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작가의 서자로 살아가는 법-107화 (107/176)

첩자를 감시하는 첩자

그들을 태운 마차가 레핀 저택 안으로 들어섰다.

차창 밖 풍경을 보며 퍼시와 도나가 입을 다물지 못하는 가운데, 본관 앞에 멈춰섰다.

“어서 오십시오, 에드윈 경.”

총관 카얀의 정중한 맞이에 에드윈은 기분이 몹시 좋아졌다.

‘역시나.’

최상급으로 준비된 손님 방. 따끈하게 데워진 목욕 물. 사용인들의 공손한 태도를 보며 확신했다.

‘세자르 공이 나를 자기 편으로 끌어들이지 못해 안달이 났군.’

지금의 소년 국왕이 귀족회의 지지를 얻지 못한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

이런 불안정한 시국에 왕실에 ‘만약의 경우’라도 생긴다면, 과연 그 귀족들은 레핀 공작을 왕좌에 앉히려 할까?

‘그러니 세자르 공은 불안한 것이겠지.’

이 에드윈 레핀이 혹여나 그들의 사탕 발림에 넘어가 자신을 적대시하지 않을까 말이다.

에드윈은 자신이 이 관계에서 유리한 위치에 있다는 점이 만족스러웠다.

‘어디, 마음껏 나를 구슬려보라고.’

그러나 잠시 후 모두가 함께한 오찬 자리에서.

에드윈의 예상은 완전히 빗나가고 말았다.

“에드윈, 그간 잘 지냈나.”

로건 드 레핀이 안부차 인사를 건넸지만.

세자르 레핀은 에드윈에게 아무 말도 붙이지 않았다.

‘이게 아닌데.’

에드윈이 이따금 힐끔거렸지만 세자르는 평온한 얼굴로 식사를 계속할 뿐.

그렇게 레핀 공작가 일원들은 별 말이 없는 반면, 에드윈의 남매들은 신이 난 터였다.

“악, 너무 맛있는데! 이거 어디 산입니까? 세상에 이렇게 맛있는 가재는 처음 먹어봅니다.”

“어머! 입에서 살살 녹아요.”

“역시 수도 음식은 뭐가 달라도 다릅니다, 세자르 공! 내가 세자르 공 얘기를 진짜 많이 들었는데···.”

“저도요! 세자르 공이 제 친척이라니까 친구들이 안 믿는 거 있죠?”

에드윈은 식탁 아래서 주먹을 불끈 쥐었다.

‘이 자식들아! 주접 좀 그만 떨어!’

다행히 그런 남매를 보며 세자르는 친절하게 웃으며 대꾸했지만.

“입맛에 맞으신 것 같다니 다행입니다. 제가 수도 밖에서도 그리 유명해진 줄 몰랐군요.”

에드윈은 쥐구멍에 들어가고 싶은 것을 꾹 참으며 그를 지켜보았다.

‘흥, 그래도 거만 떠는 자식은 아닌 것 같군.’

하긴 태생이 사생아인 주제에 운 좋게 적자가 되었으면 감사한 마음을 가지는 것이 당연지사 아닌가.

그렇게 첫 식사가 예상과 다르게 진행된 뒤.

에드윈은 세자르가 자신을 부르길 기다렸다. 하지만 공작이나 세자르에게서 별다른 호출은 없었고.

‘이러면 나를 왜 부른 건데?’

몸이 달다 못해 부아가 치밀어오르려던 순간.

사용인이 그의 방문을 두드렸다.

“에드윈 경, 세자르 공자님께서 찾으십니다.”

그럼 그렇지!

에드윈은 콧김을 내뿜으며 사용인을 따라갔다.

* * *

“먼 길 오느라 고생 많으셨습니다.”

에드윈은 맞은편에 앉은 세자르를 빤히 쳐다보았다.

‘올해로 열일곱이라고 했나?’

로건과는 하나도 닮지 않았다.

선이 가늘고 귀족적인 인상의 외모는 제 나이대로 보였지만.

말투나 풍기는 분위기 때문인지 스물이 훌쩍 넘은 퍼시보다 훨씬 어른스러운 느낌이다.

‘그래 봤자 아직은 세상 물정 모르는 어린애가 아닌가.’

