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를 안 냈을 뿐
* * *
안느는 미소를 지우지 않은 채 세자르를 가만히 지켜보았다.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모습이었지만, 레핀 가문의 공자는 애써 미소를 되찾았다.
“폐하가 안정을 되찾으신 것 같아 다행입니다. 그럼 저는 이만.”
재빨리 사라지는 그의 뒷모습을 안느는 눈에 담았다.
저런 청년이라면 사윗감으로 참 좋을 텐데, 라고 무심코 생각하며.
···물론 그녀는 세자르가 테레사의 사촌이라는 사실은 꿈에도 몰랐으니.
‘하지만 지금의 테레사는 여러모로 복잡한 상황에 놓여 있지 않은가.’
안느는 아쉬운 마음에 한숨을 내쉬며 테레사의 방에 들어섰다.
“폐하, 기분은 좀 어떠신지요.”
농농이의 머리를 쓰다듬던 테레사의 시선이 어머니에게로 향했다.
서른이 넘은 나이에도 여전히 소녀처럼 아름다운 그녀의 모습을, 두 눈을 느리게 깜박이며 올려다보았다.
“어머니, 오늘 따라 정말 아름다우시네요.”
뜬금없는 말에 안느가 당황했지만 이내 미소를 지었다.
“세자르 공과 잠시 마주쳤습니다.”
테레사의 표정이 묘해졌다.
세자르의 이야기를 별로 하고 싶어하지 않는 기색으로 말을 돌리다가.
옆에 앉아 있는 작은 아기를 가리켰다.
“세자르 공이 제 안부가 걱정됐나 봅니다. 저를 지켜줄 경호원이라며 이 아이를 데려다주고 갔어요.”
[옹!]
“···어머.”
저에게 두 팔을 활짝 뻗는 아기를 본 안느의 눈이 동그래졌지만.
이내 얼굴 가득 미소가 피어올랐다.
안느가 본격적인 화제를 꺼냈다.
“노바스 공작이 현 상황을 보고해왔습니다.”
국왕이 혼절한 이후로 그녀의 외삼촌인 노바스 공작은 현 상황을 진두 지휘해온 터였는데.
“현장에 있던 트리니다드 수도사들을 대거 잡아들였습니다만, 그들 모두가 혐의를 거부하는 중이라 하더군요.”
몸에 무기를 숨기고 있던 자들은 어떤 혐의로든 체포할 수 있었지만.
그렇지 않은 이들은 마땅한 죄목을 찾기가 어려운 상황이며.
“무엇보다··· 트리니다드 수도회 내부에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내부 문제요?”
이번 건국기념제 사건이 방아쇠를 당긴 탓일까.
그간 불만을 쌓아온 과격파들이 수도원장을 살해한 뒤, 수도원 전체를 봉쇄했다는 것이다.
“수도원의 영지민들과 근방 주민들을 인질로 삼은 상황이라고 하더군요. 게다가 운 나쁘게도 근처를 지나던 퍼킨스 가문의 마차까지 사로잡혔습니다.”
퍼킨스 자작의 자녀까지 인질이 되었다는 안느의 말에 테레사는 관자놀이를 짚었다.
“그들이 요구하는 건 뭡니까?”
“이번 사건의 주범을 포함해, 구금된 수도사들의 무사 석방.”
안느가 어두운 얼굴로 말을 이었다.
“거기에 정교단에서 독립시켜달라는 요구를 더해, 문제가 아주 복잡해졌어요.”
“아주 적반하장으로 나오는군요.”
테레사는 고민에 잠겼다.
이 사태를 어떻게 해야 할지 싶은 순간, 돌연 한 사람의 얼굴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세자르 공.’
그 사람이라면 해결책이 있을수도, 라고 생각하다 이내 고개를 휘휘 저었다.
“알겠습니다. 어머니도 이만 나가보세요.”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풍전등화나 다름없는 이 나라를 지켜내는 것.
테레사는 그렇게 다짐하며 마음을 굳게 먹었다.
* * *
알현을 마치고 공작저로 돌아가자 예상 밖의 인물이 날 기다리고 있었다.
