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나친 탐욕은 화를 부른다
* * *
테레사는 잠시 제 귀를 의심했다.
“···여왕이라고?”
그 말을 한 장본인은 아무렇지 않은 얼굴이었지만.
“그렇습니다. 애초 폐하는 명실상부한 왕가의 정통한 계승자가 아니십니까.”
세자르 레핀은 미소 띤 얼굴로 설명을 이어나갔다.
비록 최근 백 년간 에스닐에서 여왕이 탄생한 적은 없었지만.
과거에는 여왕의 즉위가 낯선 일이 아니었다고.
“백여 년 전만 해도 우리 에스닐은 남아우선상속법을 시행했지요.”
남아우선상속법.
아들에게 먼저 계승권을 주되 딸의 계승권도 인정하는 방식이다.
“그것이 현재는 남성에게만 계승권을 부여하는 법으로 바뀌었습니다.”
“···짐 역시 잘 알고 있는 사실을 굳이 설명하는 이유는 무엇이지?”
테레사는 이를 갈듯 대꾸했다.
그녀야말로 그 사실을 누구보다도 뼈아프게 통감하는 장본인이었으니까.
‘계승법만 아니었더라면.’
남동생 행세까지 해가며 살얼음판 위를 걸을 이유가 없었지 않겠는가.
“폐하께서는 본인이 왕좌에서 물러나시면 그다음 계승권자인 제 부친이나 제가 왕위에 오르는 것이 당연하다고 여기시는 것 같습니다만.”
세자르의 눈동자가 의미심장하게 빛났다.
“부친이나 저는 해로드 가문이 아니라 레핀 가문 사람이 아닙니까.”
그제야 테레사는 세자르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이해했다.
“왕을 배출하는 가문이 바뀌는 경우, 의회의 승인을 받아야 한다는 걸 얘기하고 싶은 건가?”
“그렇습니다.”
그리고 그 굶주린 늑대 무리 같은 귀족들이 쉽사리 레핀 공작, 혹은 세자르를 왕으로 인정하려 들 리 없다.
세자르는 그렇게 말하는 셈이었다.
“만약 그대가 나의 백부이신 이언 전하의 소생임을 밝힌다면?”
그녀의 질문에 세자르는 쓴웃음을 지었다.
“그렇다 해도 저는 어디까지나 사생아일 뿐입니다.”
“···!”
완전히 잊고 있었다.
아무리 왕의 핏줄이라 해도 알레스 정교단의 세례를 받지 못한 사생아는 작위를 계승할 수도, 재산을 물려받을 수도 없다는 것을.
세자르의 설명이 이어졌다.
“물론 제 부친인 레핀 공작께서는 교단에 적잖은 선물을 안겨 저를 적자로 만드셨지만.”
한마디로 교단에 뇌물을 먹였다는 말에 테레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거야말로 서자를 적자로 만드는 가장 대중적인 방법이니까.
“하지만 왕이 되는 건 문제가 다르다, 그 말을 하는 거로군.”
“맞습니다, 폐하. 교단 측에서 문제 제기를 할 거고, 최악의 경우에는 그들에게 국정에 끼어들 여지를 줄 수도 있습니다.”
“···그 점까진 생각지 못했군. 그렇다면 그대는 무엇을 제안하고 싶은 건가?”
세자르의 눈동자에 장난기가 반짝였다.
“왕을 바꾸는 것보단 법을 바꾸는 게 쉽지 않겠습니까? ···대륙의 다른 나라들처럼, 여성의 계승권을 인정하는 방식으로요.”
맞는 말이라는 생각에, 테레사의 두뇌가 재빨리 돌아갔다.
국법을 바꾸는 데 필요한 의원의 정족수를 떠올려보는데.
세자르가 두 손가락을 부딪쳐 딱 소리를 냈다.
“적당한 시기에 폐하께서 본인의 성별을 밝히시고, 그와 동시에 남편감을 찾는다 공표하신다면?”
“···!”
남편감.
그 말을 들은 순간, 눈앞에 있는 세자르의 얼굴이 어쩐지 달리 보였지만.
한순간뿐이었다.
“한 발 더 나아가, 그 남편에게 공동 통치권을 주겠다, 라는 미끼를 내거신다면.”
세자르의 얼굴에 교활한 미소가 떠올랐고.
