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작가의 서자로 살아가는 법-109화 (109/176)

테레사의 묘수

* * *

국왕은 잠시 당황한 듯하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

“네. 나중에 비슷한 물건이 생기면 그건 꼭 폐하께 드리겠습니다.”

그래, 라고 대답하는 테레사의 얼굴이 어쩐지 시큰둥해 보인다.

설마 이거 안 줬다고 삐진 건 아니겠지.

‘그거야 그렇고.’

오늘 국왕은 화사한 붉은색에 금사로 화려하게 장식한 옷차림이었다.

타고난 미모 덕분인가, 화려하다 못해 부담스러운 의상을 완벽하게 소화해내는 중이었으니.

“폐하, 이건 기념제에서 입으실 의상입니까? 참으로 잘 어울리시는군요.”

그 말에 테레사가 이쪽을 돌아보았다.

‘저렇게 입으니 사람이 또 달리 보이네.’

전에는 한없이 어린 아이 같았는데 지금은 제법 소녀 티가 물씬 풍긴다.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는 투명한 눈동자에 문득 당황한 순간.

국왕은 어색하게 웃으며 고맙다고 대꾸했다.

나는 얼른 고개를 저은 뒤 본격적인 화제를 꺼냈다.

“그리고 폐하, 내일 기념제의 경호 대비책 관련해서 말인데···.”

요는 트리니다드 수도사들의 출입을 금지해야 한다는 것.

“제 밀정이 가져다준 정보에 따르면, 그들이 이번 기회를 악용할 계획인 것 같습니다.”

“하긴. 그자들이라면 충분히 큰일을 저지르고도 남겠지.”

국왕은 경비대장에게 언질을 주겠다고 약속했다.

이윽고 대화의 주제는 다른 것으로 넘어갔다.

“얼마 전 그대와 긴히 나눴던 얘기가 있잖은가.”

‘여왕의 남편감 찾기’ 제안을 말하는 건가.

“그대의 의견도 이미 충분히 좋네만, 그것을 좀 더 꼬아볼까 생각 중인데.”

“말씀해주시지요.”

테레사는 나를 보며 장난스러운 미소를 짓더니.

“우리의 위쪽으로 국경을 맞댄 커글랜드에 나와 비슷한 나이의 왕자가 있다는 걸 알고 있는가?”

“···커글랜드 왕자요?”

커글랜드.

반도 국가인 덕분에 드넓은 바다를 장악해 막강한 해군력을 자랑하는 왕국.

갑자기 그곳의 얘기를 꺼내는 이유가 뭘까.

“물론 국내 귀족 가문을 대상으로 남편감을 물색하는 건 그대로 진행할 거네.”

“덕분에 왕위 계승법의 개정은 쉽게 진행할 수 있겠군요.”

여왕의 남편 자리가 걸려 있는 만큼, 다들 국왕의 눈에서 벗어나려 하지 않을 테니 말이다.

“그렇지. 후보감을 여럿 골라 정기적으로 왕궁에 드나들게 하여 기대감을 잔뜩 키워주는 한편.”

테레사는 탁자 위에 펼쳐둔 지도 한 곳을 가리켰다.

에스닐의 바로 위에 자리한 커글랜드 왕국.

“북부의 영토 분쟁이 점차 심화되는 건 알고 있지? 이걸 핑계로 삼아 짐은 상비군을 증원할 거야. ···아주 대폭 말이지.”

그녀의 말은 많은 의미를 내포했다.

‘겉으로는 커글랜드와의 전투 때문인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중앙권력을 강화해 왕실의 권한을 강화하는 것이 목표라는 것.

그녀의 수에 내심 감탄하는데, 테레사의 말이 이어졌다.

“커글랜드의 얘기로 돌아가보자면, 국왕 피터 3세에겐 정식 왕비에게서 얻은 아들이 셋, 딸이 둘 있어.”

“다들 유부남 유부녀인 걸로 알고 있는데요.”