“카렌.”
“오랜만이야.”
그 말대로였다.
최근 카렌은 밀정대를 정식으로 창립하고 그 운영에 힘쓰느라 이곳에 자주 오지 못했던 터였다.
그 와중에 내가 요청한 각종 정보 조사 의뢰도 수행했으며.
‘간간이 아카데미의 수업도 들어야 했으니.’
몸이 두 개라도 모자랄 만한 스케줄을 소화했기 때문인지 피곤해 보였다.
그럼에도 얼굴은 여전히 빛이 날 정도로 예뻤지만.
“살 빠졌어?”
“아마 그럴걸.”
그녀가 피식 웃더니 서류 하나를 내밀었다.
“봐봐. 오프러스 공국과 헬리오스 가문 사이에 어떤 움직임이 있었는지를 세밀하게 조사해서 기록했으니.”
나는 서류를 재빠르게 살펴보았다.
그녀 말대로 꽤 세밀한 기록이었지만.
“···아직 뭔가 결정적인 결과물은 나오지 않은 것 같군.”
“응. 최근 공국 쪽의 움직임이 아주 신중해졌거든.”
하긴 팰러스 일로 워낙 세간이 떠들썩했으니 그럴 만하다.
“좋아. 당분간은 이런 식으로 계속 주시해줘. 그리고 한 가지 더 부탁하고 싶은 게 있는데.”
나는 글씨가 빼곡히 적힌 쪽지 한 장을 카렌에게 건넸다.
내용을 읽어내리던 카렌이 피식 웃었다.
“이건 대체 뭐야, 노랫말이야?”
“어, 참고로 말하자면 한 달 내에 저잣저리에서 유행할 노래이지.”
“흐응.”
“곡조까지 붙이면 좋겠지만, 거기까진 내 역량이 안 돼서 말이야.”
카렌은 미소 띤 얼굴로 가사에 음을 붙여 흥얼거렸다.
“사자가 없는 곳에선 승냥이가 왕 행세를 하려 한다네, 하지만 어쩌나, 새끼사자가 엄연히 왕좌에 앉아 있는데···.”
사자와 승냥이가 등장해 얼핏 듣기엔 동물 우화처럼 들리지만.
‘실상은 수도의 귀족들을 모반 계획이나 하는 승냥이 떼에 비유한 내용이지.’
카렌 또한 그것이 의미하는 바를 곧바로 알아차린 듯했다.
“내일부터 거리의 아이들에게 불러서 퍼뜨리도록 할게.”
“고마워.”
이런 노래를 퍼뜨리는 데는 다 이유가 있는데.
수도의 귀족파가 함부로 움직이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다.
‘건국기념제에서 국왕의 목숨을 위협하는 사건까지 벌어졌으니.’
가뜩이나 불안한 정세에 기름을 들이붓고 불을 붙인 꼴이다.
···이런 와중을 노려 모반을 꾀하는 귀족이 없을 거라고 말할 수 없으니 말이다.
“그래. 그건 그렇고···.”
카렌은 잠시 망설이다 내 눈을 똑바로 마주 보았다.
“몸은 괜찮아?”
“나야 뭐.”
건국기념제 사건을 얘기하는 건가.
대수롭지 않게 대꾸하는데, 문득 부드럽고 따뜻한 촉감이 이마에 느껴졌다.
고개를 들자 카렌의 손가락이 내 이마를 짚고 있다.
“여기 상처 났네. 어제 생긴 거야?”
“···.”
그녀의 얼굴이 지나치게 가까웠다.
내 이마를 들여다보는 그녀의 푸른 눈동자에서 어쩐지 눈을 뗄 수가 없다.
불과 한 달 만에 눈에 띄게 성숙해진 미모 때문일까.
‘···.’
숨 쉬는 것조차 잊은 채 그 손가락의 감촉을 신경 쓰는데.
카렌이 나직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열심히 하는 건 좋지만 네 몸도 좀 챙기고 그래, 알겠지?”
그녀의 몸이 떨어지고 나서야 후, 하고 숨을 몰아쉬었다.
···얘가 뭘 잘못 먹었나, 갑자기 왜 그런대.