“그 탐욕에 눈이 먼 무리들이 쌍수를 들고 환영하지 않겠습니까.”
제 감정 변화를 미처 깨닫지 못한 테레사의 얼굴에도 비슷한 미소가 번졌다.
* * *
애초에 살리카법을 이렇게 엄격하게 적용하는 나라는 에스닐뿐이다.
나머지 국가 대부분이 여성의 계승권을 인정하는 만큼, 계승법을 수정하는 것 자체는 그리 어렵지 않을 거다.
‘게다가 귀족들 입장에서도 훨씬 더 구미가 당기는 제안일 테고.’
딸을 통해 가문의 입지를 다지는 것보다, 아들을 여왕의 남편으로 만드는 것이 훨씬 더 유혹적이지 않겠냐, 이 말이다.
게다가.
‘과거 메리 2세와 그 남편 윌리엄 3세가 잉글랜드의 공동 국왕이 되었던 것처럼.’
공동 통치권까지 얹어주겠다는 제스처를 취한다면?
“판돈을 크게 거는 셈이지요.”
하지만 테레사는 다른 단어에 집중하는 모습이었다.
“그러니까··· 내 혼인 상대를 찾는다고 말하자, 이거지.”
“네, 그렇죠.”
“내 남편감.”
그렇게 중얼거리는 테레사의 얼굴이 긴장한 듯 보였다.
‘하긴.’
애가 말하는 게 능구렁이 같아서 종종 잊곤 하지만, 따지고 보면 국왕도 십 대 소녀이지 않은가.
어찌 보면 일생일대의 선택이 될 수 있는 일이니 긴장하는 것이 당연한 일.
나는 그녀를 달래듯 말했다.
“일단은 약혼부터 하시고, 결혼은 천천히 시간을 들이셔도 되니 마음 편히 가지시지요.”
테레사는 그 말에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묘한 눈빛으로 나를 올려다본다.
···그 눈빛은 뭔데?
“알겠네.”
두 뺨도 살짝 달아오른 것이 조금 심상치 않은 느낌이었지만.
나는 부끄러워하는 것이려니, 생각하며 다른 화제로 넘어갔다.
“그리고 폐하, 본격적으로 상비군 훈련을 시작해야 할 것 같습니다.”
나는 상비군을 증원할 필요가 있음을 강조했고.
부족한 재원을 어떤 식으로 확보할지도 제안했다.
“필요하시다면 제 사재를 낮은 금리로 빌려드릴 수도 있는데.”
“···고려는 해보겠네.”
역시 바로 넘어오진 않네.
경계심을 높이는 국왕을 보며 나는 씩 웃었다.
어쨌거나.
군사 증원의 필요성을 강조하는 것은 다른 이유 때문이 아니었다.
‘반란의 조짐이 엿보이기 때문이지.’
다만 그것이 눈앞에 닥치지 않았을 뿐.
나는 내심 헬리오스 가문이 주축이 되어 반란을 일으킬 것을 절반 이상 확신하는 터였다.
“그 외에도···.”
상비군의 월급날을 정확하게 지켜주고 군기와 군율을 바로잡으며.
병사들의 계급을 세분화하고 상위 병사들의 책임감을 강화할 필요가 있다고 덧붙였다.
“요컨대 합리적인 병영 생활을 정착시켜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좋은 의견이야.”
“그리고 제 가신들이 생각해낸 전술상의 계책이 있는데···.”
앨빈과 디터가 머리를 짜내어 만들어낸 전술을 설명했다.
내 말을 귀담아 들은 국왕은 이런 결론을 내렸다.
“다음에 그 가신들을 데리고 오게나.”
“알겠습니다.”
“군단장과 다 같이 의논해보면 좋겠군.”
군단장이라니 후덜덜하군.
주눅든 티를 내지 않으며 고개만 끄덕였다.
그렇게 어느 정도 이야기가 마무리된 뒤, 알현실을 나서려는데 국왕이 덧붙였다.
“아, 그리고 짐이 모임을 가질까 생각 중인데.”
“···모임이요?”
끊이지 않는 암살의 위협 때문에 사교계와는 아예 벽을 쌓지 않았었나.
“거창한 건 아니고, 친한 이들만 모여 차를 마시는 정도라고 생각하게나.”
“혹시 저도 불러주시는 겁니까?”
