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국기념제
한편.
노엘 크로이츠 백작의 마음은 여유롭기 그지없었다.
‘저 모습 좀 보라지.’
수도의 최신 유행에서 십 년은 뒤떨어진 듯한 촌스러운 옷차림은 물론이고.
고급스러운 실내 분위기에 압도되어 여기 저기를 두리번거리는 에드윈 레핀의 모습은-
‘누가 봐도 시골에서 갓 상경한 시골뜨기가 아닌가!’
패를 쥔 것은 자신이다.
크로이츠 백작은 그 사실을 확신하며 차를 한 모금 들이켰다.
언제나처럼 향기로운 뒷맛이 입안에 가득 남은 가운데.
그가 미끼를 던졌다.
“···그대가 제 역할을 해주는 것이오.”
많은 것을 내포한 말에 에드윈의 눈이 커졌고.
이내 그 넙대대한 얼굴에 욕심이 가득 번졌다.
“백작님, 아주 흥미로운 이야기군요.”
걸려들었군.
크로이츠 백작은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그러니 어디, 그 자세한 계획을 들려주실 수 있으십니까?”
무지렁이 같은 자가 자신의 미끼를 냉큼 물었다는 생각에 도취된 나머지,
그는 ‘자세한 계획’을 들려달라 청하는 에드윈의 눈빛을 미처 확인하지 못했다.
“그렇다면야···.”
또한,
이 시골뜨기에게 자랑하듯 털어놓은 말들이 향후 자신의 발목을 붙잡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 못 했다.
* * *
시간이 빠르게 흘렀다.
에드윈 일가가 공작저에 머문 지 석 달쯤 된 시점.
퍼시는 여전히 온갖 사교 모임에 참석하며 이름을 날렸는데, 친화력 하나만큼은 끝장인 듯하다.
술이나 노름, 여색을 즐긴다기보다는 사람 만나는 걸 좋아하는 스타일이 있지 않은가.
‘망나니라기보단 핵인싸라고 해야 할까.’
반면 도나는 밖에 나가 즐기기보다는 이 기회를 이용해 어떻게든 일자리를 잡고 싶어했는데.
‘왕궁의 시녀직은 어떻습니까?’
그 말에 도나는 무릎이라도 꿇을 기세로 감사했으니.
그도 그럴 것이, 왕궁 시종이나 시녀는 상당한 요직인 덕에 아무나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최소한 귀족 자녀여야 왕궁에서 일할 수 있으며, 그중에서도 왕비궁이나 모후궁에서 일하는 시녀는 최상급의 대우를 받는다고 들었다.
‘세자르 공, 이거 정말··· 어떻게 감사의 말씀을 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이야기를 전해들은 에드윈 또한 비슷한 반응을 보였고. 완전히 감복한 그는 충성스러운 첩자가 되기로 다시금 맹세했으니.
그 외에 생각지 못한 수확이 있었다면.
‘필요하실지는 모르겠지만··· 일하며 흥미로운 정보를 듣게 되면 곧바로 세자르 공자님께 말씀드릴게요.’
시녀 일을 시작하고 나서도 한동안 기쁨을 주체하지 못하던 도나는 센스 있게 그런 것까지 해주기로 했다.
“한마디로 여러모로 이득을 본 도박이라고 할 수 있지.”
“그렇네. ···그런데 한 가지 궁금한 게 있는데.”
어쩐지 의미심장한 목소리로 묻는 우만을 돌아보자, 그가 창문 너머에 서 있는 에드윈을 가리켜 보였다.
“나한테 채워놨던 그 팔찌를 어째서 저자가 차고 있지?”
“아, 그거.”
나는 피식 웃으며 자초지종을 들려주었다.
이야기를 다 들은 우만은 황당하다는 반응이다.
“그러니까 결국, 저걸로 첩자를 만들었다?”
“요약하자면 그렇긴 한데.”
“첩자는 아무나 하는 줄 아나. 그래서, 저자가 괜찮은 정보를 가져다주고 있어?”
우만의 말에 나는 고개를 저었다.
“딱히.”
우만의 말이 맞다.