“맞아. 근데 몇 달 전, 피터 3세의 왕비가 사망했거든.”

애도 기간이 끝나자마자 피터 3세는 총애하던 애첩을 왕비에 자리에 앉혔고.

덕분에 서자에 불과했던 첩의 자식들 또한 왕자와 공주로 승격되었다는 것이다.

“이는 모두 커글랜드가 알레스 정교가 아닌 ‘커글랜드교’를 국교로 채택하고 있기에 가능한 일이지.”

“아까 말씀하신 ‘비슷한 나이대의 왕자’라는 게 서자 출신의 왕자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래. 나보다 두 살 어린 열한 살이라고 하더군. 게다가 피터 3세의 총애를 받는 자식이라고 말이야.”

그녀가 이런 말을 꺼낸다는 건 그 서자 왕자를 남편감으로 염두에 뒀다는 뜻이다.

일종의 데릴사위를 들이는 셈이다.

“개정안이 통과되고, 군사력 강화까지 마치고 나면.”

고개를 들어 그녀와 눈을 마주치며 말을 이었다.

“···실질적으로는 커글랜드 왕실과 혼담을 맺으실 생각이시군요.”

국왕이 활짝 웃으며 손뼉을 쳤다.

“역시 세자르 공이야.”

헌데 다른 곳도 아니고, 악 감정이 많은 커글랜드와 굳이 사돈을 맺으려는 이유가 무엇일까.

나는 재빨리 머리를 굴렸고 금세 해답을 찾았다.

“목적은 역시 화친 도모입니까?”

“정확해. ···그것도 전부 비밀리에 진행할 생각이지.”

몇 수 앞을 내다보는 그녀의 식견에 나는 잠시 말을 잊었다.

‘이것 참.’

따지고 보면 오프러스 공국은 에스닐보다 훨씬 작은 나라다.

군사력의 차이는 말할 것도 없고, 그나마 경제력 정도가 비빌 만한 수준이라고 할까.

‘그럼에도 이렇게 대놓고 방해 작전을 계속할 수 있는 것은.’

에스닐의 전력이 커글랜드와의 분쟁 지역에 다 묶여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 와중에 내전이 발발하고, 수도 귀족들마저 반란군을 지지하고 나선다면?

‘오프러스 공국에게는 어부지리나 다름없는 상황이지.’

칼 오프러스 대공이 노리는 바가 바로 그것이다.

···에스닐의 다리를 하나씩 하나씩 묶어서 옴짝달싹 못 하게 만드는 것.

“하지만 폐하의 혼담으로 커글랜드와 화친이 성립된다면.”

갑작스러운 깨달음에 눈이 번쩍 뜨이는 기분.

나는 흥분한 채 말을 이었다.

“···오프러스 공국은 닭 쫓던 개 신세가 되겠군요.”

“역시 세자르 공이라면 내 마음을 알아줄 줄 알았어.”

싱글싱글 웃는 국왕을 나는 대견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외모는 우리 조카 또래인데 생각하는 수준은 어쩜 이렇게 다른지.

테레사의 말이 이어졌다.

“물론 커글랜드와의 화친이야 금방 깨지겠지. 하지만 몇 년, 아니 1년만 가줘도 상관없어.”

“···폐하가 반란을 진압할 때까지만 가준다면 충분하겠군요.”

“그렇지. 그리고 그 왕자는 그때까지···.”

그녀의 입가에 교활한 미소가 떠올랐다.

“훌륭한 볼모 역할을 해줄 것이고.”

순간 오싹한 기분이 들었지만.

동시에 경탄하고 말았다.

“어떻게 이런 생각을 하신 겁니까.”

나는 그녀를 천재라고 몇 번이나 추켜세웠다.

국왕은 ‘빈말하지 말게나’라고 대꾸하긴 했지만 싫지 않은 기색이었다.

“···비밀스럽게 보낼 만한 외교 사절을 찾아봐야겠군요.”

그때만 해도 우리는 무척이나 희희낙락했다.

