는 미래를 보는 힘이 있을 뿐 아니라, 사태를 해결할 열쇠마저 지니고 있다고 말이지요.”

귀족은 진지한 목소리로 말을 마쳤다.

크로이츠 백작은 그가 했던 말들을 곰곰이 곱씹어보았다.

* * *

디터와 앨빈은 잔뜩 긴장한 채 상대의 반응을 기다렸다.

지금 그들이 있는 곳은 왕궁의 병영이며 마주한 이는 수도 기사단장인 페킹튼 백작.

‘리암 경의 아버지···라고 했던가.’

그뿐이 아니다.

흑의 기사 에드먼드 경, 철혈의 레핀 공작과 더불어 전장의 전설로 불렸던 3인방 중 한 명.

살아 있는 전설을 몸소 영접하려니 손발이 달달 떨릴 지경이었지만.

‘나는 주군을 대신해서 이곳에 온 자가 아닌가.’

자신이 형편없이 군다면 주군의 얼굴에 먹칠을 하는 꼴.

디터는 그렇게 다짐하며 흔들림 없는 목소리로 물었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페킹튼 백작은 한참 후에야 입을 열었다.

“···훌륭하군.”

“!”

“솔직히 말하면 어째서 진작 이런 생각을 해내지 못했는지 의아할 정도야.”

주름과 흉터가 가득해 험상궂어 보이는 얼굴이 미소를 지었다.

“아무래도 젊은이들이라 그런가, 발상의 전환이 놀랍구먼.”

노장의 아낌없는 칭찬에 디터와 앨빈이 얼굴을 붉혔다.

그들이 생각해낸 계획의 골자는 이랬다.

에스닐을 비롯한 대부분 국가들이 창병과 총병을 결합한 전술을 쓰는데.

‘총병이 사격하고 뒤로 숨으면 창병이 나서서 백병전을 하는 형식.’

앨빈은 이 경우 어쩔 수 없이 놀게 되는 병사가 생기게 된다고 지적했다.

즉, 병력을 낭비하는 셈인데.

‘디터 경, 대형을 종대가 아니라 횡대로 짜면 어떨까요?’

‘그럼 낭비되는 병력이 줄어들겠군요.’

‘네. 게다가 총병의 수가 늘어나 화력도 강화되고요.’

하지만 이러한 횡대 대형에는 문제가 하나 있는데.

‘···대형이 잘게 쪼개지는 만큼 병사들의 두려움이 급증한다는 거죠.’

이 문제를 해결하려면 다음 같은 조건들이 선행되어야 한다.

병사들의 훈련도를 높이고, 군기를 강화하며, 군 전체의 신뢰를 구축해야 한다는 것.

“자네들 말이 전부 맞네. 다만 이를 위해선 꽤 오랜 시간을 투자해야겠군.”

그 말에 살짝 불안해하던 두 사람은, 이어지는 페킹튼 백작의 말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뭐, 장기적인 관점으로 봐야겠지. 안 그런가?”

세 사람은 좀 더 세부적인 안건에 관해 논의했다. 군기와 사기 증강을 위해 어떤 방식이 좋을지, 병사들의 계급은 어떻게 세분화하는 것이 좋을지 등등.

언뜻 허무맹랑하게 들릴 수 있는 의견도, 페킹튼 백작은 장단점을 구분해가며 진지하게 경청했다.

디터와 앨빈은 백전의 노장이 이렇게나 열린 사고의 소유자라는 사실에 감탄했다면.

‘이들이 리암과 함께 수학한 동기이자 세자르 레핀 공자의 가신단 일원이라 했던가.’

페킹튼 백작은 차남인 리암이 최근 1년 사이에 급성장한 것에 깊은 인상을 받은 터였는데.

그 이유를 이 두 사람과의 대화로 깨달은 터였다.

‘그래. 젊은 시절엔 재능 있는 이들과 함께하는 것만으로도 성장하기 마련이지.’

둔재는 아니지만 천재 소리를 듣는 다른 형제들에 가려져 있던 리암.

부모에게는 아픈 손가락이나 다름없었던 자식이 성장하는 것은 언제 봐도 뿌듯하기 마련이다.

“좋네. 그럼 논의는 이 정도로 하고···.”