첩자는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며, 특히 양쪽의 눈치를 보며 쓸 만한 정보를 물어다주는 건···.
‘우만 정도로 명석한 데다 신임을 받는 자가 아니라면 쉽지 않지.’
그 사실을 나 또한 모르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 왜 굳이 그런 짓을 시켰지? 나중에 곤란한 상황이 생기면 어쩌려고.”
“빠져나갈 구멍은 다 마련해놨으니 그 부분은 걱정 말고.”
에드윈 레핀에게 그런 역할을 맡긴 데는 다 이유가 있다.
에드윈 본인이 양측 사이에서 어설프게 박쥐처럼 구는 것을 막는 효과도 있지만.
“제일 큰 이유는 귀족회가 헬리오스 세력에 붙는 걸 막기 위해서이지.”
카렌이 준 정보에 따르면, 헬리오스 가문은 벡카드를 비롯해 다양한 가문들에 러브콜을 보내고 있다고 한다.
아마 본격적인 반란을 준비하는 중이 아닐까.
이 상황에서 귀족회 또한 유혹에 흔들릴 수 있으며, 최악의 경우 반란파에게 붙을 수도 있지만.
“눈앞에 에드윈이라는 먹기 좋은 미끼가 있다면 생각이 달라질 것 아냐?”
게다가 지금 에스닐의 상황은 그게 아니더라도 이미 안 좋았다.
에스닐 위쪽에 자리한 나라, 커글랜드와 영토 분쟁이 계속되는 중이었으니까.
사실상 정규군 병력 대부분은 북부에 주둔 중이라고 봐도 무방했다.
‘이런 상황에 반란 세력이 군대를 일으킨다면!’
설상가상으로 수도 귀족들이 그 편에 붙는다면, 에스닐은 한순간에 쑥대밭이 될 거다.
지금은 어떻게든 간에 이 아슬아슬한 균형을 유지하고, 병력을 동원할 일을 최소화해야 했다.
“그러니까 네 말은 ‘반란’이라는 위험한 길을 택하기보단, 에드윈을 꼭두각시 삼아 부귀영화를 유지하는 길을 택할 거라는 거지?”
우만의 지적은 정확했다.
귀족회의 주축을 이루는 세력은 대부분 리스크를 감당하기보단 안전하고 온건한 결정을 선호한다.
“나는 에드윈이라는 당근을 열심히 흔들어주는 셈이지.”
실질적인 뭔가를 보여주기보다는 기대감만 살짝씩 주는 게 더 효과가 좋다.
물론 여기서 중요한 건 에드윈 레핀이 배신하지 못하도록 잘 관리하는 건데.
“바로 그러한 차원에서 에드윈 경께 팔찌를 선물해드렸다, 이 말이지.”
“지독하기가 이를 데 없군.”
“칭찬 고마워.”
우만이 어이없다는 표정을 하더니, 한 마디 덧붙였다.
“···그거 진짜로 아프던데.”
“그래?”
그렇담 안심이고.
씩 웃으며 대꾸하자 우만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 * *
얼마 후.
나는 가신들을 한자리에 모았다.
“부르셨습니까?”
발닉, 디터, 우만, 앨빈, 롯과 3형제, 리암, 농농이까지.
한창 정보 수집 중인 카렌과 어디선가 또 사기 타로를 봐주고 있을 바바를 제외한 전원이었다.
“이렇게 부른 건 다름이 아니고, 곧 있을 건국기념제 행사 때문에 할 얘기가 있어서.”
건국기념제.
에스닐이 도시국가를 벗어나 최초로 왕조를 수립했을 때, 건국왕 아슬란이 곡식과 고기를 잔뜩 실은 수레를 끌고 와 백성들에게 나눠줬던 것에서 유래된 행사다.
백성들 또한 가진 것 중 제일 좋은 옷을 차려입고 나들이를 나오며, 아침부터 밤까지 먹고 마시며 즐기는 날이라 한다.
중요한 것은 국왕이 직접 가마에 탄 채 대로에서부터 왕궁 입구까지 행차해야 한다는 것인데.
‘지금은 곡식과 고기가 아닌, 은화나 동화를 뿌린다고 했나.’