에드윈은 애송이에게 밀리지 않겠다고 다짐하며 말을 받았다.

“고생이라뇨. 간만에 주신 연락에 기쁜 마음으로 왔습니다.”

“그렇다니 다행입니다만···.”

세자르는 쉽게 본론으로 들어가지 않았다.

답답해진 에드윈은 결국 먼저 본론을 꺼냈다.

“저를 부르신 이유가 뭡니까?”

“네?”

그럼에도 능청스럽게 대꾸하는 세자르.

에드윈은 분통을 터뜨리고 싶은 것을 참았다.

“탐색은 그 정도면 충분하지 않습니까? 그간 로건 형님께서 제게 연락을 취하신 게 몇 년간 손에 꼽을 정도입니다. 헌데···.”

이제 판은 내가 다 깔아놨으니 너는 말만 해라.

조바심에 진 에드윈이 직설적으로 나가자, 세자르가 한숨을 내쉬었다.

“경께서도 벌써 짐작하고 계신 모양이군요. 이렇게 경을 초대한 이유는 다름이 아니라··· ”

역시 그럴 줄 알았지.

세자르가 무엇을 제안하려나, 에드윈은 기쁜 마음으로 다음 말을 기다렸다.

“경에게 닥칠 위험을 경고드리기 위해서였습니다.”

“···경고라고요?”

예상 외의 말에 에드윈이 멍하니 대꾸한 순간.

세자르가 훅 치고 들어왔다.

“크로이츠 백작이 단둘이 만나자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 그걸 어떻게!”

“그분을 만나시겠다면 말리지는 않겠습니다만···.”

에드윈은 이제 놀란 기색을 감출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제대로 대비하지 않는다면 함정에 빠지게 되실 겁니다.”

“함정이라니, 그게 대체 무슨 소리입니까?”

“크로이츠 백작, 아니 수도 귀족회 세력은···.”

세자르는 미소를 짓는 건지 찡그리는 건지 알 수 없는 표정을 지었다.

“에드윈 경을 방패로 삼아 모반을 꾀할 작정인 것 같거든요.”

“···!”

모반이라니!

에드윈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 * *

레핀 공작저에 온 지 이틀째.

퍼시와 도나는 인생 최고의 순간을 경험하는 중이었다.

“봤어, 도나? 이거 세자르 공이 내게 선물해주신 옷이라고.”

“흥, 옷걸이보다 옷이 더 근사한걸.”

“무슨 말을.”

퍼시는 전신거울 앞에 서서 한 바퀴 돌았다. 제 모습이 아주 마음에 든 기색이었다.

“···뭐, 그래도 그렇게 입으니 어디 귀족 자제 같은 걸?”

“그렇지? 세자르 공자님, 정말 감사합니다!”

“감사는요, 그저 작은 선물일 뿐인데요.”

나는 아무렇지 않은 척 미소 지으며 대꾸했지만.

‘너희 귀족 자제들 맞거든.’

좋은 옷, 좋은 음식에 금세 마음을 활짝 여는 남매를 보니 조금 안쓰러운 기분이 든다.

‘카렌의 말로는 에드윈이 젊을 적부터 사업 실패를 반복했다던가.’

그 왜 있잖은가.

운 좋게 부잣집에서 태어났지만, 욕심 많은 아버지의 사업 실패로 갑작스레 가난해진 아이들.

···퍼시와 도나 남매가 딱 그 느낌이었으며.

“퍼시 님, 정말 근사하십니다.”

발닉은 이런 몰락귀족들의 비위를 맞추는 데 일가견이 있었다.

“날도 좋은데 저희 가신들과 함께 가볍게 사냥이라도 나가지 않으시겠습니까?”

“사냥이라면.”

“공작저 안에 아담한 대신 꽤 안전한 사냥터가 있거든요. 소화도 시킬 겸 같이 가볍게 한 바퀴 도시죠.”

오랫동안 모신 주인 대하듯 털털하게 자신을 대하는 발닉의 태도에 매료된 것인지.

퍼시는 희희낙락하며 그를 따라갔다.

‘잘했어, 발닉.’