페킹튼 백작은 그때껏 옆에 서서 침묵을 지키던 자신의 부관을 소개했다.

“이쪽은 내 부관 리오넬 크로이츠 경이네.”

백작은 귀빈들을 연병장으로 데려가 병사들의 훈련 모습을 직접 보여줄 것을 명했다.

“존명!”

부관이 깍듯이 경례를 했다.

백작이 떠난 뒤, 그는 디터들을 연병장으로 데려갔다. 그들이 병사들의 훈련을 가만히 지켜보는 와중 부관이 이것저것 질문 세례를 퍼부었다.

“아카데미 군사학부에 재학 중인가?”

“괴력의 소유자라는 별명이 있다더니 체격만 봐도 그럴 것 같군.”

“그대의 무술이 대단하다고 들었는데 한 번 보여줄 수 있나?”

나이와 소속을 이야기하자 대뜸 말을 놓는 것은 기본이요, 앨빈은 없는 사람 취급하고 대화를 이어가는 것도 불쾌했지만.

최악은 이거였다.

“아무리 봐도 그대의 주군이 그대의 공을 빼돌린 것 같던데.”

“···그게 대체 무슨 말씀이십니까?”

버럭 흥분하려는 디터에게 부관이 타이르듯 말했다.

“워워, 너무 흥분하진 말고. 남들 보는 눈을 의식해 그럴 것도 없네, 그런 경우가 한둘이 아니니까.”

나머지 두 사람의 얼굴이 불그락푸르락해지는 것은 눈치채지 못한 채 부관이 말을 이어갔다.

“요즘 보면 전장에 나가본 적도 없으면서 검술이 어쩌니 무공이 어쩌니 소문만 번지르르한 이들투성이가 아닌가. 나 같은 직업군인이 보기엔 어이가 없을 정도이지.”

“아니, 나만 해도 백작가의 삼남이지만 우리 아버지께서는 그리 가르치지 않으셨네. 위에 있는 사람일수록 진짜 총과 검으로 전쟁을 치를 줄 알아야 한다 하셨지.”

“그대의 주군은 총은 쏘실 줄 아는가? 검술이야 뛰어나다 들었지만, 요즘 시대에 검은 귀족들의 유흥이 아닌가. 진짜 전투는 총으로 하는 것.”

디터는 분노를 억누른 채 부관을 돌아보았다.

“···말씀 조심하시지요.”

그에서 느껴지는 강렬한 기세에 부관이 움찔한 순간.

“저의 주군은 저보다 몇 배는 더 강하십니다.”

“호오, 그렇다면 사격 실력도 훌륭하다는 얘기이겠지? 가능하면 내 두 눈으로 직접 확인하고 싶은데.”

“···그 정도 하시지요, 더 이상 무례하게 구신다면-”

“무슨 대화를 그리 긴밀하게 나누십니까?”

디터가 저도 모르게 허리춤에 손을 가져간 순간.

세자르의 목소리가 등 뒤에서 들려왔다.

“···주군.”

“디터, 흥분하지 말거라.”

갑작스러운 등장에 눈이 휘둥그레진 부관을 보며 세자르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리오넬 크로이츠 경 되십니까? 페킹튼 백작 각하께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아, 그게···.”

당황해서 머리를 긁적이는 부관을 보며 세자르는 눈을 가늘게 떴다.

“그나저나, 제 사격 실력이 궁금하다 하셨습니까?”

모든 걸 다 들은 게 분명한 반응에 부관의 얼굴이 창백해진 순간.

“직접 보여드리지요.”

* * *

등 뒤에서 등장한 내 모습에 부관의 얼굴이 멍해졌다.

수도 기사단을 이끄는 페킹튼 백작의 젊은 부관들 중 한 명이자, 크로이츠 백작의 삼남이라고 했던가.

‘나를 어지간히 마음에 안 들어하는 모양이군.’

레핀 가문의 적자로 인정받으며 전반적인 분위기가 많이 달라졌다고는 해도,

아직 이렇게 ‘서자 출신의 적자’를 무시하고 싶어하는 인물이 간간이 있기 마련이다.

그런 이들에게 일일이 열을 내느니 두 말 하지 못하게 실력으로 보여주는 것이 최선인 법.