이 과정에서 국왕의 목숨을 노리려는 자들이 있을 수 있다는 것.
리암이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운을 띄웠고.
“건국기념제에 폐하께서 직접 행차하시는 건가?”
“···국왕 폐하의 경호 문제를 논하려 부르신 거군요.”
그 말을 받는 발닉을 돌아보며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대들의 말이 맞다. 폐하를 안전하게 지켜낼 대비책을 강구해야 해.”
물론 나라고 완전히 안전한 것은 아니지만,
그간 암살자들의 배후가 오프러스 공국이라 가정한다면.
공국 입장에서는 나보다도 국왕을 처리하는 게 우선 순위일 테니 말이다.
“불시에 암살자들이 습격하더라도 막아낼 수 있도록 말이다.”
결연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가신들에게 나는 종이 한 장을 꺼내 보였다.
“그런 의미에서 의견을 구하고 싶은데.”
이전에 비슷한 그림을 본 적 있는 우만이 입을 열었다.
“혹시 바바의 그림인가?”
“그 말대로야.”
바바는 ‘건국기념제에서 폐하께 위험한 일이 생길까?’라는 내 질문을 가지고 이능을 썼고.
그렇게 해서 완성된 그림이 이거였다.
‘가로 세로 4칸으로 나뉜 것은 저번과 같지만.’
그 칸에 그려진 것들이 알쏭달쏭하다.
숫자 3.
맞잡은 손.
Don(축복).
그리고···.
“이건 뭐라고 생각해?”
마지막 그림을 가리켜 보이자 가신들이 미간을 좁히며 한 마디씩 했다.
“···구름?”
“무슨 구름이 저렇게 새까매.”
“버섯일까요.”
“그건 아닌 듯.”
“음, 붉은 기가 섞여 있는데···.”
그때껏 아무 말도 안 하던 앨빈이 한마디했다.
“···폭발?”
그 말에 모두의 눈이 커졌다.
순간 내려앉은 정적을 깨고 내가 입을 열었다.
“제일 그럴싸한데.”
리암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누군가 폭탄을 터뜨릴 작정인 걸까?”
“그렇다면 대체 누가···.”
그 순간, 그림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던 우만이 서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트리니다드 수도회?”
“···!”
모두의 시선이 그에게 쏠린 가운데,
우만의 긴 손가락이 숫자 3을 짚었고.
“트리니다드는 ‘삼위일체’를 의미하는 단어 트리니티아에서 왔고.”
그다음 ‘맞잡은 두 손’으로 향했다.
“이건 기도하는 손, 즉 수도사라는 의미가 아닐까. 마지막으로 이 don은 ‘신의 축복’을 의미하는 단어이지. 그런데···.”
그의 손이 마지막 폭발 그림으로 향했다.
“‘이능’을 가리켜 흔히 신의 축복이라고 부르지 않나?”
“그렇다면.”
나는 그가 하고자 하는 말을 간파했다.
“트리니다드 수도사 중 ‘폭발의 이능’을 가진 자가 있다고?”
우만이 대답 대신 고개만 끄덕이자 가신들 사이에는 무거운 침묵이 자리잡았고.
나는 목에 걸고 있던 막대 형태의 목걸이를 만지작거렸다.
···무효화의 목걸이가 또다시 빛을 발할 타이밍이 왔다.
* * *
다음 날 왕궁 회의실.
테오 2세, 아니 테레사는 자문원장인 노바스 공작을 비롯해 여러 자문관들과 함께하는 중이었다.
자문관 하나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입을 열었다.
“하지만 폐하, 정말로 괜찮으시겠습니까?”
“무엇이 말인가?”
“십 년 만에 열리는 건국기념제이자, 폐하의 존안을 백성들이 볼 수 있는 유일한 기회이니만큼 온 나라가 이때를 기대하고 있을 터이지만···.”
다른 자문관이 그의 말을 받았다.
“폐하가 얼굴을 비치실 때를 기회로 삼으려는 질 나쁜 자들이 있지 않을까 우려가 되옵니다.”
요컨대 이런 의미였다.