너스레를 떨자 국왕이 픽 웃음을 터뜨렸다.
“그대 때문에 여는 모임인데?”
나 때문이라고?
“그대와 그대의 당숙인 에드윈 경을 초대할 생각인데, 그대 의견은 어떤가?”
그 말에 나도 모르게 한쪽 입꼬리가 올라갔다.
‘이미 다 상황을 파악하고 있다, 이건가.’
언제 봐도 영특하지만, 이럴 때 보면 내 머리 위에 있는 것 같단 말이지.
“아주 훌륭한 생각이십니다.”
“그럼 다행이고.”
국왕과 척을 지지 않아 다행이라는 생각을 하며 왕궁을 나섰다.
* * *
밀린 수업을 챙겨들으랴, 나름 성적 관리도 하고 우애단 일도 처리하랴.
무엇보다 장학단 사업이 은근 신경쓸 게 많았는데.
슐츠 학장이 의외로 높은 열의를 보인 탓이었다.
‘세자르 공! 세자르 공! 내 서신은 아직 읽어보지 않았는가?’
‘세자르 공, 신청자가 쇄도하고 있네! 이것 아나? 덕분에 아카데미 수업 출석률과 각종 평가의 평균 점수가 팍팍 올라가고 있어!’
‘간만에 이렇게 새로운 사업을 추진하니 신이 나는구만. 이 리히터 슐츠는 세자르 공의 영원한 친우가 될 것을 알레스 신의 이름에 걸고 맹세하네.’
영원한 친우를 맹세하는 건 좀 지나치지 않은가 싶었지만, 뭐 어떤가.
‘좋은 게 좋은 거지.’
그거야 그렇고.
공작의 사촌인 에드윈 레핀 경에게서 얼마 전 서신이 도착했다.
카얀이 공작의 허가를 받아, 레핀 가문의 이름으로 보낸 초청장에 대한 답신이었다.
『···그간 참으로 격조하였습니다. 이리 불러주시니 감개무량하기가 이를 데 없으니··· (중략)
···말씀하신 날짜에 맞춰 귀댁을 방문하기로 하겠습니다.
진실한 마음을 담아,
언제나 충실한 당신의 사촌 에드윈이.』
언뜻 보기에 문제가 될 소지는 없었지만, 그 속뜻을 가만히 짚어보면.
‘왜 지금까지는 관심도 안 두다가 왜 이제 와 이러냐.’
‘그래도 불러줬으니 가주겠다, 내게 돌아올 떡고물은 준비해놓은 거지?’
···뭐 대략 이런 의미가 되지 않을까.
은근히 말에 뼈가 있는 타입인 듯하다.
‘에드윈 본인이 작성한 게 맞을까?’
카렌이 조사한 바에 따르면,
에드윈 레핀은 본인의 능력에 비해 욕심이 많다는 평가가 대부분이며.
그의 아들 퍼시는 근방에서 누구나 아는 이름난 망나니.
딸 도나는 유일하게 머리 회전이 빠르고 기민한 타입이라고.
‘뭐, 직접 보면 알겠지.’
그리고 답장이 온 지 일주일 뒤.
총관 카얀이 내 방문을 두드렸다.
“세자르 공자님, 에드윈 경 일행이 도착했습니다.”
드디어.
기다리던 손님이 도착했다.
* * *
레핀 공작저에 도착하기 십여 분 전.
마차로 먼 길을 달려온 탓에 지칠 만도 했지만.
에드윈 레핀과 그 자녀들의 눈은 기대감으로 빛나는 중이었다.
“레핀 공작저라니!”
그중에서도 에드윈의 장남 퍼시는 제일 신이 난 기색이었으니.
“평생 레핀 가문의 영지나 관리하며 살 줄 알았는데 수도로 불러줄 줄이야!”
“퍼시, 제발 흥분하지 말아라.”
“지금 흥분 안 하게 됐어요, 아버지? 권력자 옆에서 그 빵쪼가리만 얻어먹어도 삼 대가 먹고 살 수 있다는데.”
퍼시가 클클거리며 말을 이었다.
“이렇게 수도로 부르는 것 보면 뭔가 더 줄 게 있다는 의미 아니겠습니까?”
“적당히 해, 퍼시.”
“너야말로 입이 찢어질 것 같은데, 도나?”