···곧 닥쳐올 위기를 예상하지 못한 채.

* * *

온 백성이 고대하던 건국기념제 날이 되었다.

“호외요, 호외! 국왕 폐하께서 친히 행차하신다고···.”

“은화와 동화를 뿌린다 합니다!”

십 년 만의 대축제에 마음이 들뜬 것은 어른이나 어린아이나 마찬가지였다.

음악 한 가락 흐르지 않던 거리는 떠돌이 악사들이 연주하는 음악으로 흥겹기 그지없었고.

노점과 음식점, 여관 따위에서 흘러나오는 맛있는 냄새가 행인들의 코를 간질였다.

“다들 구경오세요! 건국기념제를 기념해 떨이로로···.”

“이대륙에서 흘러들어온 희귀한 상품들 대방출! 오늘 기회를 놓치지 마세요!”

“특별 할인! 전 상품 할인합니다!”

이런 대목을 놓칠 수 없는 상인들 또한 분주하기 짝이 없었다.

그야말로 모두가 웃고 즐기는 이 떠들썩한 분위기 속에서, 유일하게 긴장을 놓지 못하는 이들이 있었으니.

“단 한 순간도 방심해서는 안 된다, 알겠나?”

“명심하겠습니다!”

우렁차게 대답한 병사들은 이내 거리의 인파 속으로 섞여들었다.

‘문제가 없어야 할 텐데.’

경비대장은 오늘을 위해 역대급의 인원을 차출해 물샐 틈 없는 경호를 준비했다.

경비대는 이 거리를 봉쇄하고 통제구역으로 지정했으며, 몸수색을 해 날붙이뿐 아니라 무기로 쓰일 만한 것을 지닌 이는 출입을 엄금했다.

‘레핀 가문 또한 경호에 협조하겠소.’

국왕 폐하의 최측근이라 불리는 세자르 공자 또한 본인의 가신과 사병들을 배치시켰을 뿐 아니라,

자신의 밀정이 보고했다는 중요한 정보를 알려주었다.

‘오늘 행사에서 트리니다드 수도사들이 모종의 사건을 벌이려고 계획 중이라는 정보요.’

트리니다드 수도회.

신앙을 위해서라면 남의 목숨도 빼앗을 수 있다고 믿는 이단 광신도들.

세자르의 말에 경비대장은 해당 수도회 소속으로 보이는 인물들 또한 출입을 금지하라고 명했으나.

‘어째서 이렇게 불길한 예감이 드는 것일까.’

마음 깊은 곳에서 차오르는 불안감을 지우지 못하며 경비대장은 본인의 자리를 지켰다.

그의 시야 저쪽에서 화려한 행차가 시작되었다.

건장한 사내 넷이 짊어진 황금 가마에 아름다운 소년 하나가 앉아 있었다.

비단 그의 머리에 씌워진 관이 아니더라도, 강렬한 카리스마와 기품을 온몸으로 풍기는 그의 모습을 본 청중은 직감했다.

저 소년이야말로 말로만 듣던 소년 국왕, 테오 2세라는 것을.

“폐하다! 폐하가 나오셨다!”

“테오 2세 폐하시다!”

“에스닐의 태양을 뵙습니다!”

그에 화답하듯 국왕이 한 손을 들어올리자, 관중은 누가 먼저랄 것 없이 환호하기 시작했다.

“저렇게 아름다우실 줄이야!”

“초상화보다도 훨씬···.”

“아주 건강해 보이시는데!”

제법 살이 통통하게 오른 뺨, 장밋빛 혈색의 얼굴은 ‘언제 죽을지 모르는 병약한 소년 왕’이라는 삿된 소문을 불식시키기 충분했다.

그때.

소년 왕이 관중을 정면으로 마주하며 입을 열었다.

“나의 백성들이여.”

한때 에스닐의 여신이라고 불렸던 모후 안느처럼 아름다운 외모이나.

선왕을 떠올리게 하는 강렬한 눈빛에 좌중이 삽시간에 조용해졌다.