발닉과 디터 등이 퍼시를 붙잡아둘 동안, 나는 이 도나 아가씨에게서 정보를 캐낼 생각이었으니.

“와, 정말 영지 안에 큰 숲이 있네요.”

도나는 창 밖을 바라보며 감탄하더니, 나를 돌아보았다.

“이렇게 친절하게 대접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친척인데 당연한 일이지요.”

도나는 송구하다는 듯 고개를 젓더니, 내 눈치를 보다가 조심스레 운을 띄웠다.

“그··· 아버지에 관해 말씀드릴 게 있는데요.”

올 게 왔구나, 라고 생각하며 나는 선수를 쳤다.

“혹시 크로이츠 백작의 초대에 관한 얘기입니까?”

“그걸 어떻게.”

“이 수도 정치판에 있다 보면 그 정도 눈치는 저절로 늘게 마련이지요.”

쓴웃음을 지으며 대꾸하자 도나가 한숨을 내쉬며 속내를 털어놓았다.

“사실 아버지가 걱정되어서요···.”

도나의 이야기는 길게 이어졌다.

자신의 아버지가 딱히 귀가 얇거나 경계심이 없는 게 아닌데도 늘 화를 자초하고 마는 것은.

“욕심이, 아니 욕심이라기보단 예전의 부귀영화를 되찾아야 한다는 강박에 사로잡혀계세요. ···저희 남매를 위해서라도 말이죠.”

도나가 조심스레 내 눈치를 살폈다.

자신의 말을 오해하지 않을까 걱정하는 모양이다.

“하지만 저희는 정말 괜찮아요. 퍼시는 망나니 같은 구석이 있지만 타고나길 긍정적이니···.”

“그럼 도나 당신은요?”

“···저는.”

잠시 움찔하던 그녀가 말을 이었다.

“혹시··· 일자리를 구해주실 수 있을까요?”

의외의 말이라는 생각에 눈을 크게 뜨자.

도나가 속내를 털어놓았다.

“저희 집 사정은 잘 알고 계실 거예요. 매번 돈을 융통하거나 남의 도움을 받기보단, 가능하다면 제가 번 돈으로 가족을 먹여살리고 싶어서요.”

“그것 참 훌륭한 마음가짐이군요.”

“이런 부탁 역시 일방적이라는 건 알고 있어요. 사람을 추천하는 거야말로 공자님의 신용을 걸어야 하는 일이니까요.”

사리 분별이 확실한 성격이구나 싶다.

“만약 바라시는 게 있다면 뭐든 말씀해주세요. 제가 도움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말을 흐리는 그녀를 보며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글쎄요, 내가 무얼 원할 것 같습니까?”

잠시 고민하던 도나가 눈을 반짝 빛냈다.

“···아버지의 동향을 매번 파악해 보고드릴까요?”

이것 참 마음에 드는 대답인걸.

“좋습니다.”

그렇게 거래가 성립되었다.

* * *

수도의 귀족들만 드나들 수 있는 고급 커피하우스.

본래는 이곳과 인연이 없을 에드윈 레핀이었지만, 크로이츠 백작의 안배로 제일 안쪽에 자리한 VIP룸으로 안내받았다.

“반갑소, 에드윈 경.”

맞은편에 앉은 노엘 크로이츠 백작이 손을 내밀었다. 에드윈은 그 주름진 손을 맞잡으며 백작의 얼굴을 살폈다.

‘이자가 바로 음흉한 너구리라 불리는 노엘 크로이츠.’

에드윈은 정신을 바짝 차렸다.

크로이츠 백작은 대수롭지 않은 가십거리를 늘어놓았고.

그렇게 잔에 든 차가 다 식어갈 무렵에야 본론으로 들어갔다.

“···헌데 에드윈 경은 대의에는 관심이 없으신가?”

드디어.

에드윈은 탁자 아래서 주먹을 꽉 쥐었다.

“대의라 하심···.”

“그게 말이지.”

크로이츠 백작이 준비해온 이야기를 술술 풀어내는 동안.

에드윈은 그저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어제 세자르 공자가 했던 말대로가 아닌가.’

어제 저녁.

단둘이 있는 자리에서 세자르는 그렇게 단언했다.