다소 어색한 분위기로 그녀를 보낸 뒤, 1층에서 올라오던 앨빈과 마주쳤다.
“앨빈, 방금 카렌 나갔는데.”
“아, 전 아까 얼굴 보고 얘기 나눴어요.”
나는 잠시 망설이다가 물었다.
“근데 카렌한테 무슨 일 있었어? 뭔가 사람이 좀 달라진 느낌이던데.”
“달라지다뇨?”
“아니, 갑자기 내 안부를 막 걱정하고 그러길래···.”
어쩐지 쑥스러워져 말을 흐렸다.
안 그러던 애가 갑자기 그러니까 민망하잖아, 라고 생각하는데.
앨빈이 설핏 웃으며 말했다.
“갑자기라뇨, 카렌 님이 공자님 걱정을 얼마나 하는데요.”
“···응?”
“모르셨어요?”
앨빈은 돌연 내가 기절했었을 때의 이야기를 꺼냈다.
왜, 암살자에게서 공작을 구하려고 ‘절대 빗나가지 않는 권총’을 썼다가 그 여파로 사흘을 내리 기절했을 때 말이다.
“제가 그건 그냥 마도구의 부작용일 뿐이다, 사흘이면 깨어나실 거라고 몇 번을 얘기드렸는데도···.”
내가 기절해 누워 있는 동안 카렌이 내 침대를 한참이나 지켰다고, 앨빈은 말했다.
“카렌 님은 티를 안 낼 뿐이세요.”
···그런 건, 음.
어딘가 간질간질한 기분으로 나는 멋쩍게 중얼거렸다.
“전혀 상상도 못 했는데.”
감정에 희미한 변화가 일긴 했지만,
단지 그뿐이었다.
* * *
그로부터 한 달 간.
모든 것이 정신없이 돌아갔다.
일단 좋은 소식부터 꼽아보자면 아카데미를 조기 졸업하게 되었다는 것.
‘세자르, 네가 어엿한 아카데미 졸업생이 되었구나.’
이제 제법 건강을 회복한 공작은 내가 왕국의 최상위 고등교육기관을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것에 매우 기뻐하는 눈치였다.
···물론 무사히 조기 졸업할 수 있었던 데는 학장의 입김이 크게 작용했지만, 그것까진 공작이 알 바가 아니었고.
공작저에서는 내 졸업을 축하하는 소규모 연회가 열렸다. 참석한 것은 내 가신들과 공작저 식솔, 거기에 에드윈 경 일가가 전부였는데.
‘마음 같아서는 제대로 된 연회를 열고 싶었는데···.’
시국이 시국이니만큼, 그러지 못하는 것이 공작은 영 아쉬운 모양이었다.
다음으로 아쉬운 소식들을 꼽아보자면.
“하, 그 많은 병사를 이끌고도 진압에 실패하다니, 이게 말이 됩니까?”
귀족회 소속의 어느 의원 말마따나,
왕실 경비대가 트리니다드 수도원의 진압에 실패했다는 것이다.
“오죽하면 유구한 역사의 왕궁 경비대를 가리켜 ‘돈 먹는 하마’라는 비아냥이 나오겠습니까?”
“거 말씀이 지나치시오!”
그렇게 말한 것은 왕실을 지지하는 또 다른 의원.
“그럼 인질은? 그 광신도들이 인질들을 몰살하든 말든 그냥 돌격하란 말이오?”
그 말도 일리가 있기에, 일부는 고개를 끄덕이며 동감했지만.
“그걸 해내는 게 경비대의 역할이 아니겠소!”
그래. 그거야 뭐 그렇다 치고···.
그 외에 나쁜 소식을 하나 더 꼽아보자면.
“다들 정숙하시오.”
노바스 공작의 진중한 목소리에 갑론을박하던 이들이 입을 다물었다.
“사담은 그 정도로 하고, 첫 번째 안건의 논의를 시작하겠소.”
이 첫 번째 안건이 바로 그것인데.
“해로드청년회 소속의 세자르 레핀 공이 아카데미를 졸업한 바, 왕실 의전관으로 정식 등용할 것을 건의하는 바요.”