“우리 에스닐이 작은 도시국가에서 시작해 대륙을 호령하는 왕국이 된 지도 올해로···.”

담담하고도 힘 있는 목소리가 거리 끝까지 퍼져나갔다.

열 살짜리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만큼 총명하고 담대한 태도에 군중은 저도 모르게 경탄했다.

“···하여 짐은 여기 와준 고마운 이들에게 작은 선물을 하사하려 하니.”

그 말에 군중의 시선이 가마 뒤에 죽 늘어선 수레로 향했다.

금과 보석을 박아넣어 화려하기 그지없는 수레에 은화와 동화가 산처럼 쌓여 있었다.

“오오오!”

“드디어!”

모두가 가장 기다려왔던 행사의 하이라이트.

국왕의 손짓에 맞춰 수하들이 수레 가득 쌓인 돈을 사방으로 뿌렸고.

“돈이다! 돈이 쏟아진다!”

“이 얼마나 관대하신가!”

“남김 없이 주워!”

최근 몇 년의 혼란은 민생에도 큰 영향을 미친 터, 생활고로 어두웠던 이들의 얼굴에 생기가 떠올랐다.

잔뜩 흥분한 채 어린아이처럼 돈을 줍는 군중을 보며 국왕은 자애로운 미소를 지었지만.

내심 그가 이런 생각을 하는 중임은 아무도 몰랐다.

‘···갚을 수 있겠지?’

바로 어제.

경호 대책을 논의하러 왔던 세자르에게 ‘은화와 동화 대신 곡식을 뿌리겠다’고 전하자, 그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기왕이면 전통을 따르시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물론 그 편이 효과야 좋겠지만, 그대도 알다시피 지금 국고가 어려운 상황이라.’

테레사라고 왜 모르겠는가.

백성들이 이 건국기념제 행사에서 가장 기대하는 부분이 바로 이거라는 것을.

하지만 행사할 때 뿌리는 돈이 전부가 아니었다.

‘건국제 기념으로 전국적인 구휼이 실행될 거네. 그때에도 가급적 현물로 지급할 생각이니-’

‘빌려드릴까요?’

그 부드럽고 달콤한 목소리에 테레사는 기겁하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 됐네. 그렇게 무턱대고 돈을 융통하는 거야말로 망국의 지름길이니···.’

‘무이자로 빌려드리죠.’

‘무이자? 진심인가?’

세자르는 자애로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저 역시 이 나라의 백성이 아닙니까. 나라를 위한 일에 이자를 받을 수는 없죠.’

‘···흠.’

고민 끝에 테레사가 그의 제안을 받아들이자, 세자르는 이렇게 덧붙였다.

‘물론 첫 거래 한정이라는 것, 잊지 마시지요.’

‘···.’

그때 대화를 떠올리던 테레사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저었다.

어쨌거나 무이자로 해준다는 증서까지 썼으니 천천히 갚으면 되겠지.

‘가장 긴장되었던 순간은 지나간 것 같군.’

그렇게 한숨 돌리려던 순간.

바닥에 떨어진 동전을 줍느라 여념이 없는 군중 사이로 덩치 큰 여인 하나가 다가왔다.

“에스닐의 왕이시여.”

허나 그에게서 흘러나온 것은 사내의 목소리.

테레사가 저도 모르게 멈칫하자 경비병들이 낌새를 눈치채고 재빨리 움직였으나.

“왕께서는 거짓된 믿음을 호도하고 날조를 일삼는 가짜 성직자들을 정녕 의심하지 않으신단 말입니까?”

상대는 머리에 쓴 가발을 거침없이 벗어젖혔다.

그러자 여인은커녕, 정수리 부분을 훤하게 깎아 탁발한 머리가 드러났고.

상대의 정체를 깨달은 테레사의 눈이 커졌다.

‘트리니다드 수도회!’

분명 출입을 금지하라고 했을 텐데 어째서 이자가···.

그녀는 저도 모르게 목에 건 목걸이를 움켜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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