애써 침착한 척하지만 기대감을 지우지 못하는 여동생의 모습에,
퍼시는 낄낄거리며 웃었다.
“최소한 난 너처럼 내숭은 떨지 않는다고. 난 어쨌거나 뭐든 시켜주면 감사합니다! 하고 넙죽 받아들일 거다.”
로건 드 레핀 공작에게 목숨이라도 바칠 수 있다느니, 삼 대에 걸쳐 충성을 맹세하겠다느니.
신나서 허풍을 늘어놓는 아들을 보며 에드윈은 끌끌 혀를 찼다.
‘어쩌다 저런 자식을 낳아서.’
그의 장남 퍼시는 망나니로 유명했다.
이 여자 저 여자 가리지 않고 만나는 바람둥이로 이름 높은 것은 물론이요.
무예나 학문 그 어느 쪽에도 뜻을 두지 않은 채 노름과 술로 허송세월을 했다.
‘제가 이래 봬도 최신 유행에는 빠삭하답니다, 아버지. 이 정도면 옷빨도 잘 받고 외모도 잘났잖아요?’
자랑스럽다는 듯 그렇게 말하는 장남을 보면 기가 찰 뿐이었다.
그나마 도나는 좀 나았다.
얼굴도 제법 예뻤고 몸가짐도 단정했으며 머리도 잘 돌아갔으니까.
아쉬운 점이라면.
‘아버지, 사람은 자기 분수를 알아야 해요. 제발 허황된 꿈 좀 그만 꾸세요.’
더 높은 곳으로 나아가려는 향상심이 없다는 거였다.
게다가 에드윈은 자신이 전통 있는 귀족 가문 출신이라는 것에 늘 자부심을 가졌다.
‘로건이 공작이 된 건 어디까지나 운 좋게 장남의 피를 물려받은 덕분이 아닌가!’
그의 사촌인 자신은 차남의 피를 물려받았다는 이유로 시골의 영지 관리인으로 썩고 있는데 말이다.
···이러한 그의 지론에 남매는 늘 이렇게 대꾸했지만.
‘그거야 아버지가 무리수를 두다 사업을 말아먹어서 물려받은 재산까지 다 날린 탓 아닙니까.’
‘퍼시 말이 맞아요, 로건 당숙께서 영지관리를 맡겨주시지 않았으면 우린 지금쯤 손가락 빨고 있었을 거라고요.’
그거야 그렇다치고.
에드윈은 한 치 앞밖에는 내다보지 못하는 남매를 보며 고개를 저었다.
“허, 너희들은 이 상황을 이용할 생각은 못하는 거냐? 내게 초대장을 보낸 것이 세자르 공뿐인 줄 아느냐는 얘기다!”
무려 수도 귀족회 수장인 크로이츠 백작 또한 그에게 서신을 보냈다.
에드윈 레핀 경의 이름을 익히 들었으며, 수도에 오는 대로 티타임을 가졌으면 한다고.
“이 거대한 배의 키를 쥔 것은 우리들이다, 이 말이야. 설마 가자 마자 세자르 공에게 바싹 엎드려 충성하겠습니다, 이럴 생각은 아니겠지?”
그 말에 퍼시가 멍하니 대꾸했다.
“어떻게 아셨습니까?”
에드윈은 저도 모르게 한숨을 쉬었다.
“하, 이런 아둔한 것들!”
어째서 갑작스레 수도의 두 세력이 자신에게 러브콜을 보내는가.
그 이유는 명확했다.
‘만일의 경우 왕좌가 내게 돌아올 수도 있으니!’
물론 왕이 되려는 욕심 따위는 없다.
지나친 탐욕은 화를 부른다는 것 정도는 잘 알고 있으니까.
다만 이 두 세력 사이에서 줄타기를 하며 자신의 이득을 최대화하는 것 정도는 가능하지 않을까?
언뜻 합리적으로 보이는 생각이었으나, 당시의 에드윈은 몰랐다.
그가 곧 만나게 될 레핀 공작의 아들, 세자르 레핀이 어떤 사람인지.
그래서 그의 딸 도나가 이렇게 말했을 때도.
“어줍잖게 들이댔다간 된통 당할 수 있어요.”
쓸데없는 욕심 좀 부리지 말라고 했을 때도 그저 코웃음을 쳤었다.
···앞으로 다가올 일은 상상조차 하지 못한 채.