문제는 진압 작전의 실패로 왕실의 입지가 더욱 약해졌고.
이러저러한 상황의 여파로 국왕이 내게 약속한 ‘왕실 의전관’ 자리가 간당간당해졌다는 것.
‘왜냐. 신입 의전관 임명에는 의회의 승인이 반드시 필요하거든.’
“···다소 과한 처우가 아닙니까?”
“저희 내부 인사들은 이해를 하더라도, 바깥에서 보기에는 특혜라고 볼 수도···.”
“아직 나이 또한 어리니···.”
역시나.
당연한 듯이 반기부터 들고 나서는 의원이 절반 이상이다.
물론 노바스 공작 또한 만만한 이는 아니다.
“나이보다 중요한 건 능력이 아니겠소?”
이런 반응이 나오리라 예상한 듯 반론을 이어나갔으니.
“세자르 공이 짧은 시간 내에 이룩한 성과를 보시오. 의전관으로 임명하기엔 전혀 부족함이 없는 실적이라 보는데.”
하지만.
그 말을 기다렸다는 듯 크로이츠 백작이 치고 나왔다.
“능력이라 하셨습니까?”
“···그렇소.”
어쩐지 불길한 예감이 드는데, 이거.
“그렇다면 세자르 공의 능력을 시험할 기회를 주고, 그 결과에 따라 의전관 등용 여부를 결정하면 되지 않겠습니까.”
“시험할 기회라니?”
노바스 공작이 반문하자 백작이 늙은 너구리처럼 웃었다.
“이 노구는 세자르 공이라면 트리니다드 수도회 사건을 능히 해결할 수 있으리라고 믿습니다. 안 그렇습니까?”
그러자.
백작을 지지하는 수도 귀족파 의원들이 열렬하게 동의의 뜻을 표했다.
“잠깐만.”
노바스 공작은 당황한 얼굴로 그들을 제지하려 했지만.
내 쪽에서 선수를 쳤다.
“좋습니다.”
“···!”
이 자리에 앉은 모두의 시선을 느끼며 말을 이었다.
“제가 직접 사병대를 이끌고 가겠습니다. 감히 폐하의 목숨을 위협하려 한 광신도들을 응징하는 한편, 무고한 인질들 또한 구출하겠습니다.”
반응은 다양했다.
대체 무슨 자신감이냐며 어이없어하는 이.
젊은이의 치기라고 생각하며 코웃음을 치는 이.
희미하지만 기대감을 갖고 나를 바라보는 이.
“···.”
그 와중에도 크로이츠 백작은 속을 알 수 없는 눈빛을 내게서 거두지 않았으니.
어떻게 생각하든 상관없다.
···이 두 가지만 약조받을 수 있다면.
“그러니 두 가지만 약속해주십시오. 첫째, 이 작전을 성공시킬 시 제 임명안을 통과시켜주시는 겁니다.”
“그거야 당연한 거 아니겠소!”
“그럼 첫 번째는 약조해주시는 걸로 알겠습니다. 그리고 둘째, 이건 어디까지나 진압 작전의 성공을 위해서인데.”
옆에 앉은 경비대장을 돌아보며 말을 이었다.
“지금 경비대에서 신병을 확보한 수도사들. 그들을 제 손에 넘겨주시죠.”
“그거야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만··· 대체 왜?”
어리둥절해하는 경비대장에게 나는 미소만 지어 보였다.
왜냐고 묻는다면.
‘지난번 테레사의 비밀을 알게 된 덕분에 과제 달성 보상으로 이런 걸 받았거든.’
『‘변장의 약’(잔여 사용횟수 5회)
- 설명 : 타인의 모습으로 약 6시간 동안 변신하게 해주는 물약.
- 사용법 : 이 물약에 특정 인물의 머리카락을 넣어 팔팔 끓인 뒤 식혀서 마시면, 머리카락 주인의 모습으로 변한다.
- 비고 : 6시간이 지난 이후에는 5분에 걸쳐 서서히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온다.』
···이거라면 충분히 작전을 성공시키고도 남지 않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