“어디서 쏘면 될까요?”

훈련용 머스킷을 하나 집어들고 서자, 부관이 주춤거리며 나를 사격연습장으로 안내했다.

“세자르 님, 정말 괜찮으시겠어요?”

“주군, 저 오만방자한 자의 놀음에 굳이 어울려주실 필요는···.”

걱정스러워하는 앨빈과 화를 간신히 억누르는 디터.

나는 고개를 저은 뒤 사람 모양의 표적 앞에 가 섰다.

‘대략 100미터.’

머스킷의 낮은 명중률을 생각하면 명중하기 쉬운 거리는 아니었지만···.

탕!

강한 반동과 함께 총이 발사되었고.

“명중이다!”

···정확히 표적의 머리 부분에 박힌 총탄을 보고, 병사들이 환호성을 질렀다.

“저건 누구야?”

“세자르 레핀 공자라는데?”

“귀족이 왜 사격장에···.”

“아니 그보다 총을 쏠 줄 아는 귀족이라고?”

기분 좋은 충격으로 수군거리는 게 들려온다.

나는 만족스러운 기분으로 옆에 선 부관을 돌아보았다.

“어떻습니까, 이 정도면 전장에 서도 충분할까요?”

“···.”

멍하니 나를 바라보던 부관의 목소리가 돌연 진지해졌다.

“그럼요, 충분한 실력이십니다.”

“그리 말씀해주시니 안심이 되는군요. 그럼 저는 이만-”

“저, 공자님.”

그 말에 다시 뒤를 돌아보자, 크로이츠 백작의 삼남이 주저하며 말했다.

“공자님이 계시지 않은 자리에서 그런 식으로 행동한 데에 사죄의 말씀을 드립니다.”

“사죄라뇨, 뭘 그렇게까지.”

“아뇨, 사나이답지 못한 행동이었습니다.”

사소한 해프닝은 이처럼 생각지도 못한 방향으로 마무리가 되었다.

두 가신을 데리고 왕궁을 나서서 공작저로 돌아가는 중.

디터가 조심스레 물었다.

“저··· 주군, 사격술은 어디서 배우셨습니까?”

궁금해하는 것이 당연하다.

얘들은 내가 총을 못 다루는 줄로 알고 있으니까.

‘이 세계의 귀족들은 총보다는 검을 중시한다고 했던가.’

기사도를 숭상하는 경향이 남아 있는 사회인 만큼, 사격을 제대로 배우는 것은 직업군인들뿐이라 들었다.

아마도 크로이츠 백작의 삼남은 그런 분위기에 불만, 혹은 묘한 열등감을 느끼는 듯했다.

나는 디터를 슥 돌아보고는 중얼거렸다.

“글쎄, 전생에서?”

“그게 무슨···.”

그 외에도 디터가 모르는 사실이 있다면.

‘여기서도 제법 사격 연습을 해봤다는 거지.’

개인적인 호기심 때문일까.

제이콥에게 따로 부탁해 머스킷을 구해 어느 정도 연습해본 터였다.

아무래도 몸에 익은 게 있어서인지 독학으로도 충분히 다룰 수 있었다.

“나중에 사냥이나 같이 갈까, 디터?”

“사냥은 언제나 옳죠, 기대하겠습니다.”

그렇게 공작저에 도착하자마자 나는 3형제를 불렀고.

벼르고 벼르던 명령을 내렸다.

“지하감옥에 수감된 수도사들의 머리털을 좀 뽑아올 수 있나? 많이는 필요없고, 서로 섞이지만 않게 조심해줘.”

나만, 나훔, 나답은 서로의 얼굴을 돌아보며 씩 웃더니 대답했다.

“여부가 있겠습니까!”

3형제가 쏜살 같이 사라진 직후.

저 아래서 “머리! 머리를 보자!”라는 외침이, 이내 수도사들이 내뱉는 고통의 비명이 들려왔다.

잠시 후.

“주군, 적의 머리털을 뽑아왔습니다.”

“···음?”

내 앞에 수북이 쌓인 머리털을 보고 나는 잠시 멍해졌다.

이렇게 많이 뽑을 필요는 없었는데.

“이거 원.”

···탁발 수도승이 아니라 대머리 수도승이 됐겠는데.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