기념제에서 왕이 얼굴을 드러낼 때를 암살자들이 작정하고 노리면 어떡하냐.
“짐 또한 그런 우려가 없지는 않네. 하지만.”
국왕은 암살자들의 배후가 오프러스 공국이라고 짐작하는 터였고.
그 꼭두각시인 팰러스가 최후를 맞이한 만큼 전처럼 대놓고 움직이진 못할 거라고 보았다.
게다가.
“건국기념제는 이 에스닐의 정신이나 다름없는 중요한 축제이네. 그런 때에 국왕이 목숨이 노려질까 봐 궁 안에 틀어박혀 있다면, 뒷말하기 좋아하는 수도 귀족들이 뭐라고 하겠나?”
“그건···.”
“가뜩이나 왕실의 권위가 흔들리는 상황에 그런 재미난 화젯거리까지 던져줄 수는 없는 노릇이지.”
기념제에 얼굴을 비추는 것은 물론 위험하겠지만, 때로는 이를 감수하더라도 강한 모습을 보여야 하는 법.
세자르 또한 그리 말하지 않았던가.
‘폐하, 블러핑이라고 아십니까?’
손에 뭐 하나 쥔 것이 없는 상황에서도 콜을 해야 할 때가 있다고. 이는 단순히 허세를 부리기 위함이 아니라···.
‘상대에게 내 패를 보이지 않게 위함이지요.’
자신 역시 동감이었다.
백성뿐 아니라 귀족들, 외세들 모두 건국기념제 이슈에 정신이 팔려 있는 사이.
‘제일 중요한 사안을 소리 소문 없이 내 의지대로 밀고 나간다.’
테오 2세, 아니 테레사는 입가에 절로 미소가 떠오르는 것을 느꼈다.
국왕은 한결 자신 있게 말했다.
“이번 건국기념제는 예정대로 진행하겠네. 다만 행사장 주변의 경호 수준을 최대로 끌어올리는 데 집중하도록.”
“명심하겠습니다.”
경비대장이 고개를 꾸벅 숙였다.
그렇게 모두를 내보낸 순간, 시종이 다가와 그녀의 귓가에 속삭였다.
“세자르 공자가 왔습니다.”
바로 어제 봐놓고 무슨 일로 또 온 걸까.
그렇지만 괜스레 기분이 좋아지는 것은 어쩔 수가 없다.
가벼운 발걸음으로 알현실 안에 들어서자, 기다리고 있던 세자르가 벌떡 일어났다.
“폐하.”
“편히 앉게. 헌데 오늘은 무슨 일이지?”
세자르의 얼굴이 평소보다 심각했다.
그는 잠시 머뭇거리더니, 조심스럽게 작은 상자 하나를 꺼내 보였다.
“다름이 아니고, 보여드리고 싶은 게 있어서 말입니다.”
“···선물이라도 주려는 건가?”
농담을 던졌지만 세자르는 웃지 않았다. 대신 상자를 열어 그 안의 물건을 꺼냈다.
“···.”
황금색 목걸이를 본 테레사는 잠시 혼란스러워졌다.
‘내게 목걸이를··· 선물하겠다고?’
미혼의 사내가 여성에게 목걸이를 선물한다는 것이 어떠한 의미인지 설마 모르는 걸까.
괜히 입안이 마르는데, 세자르가 그녀의 손에 목걸이를 건넸다.
“이건 폐하의 몸을 지켜드릴 물건입니다. 괜찮으시다면 이 자리에서 바로 목에 거시는 게-”
“잠깐만.”
그 금속의 감촉을 느끼며 국왕은 말을 끊었다.
···멋대로 착각하느니, 확실히 해두는 게 좋을 것 같아서.
테레사는 세자르의 두 눈을 똑바로 마주 보며 말했다.
“이것 지금, 내게 주는 선물인 건가?”
세자르는 잠시 두 눈을 꿈벅하더니 고개를 저었다.
“아닌데요.”
“···뭐?”
그는 확실하고도 또박또박 말했다.
“워낙 귀한 거라서요. 선물은 아니고 잠시 빌려드리는 겁니다.”
“···.”
테레사는 저도 모르게 발끈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