‘크로이츠 백작은 대의를 운운하며 현재 왕권에 문제가 많다고 운을 띄울 겁니다.’

‘왕실이 귀족들의 목소리를 무시하고 제멋대로 통치하고 있으며.’

‘귀를 닫고 문을 걸어잠근 채 나라를 운영하고 있으니, 이 에스닐의 운명은 풍전등화나 다름없다고 말이지요.’

세자르가 했던 말을 떠올리는 가운데, 백작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그러니 이 나라의 운명은 바람 앞에서 흔들리는 촛불이나 다름없다, 이 말이오.”

“허, 참으로 문제이군요.”

대충 맞장구를 쳐주자 크로이츠 백작이 눈을 의미심장하게 빛냈다.

“그러니 말인데··· 우리 귀족회는 앞으로 다가올 혼란에 대비할 생각이오. 그리고 거기서 가장 중요한 것은.”

“···.”

“바로 그대, 에드윈 경이 제 역할을 해주는 것이오. 내 말 무슨 말인지 알겠소?”

에드윈은 경악의 신음을 간신히 삼켰다.

세자르 공자에게 미래를 보는 눈이 있다는 말은 그저 헛소문이라고만 생각했는데.

‘정말로 그자는 미래라도 본단 말인가!’

또다시 머릿속에 들려오는 세자르의 목소리.

‘그자들은 에드윈 경을 방패로 삼아 모반을 획책하려는 겁니다.’

‘그게 아니라면 폐하께서 떡하니 살아계신데 왜 다음 왕위계승권자인 경을 찾아 저런 말을 늘어놓겠습니까.’

에드윈의 이마에 식은땀이 흘렀다.

‘게다가···.’

세자르가 덧붙인 마지막 말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폐하께서는 이미 에드윈 경을 주시하고 계십니다.’

‘···절 말입니까?’

‘제게 다음 모임 때 경을 초대하라고 이르셨지요. 그 자리에서 경의 속내를 떠보실 겁니다.’

‘그러니 에드윈 경께 제가 경고를 드리는 겁니다. ···경께서 어설픈 수를 쓰셨다간 친척인 제게도 불똥이 튈 수 있으니까요.’

‘모반의 주모자는 멸문지화를 당하는 것, 알고 계시지요?’

멸문지화라는 말에 소름이 쫙 돋았던 에드윈이다.

어제 느꼈던 두려움은 지금 크로이츠 백작과 함께하는 이 순간에는 더욱 커진 터.

‘말 한 마디만 까딱 잘못했다간 집안 전체가 비명횡사할 수 있다.’

에드윈은 세심하게 단어를 골랐다.

그럼 자신이 대체 어떻게 해야 하냐는 말에 세자르가 내놓은 대안을 되새기며.

‘방법은 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크로이츠 백작과 일절 연락을 두절하는 것. ···상대적으로 쉬운 방법이지만, 경에게 아무런 대가가 돌아가지 않는다는 단점이 있지요.’

‘그리고 둘째는··· 조금 위험한 반면, 더 많은 것을 약속드릴 수 있는 방법입니다.’

에드윈은 침을 꿀꺽 삼켰다.

그의 인생은 언제나 하이 리스크 하이 리턴이었으니까.

‘그게 뭡니까?’

흥미를 보이는 에드윈에게 세자르는 팔찌 하나를 건넸다.

···그것이 지금 이 자리에 차고 나온 팔찌다.

에드윈은 마른 입술에 침을 바르며 크로이츠 백작을 마주 보았다.

“백작님, 아주 흥미로운 이야기군요. 어디, 그 자세한 계획을 들려주실 수 있으십니까?”

세자르가 말한 두 번째 방법이란 이런 것이었다.

‘이건 경의 충성심을 시험하는 팔찌입니다. 이걸 차고 나가 제게 유리한 정보를 얻어다주신다면.’

그렇게 말하며 청년은 묘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꼭 악마의 미소 같구나, 라고 생각하며 에드윈은 그 팔찌를 착용했다.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약속드리지요.’

이렇게 에드윈은 세자르의 첩자로서 수도에서의 첫 커리어를 시작했다.

···자신이 찬 ‘제어의 팔찌’의 진짜 성능이 무엇인지는 상상도 못 한 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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